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성

슬램덩크 정대만 드림

심해 by 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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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현주는 구룡성 내에서 제법 유명한 축에 속한다. 아무렴, 밖에서 촉망받던 발레 선수가 스스로 구정물에 발을 담근 거나 다름없었으니 당연한 유명세였다.

약 오 년 전쯤 세계적으로 천재라고 혀를 내두르며 칭찬하던 발레리나 하나가 잠적하는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슬럼프다 부상이다 하며 온갖 기사와 소문을 내고 다녔으나 그것도 잠시, 더 자극적인 뉴스로 인해 그 일은 잊히는 듯 했다. 그리고 발레리나의 팬들조차 행방을 수소문하기 지쳤을 무렵 그녀는 소리소문없이 구룡성 안에 나타났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것처럼 절뚝대는 걸음을 한 채였다.

암만 소문이 가라앉았다고 해도 원체 유명인이었던 사람이다. 서문현주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순식간에 구룡성 내에 퍼져나갔고,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서 정보를 살 수 있다는 소문 또한 퍼져나갔다.

서문현주는 제법 질 좋은 정보를 팔았다. 가격을 제시하기만 하면 그것에 상응하는 것들을 보따리 안에서 술술 풀어내니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녀가 거주하는 곳은 거의 불가침 구역이 되었다. 자신의 약점도 상대의 약점도 쥐고 있는 정보상은 여러 군데에 연이 닿아 있었고, 그들을 죄다 무시한 채 정보를 독점하기엔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는 수월하게 녹아든 채 삼 년을 보냈다.

 

구룡성엔 하루에도 몇 명씩 신분 없는 사람들이 새로 생겨난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을 아예 싹 갈아엎은 사람이던가, 혹은 어딘가에서 도망쳐 이름 버린 사람들이다. 얼마 전 만춘회晩春會에 새로 들어와 말단 취급 받는 미츠이도 그렇다. 밖에서는 농구선수 하다가 이곳저곳 빚을 많이 져서 아주 도망쳐 왔다고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얘기하는 꼴이 어리숙해 보이긴 해서, 조직 내에서도 거의 잡일 처리나 맡으며 행동하는 잡일꾼에 가까운 처지였다.

그날도 미츠이는 큰길에서 세 번째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곳에서 정보를 들고 오라는 심부름을 받은 참이었다. 어느 큰길에서 어느 골목인지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거 아냐. 잔뜩 찡그린 얼굴로 입술을 비죽이며 툴툴대는 모습이 제법 불만족스러워 보인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미츠이의 귀에 스쳐 지나간다.

정보상을 찾니?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멀대같이 키만 크고 비쩍 말라 보이는―전적으로 미츠이의 생각이다.―여자였다. 볼 것도 없어 보이는데 몸에 딱 달라붙는 짙은 초록색 치파오를 입은 채 한 손에는 기다란 담뱃대 하나를 들고 있다. 미츠이와 시선을 마주친 여자는 느릿하게 담뱃대를 입에 물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허공을 한 번 쳐다본 채 잇새 사이로 연기를 뱉어냈다. 얼굴이 희끗희끗하게 가려진다. 미츠이는 그 자리에 짝다리를 짚고 서 퉁명스레 질문에 답한다. 그래. 어떻게 알았냐? 한참을 연기 속에 뒤덮여 말이 없다. 기다리다 지쳐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를 뜨려 하는 미츠이의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보는 듯하더니 그제야 문장을 툭 뱉어냈다. 조금 더 안으로 가면 녹색 천으로 가려진 집이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 있으면 곧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 말의 진의를 판단하듯 미츠이의 눈이 날카롭게 벼렸다. 그리고 이내 여자가 말한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몇 분 후, 그는 경악 어린 얼굴로 다시 재회한 이를 바라본다. 장난기 섞인 웃음소리가 여자, 서문현주의 거주지를 한가득 울린다.

 

* * *

 

“나 왔다.”

“밋치. 이번에도 너니?”

“나 아니면 누가 온다고 그르냐.”

 

짧은 대화가 농담조로 흘러 다닌다. 어색했던 첫 만남을 가히 놀라운 친화력으로 날려 보낸 미츠이가 이뤄낸 관계의 전진이었다. 서문현주는 다른 조직은 몰라도 만춘회에 건네줄 정보는 무조건 미츠이를 통해 다뤄지기를 바랐고, 그래서였을까 미츠이는 잡일 처리나 하는 말단에서 벗어나 지금은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는 사람까지 생긴 참이다.

서문현주의 거주지―이자 일터―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종이나 서적으로 가득했다. 미츠이는 익숙한 걸음으로 그것들을 이리저리 피해, 유일하게 빛 들어오는 창가 근처에 의자를 두고 앉은 서문현주의 근처로 다가간다. 근처에 낡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햇빛은 그다지 들어오지 않았으나 그녀는 항상 그 근처에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곤 했다.

창문 활짝 열어둔 탓에 바람이 불면 서문현주의 눈 가린 앞머리가 훌쩍 넘어가 짙은 녹색을 드러낸다. 제법 쌀쌀한 공기에 인상을 찌푸린 미츠이가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둘러주며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정보를 가지고 오겠다며 말해놓곤 두세시간은 넘게 가만히 앉아 서로의 기척을 느끼는 것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특별한 할 말 없는 날의 연속이었기에 그저 밖의 소음을 들으며 차를 마시던가 담배를 태우며 정적을 즐겼으나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게 잘 맞는 사람과 있을 때의 힘인가 싶었다.​

한 날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던 날이 있었다. 자존심 때문인지 안 그런 척 해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서문현주다. 미츠이는 항상 이럴 때면 바지 밑단을 다 적시면서도 우산을 쓰고 걸어와 따뜻한 물수건으로 그녀의 무릎과 다리 근육을 풀어주며 마사지를 해주곤 했다. 신뢰가 없다면 집에도 들이지 않았을 텐데. 비로소 미츠이는 서문현주가 자신을 선 안에 들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녀를 마음에 담았음을 눈치챘다.

 

서문현주의 정보망은 기이하게 빨랐다. 구룡성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아마, 서문현주의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그럼에도 미츠이의 정보가 손쉽게 들어오지 않았던 것에 의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잔잔하게 가라앉은 서문현주의 짙은 녹 빛의 눈동자엔 빛이 들어오지 않아 온통 어두컴컴했다. 그녀의 앞에 널브러진 서류는 온통 미츠이로 가득하다. 몇날 며칠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서부터 시작해 가장 최근 일어난 일까지 상세하게 적힌 서류들이었다. 개중 서문현주의 눈길을 끈 문장은 단연 하나였다. '경찰대 졸업 후 강력계 형사로 구룡성채 잠입 중.' 서문현주는 눈 앞이 새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당연하지. 그녀가 찬란한 곳에서 도망쳐 나와 구룡성 안에 처박힌 이유가 경찰이었는데…….

흔히 말하는 비리 경찰이었다. 서문현주가 속해있던 발레단 단장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대담하게도 제 어머니의 구역 내에서 마약을 팔아넘기려고 시도했다. 항상 늦게까지 남아 연습하던 서문현주에게 들키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커다란 가방 안 가득 담긴 돈다발과 마주 건네어지는 수상한 가방. 남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넘겨야 하는 무언가. 물론 경찰이었으니 이해할 수 있는 범위였으나, 그것들을 주고받으며 한 말은 그 범위에 속하지 않았다. 서문현주는 제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음을 직감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형편없이 뒤틀린 제 무릎을 상기한다. 자연적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을 정도의 각도로 뒤틀린 다리를. 평생을 꿈꿔온 것을 단번에 사라지게 한 그를 회상했다가, 미츠이의 얼굴을 떠올린다. 기만자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서문현주는, 미련하게도 미츠이를 매몰차게 끊어낼 수가 없어서 회피를 선택했다.

 

* * *

 

정대만은 경찰이다. 경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명예롭게 강력계에 신입으로 들어간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처음 맡은 임무는 구룡성채 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마약 밀매를 하는 만춘회에 잠입하는 거였고, 그렇게 서류상의 대충 말소된 신분을 들고 미츠이라는 이름으로 구룡성에 들어갔다.

바깥과 폐쇄된 채 살아가는 공간은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정대만이 다시 경찰로 복귀하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리리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온갖 불법적인 일이 성행하고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는 곳이 구룡성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의 임무는 생각보다 쉽게 흘러갔다. 정확히는, 서문현주가 있었기에 쉬웠다고 하는 게 옳았다.

그녀는 구룡성 내의 온갖 정보를 알고 있었고, 아무 조직에도 속해있지 않았기에 친하게 지내면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여겼다. 정대만은 서문현주를 쉽게 구워삶을 수 있었다. 아닌 척해도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여자는 그가 쾌활하게 웃으며 몇 번 허물없이 대해주기만 해도 굳게 걸어 잠근 빗장을 손쉽게 열어주었다. 그렇게 정대만은 서문현주를 사용해 조직 내에서의 기반을 다졌다.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은 그녀를 스스럼없이 친구라고 부르며 가져오라고 시킨 정보뿐 아니라 다른 정보들도 얻어 오니 조직은 그를 더 이상 일개 잡일꾼으로 취급할 수 없게 됐다.

장담컨대, 처음엔 그저 이용 가치 있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첫 만남은 계획적이지 않았더라도 그 뒤의 만남과 대화들은 계획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서문현주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이나마 알게 된 뒤로는 임무를 조금 더 수월케 처리하려는 생각으로 마음을 얻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 선택이 제 감정조차 수렁으로 떨어트리게 한다는 걸 빨리 알아챘어야 했다.

애초에 정대만 역시 온기에 약함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서문현주는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고……. 정대만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의도와는 다르게 서문현주에게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대충 말소된 신분 속 대충 지은 이름인 미츠이가 아니라 지금껏 제가 살아온 나날 속 이름을 알려주고 싶어졌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그리고 네가 이곳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하고 살며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생각은 길지 않았고, 정대만은 곧 서문현주를 찾아 나섰다. 그 시점 이미 서문현주가 회피를 선택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였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서문현주의 치맛자락 하나 제대로 보기 어려운 기간이었다. 처음엔 바쁜가 싶어 다음날에 와야지, 했고 다음 날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자 신경 쓸 시간이 없나보다 싶어 쪽지를 남겼다. 연락은 오지 않았고 점점 초조해져만 갔다. 일주일 정도야 말없이 사라진 적이 잦았기에 이번에도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짐짓 심각해진 얼굴로 정대만이 턱을 짚었다. 아주 못 봤더라면 바쁜가 보다 하고 넘길 수야 있었겠지만 서문현주는 나 지금 당신 피하고 있다는 티를 내며 자리를 옮겨대고 있었다. 오죽하면 그를 형님이라 불러대던 놈들이 정보상과 싸우셨냐 물어볼 지경이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쉰다. 더는 못 기다려 주겠다. 서문현주가 나다니는 곳은 한정적이었으니 그중 한 군데에서 잠복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서문현주는 며칠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정대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화들짝 놀라 자리를 벗어나려는 걸 잡아 제 품에 안아 결박했다. 아니나 다를까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길래 이를 악다물고 중얼댄다. 현주야. 피하지는 좀 말아라. 아니면 날 보기 싫어졌다 얘기라도 하던가. 그러면 서문현주는 눈에 띄게 얌전해져서는 입을 앙다무는 것이다. 정대만은 그제야 안도하며 제 품에 안긴 서문현주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고 비비적대며 물었다.

 

“현주야. 내가 싫으냐?”

“…….”

“야……. 암만 그래두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야지 사람 걱정하게 왜 피해 다니고 그러냐.”

 

정대만의 품 안에 빈틈없이 결박된 서문현주는 여전히 말이 없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표정을 살핀 뒤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제 불만만 내뱉는다. 사람 많이 돌아다니는 거리에서 이러고 있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보지. 꽤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다가 서문현주의 다리에 힘이 빠진 듯 조금 비틀대자마자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자리를 옮기는 정대만이다.

곧 서문현주는 익숙한 공간에 도착해 정대만의 손에 제 다리를 맡긴다. 비가 오는 날이면 흔히 받아왔던 손길이다. 발목을 삔 것도, 다시 통증이 도진 것도 아닌데 제 것 대하듯 조심스럽게 힘을 주는 게 보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가슴이 울렁댄다.

몇 번이고 집어삼킨 말임에도 속이 불룩하게 갑갑한 느낌에 뱉어내고야 만다. 사랑해. 가슴 안쪽이 단단하게 옥죄인다. 그를 피해 다니던 사이 평생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말이었고, 설사 전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형태를 원하진 않았다. 만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보기 흉한 꼴이 되어있을 게 뻔하다. 정대만은 고개를 숙인 탓에 굳게 다물린 입술만 서문현주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사이로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스스로의 팔을 손톱으로 긁어 상처를 낸다.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는 생각과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듣고 편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서로 공존해 머리가 깨질 듯이 아려 온다.

정대만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낯빛 새하얗게 질린 서문현주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들려온 소리를 맞게 들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절로 나온 행동이다. 그 와중에도 손톱으로 긁어대는 팔을 기가 막히게 알아본 채 제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모아 잡는다.

사랑한다고 했다. 서문현주가. 정대만을.

서문현주가 정대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새하얗게 질린 낯빛과 대비되게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대만은 더듬더듬 답한다. 여전히 손은 잡은 채였다. 덜덜 떨리는 제 손이 꼴사납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내게 시간을 다오, 현주야. 사, 아니. 일주일이면 된다.”

“……일주일이라고.”

 

서문현주는 조금 전과는 달라진 낯으로, 그러나 더욱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손 덜덜 떠는 정대만을 차갑게 내려다본다. 일주일 전 그에 대한 받았을 때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정대만은 경찰이고, 구룡성 내 만춘회에는 잠입을 위해 왔으며, 서문현주에게 접근한 것도 아마 계획에 따른 것이었을 테다.

그는 사라질 사람이다. 일주일이라고 했던가. 서문현주는 절로 표독서린 얼굴이 되어 정대만을 노려보았다. 만춘회 내는 지금 큰일이 하나 터져 그것을 수습하려고 안달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정대만은 그 틈을 타 조직을 배신하고 도망쳐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갈 생각이겠지. 서문현주를 버린 채로.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입술이 질타를 쏟아낸다.

 

“대답은 들은 거로 하마.” 잠시 정적이 이어진다.

“나는 너에게 있어 을의 입장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지금 네가 숨기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으마. ……대만아.”

 

언뜻 익숙한 이름이라 반응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정대만은 곧 제가 미츠이라는 이름 말고는 서문현주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새파랗게 질려서는 그녀를 쳐다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감각한 표정으로 돌아온 채 가만히 정대만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부정하려다 입만 꾹 다문 채 그녀의 녹 빛 눈동자를 응시한다. 정대만은 곧 중얼댔다. ……일주일 뒤에 올게. 구룡성 가장 안쪽, 서문현주의 정보들이 가득한 곳에 그녀 홀로 남겨두고 정대만이 떠났다.

어쩌면 평생.

 

* * *

 

약속의 시간이다.

정대만이 오지 않음을 알았다. 일주일 전, 그가 꺼낸 말을 지키지 못함을 한 주 내내 곱씹고 있었다. 그럼에도 멍청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환멸 나서 헛웃음 픽 내보이고 비 잔뜩 맞아 축축한 머리카락 대충 털어내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서문현주다.

제 형태가 아닐 정도로 비틀렸다가 겨우 본래 모습을 찾은 무릎은 이럴 때마다 욱신대며 정상이 아님을 몸 주인인 서문현주에게 피력했다. 성할 때도 절뚝대는 걸음은 더 심해져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 습기 먹어 눅눅한 바닥에 단단한 것이 찍히는 소리가 선연하다.

서문현주는 그렇게 걸어 창문 앞에 몸을 의탁했다. 살벌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고막에 꽂힌다. 기대하지 않음을 결심하고도 비가 오기 전부터, 오고 난 후로도 몇 시간을 기다린 몸은 힘이 빠져 축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긴 몸살을 앓을 것 같았다. 한때 정대만과 함께 앉아있던 곳은 다시 서문현주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지독한 외로움이 사무친다…….

 

잠깐 눈 감았다 뜨니 창밖은 벌써 어둑해져 있다. 잔뜩 젖고도 물기 닦을 생각을 않아 그대로 말라버린 몸은 체온을 빼앗겨 싸늘하게 식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제법 지났겠구나, 하며 멍하니 허공을 쳐다볼 뿐이다. 그 상태 그대로 십 분 정도 흘렀을까, 거칠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비몽사몽하던 정신이 또렷하게 깨어났다.

짜증 잔뜩 섞인 얼굴로 탁자 위에 대충 올려져 있던 권총을 집어 들어 문 쪽을 향해 대충 몇 발 쏴댔다. 위협사격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 웬만한 사람이면 겁 잔뜩 집어먹고 떠났을 테다. 그렇게 생각한 서문현주는 다시 권총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의자에 축 늘어진 채 앉아 눈을 감았다. 얼굴이 따뜻한 것이, 감기에 걸려도 퍽 지독하게 걸린 게 틀림없다. 다만 상황은 그녀가 편히 쉬도록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잠시 멈춘 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더 거친 소리를 내며 쾅쾅댔다. 결국 서문현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권총을 집어 들고 난폭하게 문을 벌컥 열어 조준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비 냄새를 뚫고 코를 찌르는 피와 흙먼지 냄새다. 서문현주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당장 머리에 바람구멍을 뚫어주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은 피와 먼지로 뒤덮여 척 봐도 지저분해 보이는 모습으로 쾌활하게 웃고 있는 정대만이다. 그는 문 열어젖힌 서문현주와 그녀가 들고 있는 권총을 몇 번 번갈아 보더니 금세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이 와중에도 제가 늦은 건 알았는지 서글서글 웃는 꼴로 세 치 혀를 놀린다.

 

“현주야. 데리러 왔다.”

“이 꼴이 다 뭐야.”

“나도 너 사랑하는 거 같은데 같이 가 주지 않겠냐? 여기까지 오겠다고 멀쩡한 무릎도 깨 먹었어. 이제 꼼짝없이 너랑 평생 부축하며 살아야 할 판국이다.”

 

대답도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는 게 얄미워 죽겠다. 서문현주는 답답하게 막혀오는 가슴을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 쿵쿵 두드리며 정대만의 무릎 언저리를 쳐다본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지도 모를 만큼 엉망이다.

서문현주는 정대만이 원망스러웠다. 애초부터 거짓으로 점철된 관계였다. 그것마저 좋다고 저를 버리지 말아달라 외쳤으나 결국엔 버림받았구나 해서, 이 지독한 열병을 앓고 난 뒤엔 그를 아주 잊으리라고 다짐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것이 괴로워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하여 그녀는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정대만이 서문현주를 배신할 일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이 악물고 새어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집어삼킨 서문현주가 정대만의 팔 밑에 제 몸을 욱여넣고 그를 지탱하여 서며 속삭였다. 네 친구들 어디 있니. 그러면 정대만은 제 뜻대로 됐다는 듯 밝게 웃고는 서문현주의 귓가에 힘 다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서문현주가 있는 힘 없는 힘 다 빼가며 정대만을 부축해 지정된 장소로 데려갔을 땐 이미 사람이 가득했다. 그녀는 개중 가장 덩치 큰 남자가 있는 곳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채치수. 정대만이 그녀의 귓가에―정확히는 크게 말할 힘이 없던 것에 가깝다.―속삭인 남자의 이름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정대만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는 이들이 우스웠다. 서문현주가 혹시라도 배신할까 허리춤에 찬 총에 손 올린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온 채치수에게 흔쾌히 정대만을 넘겼다.

그는 손쉽게 서문현주에게 기대어 힘겹게 걸어온 정대만을 부축했다. 정대만은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채치수의 어깨에 제 몸을 거의 기대놓고는 서문현주를 바라본다.

현주야. 너도 같이 가자. 서문현주는 목소리 낼 힘도 없어 공기 가득 섞인 부름이 그렇게 기꺼운 줄 몰랐다. 흐릿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 만면에 가득 번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총성음이 울린다.

고요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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