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왼쪽으로 가지 않은 것은 내 선택이기도 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마노 글 모음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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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발을 움직였다. 달이 떠 있지 않음에도 별빛 하나 찾아볼 수 없고 당장 제대로 걷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길이었지만,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가만히 있으면 제 모습마저 집어삼킬 어둠 속에서 청명은 이 길이 초행은 아님을 짐작했다. 쭉 뻗은 길 위에는 아무런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함? 그리움? 이 느껴지기에. 끝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했지 길을 걷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반각쯤 걸었을까 무색무취의 공간에서 어렴풋한 풀 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사천으로 이어지던가?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어제 무엇을 했는지, 어디를 가던 중인지, 이 길에 오른 이유가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꼭 누군가 강제로 막아둔 것처럼 말이다.

자박자박

자신을 따라오는 듯 따라붙은 발소리에 청명은 성큼성큼 걷던 보폭을 반 정도 줄였다. 검 한 자루 없는 단출한 도복 차림이라 상대가 기습이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향한 믿음이 청명의 걸음을 늦췄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소리는 반평생 청명이 맞춰주었던 소리였으며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소리였고. 한번 보고 지나칠 꽃을 두 번 보게 만들며 길고 나긋한 목소리로 청명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소리였다.

발소리는 이따금 사락거리는 천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어느 순간부터 온 신경이 뒤로 쏠려 상대의 발걸음을 제외하곤 모든 소리가 숨을 죽였지만 아무튼 그랬다. 아무것도 없는 길 위에서 팔을 앞뒤로 흔들어 나풀대기도 하고, 한쪽만 올려 얼굴을 가리기도 하고. 어쩌면 너에겐 무언가 보이는지도 모른다. 너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아 제게 쥐여주었으니.

그러다 마주한 것은 좌우로 길게 뻗은 갈림길로, 오른쪽엔 익숙한 술잔 두 개가. 반대쪽엔 화려하게 치장된 붉은 잔 두 개가 아무런 설명 없이 놓여있었다. 청명은 제 뒷사람에게 의견을 구하고자 몸을 움직였지만 상대의 모습이 시야에 잡히기도 전에 들린 오른쪽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오른쪽 길로 걸어갔다.

왜 너는 오른쪽을 고르는 걸까. 네 눈에 차는 것은 왼쪽의 붉은 잔이었을 텐데. 청명은 막연히 떠오른 생각을 무의식 너머로 흘려보냈다. 묻는다고 해서 지나친 길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보단 네 선택이 낫겠지 싶어서. 어느 쪽이든 너와 오래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다.

두 번째로 마주한 갈림길에는 익숙한 당가 주머니 끈과 투박한 비녀가 오른쪽에, 홍옥으로 꽃잎을 새기고 떨어지는 술이 찰랑이는 비녀와 고급스러운 은사로 수가 놓인 비단 끈이 왼쪽에 놓여있었다. 지금에야 제가 만들어준 비녀를 꽂아 뒀다만 청명은 시전에서 화려한 비녀를 볼 때마다 두 눈에 담아 두었다. 항상 수수하게 입고 다니지만 늘 장포는 빼놓지 않는 것처럼 저를 상징하는 비녀를 꽂아 두어 제 것임을 공고히 하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오른쪽으로 갑시다.”

“왜. 저런 비녀는 네 취향이 아니더냐?”

“불편해서 쓰지도 못할 거 뭐 좋다고 하고 다닙니까.”

“해보지도 않았는데 불편한 걸 어찌 알아.”

“형님의 머릿속에선 이미 수백번 써 본 것이 아니오.”

당연하단 듯 대꾸하는 통에 청명은 말문이 막혀 허, 참. 내가 언제 그랬다고. 하며 오른쪽으로 발을 옮겼다.

세 번째 길에는 각각 피에 젖어 본래의 색을 찾아볼 수 없는 장포와 같은 색의 도복이, 그리고 척 봐도 비싼 비단에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진 붉은 옷 두 벌이 자리해 있었다. 공통점은 둘 다 빨갛다는 것 정도일까. 청명은 내심 당보가 왼쪽을 골라주길 바랬다. 지금껏 고른 건 별 의미가 없었지만 이번 건 오른쪽을 고르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피에 젖은 게 좋은 것도 아니고 굳이 골라야 한다면 혼례복을 닮은 저쪽이 좋지 않은가. 그런데도 당보는 오른쪽이라 말했고, 청명이 이를 무시하고 왼쪽으로 가려 하자 도사 형님. 하며 청명을 불러 세웠다.

“왜.”

“오른쪽이라니까요.”

“싫다.”

“저 믿으십쇼. 형님은 오른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아니, 왼쪽으로 갈 거다.”

청명은 당보의 말을 무시하고 왼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뒤에서 넓은 장포 자락이 청명을 감싸 안았고,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하려니 부드러운 손에 눈이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가십시다. 네?”

“손이나 치우고 말해라. 그리고 왼쪽으로 간다고 화를 입는 것도 아닌데 웬 고집이냐?”

“고집은 지금 형님이 부리는 게 고집이죠. 내내 잘 가셔놓고는 갑자기 왼쪽으로 가시려던 거 막은 게 누군데.”

“오른쪽은 불길해. 너는 세가놈이라 모르나 본데 저리 피에 물든 건 빨기도 힘들다. 그러니 왼쪽으로 가는 게 맞지.”

“싫습니다. 왼쪽을 본 형님의 머릿속이 아주 불순하니 저는 꼭 오른쪽으로 가야겠소.”

“이게 왜 불순해. 아주 합당한 생각이구만.”

“얌전히 입혀둘 게 아니라 벗겨 먹을 생각밖에 없으니 그러죠.”

놀리려는 투가 아니라 정말 저를 달래서 오른쪽으로 이끌려는 목소리에 청명은 더더욱 오른쪽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가야 하는지, 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오른쪽으로 가라고만 하는 네가 미웠다.

“내가 오른쪽으로 가면 너도 좋은 거냐?”

당보는 청명을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청명은 한참 후에 오른쪽으로 걸었다.

그렇게 몇 번 더 반복되던 갈림길에서도 당보는 늘 오른쪽을 말했다. 오른쪽 길에는 부러진 검이 나오기도 하고, 난도질당한 시체가 나오기도 했으며 당보가 직접 저를 닦을 때 쓰던 핏물이 담긴 그릇과 피에 젖은 영견이 놓여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보는 오른쪽만을 말했다.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곤 무엇이 나오던 오른쪽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당보의 오른쪽을 향한 집착은 없앨 수가 없는지라, 괜한 대거리를 하느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두자 하고 체념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은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된 추혼비와 청명이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뎌지고 녹슨 추혼비가 대조적으로 놓여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른쪽으로 가리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당황스러운 선택지라 발을 멈추면 당연하게도 당보의 오른쪽이라는 말이 건네졌다.

“진짜 오른쪽이냐?”

“네. 오른쪽입니다.”

“그냥 추혼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 끝이라고? 왜?”

“당연히 오른쪽이 좋으니까 그러죠.”

“오른쪽이 네가 원래 쓰던 거고, 왼쪽은 날이 무뎌 고기도 안 썰리고 색도 이상한 추혼비다. 그래도 오른쪽이 맞아?”

“맞다니까요. 아니면 저 구린걸 제가 쓰길 바라십니까?”

청명은 그동안 계속 거지 같은 거 골라왔으면서 왜 이번엔 멀쩡한 걸 골라? 하고 추궁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천천히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당보가 죽은 뒤로 당가주가 물려받은 추혼비는 소매 속에서 언제나 말끔하게 관리되는 것이 당연했다. 전쟁 중에서도 추혼비를 그렇게 관리했으니 100년이 지난 뒤에도 멀쩡한 게 맞단 말이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수록 발목이 붙잡힌 듯 걸음을 내딛기 힘겨웠고 쿵쿵 뛰는 심장이 자꾸만 옥죄여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저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이 길로 가면 안된다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너는 오른쪽이라 그랬는데. 그래야 나도 좋고 너도 좋다고…

네가 대답을 했던가?

“…당보야.”

“…”

“오른쪽으로 가면 너도 좋은 게 맞아?”

“…”

“여기가 마지막이라며. 너는? 넌 어떻게 되는 거냐?”

당보는 말없이 밝게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본 청명은 발을 돌려 사라지기 시작하는 당보의 몸을 끌어안았고.

그리하여 눈을 떴을 때 자신은 단 한 번도 길의 끝을 본 적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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