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되는 이유 2

비승천 아스타브 현대환생AU

여기서 이어집니다

가내 타브 설정이 많습니다(이름, 체형 등)

***

“눈이 계속 내리는데, 정말 더 걸어갈 거야?"

아스타리온이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조금 더 우산을 기울였다. 그 덕에 남자가 가까워진 만큼 깊은 한숨이 빠져 나오며 하얀 연기를 만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지고 싶었다. 아무리 지갑을 주워준 선의가 있다고는 하나 처음 보는 사람을, 그것도 처음 오는 도시에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험했다. 물론 걷자고 한 건 제 쪽이었지만. 바람에 날린 눈송이가 눈꺼풀에 떨어져 어깨에도 닿지 않는 짧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슬쩍 올려다 본 남자는 날씨에 질색하면서도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호감을 사기 위한 웃음이라고 해도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그러니 대뜸 대로변 한복판에서 각자 갈 길을 가자며 차갑게 떨쳐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우산도 없는 사람을 혼자 보내기에는 고작 지갑을 주워 돌려주었을 뿐인 짧은 만남에 얕은 호감 같은 것이 남은 탓이었다.

걷기에는 바닥이 미끄럽고 눈이 쉬지 않고 내려 아무리 여행 중이라고 한들 낭만보다는 막막함이 먼저 드는 날씨였다. 결국 고집을 꺾어낸 표정으로 아스타리온에게 시선을 돌렸더니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게 가까이 있어도 체온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늘했다. 날씨가 이런 탓이겠거니, 이리엘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무리일 것 같은데요."

"차라리 잠깐 어디 들어가는 게 어때. 저기에 나쁘지 않은 바가 있어서."

고갯짓 끝에는 가게가 영업 중이라는 것을 알리는 네온사인이 반짝였고 이리엘은 잠시 고민하다 끄덕였다. 아직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도 모르는 여행객에 불과했으며 상대는 적어도 근처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만약 이 날씨에 걷다가 여기서 감기라도 걸린다면 혼자 고생할 것이 뻔했으니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자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나무 냄새가 섞인 따뜻한 공기가 얼어가던 얼굴을 감싸안았다. 바에는 역시나 날씨 탓인지 사람이 적었고 아스타리온은 구석 자리를 향해 걸어가며 이리엘을 이끌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정작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오히려 텅 비어있는 기분이었다. 종업원에게 무어라 주문을 하는 아스타리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비슷한 걸로 달라고 말했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혼자 여행 중이라는 거네. 여기가 두 번째 도시였고, 모레 떠날 예정인 거지?"

"아직 미정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래요."

이미 정해진 일정이 있음에도 부정해버린 입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문질렀다. 쓸데없이 튀어나오는 말이 너무 많아 스스로에게 놀랄 지경이었다. 지금은? 아스타리온이 말 끝을 따라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가볍게 잔을 흔들자 얼음이 유리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아스타리온은 그저 즐거웠다. 오래된 기억 속 얼굴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사람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올챙이에, 온갖 일에 휘말려 하루가 멀다하고 전투를 이어가던 때와 달리 한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긴 손가락으로 컵에 입술이 닿는 곳을 두드리며 콧노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이 도시가 나쁘지 않지. 사람도 많고, 꽤 오래된 역사도 있고. 안 그래?"

"뭐... 돌아다니기 좋았어요. 아직 못 가본 곳이 있긴 하지만-"

"그럼 너도 여기에서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아?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리엘이 대답을 얼버무리며 잔을 입가에 기울였다. 어디를 가봐야 겠다, 혹은 무언가를 봐야겠다는 가벼운 계획을 제외하면 특별히 내세울 만한 일정이 있지는 않았다. 잠시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이 이어지던 사이 컵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팔에 떨어져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이걸 왜 고민하는데? 굳이 할 필요 없는 고민에 머리를 쓸어넘기며 생각을 떨쳐냈다. 이틀 뒤면 이 도시에서도 떠날 것이고, 눈 앞의 사람은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러니 기차표를 취소하려는 그런 찰나의 마음은 방금 마신 술 한 모금에서 비롯된 충동이 분명했다. 

그 뒤로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뭘 좋아하는지, 원래는 무슨 일을 하는지 같은 사소한 이야기에 대해 대답을 하다보니 주로 말하는 쪽이 되었다는 자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세상에나, 혼자 다니는 게 편해서 동행도 구하지 않았는데 말을 이렇게 많이 하다니. 스스로에게 놀라는 것도 잠시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물음에 대답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스타리온은 대답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신기하다는 태도에는 동시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반응할 때가 많아서, 이리엘은 불만을 표하듯 잔을 들어 아스타리온의 것과 가볍게 부딪혔다. 입 안으로 얼음이 녹아버린 씁쓸한 액체가 화하게 밀려들어왔다. 

만난 지 고작 3시간이 채 되지 않은 사람에게 홀렸다고는 해도 할 이야기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화가 끊기면 말 없이 가게를 훑던 시선이 맞닿았다.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진 지 오래 되었을 즈음에야 이리엘은 그만 가야겠다며 한참 마주보고 있던 붉은 눈에서 시선을 돌렸다. 잠시만, 이리엘. 붙잡으며 부드럽게 내려앉는 목소리에 그대로 몸이 멈췄다. 오래 전 바다에서 들리는 노래에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뱃사람이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연락처 좀 줄래, 자기?”

아, 만약 그게 불편하면 여기로 먼저 연락 주든가. 냅킨 구석에 번호를 끼적이고 맞은 편으로 미는 손끝이 닿을 듯 스치며 멀어졌다. 바뀐 세상에서 남을 유혹하는 일은 더욱 번거롭고 오래 걸리는 과정으로 변해 있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서로 이름을 말하고, 연락처를 주고 받은 뒤에 그래도 몇 번을 만나고 나서야 어느 단계를 거치고 연애를 시작하더라니. 물론 하룻밤의 짧은 인연을 찾을 게 아니라면 과거에도 똑같았겠지만, 아스타리온은 이런 수고스러운 일을 사서 할 만큼 눈 앞의 사람을 붙잡고 싶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지나쳐 온 만남이었다. 

당연하게도 왜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 돌아왔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며 웃자 시야에서 이리엘이 잠시 사라졌다. 200년을 세고도 몇백 년을 더 살아온 뱀파이어에게 한 사람을 매혹시키는 일은 눈을 감는 것보다 쉬었으니, 아스타리온은 테이블에 살짝 몸을 기대며 낮게 속삭였다.

"오, 그럼 처음 본 사람에게 시간이 있냐고 묻는 의도에 또 뭐가 있겠어?"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럴 의도가 맞았으니까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 물론 속인 부분은 처음 만났다는 쪽일 테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건너 편의 사람은 눈치 챌 수 없을 거짓이었다. 가만히 턱을 괴고 눈을 마주치면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이 정도 선에서 넘어올 게 분명했다. 자기 얼굴을 보면 할 말도 못하겠다니까. 오래 전 손사래를 치며 꺼냈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아스타리온은 흐려진 기억에 오랜만에 반갑게 웃었다. 아마도 상대에게는 호감으로 다가올 미소였다. 냅킨을 가볍게 들쳐 본 이리엘이 가방을 뒤적여 펜을 꺼냈다. 펜? 의아하게 보는 사이 잠시 몸을 숙이고는 무언가를 적으며 어딘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눈이 마주쳤다.

"당신이 먼저 연락 줘. 아스타리온."

이리엘이 한숨을 내쉬며 이제 번호 두 개가 적힌 냅킨을 건넸다. 사람만 조심해도 반은 간다며 신신당부하던 오랜 친구의 말이 귓가를 스쳤으나 이미 건너기 시작한 강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반쯤 넘어갔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왠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이 사람의 계획대로 흘러가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만약 선택권을 다시 손에 쥐어준다면 눈 앞의 조각 같은 남자는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로 다시 연락해올지 알고 싶었다. 

어느 새 짧아진 말꼬리에 아스타리온이 가늘게 눈을 뜨며 웃었다. "그래야지, 뭐. 네가 그걸 원한다면 말야."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유독 날카로운 송곳니에 눈이 갔다. 잘못해서 혀라도 씹으면 큰일나겠다 싶을 만큼 길고, 끝이 뾰족한 모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아들일 만큼 얼굴에 넘어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깜빡거리는 네온사인을 뒤로 하고 멀어지려 하자 아스타리온은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팔짱을 끼고 서서 먼저 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짧은 인사가 건네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리엘은 걸음을 옮겼다.

길가에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옅은 술냄새가 풍기는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리면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 아스타리온이 서서 가만히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은 물결처럼 은색으로 반짝였으니 눈이 조금 쌓인다고 해서 티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유령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순간 아스타리온을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놀라 몸을 떨었다. 마지막 남은 술은 마시지 말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돌아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방문을 열자 익숙한 어둠이 이리엘을 반겼다. 대강 짐을 던져놓고 옷가지를 의자에 걸쳤다. 침대 위로 몸을 던지자 종일 걸어다닌 몸에 술기운이 돌며 팔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정말 연락이 올까? 얇은 잠옷 위로 두꺼운 이불이 덮인 무게감이 아늑하게 몸을 감싸안았다. 겨울 바람에 얼어 붙었던 살이 느리게 녹아가며 잠이 몰려왔다. 이리엘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리며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호기심에 번호를 물어본 사람일지도 몰랐다. 눈이 내리는 저녁은 여느 날보다 조용하고, 우연치 않게 사람을 만나 고요함을 떨쳐내고 싶은 법이었으니까. 

핸드폰을 몇 번 더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결국 덮어버릴 즈음에 갑자기 진동이 매트리스를 흔들었다. 근원지가 방금 머리 맡에 던진 핸드폰이라는 걸 알고 덥썩 들면 연속으로 온 두 개의 메세지가 나란히 떠 있었다.

[자?]

[안 자는 거 알아]

보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어도 후보는 한 명뿐이었다. 이리엘이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지듯 엎어뒀다. 진짜 귀신인가? 그저 짐작이더라도 어딘가 들킨 기분에 주변을 의미 없이 둘러보았다. 새로운 알림이 뜨지 않아 가만히 엄지로 화면을 내렸다가, 다시 올라가는 화면을 바라보다 무심코 어느 곳을 누르자 대화창이 가득 떠올랐고, 숫자가 사라지자마자 곧장 새로운 메세지가 튀어올랐다.

[내일 봐.]

다음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이게 끝이라는 듯 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답장을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고 그대로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내일도 만나는구나, 그런 생각에 오늘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헤어지기 전에 들었던 낯간지러운 호칭에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가 썩 나쁘지 않은 기분에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정 이상하면 바로 도망가면 되지. 

미술관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일찍 일정을 마무리하려던 차에 우연히 홍보 포스터에 눈이 머물러 발을 들였었다. 이 도시에서는 누구도 부를 일 없는 이름에 뒤를 돌았던 순간 마주쳤던 타오르는 것처럼 붉었던 눈동자가 다시 떠올랐다. 컬러 렌즈를 껴도 저렇게 붉을 수는 없을 만큼 눈을 떼기 어려웠다. 

지난 밤 꿈을 잊어버릴 만큼 피곤했는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다만, 하나 기억하는 것이 있었다. 석양보다 붉었던 눈동자에 지금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상한 일이야. 처음 만난 사람이 꿈에 나왔다는 사실에 이리엘이 부시시한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다시 만나기까지 약 열두 시간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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