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쓰기.

20240304. 조금 슬퍼지고야 말았다.

- 목정원 산문,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고.

먼 옛날부터 나는 활자를 가지고 노는 일을 즐겼다.

혹자는 그것이 글을 사랑하기 시작한 시점이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되돌이켜 보건대, 사랑이 아니다. 나는 글을 사랑하고 아껴 마지않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 싶어 안달을 하는 중이기 때문에. 만일 사랑이라면 이것은 아주 해로운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놀이라고 말해 보자. 나는 활자를 잡아 가두고, 그것을 능히 부리며 나만의 형체를 짓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이것은 일종의 통제적 욕망이다. 우리는 쌍방으로 사랑과 애정을 주고받지 않는다. 차라리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겠지. 내가 술래이다. 나는 글을 붙잡아 내 안에 가두고자 하고, 글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할 수 없으나 도망친다. 그 뜀박질의 사이 간격에는 웃음이 있기도 한다. 어릴 적 아이들과 아무 이유 없이 서로를 쫓아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던 때처럼. 그러니까 이것은 놀이였고, 놀이이다. 아직은 그렇다.

첫 소설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그 문장의 나열들─ 을 쓰고 난 후 그것을 자랑스레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내 기억에 대강 그것은 <보물섬>과 <셜록 홈즈>, <해저 2만리>와 해적 검은 수염의 이야기에서 조금씩 떼어낸 조각들을 얼기설기 꿰메었던 것 뿐이었다. 빌렸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문장과, 인물과, 그리고 이야기. 플롯에는 구멍이 나 있으며 나는 징검다리를 건너듯 그것을 건너뛰면 되는 일이라고 여겼었지. 그건 정말 창피한 일이다. 누군가 남긴 부스러기를 주워 모방했던 첫 작품. 흙과 나뭇잎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의 소꿉놀이 같은 것. 내가 미성숙함을 못 참아주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 불행하다. 내 모방의 시도를 자랑스레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놀이의 시발점에 대해 이토록 민망함을 느낀다는 것이. 어쨌거나 그것을 쓸 때의 나는 즐거웠고, 그 감정만을 기억한다. 생각하면 즐거우나 또한 얼굴 붉어지는 일을 조금 겪어 본 지금의 시간에나마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항상 도둑질을 해왔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도 또 조금. 나는 훔쳐 내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위대한 작가들의 활자는 풍부하고 멋진 줄로만 알고서. 그것들의 한 부분을 내가 뚝 떼어 낸 채 이리저리 주무르다 멋대로 주형해댄 글들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첫 번째 극작의 시도 ─그 중간의 많은 것들은 생략하고 싶다.─ 는 그래서 도둑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그 때 즈음, 그러니까 고등학생 때 즈음에는 상당히 과감해져서, 어떤 모티프를 통째로 가져오거나 한 문장을 통째 잘라 내어 솜씨 나쁜 용접공처럼 우툴두툴하게 덧붙여 대는 작업들을 했었다. 그것은 사서에 대한 글이었는데, 스스로를 도둑이라 여기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서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거대함을 줄지어 덧붙인 뭉뚝한 철제 막대 같은 인물이었다. 그 안에 존재하던 유일한 내 것이라고는 오로지 죄책감 뿐이었을 거다. 죄책감. 고작 놀이에 불과한 나의 행위에 위대한 것들의 조각을 가져다 써도 될까? 마치 나는 놀이방에 들어서 값비싼 장난감을 보고 망설이던 아이와 같았던 것이다. 저것에 내 손이 닿아도 될까? 내가 가져가도 될까? 과감히 용기를 내어, 어쨌거나 놀이하고픈 나의 욕구 충족을 위해 손 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마음 한 켠 있던 그 무거운 감정.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위대함이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키도 전에 나는 위대함에게 지레 겁을 먹어버렸던 것일까. 나는 글을 좇고 있었을 뿐인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닌 놀이였을 뿐이다. 죄책감 따위는 상관도 없는.

언젠가부터는 그 죄책감이 분노로 발화되기 시작했다. 도저히 내 손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분노. 열심히 도둑질을 해 보아도 그것들은 본디 저 위대한 사람들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었기에. 그건 그 즈음 내 삶의 많은 사건들과 이 술래잡기에 지나치게 맹목적이었던 나의 정신이 겹쳐 만들어낸 사고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분노가 불 붙은 석탄을 손에 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으며, 나는 그때에 양 손에 석탄 한 줌씩을 가득 쥔 채 거리를 돌아다녔다. 지귀처럼. 애정에 불 붙은 석탄을 쥐고 나를 다치게 만들며 세상을 위협하고 다녔다. 그 즈음의 글들은 소설도, 산문도 아닌 내 속을 긁어낸 살덩이 같은 것들이다. 너무도 노골적인 분노와 채 표출되지 못한 공격성이 있던 것들. 한 인물은 너무도 외로워 거북이와 콘트라베이스를 자신의 상징물로 생각하고, 한 인물은 지장보살님 앞에서 이마에 마루 자국이 나도록 조아렸다. 시를 썼던 것도 그 즈음이었으나 함축의 언어를 다루지 못해 또 실패했던 기억이 난다. 자기혐오와 염세는 그토록 해로웠다. 불 붙은 석탄처럼.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게 되었고, 그것은 추격전에 가까운 성급한 행위로 돌변하고야 말았으며. 나는 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놓지 않았던 것은 말과 함께 스미어 나오던 나의 조각들, 그 가운데에서 내가 더 많은 ‘나의 것’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 속에 침잠하던 활자들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그렇게 낭비되었어야만 했던 글들에게.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늘 그렇듯, 업보처럼 공덕처럼 내게 돌아왔다. 글이 내게 돌아온 것이다. 추격전 속에서 내가 난도질한 모든 것들의 조각이 나에게는 또 다른 창조의 순간이었다니. 놀라운 시간들이다. 그것 외에 더 할 말이 없어진다.

그 뒤로 나는 오래도록 숨을 고르고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글이 내게 등을 보이며 이리로 뛰어오라 얼쩡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것을 보았고 언젠가 따라 쫓아가기 위해 숨을 고른다. 저기 잡힐 것처럼 뵈는 모든 것들은 실은 영영 내 손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뛸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이 놀이의 끝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던간에 기꺼이 따라가고픈 마음은 무얼까. 나는 뒤를 따르는 자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든 인류 역사는 항상 앞선 이와 뒤따르는 이의 혼재된 걸음으로 직조된 하나의 직물 아니던가. 또 다른 앞선 자가 되고픈 마음마저 내려놓은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꼈던 모든 즐거움, 죄책감, 분노를 매순간 반복하며 다시 나만의 직물을 만들기 위해 손가락 끝으로 자판을 두들기며 베틀질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놀이에 불과한 것에서 나는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래, 그러니까 이 글은 어쩌면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이라는 목정원 작가의 글처럼 발화된 언어를 통해 행위를 찾아나가는 나의 한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활자로써 나를 수행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쓰며, 또 뱉어내며. 발화와 행위가 동시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려 들면 그것은 반드시 현재로 돌아온다. 내 글쓰기가 항상 과거의 즐거움, 죄책감, 분노의 삼각형에서 돌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그것은 어느 날엔가 사각형이 되고, 오각형이 되고, 무한한 수의 세계처럼 자신의 코너를 확장해가며 내게 오갈 수 있는 선의 갯수를 늘려 줄지도 모른다. 그 날이 오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유희의 세상이 조금 더 단단해졌음을 즐거워할까. 어쩌면 그것은 평면의 도형에만 머무르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기쁘겠다. 그 선들이 확장된다면 어쩌면 나는 ‘갇힌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그러니까 이 짧은 세 개의 선 안에서 오락가락해대는 나의 놀이에게 더 많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생각을 한다. 내가 나를 활자로써 수행해 왔던 시간들이 만들어 준 것들이 작다고 하여 지금 낙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생이 있다면 나는 나의 놀이를 놓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므로.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쭈욱 그럴 것이다. 그러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목정원 작가가 논문 속에 남긴 편지의 문장처럼. “혹 이해해주신다면”, 나의 행위에 대한 어떤 조각을 누군가 이해해 주신다면. 그런 생각도 하여 보고, 내내 글과 나의 놀이 속에 독자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았다는 치명적인 오류를 생각한다. 그렇게 또 다시 나는 글을 놓지 못한다. 조금 슬퍼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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