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
단아. 평이한 어조, 라기보다는 어떤 유혹을 하는 것처럼. 사실 그건 유혹도 뭣도 아닌 부드러운 발성과 어투다. 사근사근하게, 마치 목소리만 베낀 다른 사람이 말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다르게. 그게 특히 들릴 리가 없는 사람의 목소리라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배가 된다. 단아. 다시 한번 저를 부른다. 바람에 희미하게 실려오면서도 결국은 또렷하게 들리고 마는 목소리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귀를 기울이면 그건 계속 저를 부른다. 어투의 어색함이 역으로 그에 대한 기억을. 바람에 실려오는 목소리는 선물을 싸안고 온다. 그때 그 냄새, 풍경, 분위기, 그 모든 것.
철썩. 파도치는 소리가 세차게 귓가를 때린다. 익숙한 파도다. 굳이 따지자면 익숙하다기보다 전혀 잊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아무튼 간에 제 몸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다. 그 익숙한 파도가, 기시감을 그리는 파도가 이제는 없어진지 좀 된 누군가의 목소리를 토해서—
———♪♪
아, 꿈이다.
夏
요란스레 울리는 알람소리가 고막에 닿는다. 꿈속에서 저를 부르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때려박는 듯한 음량으로. 그 소음에서 겨우 눈을 뜨고서도 비몽사몽한 상태인 그는 천천히 눈을 부볐다. 상체를 일으키다가도 기우뚱하는, 덜 깨어 잠에 취한 상태로 꾸벅꾸벅 화장실로 기어들어가면서. 물을 좀 맞고서야 각성하는 정신은 몸을 빠릿빠릿하게 굴리고 학교로 갈 준비도 순식간에 끝내서. 탁탁, 소리를 내며 신은 신발을 점검하고서는.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철썩.
기이하게도, 쾅 하고 닫혔어야 할 문이 내던 소리는 크게 치는 파도소리처럼. 걷는 발걸음에는 썰물의 소리가. 단의 귀에 파도가 머물렀다. 아마 꿈 때문인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도 잠시, 발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
익숙한 종소리가 잠깐 숙면을 취하던 귓가에 닿는다. 딩동댕동. 찌뿌둥한 몸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고 있으면 같이 밥 먹으러 가요— 하며 저를 기다리고 있는 이의 목소리가 저를 마주해서. 힐끔 본 그의 옆에는 잿빛 머리카락을 한 누군가가 있었던 것도 같다. 놀라서 눈을 비비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지만.
“뭐해요? 나 배고파요.”
저를 재촉하는 눈동자(그는 실눈이라 보이지 않았지만)가 단을 본다. 점심시간의 종은 친지 3분이 넘었고, 빨리 달려간 친구들의 급식실 줄이 꽤 쌓여 있을 테다. 그를 생각하면 빨리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것이 분명 맞았으나…
“빨리 안오면 버리고 갈게요~”
어서 따라오라는 듯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그 동작을 넘어서, 부산스러움이 멎은 조용해진 복도를 인지하기 무섭게 부는 바람은 여름치고는 꽤 차다. 바닷가에서나 볼 법한 짠 냄새도 품었다. 안 와요? 하고 묻는 목소리를 내는 뒷태는 더 이상 다갈색의 머리카락과 교복이 아니라 잿빛 머리카락과 조금은 가볍게 입은 외출복처럼. 저를 돌아보는 그가 입을 연다. 뭐라 말하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파도가 쳐서, 단은 언제나 그 말의 끝을 듣지 못했다.
단씨!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건 분명 파도와 함께 쓸려나간 이와는 다른 사람.
“P?”
“괜찮은 거 맞아요?”
“…밥 먹고 조퇴해야겠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뱉는 말은 그런 것이었다. 조퇴하고, 집 가서 푹 쉬어야겠다고. 병원이라도 가야하지 않냐는 물음에는 어떻게 답했더라? 대충 답했던 거 같긴 한데, 뭐… 괜찮겠지. 저를 지탱해주는 이의 부축에 조금 기대어서 살짝 어지러운 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를 꾹꾹 누르고. 어찌저찌 급식을 다 받기는 했다. 이젠 진짜 밥만 먹고 집에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웩……!”
토를 할 뻔 했다. 정말로 올라온 것은 아니었지만 살짝 목구멍을 간질간질, 하고 넘어오기 직전에 찰랑찰랑하는 그 느낌 있잖은가, 그거. 주위에서 걱정하는 시선을 받으면 괜찮다 말하면서도 제가 대체 왜 이러는지 생각해보자면 오늘 꾼 그 꿈 밖에 없다. 바다랑, 파도랑, 그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사람. 1년도 더 전에 사라져서 대체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도 싸그리 잊은 듯 했던 사람.
그런 꿈을 갑자기 꾸고 나서 아침부터 얼마나 이상한 일이 많았는가. 집을 나서는 와중에 파도의 환청을 듣고. 학교에 오고 나서는 자꾸 생각나는 정도였던 것이 몇 교시를 반복하다보니 환청이나 환각같은 것도 듣고, 급식실로 오는 길목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물에서는 짠맛이 난다. 생선조림은 너무 비린 향이 나고. 정신병인가? 김도원이라는 그 저보다 한 살 많던 이에 대해 저만 기억하는 것을 보면 아예 틀린 가설도 아닌 거 같은데, 분명 병은 아니라는 확신은 있었고.
“미안, 나 먼저 갈게….”
뭐 억지로 좋은 모습을 하기도 좀 그렇다. 제 상태에서 억지로 텐션을 올리면 토나 더 할 것 같아서 얌전히 돌아가는 거밖에 할 수 있는게 또 있나. 밥 자체를 꽤 늦게 받은 덕에 교무실에 있었던 선생님께 조퇴를 허가받는 것도 다 되었고. 돌아가는 길은 꽤 소란스러웠다. 반에서 떠드는 목소리가 시끄러워서, 그 속에 파도의 환청 하나를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듯 싶은 시끄러움.
“진짜 죽겠다….”
풀썩- 소리와 함께 너무 상태가 안좋아서 교복 째로 침대에 엎어지고서야 교복을 갈아입을까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틀어놓은 선풍기가 머리맡에서 저를 스치고 가는 바람과 매트리스에서 퍼질러 누워있는 것이 꽤나 안정이 되어서, 그래서. 아, 한숨 자고 바다나 한번 갔다가 병원 가야지…. 그러니까 조금, 편해진 것만 같았다.
.
머리맡에서 부는 바람. 둥실둥실하게 떠 있으면서도 무언가에 닿아있는 것 같은 감각.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보인 새파란 하늘을 멍하니, 저게 천장이었나? 하고 바라보는 것도 잠시 코에 걸리는 짠내와 제가 지금 닿아있는 것이 액체의 한가운데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몸을 움직이려다가 기우뚱- 무너져서.
——!
첨벙대는 소리와 그리 깊지 않은(체감상 15센티 정도?)바닥과 충돌해서 모래와 물과 섞이면서 비명을 지르자면 저 멀리서 실컷 웃어대는 목소리가. 하하하하! 진짜 바보같아. 그래, 그런 말을 하는 목소리가.
“단아 뭐해 진짜?”
“도원 언니? 언니야?”
“그럼 내가 도원이지 누구냐? 얘가 물에 빠지더니 정신을 못차리네.”
머리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는 것도 잠시 휙휙 돌아가는 고개는 제 주변을 살핀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새파란 물과 모래사장밖에 없는 기이한 장소. 딱히 숨을 곳도 없어보이는 그곳인데도 저를 보며 웃고 저와 대화한 김도원이 있다. 언니 어딨어? 하는 공허한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그저 주저앉은 저의 다리까지는 잠기게 하는 파도가 왔다갔다 하는 소리만.
“언니! 도원언니! 아 언니 말 좀 해봐~!”
공허하다. 가끔가다 큰 파도에 소리가 먹혀서 단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사실 소리가 먹혔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의 착각일 정도로 그의 소리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응답도 없어서.
“아 언니 진짜 장난치지 마….”
소리도 지친 건지 터덜터덜 나오는 모래사장에는 나뭇가지로 끄적인 것만 같은 바다로 와, 한 마디만. 그걸 멍하니 보고 있자면 세상은 붉게 물든다. 태양이 하늘과 바다 사이에 걸려서, 그 붉은 기를 물에 다 씻어놓고 떠나는 노을. 그는 이 노을을 안다. 오늘 꾸었던 꿈에서 마주한 파도처럼 익숙한 것이다. 붉은 바다. 얕은 수면. 모래사장. 가볍게 밀어닥치듯, 작은 파도가 치는 것처럼 밀려오던 것이—
철썩!
요란하다. 소리에 비해서는 조금 규모가 작은게 아닌가 싶지만 저 파도는 기억하기에 저를 잡아 끄는 파도가 아니라서. 저를 지나는 물살이 제 뒤에 있을 모래사장을 덮어서. 글씨가 쓸려나간다. 바다로 와, 남긴 말이, 흔적이. 전부 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듯이. 이내 다시 파도가 친다. 철썩, 하는 그 파도는.
저를 삼킬 파도다.
눈을 뜬다. 아까 전까지 보던 하늘도 파도도 없는 그냥 흰색 천장. 눈뜨고 보니 메이는 목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고, …나 도원 언니 찾던거 다 잠꼬대로 말했나? 아니면 목이 이렇게 마를 이유가 없는데. 아니, 아무튼. 물을 몇번이고 비워내자 목을 점거하던 갈증도 다 가신 것처럼.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처럼 이상할 정도로 짠 맛도 없고.
이제 모든 이상현상도 가셨겠다. 나른해진 몸을 쭉쭉 늘이며 정신을 차린 단이 겉옷 하나를 챙겼다. 바닷바람은 많이 차니까. 단촐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바다로 갈 시간이라.
철썩, 파도소리가 단의 귓가에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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