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클
총 14개의 포스트
겨울의 공기에서는 서늘한 맛이 났다. 누군가 설탕을 쏟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을 가득 채운 푸르고 흰빛마저 정오의 햇살 앞에서는 금빛 테를 머금었다. 삼삼오오 줄지어 높다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가만 올려다보던 치유리가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명소도 아니고 고작해야 동네에 자리한 신사라 여긴 것이 잘못이었을까. 주차하러 떠난 연인은 10분째 감
얘는 티스토리에 있어서 순서가 꼬였는데... 가을 바다 직전 로그네요. 길가에 늘어진 가로수에서는 무거운 소리가 났다. 솨아아, 허공의 수중처럼 깊은 물결음 사이로 매미의 울음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섞여 순간의 화음을 자아냈다. 소란스럽다면 소란스럽고, 감상적이라면 감상적일 축제의 풍경이다. 어지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불빛 속에서 엷은 제비꽃색 눈동자가
하얀 포말이 둥글게 떠올랐다. 뽀그르르─ 흩날리는 거품 사이로 물결이 인다. 짙은 물살 사이로 빛의 조각이 춤을 췄다. 희고 푸르게 빛나는 결정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파랑波浪을 이뤘다. 검푸른 그림자를 지나, 검은 꼬리가 큰 폭으로 흔들렸다. 물살을 가르고, 모난 곳 없이 통통한 몸체가 유려하게 나아간다. 느긋함마저 엿보이는 움직임에 절로 탄성이 튀었다.
꿈과 희망의 낙원은 눈이 아플 정도로 현란한 원색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색색의 풍선을 든 아이들이 잿빛 도심의 기억을 잊은 채, 환상을 논한다. 보드라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바삐 뛰어가는 그들을 어여삐 여기듯, 드러난 살갗과 옷자락 따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퍽 사랑스러운 정경이었으나, 사람이 여럿 모일 때에는 언제나 그렇듯 웃음만이 감돌 수는 없었다.
해변을 빠져나오자 어느덧 파도가 오렌지빛 태양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저녁이라 부르기에는 제법 이른 시간이었으나 우중충한 하늘을 물들이던 오후의 햇살마저 사라지자, 주변은 삽시간에 어둑해졌다. 그러나 길가에 늘어선 가로등과 가게의 빛이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으므로 거리를 거니는 행인들의 낯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재잘거리며 걸음
구름이 드리운 하늘이 잿빛으로 범람했다. 당장에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으나, 바람을 타고 소금기를 머금은 물내음은 공상 속의 바다보다 불유쾌한 데가 있었다. 하물며 여름도, 겨울도 아닌 가을의 바다는 더욱 그러했다. 얼핏 스산한 감이 있는 날씨를 온몸으로 알리듯, 거세게 넘실거리는 파도가 하얀 운동화 앞코를 적시고는 다시금 멀어졌다. 이런 날씨라면
프리지아, 개나리, 민들레. 꽃의 이름을 담을 때면 작고 보송한 꽃잎들이 혀끝에서 춤추는 것만 같았다. 그 이름을 꺼낸 이가 저와 같은 심상을 공유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랬다. 작디작은 소녀였을 시절부터 사랑해왔던 몽글하고도 다정한 빛깔의 이름들에 어찌 질릴 수 있을까. 사르르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바보처럼 헤죽 웃고 있으려니 그
“아키쨩, 잠깐 편의점 좀 들러도 될까요?” 돌연 걸음을 멈춘 여자가 길거리에 놓인 편의점을 가리켰다. 목소리가 담은 언어는 청유에 가까웠으나 치유리의 몸은 이미 편의점 쪽으로 기울은 채였다. 원체 그러한 성정이기도 하였으나 동행인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러던가.” 예상대로 쉬이 허락을 내뱉은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극채
무대 위의 빛을 받아 본 적 있나? 무대는 삶의 가장 뜨겁고 찬란한 일부를 잘라내어, 그것을 진열하는 공간이며 스포트라이트Spotlight는 그 열기를 그러모아 집중시키기 위한 개체였다. 그렇다면 뜨뜻미지근하고 평탄한 삶이기를 간원하는 타니무라 아키토에게 있어, 스포트라이트는 불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의 삶에 허용되는 빛이란 고작해야 한낮의 태양 정도
“보통은 이유를 물어. 그런데 납득시킬 이유가 있는 건 아니라서.” 청보랏빛 눈동자가 데로록 굴렀다. 사내의 갤러리에는 사라진 대학 동기와의 사진 대신, 직장 동료들과의 사진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시라미네 치유리가 아는’ 타니무라 아키토답지 않은 결과였다. 허나 ‘사람들이 아는’ 타니무라 아키토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유가 꼭 필요한가요?
문틈 사이로 더운 바람이 새어들었다. 직각으로 내리꽂히던 햇살은 어느덧 기울은 지 오래였고 거리를 장식한 꽃과 나무 사이로 봄 특유의 산뜻한 향과 빛이 흩날렸다. 잔바람이 치맛자락을 간질이는 가운데, 둥그런 눈동자 안에 밝고 옅은 색채로 가득 찬 길거리가 담겼다. 곤란한 듯 얕게 숨을 흘린 여자가 꾹 쥐었던 손잡이를 놓고 베이지색 플로피햇을 고쳐 썼다.
새초롬한 눈꼬리가 부드러이 휘는 것과 동시에 오페라색 눈동자에 빛이 내려앉았다. “이번엔 만족할만한 대답이 됐어?” 두 사람의 질의응답이 끝날 때면 타니무라 아키토는 종종 이렇게 낯선 표정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기실, 시라미네 치유리는 그의 그런 미소는커녕 질의응답의 마무리 절차조차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으니 그 미소에 담긴 규칙도 이유도
길고 길었던 크레딧 끝에 영화관 안에 불이 들어왔다. 혹여 쿠키 영상이 있을까 싶어 숨을 죽이고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가는 가운데, 여즉 눈물을 훔치기 바쁜 동행인을 보던 남자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만 가자.” “네에….” 짧은 응답과 함께 반쯤 비운 팝콘 통과 음료수를 챙겨 든 여자가 걸음을 옮겼다. 뭉그적거리던 것치고는 꽤 빠른
청남빛 머리카락 사이로 오묘한 빛이 반짝였다. 사람의 성향이 본연의 색채를 따르기라도 하는 것인지 채 몇 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함께 해온 친구는 언제나 차분한 동급생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어주기도 하고. 어째서인지 종종 다른 아이들과 다투고는 하는 모양이었으나… 글쎄? 심하게 다투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