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下

배우 당보 X 검도 선수 청명 | 현대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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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비밀 연애 중 일어난 일

*청명은 36, 당보는 30


지이잉

"시끄러..."

당보는 잠에 취한 채로 소음의 원인을 향해 팔을 휘적였다. 방에서 진동이 울릴 것이라고는 핸드폰 뿐이었고, 소리를 들어보니 자신의 반대 자리나 그 옆의 탁자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팔을 뻗는 족족 두툼한 무언가에 부딪혀 도저히 알람을 끌 수가 없었다.

탁탁

엥 벽인가. 벽치곤 말랑한 것도 같고...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팔에 걸린 무언가를 주물거리니 금방 알았어. 하는 소리와 함께 알람이 꺼졌다. 그리곤 어깨를 끌어당기더니 뜨끈한 어딘가에 머리를 대어주고 이불까지 덮어주는데 그게 또 안락하고 편안해서. 당보는 생각하길 멈추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하여간 잠귀는 밝아가지고."

청명은 한쪽 팔을 당보에게 내어준 채로 간밤에 온 연락을 확인했다. 이미 시차 적응을 끝낸 몸은 익숙한 루틴을 하자며 난리였지만, 정신은 정반대라 평화로운 지금을 깨고 싶지 않았다. 팔 위의 무게도, 고개를 숙이면 닿는 갈색의 머리카락도, 가슴에 닿은 따뜻한 온기도 전부 놓고 싶지 않았다.

연락의 대부분은 진이에게서 온 것으로 상태는 어떻냐,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 등 영 쓸모없는 말 뿐이라 무시했다. 걱정하고 위로하는 말 몇 개에 대충 답장을 보내고, 쓸모없는 광고는 지우며 시간을 보내면 지금 읽씹하는 거냐는 문자가 날라왔고. 이마저도 읽고 답장을 하지 않자 전화가 걸려 왔다.

"왜."

"어때요? 잘 됐어요?"

청명은 가슴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곤히 자는 당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제 어깨에 코를 박고 가끔 미간을 찡그리는데 살살 문질러주면 금방 풀어진 얼굴로 숨을 쉬는 모습이 아주 사랑스러웠으며, 손을 건들이면 잠결에도 꼭 잡아주니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아... 네. 축하드립니다. 안 들어도 알겠네요."

"어. 이제 끊는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바쁜 것도 아니고....... 잠깐, 형 혹시 지금 하고... 있어요? 아니죠?"

볼일이 끝나 끊겠다는 것을 무슨 뜻으로 알아들은 건지. 바들바들 떠는 목소리에는 댁이 그러고도 사람이냐는 욕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하긴 무슨. 울까 봐 건들지도 못한다."

"어휴... 나중에 귀국 날이나 알려주세요."

"야 사진 어딘지 찾,"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사람이 말만 하면 끊고 지랄이네."

어쩐지 익숙한 상황에 청명은 혀를 차며 짜증을 속으로 참아냈다. 그러자 늘어져 있던 몸이 청명에게 바짝 붙어 가슴에 턱을 기대고 눈을 깜박인다.

"... 왜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나른한 눈동자에 담기는 건 저 뿐이었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라서. 얼굴을 숙여 입을 맞춰... 주려다 실패했다.

"뭐야."

"저 방금 일어났어요. 적어도 이 닦을 시간은 줍시다."

청명은 입을 막은 손바닥 너머로 치우라고 눈짓했다. 그래도 치우지 않자 손바닥 위에 입술을 붙였고, 고개를 저으며 빠져나가려 들길래 팔로 당보의 상체를 끌어안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형니임. 진짜 안 됩니다."

"안 되는 게 어딨어."

"장난치지 말고 놔줘요."

당보는 청명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 거부를 표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간격은 종이 한장의 틈도 벌어지지 않았고 진심인가 하는 생각에, 전략을 바꿔 청명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대기 시작했다.

청명은 꽤 저항하나 싶었으나 찌르면 찌를수록 몸을 움찔대더니 끝내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양팔을 들어 항복을 취했다. 의기양양해진 당보는 여유롭게 침대에서 벗어났지만 금방 겨드랑이가 들어 올려져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청명의 아래에 갇힌 채 말이다.

"형님? 제가 이긴 거 아니에요?"

어리둥절한 얼굴은 청명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차 자신에게 손을 댈 거라고 생각조차 못하는 얼굴이었다. 저 얼굴만 아니었어도 속옷만 내리고 땀 좀 빼는 건데. 넌 진짜 나 만나서 다행인 줄 알아.

"네가 어떻게 이기냐? 내가 봐준 거지."

"봐줄 거면 끝까지 봐주시, 아! 잠깐, 야!"

당보는 얼굴 가득히 청명의 뽀뽀 세례를 받은 뒤에야 욕실로 갈 수 있었다.

"내가, 내가 안 한다는 것도 아닌데!"

당보는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는 내내 투덜 거리는 입을 쉬지 않았다. 그거 조금 기다리면 뭐가 덧나냐부터 시작해, 깨끗하게 닦고 하자는 게 잘못된 거냐, 빨아준 다음에 키스하는 건 싫어하면서 왜 이건 또 고집을 부리냐 등 옷을 갈아입는 동안 쉴 틈 없이 청명의 귀를 괴롭혔다.

"지가 유혹해놓고 넘어가니까 저러네."

"제가 언제 유혹을 했다고 그럽니까? 기분 나빠 보여서 물어본 거잖아요."

"눈을 이쁘게 접지나 말던가."

"자기가 좋아해 놓고 또 나보고 뭐라 그래."

가디건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은 당보는 입을 삐죽이며 청명에게 양 팔을 뻗었다. 그 신호를 모르기엔 연애 기간이 너무도 길었던지라 다가가 양손을 잡고 당겨주면, 당보는 일어나는지 안겨드는지 모르게 청명에게 딱 붙었다.

"봐라. 또 꼬리 치지."

"이건 유혹 맞으니까 넘어오시죠? 안 할 것도 아니잖아요."

손은 전부 서로에게 묶여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둘은 입을 맞댔다. 가볍게 쪽쪽 대기만을 몇 번, 어느 순간 벌어진 틈새로 신음을 흘려대는데 명백하게 한쪽에서 흘리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유혹한 당보조차도 당황스러워 애써 고개를 피하면 피하는 대로 따라붙어서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호흡을 잡아주기까지 한다.

"흐으, 이제 그만 해요. 이따, 이따 더 하면 되잖, 읍."

이번에도 당보는 먼저 그만을 외쳤다. 그런데도 청명이 기어코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억지로 몸을 뒤로 물려 숨을 골랐다. 이런 흐름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청명이 하고 싶은 대로 뒀다가는 계획은 고사하고 당장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할 미래가 눈에 훤했다.

"우리 나가기로 했잖아요. 응? 오랜만에 데이트 하자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근데 언제 하자고는 안 정했잖아."

청명은 태연하게 당보의 입술을 엄지로 문질렀다. 아까와 비교하면 확연히 붉은 입술은 부드럽고 말랑하고 아주 촉촉했다.

"저 옷도 예쁘게 입었는데... 진짜 안 나가요?"

당보는 눈꼬리를 내리고 가디건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계산적인 움직임을 청명이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청명은 당보의 연기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기에. 지금도 이걸 잡아 먹어, 말아 하는 눈으로 보는데 제가 뭘 할 수 있겠냔 말이다. 그리곤 입술이 당겨지자 당보는 순순히 눈을 감았고

"애교만 부리면 다 되는 줄 알지."

짧은 입맞춤과 함께 들려온 허락에 와락 청명을 끌어안았다.

"아 해요."

청명이 입을 벌리면 당보는 포크 가득 꽂힌 샐러드를 청명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제 점심부터 먹은 거라곤 과자 몇 조각과 커피뿐이라는 말을 듣자 당보가 챙긴 닭가슴살 샐러드 속 단백질은 전부 당보에게 밀어주고, 자신은 풀만 먹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관광지나 갈 줄 알았더니."

당보에게 닭가슴살 한조각을 먹여주던 청명이 중얼거렸다. 오랜만의 데이트라고 좋아하더니 정작 하는 건 공원에 앉아 샐러드 먹기라 8년의 연애 동안 알아낸 당보의 취향을 재정립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뉴욕을 상징하는 관광지이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라는 것은 별개로, 제가 아는 당보는 소박한 듯 보이면서 고급스러운걸 찾는 아주 까탈스러운 녀석이었다. 아무리 맛집이라 하여도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고급품이라 하더라도 취향이 아니면 내치는, 그런 놈이란 말이다. 그러면서도 사진으로 남기는 건 좋아해 지 맘에 안 들어도 모델로 저를 세워놓고선 즐거웠다 말하는 바보기도 했고, 배우답게 뮤지컬이나 영화에 감동하는 귀여운 면이 있기도 했다.

"여유롭고 좋지 않아요?"

"브로드웨이나 타임스 스퀘어 같은 곳 가자고 할 줄 알았다는 뜻이야. 여기 무슨 박물관도 있고 자유의 여신상도 있고 그렇다며."

"그쵸. 전망대도 많고,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많아요. 궁금해요? 형님 취향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 네 취향이지. 구경하고 사진 찍고 그러는 거 좋아하잖냐."

청명은 당보가 집어준 방울토마토를 받아 먹었다. 샐러드만 먹고 사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과일도 챙겨 먹는 모양이었다.

"음... 형님 언제 귀국하는데요?"

"진이가 말 안 했나? 너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저 폰 수리 맡겼어요. 그래서 못 받았나 봐요."

"... 언제?"

"형님이랑 헤어진 날이요. 그대로 와인에 퐁당 빠트렸거든요."

와... 다행이다. 청명은 주스를 벌컥 들이켜 바싹 타들어 가던 속을 진압했다. 어쩌다 와인에 빠트리게 된 건지 열심히 설명하는 당보의 말보다 혹시 내가 싫어서 차단했었나 하는 생각이 떠나가도록 두는 게 훨씬 급했다. 제 연락을 받지 않는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진이의 연락도 받지 않아 얼마나 당황했는지. 하마터면 스토커로 잡혀갈 뻔한 상황이지 않은가.

"왜요? 차단한 줄 알고 쫄렸어요?"

당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청명의 반응을 살폈다. 궁금해하는 것 같아 설명해 줬더니, 혼자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게 꼭 안도한 사람의 모습이라 상당히 재미있었다.

"내 입장을 생각해봐. 안 놀랄 수가 있나."

"전 안 놀랄 것 같은데요?"

잘못 들었다는 듯 청명이 당보를 응시했다. 그 상태로 뭐? 하고 되물으면 안 놀랄 것 같다고요. 하고 대답까지 하니 어이가 없었다. 이게 미쳤나? 갑자기 이별 통보를 받고도 안 놀란다고?

황당한 청명이 말을 잇지 못하자 당보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큽... 하고 몸을 떨었다. 그제야 청명은 장난이었구나 하는 안심과 그에 상응하는 짜증을 담아 주먹을 머리에 박아주었다.

"아!"

당보는 맞은 자리를 감싸 안았다. 하도 오랜만에 맞아서 눈물도 찔끔 나오는 것 같고, 멍이 든 것도 같았다.

"안 놀란다는 사람이 술에 그렇게 취해서 전화를 하냐?"

내가 취하고 싶어 취했나? 먼저 이상한 사진 찍어놓고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한 게 누군데.

"평소에 잘 해줬으면 그런 오해도 안 하죠! 전화 거는 법은 알아요? 문자 보내는 법은 아시냐고!"

"네가 뭘 하고 있을 줄 알고 전화를 걸어. 시차만 13시간인데."

"녹음을 보내주면 되잖아요. 아니면 영상을 찍어주던가."

"그래서 스토리 올려주잖아. 뭐 하는지, 누구랑 있는지. 그걸로 다 확인할 수 있으면서 뭘 더 바래."

"형님은 내가..!"

당보는 내가 하자고 해서 하시는 거냐고 추궁하려던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귀찮으면 하지 말던가 하는 말도, 내 생각을 할 순 없는 거냐는 말도 전부 목 너머로 삼켰다.

당보가 챙겨온 돗자리는 성인 남성 두 명이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워있어도 가운데 한명 더 누울 수 있을 만큼 커다랬다. 이걸 깔 때만 해도 도시락도 먹고 낮잠도 자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같은 이야기나 하며 하루를 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화를 내다 말고 됐다며 돌아눕는 당보를 그대로 두었더니 한 시간 내내 이 모양이다.

"에휴.."

청명이라고 이런 상황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에 미국으로 건너올 만큼 사랑하는데 이런 상황을 반길 이유가 있겠는가. 다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해결되기엔 반년 동안 쌓인 게 많았고, 물리적인 거리가 사라진 지금 불만을 토로할 상대는 눈앞에 있어 되는대로 말을 쏟아내다 보니 이 꼴이라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난... 그걸 형님 목소리로 듣고 싶었어요."

갑자기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청명은 바깥을 향해있던 몸을 안쪽으로 돌렸다. 팔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자리엔 긴 갈색 머리가 흐트러진 뒷모습이 있었다.

"영상통화는 한 번 하면 끝이지만 녹음이나 동영상은 다르잖아요. 언제나 생각날 때 들을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스토리도 좋지만 그건 24시간 후엔 사라져서 가끔은 놓친단 말이에요. 다시 볼 수도 없고.."

당보가 몸을 돌리자 훅 가까워진 거리에 청명이 몸을 움찔 떨었다. 이젠 팔을 뻗으면 당보의 어깨 정도는 감쌀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어딜 갔는지, 밥으로는 뭘 먹었는지, 내 생각은 났는지... 그런걸 형님이 전화로 이야기해주길 원했어요. 그럼 하루를 보내면서 오늘은 이걸 말해줘야지, 저걸 알려줘야지 같은 생각도 해줄 거고, 내 하루는 어땠는지 물어봐 주고, 시간이 늦어지면 잘 자라고 말해줄 거 아닙니까. 우리가 같이 살 때처럼."

청명이 한쪽 팔을 옆으로 벌리고 하늘을 향해 몸을 돌리자 당보는 냉큼 청명의 팔에 머리를 벴다.

"근데 그건 귀찮아 할 것 같아서 스토리를 올려달라고 한 거에요. 그렇게 해서라도 형님의 하루를 알고 싶었거든요."

"말이나 해보지 그랬어."

"그러게요. 그땐 안 해줄 것 같아서 그랬는데 물어는 볼걸 그랬나 봐요."

"내가? 해줬을걸."

"그냥 문자도 안 보내면서 말은 잘하십니다."

삐죽 내민 입술에 청명이 제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럼 입술이 쏙 들어가는데 그게 또 귀여워 입을 맞추고, 두 번으론 아쉬워 또 입을 맞추면 찡그린 얼굴은 어디 가고 부끄러운 듯 눈을 피하는 당보가 있었다.

"스토리 매번 올렸잖아. 전화도 안 받은 적 없을 거고."

스토리야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올라왔으니 그렇다 치고, 전화는 어땠나 생각해보면 제가 언제 걸어도 청명의 응답이 있었던 것 같긴 했다. 저녁이나 새벽은 청명의 주 활동 시간이니 받을 만한데 이른 아침에도 목소리 듣고 싶다 전화를 걸면 그것 또한 받고는 열심히 하라고 말을 해주던 것이다. 언제나.

"어... 그러네요? 다 받아줬네?"

"그래. 다 해준다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던 당보는 머릿속으로 지난 반년 동안의 연락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문자는 텀이 있긴 해도 하나를 보내면 늘 하나 이상이 보내졌고, 사진을 보낸 날에는 얼굴은 아니더라도 신체 일부가 담긴 사진을 보내왔었다.

"매일 자기 전에 셀카 보내달라고 하면 해줘요?"

"그 정도야 그냥 하지."

가끔은 누구랑 있다거나, 술을 마신다고. 그래서 연락이 늦을 수 있다고 보내기도 했고.

"어디 갈 때마다 알려달라고 하는 건요?"

"지금 스토리로 하는 게 그거 아니냐?'

내가 언제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꽃을 사 장식해둔 것도 모자라 좋아하는 영화를 기억하고, 동생이랑 보러 가고.

"내가 생각 날 때마다 꽃을 사달라고 하면?"

"꽃집을 차리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와아아.. 정말? 내가 아는 형님 맞아? 당보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청명을 올려보다 눈이 마주치자 금방 고개를 가슴에 파묻었다. 저는 손끝을 보다가 멀리 푸른 하늘을 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머리카락 끝만 만지고 있길래 형님도 나처럼 딴청을 피우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형님, 나를 그렇게나 사랑해요? 이렇게 이상한 고집을 부려도 깨물어 주고 싶다는 얼굴로 볼 만큼? 헤어지자는 말에 달려와 주길래 아직도 사랑하는 건 알았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항상 내가 더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난 영원히 형님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요. 진짜 어떡해. 너무 좋다..

"왜.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

당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사실 청명도 알고 있었다. 대답이 싫은 게 아니라 좋음에 가까워 이런다는 것을. 얼굴을 보지 않아도 타오를 것 같은 귀와 점점 뜨거워지는 가슴은 당보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형님이 절 너무 사랑해서 부끄러워요..."

"뭐 그런 것 가지고."

청명은 픽 웃으며 당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고 어두운색의 머리는 빛을 받아 은은한 갈색으로 비쳐 청명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쳐 지났다. 우리가 이렇게 한가하던 적이 있었나. 선수 시절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느라 제대로 된 데이트는 없었고, 대회라도 나가면 선수와 팬의 입장에서 만났지 연인다운 무언가를 하긴 힘들었다. 당보가 촬영에 들어가면 같이 자는 시간조차 줄어 얼굴 보기도 힘들지 않았던가.

아는 사이로는 12년, 애인으로는 10년, 동거한 지는 7년. 난 앞으로의 미래에도 네가 있으면 좋겠는데. 넌 어떨지 모르겠다. 우리 반지도 있고, 서로 상견례도 이미 했잖아. 뉴욕은 동성혼도, 하루 만에 결혼하는 것도 가능하니까. 나는 지금 이대로도 좋지만 네가 모두에게 축하 받고 싶다면 그것도 좋다. 반지도, 프러포즈도 뭐든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러니 당보야. 나랑...

눈을 깜박이자 어느새 고개를 들고 있던 당보가 부드러운 미소로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지?

"형님."

".... 어."

목이 막힌다. 아름다운 저녁 하늘 때문인지,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인지 눈이 차츰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입가를 가려 속삭이길래 잘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면

"만약에 영상통화로 자위해달라 하면 해주실 거예요?"

"..... 미쳤나?"

감동이고 뭐고 죄다 날려버리는 말에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남은 건 배를 부여잡고 웃는 당보 뿐이었다. 구를 듯이 웃다가 이젠 훌쩍이기까지 하는데 넋이 나간 청명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양 볼을 부여잡고 환하게 웃는 것이다.

"형님이 너무 진지하시길래 농담 좀 한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애인이 보고 있는 것도 몰라요?"

"하..... 너는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들을 사람도 없어요. 지금 다들 정리 중이라 바쁘거든요."

당보는 눈부신 주황빛 하늘을 뒤로하고 아직도 멍한 청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노을 때문인가 싶어 가려주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눈을 찌푸리는 게 제대로 가리지 못한 듯 보였다.

"우리도 갈까요?"

청명의 눈동자에 당보가 한가득 차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 청명은 자연스레 깨닫는 것이다. 네가 날 만나서 다행인 게 아니라

"보야."

"네?"

내가 널 만나서 다행이라는 것을.

"우리 결혼할까?"

"뭐, 뭐에요 갑자기."

대답으로 보기 애매한 말에도 청명은 당보의 손을 잡고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방울토마토보다 새빨간 얼굴엔 손으로 가려도 숨겨지지 않는 기쁨이 묻어나왔다.

"여기선 혼인신고만 하고, 돌아가서 뭐든 해줄게. 식이든, 반지든. 네 남편 능력 좋은 거 알잖아."

"저도 능력 좋거든요? 지금 받는 출연료가 얼만데, 아니. 이게 아니라.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요."

"오늘 같이 있었잖아."

청명은 맞잡은 손에 있는 은빛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논란이 생길까 목걸이로 끼고 있는 저와는 달리 패션이란 핑계로 끼고 있는 반지는 안쪽에 저와 당보의 이니셜이 새겨진 커플링이었다.

"그냥 이렇게. 앞으로도 너랑 함께하면 좋을 것 같아서."

"....."

당보는 청명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맞잡은 손만 멍하니 봤다. 분명 좋고 설레는데 걱정도 있고, 불안감도 있어서 섣불리 대답을 내뱉을 수 없었다. 난 미래에 대한 아무 계획도 없는데, 덥석 수락했다가 후회하면 돌이킬 수도 없잖아.

"...만약에 제가 싫다고 하면, 우린 여기서 끝이에요?"

"결혼 안 하고 평생 살면 되지."

"형님은 미래 계획이 있으실 거 아니에요. 은퇴하긴 했지만 코치라던가, 감독이라던가 그런 쪽으로.."

"없는데?"

"네?"

"계획 없다고. 진짜 너 없으면 안될 거 같아서 결혼하고 싶은 거야."

한참을 생각하던 당보는 청명의 손을 힘주어 잡고 떨리는 마음으로 청명과 눈을 마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충동적인 대답보다 조금이라도 정돈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식은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커다란 호텔 예식장에서 형님 가족이랑 선수분들 모시고, 저도 가족들 모아서 크게 축하받고 싶어요."

"응."

"반지는 지금 걸로 해요. 대신 형님도 끼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집은 가구 몇 개만 새로 맞췄으면 좋겠고... 아, 인스타에도 우리 결혼한다 알리고, 기사도 내요."

"그래. 그렇게 하자."

"상견례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부모님이 나와주실진 모르겠는데... 형님네 가족분께 제대로 인사 드리고 싶긴 해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상관없어."

"그리고..."

물기 어린 눈을 한 당보는 청명에게 쓰러지듯 안겼다. 당신을 사랑해서 다행이라고, 날 사랑하는 게 형님이라서 정말 행복하다고.

"좋아요. 결혼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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