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 달리기
30일 뒤에 세상이 멸망한다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뉴스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제가 켜지도 않은 뉴스가 시끄럽게 귀를 때려 차마 더 잠을 잘 수도 없게끔.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발로 차며 던져버리고서 침대에서 짜증스레 일어난 이는 눈을 빡빡 부비며 저기 티비가 크게 틀어진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눈을 문지르며 걸어가서 그런지 머리가 문에 부딪치기도 하면서, 짜증스레 대체 주말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이냐며 물어 따지려던 입은 환하게 켜진 티비의 화면을 마주하고 천천히 다물리고서.
“P, 내가 지금 저걸 잘못 보고 있나?”
“보통 두 사람이 한 번에 같은 걸 잘못 보진 않지 않지 않을걸요?”
말 하는 꼬라지, 같은 말을 작게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그럼 저게 진짜 헛소리가 아니라는 거잖아, 하고. 30일 뒤에 지구가 망한다고 하는 발언은 뉴스에서 쉬이 기대하긴 힘들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게 일어나네. 갑자기 그는 종말론이 대두되던 20세기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했다. 아니 뭐, 진짜로 두려움에 떨거나 그랬다는 말은 아니고 그들의 당황스러웠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세상에 종말론은 꽤 많았다. 뉴스에까지도 등장한, 진짜로 전 세계적으로 퍼진 종말론 같은 것도 있었고. 그런데 그럼에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잘 살아남아 왔다. 그러니 적어도 이런 종말론으로 겁먹을 시기는 이제 슬슬 지날 때도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 그건 이제 알았으니 넘어가고. 그러면 이제 이런 것을 본다고 잘 자던 사람을 깨운 괘씸한 죄는—
“아 근데요 도원씨, 저거 종말론 아님.”
그럼 뭔데. 종말론이 아닌데 30일뒤에 세상이 멸망하는 건 또 무슨 소린지. 몇 번 더 물어도 얄미운 목소리로 그럼 조금 더 기다려보시던가용~ 하는 말에 콱 때릴까 생각하면서도 그는 시선을 다시 티비로 돌렸다.
돌린 화면에는 웬 우주가 있었다. CG인 것이 티가 나는 운석이 빙글빙글 돌면서 우리 지구로 날아가다 이내 포물선의 궤도를 나타내는 그래프 비슷한 것으로 바뀌어 뉴스 앵커와 함께 모신 패널을 화면에 담았다. 척 보기에 불온한 느낌이 드는 것이 뭐 운석이 진짜 지구에 떨어지는 건가 싶어 설마 그러겠어 하며 듣자면 어이가 없어서. 도원은 오늘 이걸로 2번째 황당함을 느꼈다. 아니 뭐 영화야? 무슨 운석이 지구로 떨어진대. 말은 황당을 나타내면서도 손가락은 슬쩍 떨리게. 종말론 같은 것보다 그래프와 전문가가 보증하는 운석에 의한 지구멸망설이 더 일리 있었다. 그런 불안마저 영화를 닮았지만 만약 이게 안전불감증이라면. 이래서 재난영화는 보면 안된다. 그게 허무맹랑한 재난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진짜 일어났을 때 자꾸 사고가 혹시 모르잖아, 하고 자꾸 속살거리니까.
“어?”
불안하게 떨리는 P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힌 건 그때였다.
“제가 혹시 몰라서, 진짜 혹시 몰라서 탈출 우주선 자리를 2개정도 선착순으로 잡아놨거든요?”
좆됐다. P의 다음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는 그 사실을 직감했다. 하나가 망했구나. 우리 둘 중에 하나는 꼼짝없이 죽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자신이 될 터였다. 따져보자면 예매—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를 한 사람은 P니까. 자신이더라도 살고 싶으면 그 좌석을 차지한 것은 자신이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고. 그런데 만약에 그걸 뺏으면, 까지 생각하다 든 생각에 제 뺨을 찰싹 쳤다. 미친년, 진짜 미친년. 아무리 그래도 언니가 돼서 그렇게까지 살고싶나? 그러면 또 한쪽에선 어차피 죽는 상황 언니라도 살고 싶은 것 아니냐고, 그래봤자 그렇게 오래 산 것도 아닌데 살고싶지 않냐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도원씨! 도원을 불렀, 음?
P가 저와 눈을 맞췄다. 굳이 따지자면 P는 실눈이니까 저와 그렇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은 없지만 아무튼 눈높이를 같게 했으니 맞을 테다. 제 거 드릴까요? 헙. 숨을 멈춘 것 같은 소리는 도원의 입에서 나온 것이리라. 굳이 P가 이상한 소리를 낼 필요도 없고 제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든 당황할 작태는 아닐 테니까. 아무튼 그래서 이상한 소리를 낸 그는 제대로 된 말을 뱉지 못했다. 너는 어쩌고, 너는 괜찮아?, 주면 안되는거잖아, 따위의 말이 목젖 능선 6부에서 멈춰 걸렸다.
“…너 해.”
겨우 뱉은 말은 그랬다. P가 왜 제게 준다 말했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아마 표정이 정말 썩어 있었겠지, 언니가 되서 칠칠치 못하게. 너 하라는 말을 하면서도 말이 목에 걸리지 않았냐 하면 그건 분명 거짓말일 테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얻은 생명에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긴장한 저 실눈이 조금 안도했는지 처지는걸 보면 아마 본심은 주고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만약 고맙다고 냉큼 받았다면 분명 뒤에서 칼 맞았겠지. 굳이 칼까지 아니더라도 뭐든 맞았을 거다. 자기가 살았다는 사실에 제가 예매한 화면의 폰을 들고 뺨을 비비는 꼴을 보자면 분명히 그랬다. …뽀뽀까지? 으. 저렇게 좋나.
처음 돌려주었을 때는 죄책감이었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꼴을 보니 잘못 돌려준건가 싶기도 하고. 아마 저것도 보이는 모습만큼 기쁘지는 않으리라, 그냥 저렇게까지 호들갑 떨면서 좋아하는 것으로 아마 일종의 티배깅을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괘씸한 것. 콱 폰을 부숴버릴까? 그런 생각을 어찌 알았는지 호들갑을 멈추고 양손에 폰을 꼭 쥐고 가슴께로 모아 초롱초롱한 눈을 보내는 작전을 하려는 듯 했으나, P는 실눈이라 눈빛이고 뭐고 없어서 한 대 그냥 맞았다.
“아얏, 왜요. 뭐요.”
“그렇게까지 좋아하는게 괘씸해서 그랬다 왜.”
“지가 먼저 못구해놓고…“
“지? 지~? 야 P, 너 지금 언니한테 그거 맞아?“
“뭐래 딸피가.“
누가 봐도 서로 장난치는 것이 뻔하던 그 대화는 마지막의 그 발언을 기점으로 P에게 달려들기 시작하면서 앞의 사건들이나 감정들은 흐지부지 흩어져버린다. 세상이 멸망하기 30일 전이라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고 일상을 닮았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에 한해서는 일상이라. 그래서 조금 희망을 보았으리라. 이렇게 멸망하기 전이라도 살 수 없을 정도는 아니구나 하고.
10일이 지났다. 그러니까 종말까지 20일이 남았다는 말이다. 고작 10일이 지났을 뿐인데 세상은 참 많이 바뀌었다.
“아니잖아요.”
“야 P, 내가 미래 후손에게 기록을 남기고 있잖아 뒤질래?”
“야 삐, 냬걔 미럐흐스네게 기르글 는기고 있즈나~”
그래, 구라였다. 고작 10일로는 뭐가 많이 바뀌지 않았다. 도시를 나도는 사람이 줄어서 사람의 생기가 확실히 없는거 빼면. 근데 생존의 열의에 찬 사람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2-3일정도는 좀 급한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어찌나 살고싶은지 아마 우주선이 있을 그곳으로 아파트에서 사람이 빠져나가는데 와… 그 광경은 그게 진짜 선착순이었는지도 의문적이게 우르르 몰려나간 대이동이라 봐도 무관했다. 이야, 내가 저걸 놓쳤네 하는 자학을 할 때면 P가 얄밉게 휴대폰을 보여주다 등짝을 맞았지만. 이건 넘어가고.
“너는 안가?”
“네? 이제 갈건데요?”
그리 말하는 걔는 진짜로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완전히 나갈 준비를 끝마친 모습이라 무심코 때려버리고 싶게.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그런 준비를 다 마친 P가 현관 앞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이제 아마 못 만날 것 같은 느낌처럼. P랑 도원이 우뚝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아마 우리가 같은 것을 느꼈다는 증거이리라. 아니면 뭐, 어쩔 수 없고. 그런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아 목을 틀어쥔다.
이제 이 문을 열고 가면 우리는 아마 다시는 못 볼 사이가 된다. 직업정신이 투철한 누군가들이 매일 운석의 동태와 모습을 점점 더 정확하게, 더 짧아진 거리를 알려주고 있으니 분명 그럴 테다. 그들이 다 떠나고 말아버린다면 알 수도 없고 딱히 알고싶지도 않은 정보지만—
서로 뻔히 긴장한 모습으로 가만히 굳어 작별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천천히 고른다. 가는 사람이랑 남는 사람이 서로 상처받지 않으면서도 잘 훌훌 털어낼 수 있을 말을 찾는 모습은 그들이 지내온 정이란게 아마 그런 것이기에. 혈연관계도 지인관계도 딱히 아닌, 돈이 궁했고 여기서 세는 들어서 살고 싶었던 두 사람이지만 살아가다 보니 쌓은 정이 꽤 됐다. 그러니까 작별은 아름답게.
—그런 정보라서 그들은 비로소 마지막 작별을 무게감 있게 준비할 수 있다. 뭐, 지금은 너무 무거운 것 같지만.
“다치지 말고, 여기와는 다른 사람들이 혹시 너를 노릴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그래서, 먼저 꺼내는 것은 당부다.
“죽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우주선 잘 견딜 수 있도록 노력 점 해보고. 아이씨… 이런거 할려니까 쫌 부끄럽네. 여기 아파트에서 너랑 참 오래도 잘 살았다. 고작 몇년 밖에 안되지만 나는 이 생활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하고… 어… 잘 지내라.”
“일은 제가 다 했으니 당연히 좋겠죠.”
“너 여기서 감동 깰래?!”
“아니 뭐 그래도… 저도 괜찮았다고요.”
다시 보자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서로가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우리는 어떤 빌어먹을 저주에 걸리리라. 지금 필요한 것은 그냥 작별이었다. 안녕 하고 인사하면 안녕 하고 떠나는. 제발 제가 안녕할 수 있기를, P의 여정이 순탄하기를.
"그런데 이제 뭐하지.“
방금 막 분위기 있게 작별을 하고 난 뒤에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는 반드시 필요한 발언이라. 멸망이 다가온다고 해서 자살충동이 올 정도는 아니라지만 최악의 경우 진짜 그렇게 될지도 모르니까.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죽음, 같은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인데 스스로 숨을 멈추고 싶지가 않아서.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지 죽지 않을 이유가 필요했다. 그저 그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상이 멸망하기까지 아직 20일이 남았다.
1일째. 도원은 일어나서 P를 찾다 혼자서 시리얼을 먹었다. 아직 끊기지 않은 전기 덕에 컴퓨터 앞에서 한참 보다가 자는 폐인처럼 지냈다.
2일째. 집청소를 했다. 청소라도 하다보면 나오지 않을까 해서. 방 하나가 텅 비어서 편한데 기분이 좀 그랬다. 고등학교 시절 앨범도 찾아서 오랜만에 봤는데 P가 있었다. 미안 P, 우리가 학연이 있었구나.
3일째. 어설픈 뉴스가 티비에 나왔다. 어느순간 화면이 꺼져서 오디오밖에 안 들리긴 했지만. 대피용 우주선이 이제야 출발했다는 소식이다. 첫날에 출발한 사람들이 좀 애간장 탔겠구나 싶었다.
4일째. 첫날, 그러니까 멸망예고에 가까운 그 뉴스가 나온 다음 날에 부리나케 달려갔다가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 몇몇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거의 다 빠진 아파트에서 소음이 들린다.
5 6 7 8 9 ….
10일째. 딱 절반 쯤.
진짜 아직 건강하게 살 이유를 못찾은 도원은 다 먹은 식기를 싱크대에 던졌다. 직후 들리는 소음에 괜히 던졌나 생각하면 귀를 막긴 했지만 아무튼 넘어가고. 이제 고작 10일째라 그런지 혼자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별다른 조건만 없다면 이대로 한달은 건강하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조건이 덕지덕지 붙어서 문제지만. 돌아온 사람들의 소음공해도 P의 빈자리도 그럭저럭 아주 못 버틸 것은 아니었다. 문제라면 슬슬 끊기기 시작하는 수도나 전기가. 그래도 우주선이 떠나기 전엔 좀 잘 되었는데 이젠 중요한 것도 없겠다 싶었는지 다 꺼져버렸다. 와 씨 진짜, 전기 없이 어떻게 살지? 여름이 가시는 9월 중순이라지만 요새 여름이 그쯤에 끝나던가. 가을인지 여름인지 모를 날씨가 한참인데. 그럼 냉장고에 있을 아이스크림이랑 음식들은? 에어컨은? 나는?
혼자부리는 투정도 시들해질 무렵에 무심코 생각이 난 건 며칠 전에 찾은 고등학교 앨범이다. 아, 3년간 함께한 내 청춘의 고향. 사실 수업은 잘 듣지 않고 육상부 활동이랑 밥만 먹으러 갔으니 그냥 숙식제공 학원 같은 느낌이었지만 잘 즐기고 다녔던 곳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붉은색 고무같은 질감에 흰색 구분선이 있던 트랙에 서서 출발 신호까지의 긴장감으로 저를 간질이다 펑 터지는 소리와 함께 폭소하듯 달리는 게 좋았다. 결승선까지 달려 들어가면 울리는 휘슬 소리도. 뜨겁게 달구어진 습한 공기가 저를 죄이고 온몸에 열이 올라서 당장이라도 몸에 물을 끼얹어버리고 싶은 충동도 괜찮았고. 땀이 너무 흘러 아무리 닦아도 다 닦지 못하게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그 짜증마저. 그리고 저를 보는 친구들과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면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엥, 노랫소리?
날이 밝았다. 저도 모르게 잠을 잤었나? 바닥에서 대충 자서 그런지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 앓는 소리를 내며 부엌에 있을 물을 찾았다.
식도에 흐르는 물은 찼다. 그래선지 더 정신이 선명하게 깨었던 것 같다. 휴대폰 시계는 1시를 보였다. 오후 1시도 아니고 오전 1시. 진짜 지랄도 이런게 없지. 그런 말을 하며 폰을 던졌지만 내심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육상부 꿈을 꿔서 그런지 달리고 싶어졌으니까. 잘 달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고. 옷장에 처박혀 있던 체육복은 조금 끼지만 맞긴 했다. 운동화도 아예 못쓸 정도는 아니고.
도원이 달렸다. 고등학교 이후 체육계로 가지 못해서 몸이 좀 썩었지만, 달리는 법을 잊지는 않았으니까.
도원은 매일 두 번에서 세 번은 뛰었다. 전력으로 뛴 것도 아닌데 숨이 차고 땀이 오르는 것을 막지 못해서 타협한 게 그정도 횟수였다.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연습이 힘들어서 내치면 진짜 자괴감에 죽을지도 몰라서. 그런 노력 끝에 세상은 결국 멸망의 날을 맞았다. 30일째가 왔다는 뜻이다.
오랜만에 딛는 학교 트랙은 딱히 변한 모습이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고작 트랙 따위가 몇년이 지난다고 바뀔 리가 있나. 입은 것도 오랜만인 체육복이라 그런지 마치 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아무도 없는 트랙 위에서 자세를 잡고, 저 멀리서 세팅해 둔 알람소리가 언제 울릴지 속으로 초를 세면서.
3
2
!
소리가 울린다. 그때도 이만큼 빠르지 않을 속도로 도원이 달렸다. 400m 트랙 위를 질주하는 것은 자신 혼자 뿐이지만 마치 저를 쫒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언제나 도원은 선두였다. 그것도 한번도 제 앞에 사람을 두지 않는. 그래서 도원이 상상할 수 있는것은 자신밖에 없다. 그런 과거의 자신이 저와 옆에 착 붙어서 근소하게 우위를 가져가는 것은 자신이다.
첫번째 코너, 애초에 하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라 둘 다 깔끔하게 인코스로. 둘, 셋에, 네번째. 코너를 돌때마다 자신이 조금 더 늦는다. 달라진 체중, 신장, 그리고 몸 상태. 도원은 도원보다 늦었다. 정적 속에서 그는 그에게 졌다. 쿵쾅대는 심박이 저 머리속에서 쓸데없이 울린다. 자꾸만 사고를 끊듯이 헤집고 피로한 몸은 힘이 풀려서 트랙에 주저앉고. 숨이 정돈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동안에 이상하리만치 어떤 잡념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하늘을 보다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은 듯.
“근데 왜 세상이 안 망하지.”
운석이 너무 크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대한민국에 바로 꽂힐 것이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아무튼 궤도 상으로는 지구에 박히는게 맞다는 이야기다. 근데 안된거면….
생각을 이어가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아, 진짜.
어쩌면 흔한 재난 영화처럼, 이게 운석이 우리 지구를 안 맞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구 반대편에 박혀서 아직 우리나라까지 오기에 좀 걸린다던가. 뭐가 되었든 확실한 건 도원은 지금 멸망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아마 P도 그렇겠지. 설령 진짜로 지구는 멸망하는게 맞고, 그런데 아직 여기까지 오지 않은 시한부라면. 그건 우리의 삶과 다를게 무엇인가?
웃음에 사레가 들린다.
심장은 아직 뛰고 있고,
하늘은 새파랗고,
자신은 죽지 않았고….
그러니까, 언젠가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제가 살 이유가 필요하다.
세상이 멸망하기까지 X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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