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더데빌 (성/찬)

underwater by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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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었으나,

내가 입술을 열어 빛이 있으라 말하니 빛이 있었고.

 

그러나 그 빛이 과연 내 보기에 좋았던가?

 

 

 어둠은 황폐한 대지를 내려다본다. 드넓을 뿐 척박했다.

 깎아지른 절벽 위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사방이 고요하다. 사방이 온통 암暗이었으므로 그는 스스로 얼마 만큼의 높이를 딛고 섰는지 짐작하지 않았다. 수천의 검은 층계가 그의 발아래를 지탱하고 있었다. 한 발짝 나아가면 끝없는 깊이의 내부로 추락하게 될까. 혹은 중력마저 희미한 이곳을 영영 떠돌게 될까. 어느 쪽도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어둠은 안팎이 뒤집혀 공간을 분별할 수 없는 이 허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저와 닮아 있다 여겼다. 그러니 이토록 빈 땅에서 시간을 영영 허비하는 것조차 헤매임 아닌 기다림일 뿐이었다. 태초의 암흑은 오래도록 공중을 거닐었다. 때로는 무게를 가지고 낙하했고, 때로는 허공 그 자체가 되어 부유했다. 그는 아주 무료했다. 그가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그것은 어둠을 지켜볼 뿐 말이 없었다.

 그 둘은 언뜻 대등했고 또 서로를 모본하였다. 그들 중 누구도 바깥의 일에 간섭할 수 없었다. 부름 없이 나타나지 못했고 믿음 없이 섬김받지 못했다. 무용한 힘이, 힘이었던 것이, 나락의 밑바닥에 아득하게 고여 썩었다. 이후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둠이 먼저였다는 사실이 부질없어질 만큼. 둘은 이제 너무 오래되었다. 인간들은 옛 존재를 쉬이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둘의 존재는 영속되었다. 달라지는 것 없이, 나아지는 것 없이. 어둠은 노력했고 그것은 가끔 보답받았다. 그러나 빛은 항상 제 자리에서 묵묵했다. 시선, 인간들을 지켜보는 그 눈길은 주시였다가, 관조였다가, 결국 관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 번도 어둠을 향했던 적 없다. 둘은 친애를 나눈 적도, 싸움을 벌인 적도 없이 다만 존재했다. 어차피 둘뿐이다. 둘뿐이었고, 둘뿐일 것이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내가 만든 당신은 나를 인지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어둠은 저 멀리 흰 점으로 낙오된 빛을 끝없이 미워했다. 그마저도 일방향으로 흐르는 증오에 불과했다.

 빛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언제고 기억나지 않는 먼 옛날부터. 그는 그런 모양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용한 충돌을 방지하고자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으나 그런 배려는 둘의 쓸모만큼이나 부질 없는 것이었다.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부속물에 불과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여분의 선택지에 지나지 않는 존재들. 고전적인 신앙을 세우기에 인간들은 너무 바빴다. 그들에게는 더 유용한 신이 이미 있었다. 인간의 생은 순간 찬란히 타오르다가도 덧없이 스러지고 마는 것. 그들은 너무 쉽게 태어났다. 그만큼 쉽게 죽었다. 모두가 끝에는 죽었다. 끝에 이르지 못한 인간들도 죽었다.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의미도 없이 그들은 죽었다. 그즈음엔 사방이 붉었다.

 영원히 붙박여 있을 것만 같던 빛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높은 곳의 어둠이 때맞추어 거종(擧踵)하였다. 갈급한 낯이 처음으로 어둠을 향했다. 그는 전율했다. 말아쥔 손 끝이 떨렸다. 한 점 더럽힘 없는 맑은 눈빛이 전신을 꿰뚫는 것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더 남은 긴긴 세월 동안, 이 최초의 순간을 그리워하게 되리라. 어둠은 직감했다.

 

 빛이 말했다. 나와 내기를 하자.

 어둠은 망설임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기회라고 생각했다.

 

 빛은 어둠을 원망하지 않았다.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저 인간들을 바라다보며 슬퍼할 뿐. 어둠은 마침내 세워진 자신의 성소에서 그것을 관망하며 붉은 열매들을 삼켰다. 인간은 본래 어둠의 권세 아래에서 태어난 족속이니 앞으로도 자신의 승리가 거듭될 것이라, 어둠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오만은 이후 수천 년간 궤변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은 언제나 더 편리한 선택지를 골랐다. 그들에게는 빛도 어둠도 논외의 이야기, 마음대로 쓰거나 버리거나 변덕을 부릴 수 있었다. 어둠은 이를 갈았다. 더 큰 권능을 가지고 말겠노라 분노했다. 인간들은 때로 번성하고 때로 몰락했으며, 빛은 그사이 끊임없는 내기를 제안했다. 의미를 몰라도 거듭되는 게임. 어둠은 그것을 거절한 적 없었으나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것처럼 수없는 과정을 반복하는 빛이 의심스러웠다. 그보다 스스로 빛을 모른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창조주라니. 그러나 둘은 이미 너무 오래되었다. 무한과 무한의 길이를 대어 보는 일에는 소용이 없었다. 어둠은 이러다 흑백의 순서조차 뒤바뀔까 염려했다. 그들이 흑과 백 아닌 암(暗)과 명(明)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빛을 비추면 당연스레 그림자가 생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빛이 먼저라고. 심지어는 빛이 어둠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이라고. 어둠은 자신을 더없이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빛이라는 사실을 저주했다. 운명을 넘는 무엇으로 엮인 닮은꼴을. 당신과 나는 서로의 불가역입니다. 어둠이 말했다. 하찮은 인간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꼴이라니. 그 노력이 우리를 더욱 갉아먹고 있음에도. 빛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 하나, 그는 인간을 사랑했다. 억겁의 시간 동안 고독할지언정 사랑을 멈출 수는 없었다.

 

 무엇이 과실수를 열매 맺게 하는가.

 온전히 자라나지 못해 기괴한 모양새로 뒤틀린 고목들. 썩은 가지가 곳곳에 뼈처럼 나뒹군다. 죄는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으나 어느 때에든지 죄를 범하지 않고 사는 인간이 없었다. 어둠은 언제부터 나쁘고 해로운 것으로 치부되었는가. 어둠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타락과 해악이라는 이름은 인간들 눈에 더 잘 띄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더럽고 끔찍한 것들의 주인이기를 자처했다. 죄는 어둠의 양분이 되었다. 마침내 나무가 자랐다. 검고 윤 나는 껍질이 마치 뱀의 그것 같았다. 빛처럼 흰 꽃이 피었고, 피처럼 새빨간 열매가 맺혔다. 어둠은 어쩌면 그것이 저를 모르는 빛보다, 자신이 모르는 빛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가지에서 붉은 열매를 하나 딴다. 탐스럽고 향기로운 그것은 완벽한 둥글기로 손 안에 쥐어진다. 곧 상쾌한 파열음이 잇새에서 바수어진다. 맑은 과즙이 창백한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달콤한 쾌락이 혓바닥을 타고 스며들었다. 이것은 마치 중독. 인간들을 돌보려, 제 권세를 거두려 애쓰는 빛을 보며 느끼는 것과도 비슷한 울렁거림과 짜릿함이. 어둠은 열매를 다시 한 번 베어물었다. 파삭. 단 냄새가 공간을 메운다. 먼 시야에 새하얀 티끌 한 점이 걸린다.

 

 내기는 지속되었다. 어둠은 가끔 승리했고, 빛은 다만 눈물을 흘렸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고려되지 않았다. 둘뿐이었고, 둘뿐일 것이었다. 영원히 황폐한 이 땅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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