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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병 첫사랑

커미션 / 1차

선이네 by 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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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끝났다. 지난 계절에 추억할 일은 없었다. 더위 속에 아가미를 벌리듯 호흡하는 나날은 숨 쉬는 것만으로 오멸의 날이었다.

다녀올게요. 태헌이 문간을 나서자 매미 시체가 발에 챘다. 한 철 구애 끝에 결실 없이 말라죽은 곤충은 개미떼가 들끓어 시커먼 덩어리로 남았다. 불에 탄 주검처럼.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시선을 두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태헌이 걸음을 뗐다. 끼익 소리를 내며 닫힌 현관문 뒤로 잠긴 목소리가 뒤늦게 웅얼거렸다. ……다녀와. 어색하게 허공을 떠도는 손을 갈무리하고도 주란은 그 자리에 한참을 머물렀다.

다녀올게요. 다녀올게……. 메마른 입술이 되풀이했다. 그가 언제 그런 말을 들었던가. 현관에서 겨우 걸음을 돌린 주란이 잿빛 소파 위에 웅크렸다. 살에 달라붙는 가죽은 쩌적 소리를 냈고 저 밑의 결합부가 작게 신음했다. 습기를 먹어 눅눅하게 바랜 마룻바닥의 가짜 나뭇결을 망연하게 눈으로 훑던 주란은 태헌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검었으며, 거대했으며, 이따금 무척 왜소해 보였고, 으레 말이 없었다.

그들은 인사를 나누는 일이 드물었다. 줄곧 태헌은 말없이 문을 나섰다. 주란도 침묵을 지켰다. 기밀을 지키는 것처럼. 한 마디라도 비어졌다간 천기를 누설할까 봐 두려운 것처럼. 흘러넘칠 것 같은 말들. 다사로웠던 햇살이 금세 눈알을 찌를 듯 바뀌었을 때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헐뜯었다. 터져 나온 말은 자기혐오와 뒤섞여 중구난방으로 구르고 범람하며 허파에 증오를 꾸역꾸역 채워 넣었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빗물이 초여름을 흠뻑 적셨다. 번뜩이는 햇빛이 뇌를 들쑤셨다. 익사하기 싫어 발버둥치면서도 서로를 붙잡고 끌어내리기 바빴다. 언젠가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악쓰다가 바닥에 철퍽 쓰러진 주란의 몸 위로 그 거대했던 몸이 드리웠다. 목을 조르는 태헌의 굵은 손마디 하나하나가 간절했다. 그림자에 가린 그는 사람이라기보단 들끓는 관념의 총체 같았다. 그 순간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게 펄펄 끓다 고여버린 유황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성주란은 자문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만큼 간절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주란은 바르작대던 손을 내렸다. 다만 허공을 보듯 태헌을 보았다. 그게 태헌에게 어떻게 와닿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태헌도 손을 떼었고, 그림자 속이 울렁거리는 동안 그는 죽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둘은 다신 그런 식으로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더께처럼 바닥에 들러붙은 주란은 천장에 손바닥만 한 곰팡이가 피었다는 걸 알게 됐다. 쿰쿰한 덩어리는 뿌연 시야 속에서 꿈틀거렸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길 듯이 비가 오는 날이었다. 리모컨의 행방이 묘연해 내버려둔 텔레비전에서는 이례적인 폭우에 이런저런 척도를 갖다 대며 측량하고 재단하는 소리가 들렸다. 태헌은 검은 장우산을 꺼내 들었다. 신발장에 기대 선잠을 취하던 우산은 태헌이 시험 삼아 반쯤 펼칠 때 녹슨 뼈대를 펴며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지난날의 빗물은 혈흔처럼 슬어 남았다. 현관에서 내다보면 식탁 앞에 앉은 주란의 잿빛 머리카락과 힘없는 옆모습이 보였다. 오래 입을 열지 않아 잠긴 목소리로 태헌은 중얼거렸다.

갈게요.

주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즈음 그들의 침묵은 수렁처럼 깊었고 목소리를 잃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주란은 환청을 의심했다. 도어락은 이미 기계음을 내며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가는 걸까. 돌아오겠지. 아니라면. 그가 입을 열었다는 건 좋은 소식일까. 애당초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기다릴까. 갈게요. 언제까지? 태헌이 영영 떠난다면 그 또한 주란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주란은 비논리적이게도 그날 현관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태헌은 당연하게도 집으로 돌아왔고 현관에 작게 웅크린 채로 잠든 주란을 업어 침대에 뉘어야 했다. 몽롱한 와중에도 주란이 입을 열었다. 태헌아. 태헌이니? 네. 그렇구나. 주무세요.

태헌은 몇 번 더 ‘갈게요’라며 집을 떠났다. 어느 날부터는 우산 없이 문을 나섰다. 주란은 몰염치한 두려움을 느꼈다. 바싹 마른 날은 푹푹 쪄 집 안에 머무르기만 해도 땀이 흘렀고 태헌은 현관에 기댄 채 저를 기다리고 있는 주란을 업을 때마다 뒷목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살갗을 느껴야 했다. 주란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진다는 걸 느낀 다음 날 태헌은 출근하기 전 무언가를 주저하더니 입을 닫은 채 집을 나섰다. 다만 덧붙였다. 선풍기라도 켜 두세요. 주란은 현관에서 태헌을 기다리는 일을 멈추었다. 응. 그럴게.

그때는 한여름이었지만 선풍기는 여태 창고 속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은둔하고 있었다. 주란은 선풍기를 거실로 꺼내 기계적인 손길로 창살을 닦아냈다. 누레진 몸체의 버튼을 누르자 플라스틱 날개가 기침하더니 탈탈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은 미적지근했지만 그제서야 주란은 피부에 밀착해 끓는 듯한 열기를 느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물에 잠긴 것처럼 답답했다. 컴컴한 방 안으로 정오의 햇살이 작열했다.

남은 여름내 태헌은 조용히 집을 나서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주란은 더위를 체감하게 만들 뿐인 선풍기를 약하게 틀어두곤 했다. 그들은 침묵으로 영구적인 화상흔을 고백했고 느적느적 아문 탓에 하나로 얽혀 제때 분화하지 못한 쌍생아처럼 엉겨 붙었음을 시인했다. 떠날 일은 없었다.

다녀올게요.

다녀와.

다만 그것을 내어 뱉는 일이 생경했다. 처음이었다.

세 음절을 내뱉을 때 주란은 목구멍 안에서 장기를 꺼내 쏟아놓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너는, 돌아와……. 몸이 무너지듯 기울었다. 그도 모르는 새 땀에 절은 머리카락 새로 이마가 드러났다. 허공을 헤매던 시선이 천장에 가닿았을 때 그는 시커먼 얼룩을 발견하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흙탕물이 튀긴 옷자락처럼 찌글거리는 얼룩 주변으로 크고 작은 점이 뭉쳐 흉측한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소파를 밟고 선 주란이 손끝으로 검댕 같은 것을 더듬었다. 축축했다. 물이 새는 모양이네. 태헌이에겐 어떻게 말하지.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주란의 연락처 목록은 한 화면에 다 들어오고도 남도록 짧았기에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거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발신음이 두어 번 울리고 전화가 연결됐다. ×××호입니다. 위층에서 물이 새는 것 같아서요. 아뇨,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예. 수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아,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은 침침하게 비를 흘리고 있었다. 지극히 좁은 사고는 지당하게도 한 점으로 도달한다. 태헌이…… 우산 안 가져갔을 텐데.

역 안에서부터 시지근한 냄새가 풍겼다. 태헌이 지하철 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습기가 그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미끈하게 달라붙는 장갑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출구 끝 흐리멍덩한 하늘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계절의 흐름을 의식하고 사는 부류는 아니었기에 새삼스레 장마가 끝났었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비가 오는 건 오랜만이었다. 역에서 집까지는 십 분가량 걸어야 했다. 망할……. 뇌까린 태헌이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쑤셔 넣을 때서야 그의 눈에 검은 장우산을 든 인영이 들어왔다. 잿빛의 여자는 탁한 하늘 아래 흩어질 것 같았다. 다 타버리고 남은 촛농 같은 사람. 달리 갈 곳 없는 사람답게 그는 우산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 주란은 태헌이 고개를 수그려야 하는 높이에 우산을 들었기에 태헌이 넘겨받았다. 둘은 길이 단 하나로 나 있는 것처럼 말 한 마디 없이도 그토록 지겨웠던 집을 향해 발을 맞춰 걸었다. 잘박거리는 소리가 일정했다.

횡단보도 앞에서야 주란이 입을 열었다. 천장의 누수, 설비를 마치는 데 필요한 오랜 기간, 비용, 규모. 일시적인 조치는 몇 주 내로 가능하겠지만 원인을 제거하려면 꽤 번거로운 일이 될 거라고. 주란이 그런 안건을 다룰 때 말꼬리를 끌지도 주저하지도 어려움을 겪지도 않는다는 사실에는 구태여 감탄할 필요도 없었다. 태헌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주란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태헌은 시선을 주지 않고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호등이 파란불을 고했다.

주태헌은 줄곧 말을 아꼈다. 그러면 성주란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쓰지 못할 언어를 금기시하고 폐기하는 데 익숙했다. 그리하여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집에 들고 저녁을 나누어 먹고 몸을 씻고 같은 침대에 눕는 건 지극히 쉬운 일이었다. 몸집을 불려 가는 천장의 멍자국 아래서도 그들은 조용했다. 목적 없는 묵언수행이었다. 말없이도 구차해지는 데에 일가견 있는 자들.

태헌은 주란의 메말라 가칫거리는 입술과 제 입술을 겹쳤다. 건조한 소리가 났다. 씻은 몸에서는 물기가 채 가시지 않아 살갗끼리 맞붙을 때마다 질척거렸고 이내 끈적거렸다. 습관적인 교접. 태헌은 죽음과 흘레붙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주란이 얼굴 근육이라도 찡그리는 걸 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노상 주란의 입에서는 불쾌하고 느지근한 신음만이 비어졌다. 우는 법도 배우지 못한 집짐승처럼. 근래 태헌은 그런 울음을 원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새카맣게 타버린 잔재 앞에서 숨을 먹어가며 머리가 벅찰 만큼 온 정신을 새하얗게 표백하도록. 온전히 울부짖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고 난잡한 낙서로 뒤덮인 머릿속은 타는 듯 검은 먹구름만을 드리웠다. 헐떡이는 중에도 주란에게 울음마저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텁텁한 숨이 섞여 누구 것인지 모를 호흡이 폐부에 들어찼다.

뭍에서 익사할 수 있을까? 익사의 사인이 화재일 수 있을까? 당신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

거구의 남자는 억지로 여자의 품에 파고든 채 무더위를 지새운다. 눈은 기어코 어둠에 적응하지 못해 사방은 어둡다. 태헌은 이따금 두 구의 시신 가운데 누워있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화장되기 전에 시커멓게 타버린 아이와 결핍 없이도 메말라 죽은 여자. 이미 시체 된 이의 목을 조르다 질식한 남자. 그들이 아주 오랜 시간 전에 죽고 미련하게도 지상에 눌은 채 유령처럼 서성이고 있다고 하면 당신이 믿을지가 궁금했다. 믿겠지.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태헌은 계절의 흐름을 의식하고 사는 부류는 아니었다. 아주 이른 시기에 그의 계절은 종말을 맞았고 하루도 한 달도 일 년도 의미가 없었다. 시간은 부패의 형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들여놓는 걸 깜빡한 음식. 방치해 쉰 냄새 나는 쓰레기통. 삶에 소홀한 순간 억척스레 의지를 좀먹고 드글드글 끓는 구더기. 천장에 핀 곰팡이. 언제 시작했는지 모를 여름은 시시각각 부패를 알리며 선명히 윤곽을 잡아갔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형상이었다. 그 끝에 성주란의 멀건 얼굴이 있을까 봐 두려우면서도 다른 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는 뭉그러져 곤죽처럼 주란과 하나된 것은 아닐까.

깡패 자식 하는 것치곤 얼마나 간단한 일이야, 괜히 시비 붙일 일도 없고 힘쓸 것도 없지. 이번엔 그냥 불만 놓고 나오면 돼. 주태헌 너한테는 별것도 아니니까……

두꺼운 커튼 너머로 파름한 빛이 샜다. 긴 숨을 내뱉으며 눈가를 짓누른다. 심장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맞댄 몸을 끌어안는다.

다녀올게요. 태헌은 그날도 그렇게 말하며 집을 나섰다. 주란이 배웅했다. 집은 조용했고 소파에서 고개를 젖히면 지저분한 눈물 자국이 보였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느낌. 부정형의 얼룩을 올려다보며 주란은 태헌의 길 끝에 언제나 자신이 있다는 데에 타당성을 따졌다. 맞불 같은 사람들. 처음 부둥켜안았을 때부터 그들은 비가역적으로 녹아내렸고 들러붙었다. 문드러지고 썩은 채 붙은 그들은 떨어트리는 순간 피를 흘리겠지. 내가 아니었다면 달랐을 텐데.

가책감이 사지를 늘어뜨렸다. 그조차도 너무나 익숙해서 타당하지 못한 걸 탐내고 죄스러운 것을 욕망하고 고행자처럼 고통을 희구하는 일이 그의 본질인 것처럼 느껴졌다. 스멀거리며 자리를 넓히는 얼룩. 어디선가 숨을 참았다가 띄엄띄엄 뱉어놓는 물방울 소리. 여름의 잔열로 후텁지근하게 풍기는 가죽 냄새. 전멸한 동족의 시체 한복판에서 고통스레 울며 추도하는 매미. 온몸으로 울며 머리를 헤집는 소리. 모든 것이 그를 종용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낭떠러지의 한 발짝 안쪽이었다.

내가 아니면 모든 게 달랐을 텐데, 그렇지만 이미 네가 내 곁에 있다면 바라건대 부디 나를. 내가. 너를…….

지나간 여름에 추억할 것이라곤 없었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끔찍한 족속이었고 눈앞에 놓인 건 서로뿐이었고 맹목적으로 망치고 부숴놓다가 손끝과 이목구비가 닳도록 무뎌졌다. 태헌은 그날 주란의 목을 조르고 뼈를 부러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누구도 찾지 않는 그를 말끔하게 지상에서 치우는 일은 얼마나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면 마침내 더께 같았던 그가 더께로 남고 주태헌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나아가진 못하더라도 이 산 자들의 초상집을 벗어나서 부유하던 걸음을 드디어 드팀새 없이 바닥에 붙이고 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겠다고. 돌아오겠다고. 왜? 너는 날 닮아버린 거니? 언젠가 태헌이 피 흘리며 누운 주란을 두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내겐 ……밖에 남지 않았어.

너에겐 나밖에 남지 않은 거니?

태헌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에야 현관에 들어선 그는 주란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물었다. 대상 없는 질문이었다. 태헌은 제발 대답해달라고 했다. 주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발. 태헌이 되뇌었다. 주란은 자신의 대답 속에서 태헌이 자신을 찾아버릴 것 같아 침묵으로 일관했다. 탄식 같은 소리가 들렸다.

다음날의 태헌은 여느 때와 같이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마치고 주란이 내온 식사를 군말 없이 마치고 옷을 차려입었지만 쉽게 현관을 나서지 못했다. 뭇사람들에게 일상적인 인사치레가 더없는 속박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고여 있을 수도 여길 떠나는 것도 이내 돌아오겠노라고 말하는 것도. 그는 얼굴이 없는 사람처럼 숨을 죽였고. 지긋지긋하게도 답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단 하나뿐이었다. 제가 당신을 닮았나요. 당신과 저는 떨어질 수 있나요.

그날 태양은 진했다. 늦여름이나 초가을 둘 중 무엇도 아닌 시기의 하늘은 희멀겠고 햇빛은 하얀 구멍처럼 뚫려 있었다. 얼마 전 새로 칠한 페인트가 말라붙어서도 불쾌한 냄새를 풍겼고 천애 고아가 된 날벌레가 이제는 자신의 장송곡을 부르며 울었고 금언을 참지 못한 천장에서 화농한 상처 자국으로 울었고 바닥으로 눈물이 떨어졌고 누런색 액체가 마룻바닥에 스몄고 더운 바람을 연신 토하는 게 전부인 선풍기가 모든 것에 항복 선언을 올렸고 더운 날이 아니었는데도 뒷덜미를 타고 땀줄기가 흘러 늘어진 옷을 적셨고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눅진해진 바닥이 맨발에 달라붙었고 눈앞에 주태헌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 등은 검고 아파 보였다. 혈색이 가신 팔이 거대하고 왜소한 몸을 끌어안았다. 무채색의 덩어리로 뭉친 그들의 형상이 기이했다. 화산재에 덮여 박제된 고대의 연인들.

머리 위에서 불결한 흔적이 지켜보는 듯했다. 목구멍이 쑤셔 막히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태헌의 손 아래서 목이 졸렸던 그 순간처럼 성대에서 비틀린 소리가 새어 나온다. 네가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설당한 비밀은 울컥거리며 흘렀다. 네 옆에 내가 있기를 바라는 것도 전부 이기심인 거 알아 누군가 우리에게 서로를 부수다 못해 미쳐버린 거라 해도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 그런데 그렇게 미쳐버린 나는 네가 다른 곳에서 행복해지는 걸 볼 수 없을 것 같아 그래 태헌아…… 미안해 전부 내가 이기적인 거야 그런데 나는, 너를.

닿은 살의 온도가 뜨거웠다. 태헌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새카만 눈동자는 말라붙은 듯 안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란을 죽이는 일을 너무도 오래 미루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이룰 수 없을 만큼. 늦어버린 그는 주물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했고 속을 전부 게워내고픈 충동은 그의 뱃속에 괸 채로 남았다. 귓속에서 파리떼가 끓는 듯 시끄러웠고. 모든 건 망연하게 멀었다. 기어코 칙칙한 입술은 선고했다.

비이성과 광기라는 죄목으로 그들은 둘도 없을 세기의 공범자였다. 오멸의 여름병은 그들에게 줄곧 예비된 판결이다.

사랑해. 사랑해, 태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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