채이진의 시선에서 보는 에녹 피터 하이드
미완
은회색 눈동자가 에녹을 향한다. 이진은 에녹을 바라본다. 이것을 바라본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진은 정말 그를 '바로' 보고 있는 것이 맞을까. 말하자면 단순히 반복되는 현상을 기록하고 모아둔 일지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희고 긴 머리, 붉은 눈동자, 보기 좋게 미소 짓는 얼굴. 타인의 호감을 사기 쉬운 모습이라 생각했다.
입을 열면 경악할만한 말이 흔하게 나오고, 나는 그것을 흘려보내거나 눈살을 찌푸렸지. 유진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성적인 말을 내뱉던 그.
가볍고, 장난스러우면서도, 짓궂지만, 다정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보다 우리가 우선시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는데. 그렇게까지 받고 싶진 않은데.
어렸을 적과 비교하여 많이 달라진 그의 모습에 이따금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마냥 장난스러운 건 아닌 모양이야. 내가 위험한 일에 휘말리면 너는 번번이 나를 구하러 와줬지. 빌라로 이사갔을 적의 일은 거의 기억하는 바가 없다. 어림짐작으로 다른 친구들과 같이 나를 구해줬겠니, 하고 말았다. 삼재거리로 이사갔을 때도 너는 나를 구해줬지. 내가 아니었더라도 그랬겠지만. 친구들에게 죽음을 겪게해서 미안할 따름이다. 미안하다는 말로 표현되지 않을 뿐더러, 이런 말로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제일 침착했어. 아닌가? 숨을 몰아쉬었던 것 같기도 한데. 유진이랑 한결이 울던 게 남아서 잘 기억이 안 나.
함께 별장으로 여행을 갔을 때는 내가 화를 냈어. 내가 끝까지 아무것도 몰랐다면 어쩔 셈이었을까. 우리가 그 별장에서 탈출하는 것보다 내가 헤매는 것이 더 길었다면. 그래서 결국 네가 죽었다면. 죽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나? 혹은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전자는 아마도 아니겠지. 하마타면 그 불길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뻔 했으니까. 그렇다면 후자에 가깝다는 소리인데... 나는 모르겠다. 그가 왜 그런 생각을하고 행동을 했는지. 내가 너에 대한 불안을 느낀 것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 이후일 것이다.
우연찮게 별장 부부의 고향에 갔을 때는... 너는 수십의 목숨을 져버리고 나를 택했지. 아마 나라도 그랬을 거야. 고민은 했겠지만,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 수십보다는 네가 중요하니까. 네가 살인을 원치 않았다면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방법도 있었다. 헌데 너는 그것마저 들어주지 않았어. 그 증거로, 나는 지금 이 땅에 발을 딛고 서있으니까. 내가 말했지. 내키지 않는다고.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그게 네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였을까?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할까, 너는. 내가 너와 같은 선택을 하리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지만, 결코 그 과정이 같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달라. 정확하게 비교하여 집어낼 수는 없지만, 다르다는 건 확실히 느껴지니까.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직접 물어보아도 너는 대답해주지 않을 테지. 실없는 소리나 하며 질문을 넘겨버릴 거야. 결국 답은 내가 찾는 수밖에 없어.
이진은 에녹에게 하고픈 말이 아주 많았다. 걱정인가. 글쎄, 이게 뭘까. 굳이 명명할 필요가 있는가? 전해지면 그걸로 충분할 것에 굳이 이름을 찾아 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걸러내고, 참고, 정제하던 사고회로를 거치지 않으면 남는 말들은 꽤나 투박하고 거칠며 이기적이다.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차마 내뱉지 못했던 말. 간섭이라 생각했기에 하지 못했던 말. 결국은 나중에서야 후회했다. 그냥 내뱉고 볼걸. 소용이 있었을지, 없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해봐야 하는 거니까.
이진은 에녹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맞다 여겼는데 어쩌면 틀린 선택이었던 건지도. 알려고 했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집요하게 캐물었다면? 지금에 와서는 쓸모없는 가정에 불과하다. 과거는 변하지 않으니까.
이진은 에녹과 갔던 가을 여행에서 처음으로 에녹에게 말할 것을 종용했고 에녹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이걸 죽을 때라고 말할 수 있나? 에녹의 죽음이 들이닥친 후에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 말을 제대로 듣긴 한 거야?
조금 다른 상황을 가정해보자면...
에녹, 잠시 얘기 좀 해.
이상하게도 내가 하는 말은 너에게 닿지 않는 기분이고,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너는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너는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너의 죽음이어서는 안됐는데. 나는 아직 너에게 묻지 못한 것이 많고, 너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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