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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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여름의 절정이다. 열린 창틈으로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들어 작업실 안은 온통 습하고 눅눅하다. 이래서야 악기가 망가지기 십상이겠군, 생각하면서도 살리에르는 당장 그것들을 손보려 서두르지는 않는다. 적당한 시일을 골라 조율사를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지금은 우선 맡은 바 작곡에 충실해야 한다. 살리에르는 한참 동안 내버려 두었던 깃펜을 집어든다.
스테이지를 점검하던 ‘그’는 불현듯 느껴지는 기척에 눈살을 찌푸린다. 주역이 등장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고,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불유쾌한 예감은 평범한 인간에게서 비롯될 수 있는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몇 없다. 그는 귀찮은 표정으로 한 마디 뱉는다. “나오시죠.” 그러면 까만 중절모를 눌러쓴 청년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태연
창밖으로 길다란 인영이 추락한다. 곧이어 요란한 파열음이 들리고, 선잠에서 깨어난 백작은 흔들리는 커튼 너머를 흘끗 쳐다본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살피는 대신 이불을 도로 뒤집어쓸 뿐이다. 졸지에 자살 명소가 되어버린 성벽에 붉은 얼룩을 덧칠한 이는 아마도 최근 며칠을 함께 보낸 남자였을 것이다. 보름이 되기 전에 죽어버리다니, 운이 좋기도
가진 중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서, 악장은 마지막으로 크라바트를 단단히 동여맨다. 손끝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자꾸만 어그러지는 매듭을 온전하게 되도록 몇 번이나 고쳐 묶은 뒤에야 그는 거울 앞에서 물러난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긴 듯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비록 육신은 이미 늙어버렸을지언정 삶의 마지막 날을 추레한 모습으로 맞
아직도 비 오는 날만 되면 악몽을 꿔. 침대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잘 자고 있다가도, 문득 눈을 뜨면 코앞에 그 애 얼굴이 보이는 거야. 그럼 난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어나려고 애를 쓰지. 근데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가 없어. 차가운 그 애 손이 흉터가 선명하게 남은 목덜미를 매만져도, 그러다 가엾다는 듯 애틋한 미소를 지어보여도. 난 입도
자장가를 불러 줄래. 그러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사랑스러운 질투에게 애걸한다. 희멀건한 낯 위로 그늘이 지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떨리는 손을 뻗어 잔뜩 찌푸려진 질투의 미간 사이를 꾹꾹 눌러 본다. 널 이해하지만 사람은 오래 잠들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걸. 내가 백조의 노래를 완성하기 전에 떠나길 바라는 건 아니잖아. 협박
1 당신을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곧 나의 모든 충동과 욕망의 대행자이고, 실재하지 않는 환영이며 잘못을 부추기는 사념임을 알기에. 피하고 부정하는 것만이 옳다고 여겼었지요. 그러나, 이제…… 더는 당신이 두렵지 않아요. 곧은 시선이, 거울에 비친 청년을 향한다. 맑은 암갈색 눈동자는 깊이를 증명하듯 흔들림 없다. 뒤편에 홀로 선 그
음악에게, 라고 쓰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제가 당신의 음악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따져 본다면 기실 ‘당신의 음악’은 나 아닌 모차르트였을 테니까. 그래도 이 편지는 당신에게 어떤 책임을 묻거나 힐난하기 위함이 아니니, 마음 편히 읽어 주시길. 무슨 말부터 꺼내는 게 좋을까요. 계신 곳은 마침내 평안한가요. 끝내
당신은 여전히 잠들어 있다. 잠으로 도망치는 당신을 차마 쫓아가지 못해 나는 다시 혼자다. 그렇다면 차라리 당신이 노래하던 슬픔을 대신 부르고 싶었는데, 부정(不淨)은 나눈다고 해서 도무지 덜어지지 않는 것이라. 하지만 당신에게서 해로운 것들을 빼앗아 오기를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나의 일이니까. 당신 나쁜 결심을 대신 매듭짓는 것. 너무
그는 깊이 잠든 여왕을 본다. 찡그린 미간 사이에 맺힌 식은땀.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흐르는 고통의 신음. 자신을 끌어안느라 굽어진 팔의 모양과, 한껏 웅크린 등허리의 곡률을. 차라리 반갑지 못한 얼굴이다. 두려움이 불쑥 앞선다.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직감이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 얼마 만에 만나는 거죠, 아가사. 당신이 아프지 않고도 날 찾아올 수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었으나, 내가 입술을 열어 빛이 있으라 말하니 빛이 있었고. 그러나 그 빛이 과연 내 보기에 좋았던가? 어둠은 황폐한 대지를 내려다본다. 드넓을 뿐 척박했다. 깎아지른 절벽 위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사방이 고요하다. 사방이 온통 암暗이었으므로 그는 스스로 얼마 만큼의 높이를 딛고 섰는지 짐작하지 않았
꿈 속의 그는 항상 말이 없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며 속을 뒤집던 그인데, 창백한 몽중에서라면 이상하리만치 입을 가만 다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알 수 있다. 아, 내가 또 꿈결을 헤매고 있구나. 안개로 뒤덮인 자작나무 숲은 온통 희붐하다. 눈과 얼음이 발밑에서 박살난 유리의 파편처럼 으깨진다. 그는 지척에 비딱하게 서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