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이벤트를 하고 싶었던 당보

현패 대학생 AU

마노 글 모음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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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라. 청명은 곁눈질로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당보를 흘겨보았다. 며칠만의 데이트에 후드를 입고 온 것도 모자라 내내 어중간한 거리를 유지하더니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야 애교를 부리는데, 그렇다고 손을 잡으려 하면 고개를 들고 영화에 집중하는 척을 한다. 손 좀 잡아달라고 안아달라고 앙탈을 부릴 때는 언제고 해준다니까 피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되지도 않는 밀당으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꼴도 같잖았다.

관심없는 로맨스 영화를 예매한 것도 봐주었고, 몇 주간 스킨십 없는 어색한 사이로 보낸 것도 넘어가 줬다. 제가 아무리 늦어도 기다려주던 녀석이 말없이 집에 가버린 지난 날도, 연락만 하면 바쁘다 공부해야 한다며 되지도 않는 핑계를 들이미는 것도 전부 오늘 데이트를 위해 참고 넘어갔단 말이다. 근데 네가 만나서도 이따위로 굴면 뭐 어쩌자는 건지. 내가 좋다고 고백해서 사귀었으면 내 마음 안 변하도록 더 잘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

지금도 봐라. 한숨 한번 쉬었다고 허리를 쭈그리고 눈치나 볼 거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짓을 해.

“화났어요..?”

“왜.”

“기분 안 좋아 보여서요... 나갈래요? 다른 데 갈까요?”

“그냥 있어. 보고 싶다며.”

당보는 그러고도 표정을 읽어보려 고개를 기울이다가 턱을 잡은 손에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영화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은 죄가 있어 뭐라 말은 못하고 영화를 본 뒤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려있길 바라면서.

“영화 어땠어요? 끝에 OST 좋지 않아요?”

“노래가 거기서 거기지.”

“부상 때문에 밴드도 그만둔 사람이 연인을 위해서 다시 기타를 들고 연주하잖아요. 그것도 이벤트로 오직 한명을 위해서! 로맨틱하고 좋지 않아요?”

“로맨틱은 무슨. 집이나 가자.”

청명은 어둑해진 하늘에 당연하단 듯 헤어짐을 입에 올렸다. 밥도 먹고 영화도 봤고. 평소라면 찡찡대면서 조금이라도 붙어있으려는 녀석이 조용해 데이트 할 맛도 안나니 차라리 집에서 쉬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대답 없이 미적거리길래 가고 싶은 곳이 있냐 물어도 고개를 저어대는데 뭘 더 하겠냐.

영화관에서 당보네 집까지는 청명의 걸음으로는 20분, 당보의 걸음으로는 40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그마저도 그냥 걸어가는 법이 없어 놀이터에서 미적거리고,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물면 1시간은 훌쩍 지나버리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앞서가는 청명을 당보는 아무 말 없이 졸졸 따라가기만 했으니 순식간에 집 앞에 도착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들어가라.”

“형님은 바로 집으로 가요?”

“그래야지. 너 들어가는 건 보고 갈 거야.”

“… 데려다줄까요? 여기서 얼마 걸리지도 않잖아요.”

“됐다. 들어가기나 해.”

가라는듯 손을 휘저어도 당보는 여전히 후드 속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청명의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들어가라고 등을 밀어 보고, 그냥 두고 간다고 말을 해도 고집스럽게 힘을 주고 버티는데 그런 와중에도 손은 주머니 속에 봉인된 채라 울컥 서운함과 억울함이 차올랐다.

“그냥 들어가라고. 이만큼 참아줬으면 됐지, 내가 뭘 더 해줘야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뭔데. 연락은 다 피해놓고 그 꼬라지로 데이트에 오질 않나, 지 보고 싶은 영화 골라놓고 답답하게 굴질 않나. 너 나랑 마지막으로 손잡은 게 언젠지 기억은 하냐? 우리가 마지막으로 같이 걸은 날이 벌써 몇 주 전인지는 알아?”

청명은 당보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양 손목을 붙잡아 거칠게 빼냈다. 주먹을 쥐고 있길래 때리려나 싶어 강하게 붙잡았지만 당보는 그저 손이 펴지지 않도록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 형님. 제 말 좀 들어봐요.”

“손 펴.”

“나중에 다 말하려고 했어요. 형님 생일도 며칠 안 남았으니까 특별하게 축하해주고 싶어서,”

“닥치고 피라고. 아니면 억지로 펴줘?”

당보는 눈꼬리를 내리고 손바닥이 보이도록 손을 폈다. 손 아래로 떨어지는 게 없으니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는 뜻인데, 뭘 말해준다는 건지. 세게 쥐고 있어 손톱자국이 남긴 했지만 언제나와 같은 당보의 손이었다. 저보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있는 손. 이렇게 손바닥을 마주 대면 그 끝을 감쌀 수 있는… 어? 여기가 왜 이래?

“너 손이... 언제부터, 아니 아프진 않고?”

청명은 당보의 손가락 끝에 생긴 하얀 물집을 보고 물었다. 아무것도 없이 깔끔했던 손에 물집이 생긴 것도 모자라 건들면 얼굴을 찌푸리는데 아까 주먹을 쥘 때는 그걸 다 참은 건가 싶어서 당혹감이 슬쩍 밀려왔다.

“형님 생일에 기타 쳐 드리고 싶어서 그랬는데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미안해요... 화 풀어요.”

잘못했다고 어깨에 얼굴을 비비면서도 당보는 연신 청명의 눈치를 보았다. 청명의 연락을 피했던 것도 사실이고, 애인을 외롭게 둔 것도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형님의 반응을 보니 오늘도 참다 참다 터진 꼴이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획한 축하고 뭐고 당장 헤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필사적으로 애교를 부렸다만, 굳은 표정을 보니 이미 글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 생일에 기타를 쳐주고 싶어서 말도 없이 집 가고, 연락도 씹고, 거지같이 입고 와서 내 반응을 봤다 이거지?”

“… 그렇죠.”

청명은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괘씸한데 괘씸하지 않고, 화가 나는데 화가 나지 않는다. 지난 날들을 생각하면 당장 꺼지라고 발로 차버려도 시원하지 않은데 손가락이 저 지경이 될 정도로 연습하느라 그랬다고 하니 기분이 아주 나쁘진 않은 것이다.

“집에 약은 있고?”

당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여기에 바르는 연고는 딱히 없어서..”

“에휴.. 그럼 우리 집으로 가자. 니가 쌓아놓은 약 중에 하나는 맞겠지.”

청명은 손 대신 손목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따라오는 당보가 제 옆에서 걸을 수 있도록 속도를 줄이고, 이래도 확신을 못하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눈치를 보는 허당 녀석을 누가 채가지 않게 잘 감시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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