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케어

백야 주치의 용존

단풍 x 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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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는?”

조만간 있을 기물 시연회를 대비하느라 공조사 전체가 한창 분주한 때였다. 그 분위기에 아랑곳 않고 구름을 탄 선인처럼 친히 기관을 방문한 비디아다라 용존께서 지나가는 장인 하나를 붙잡고 악우(惡友)의 행방을 물으셨다.

구름 위 5전사 중 한 명이자 근 삼 백년간 <연맹의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 목록 상단에서 결코 미끄러진 일이 없는 위인의 면전에 대고 백야께서 연구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며 감히 박대를 시도할 만큼 용기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설령 용존에게 그런 명성이 없더라도 공조사 장인들은 그의 방문을 저어하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용존과 대면한 장인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백야가 틀어박힌 장소의 위치를 고해바쳤다. 주위 사람들 또한 누구 하나 그의 경솔함을 나무라지 않고, 되레 높으신 분 들어가시는 길이 쾌적하도록 냉큼 있던 자리에서 비켜서는 배려를 앞다투어 발휘했다.

단풍도 둔치가 아닌 지라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열렬하게 환영하는 장인들의 태도를 피부로 느꼈지만, 딱히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회랑을 건넜다. 만일 그들이 백야의 지시를 우습게 여기는 마음에서 그랬다면 얘기가 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보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초췌하여 당장에 단정사로 실려 가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고 퀭한 눈에서는 절박함마저 엿보였다. 그동안 응성이 얼마나 독하게 염병, 아니, 까탈을 부리며 장인들을 쥐어짰을지 안 봐도 뻔했다.

앞둔 일정이 일정이니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하려는 의욕은 이해한다. 문제는 관대함과 자비가 부재한 그의 인성이다. 천재들이 으레 그렇듯 응성은 평범함을 참기 어려워했다. 특히 그 평범함으로 자신의 시간을 까먹는 인물이 장수종인 경우에는— 서릿발처럼 혹독한 태도를 보였다.

‘지들한테 주어진 시간이 무한에 가깝다고 생각하니 게으르게 굴고, 그 게으름 때문에 수십 수백 명이 모여도 미천한 단명종 하나만 못한 성과를 내는 거다. 그딴 한심한 놈들 뭐가 예쁘다고 곱게 다뤄야 되는데? 당장 엉덩이 걷어차서 쫓아내지 않는 데에 감사해야지.’

응성은 그렇게 주장했다.

뭐 아주 틀린 논리도 아니다. 대문 안쪽에서 내린 걸쇠를 눈짓 한번으로 풀어버리며 단풍은 생각했다. 선주 장수종들은 풍요에게 부여 받은 긴 수명이 저주라고 말하지만 마각의 두려움이 코앞에 들이닥치기 전 그 사실을 진정 실감하여 경계하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선인 흉내를 내면서 도끼자루 썩는 것도 모르고 나태하게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응성의 치열한 태도를 비웃는다. 단명종 백야의 존재를 마뜩잖게 여기면서 누구 하나 그 권위에 도전하려 나서지 않는 것 또한 시간은 자신들 편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에 기인한 것이다. 자존심도 근성도 찾아볼 수 없다. 응성이 성을 낼 만도 했다.

“문 앞에 출입 금지 붙어 있는 거 못 봤어?”

작업실 문을 밀어 열기 무섭게 까칠한 목소리가 단풍의 귀를 긁었다. 작업대 앞에 선 응성은 뒤를 돌아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흰 머리카락 몇 올이 구부린 그의 등에 듬성듬성 드리워져 있었다. 몸에서 기름과 불씨, 매캐한 땀 냄새가 짙게 풍겼다. 온종일 주조실과 설계대 앞을 기계새처럼 오가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을 게 뻔했다.

“봤는데.”

“당분간 바빠서 놀아 줄 시간 없다고 했던 건 까맣게 잊어버리셨고?”

“일 때문에 온 거야.”

“무슨 일.”

응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단풍은 제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사각사각 연필 끝을 깎는 소리, 마음에 들지 않는 도면을 망설임 없이 구겨 던져버리는 손, 짜증 어린 한숨.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응성이 단풍을 돌아봤다. 피로와 검댕이 덕지덕지 묻은 창백한 얼굴에 눈동자만 별을 품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단풍은 잠시 오래지 않은 과거의 치열했던 전투를 떠올린다. 당장 전선에 투입해야할 금 조각상 기계 일곱 기가 자기장 폭탄을 맞고 죄 먹통이 되었을 때. 조각상을 전부 내버리고 플랜 B(단풍은 이 화외지민식 표현이 꽤 마음에 들었다)로 전술을 전환할 판이었는데, 후방에 있던 응성이 호위도 없이 뛰쳐나와선 먹통이 된 기계들을 리부팅하기 시작했다. 기름때로 금세 얼굴이 시커매진 와중에 눈은 시퍼런 빛을 띠고 번들거려서 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 이래서 내가 예비 코어랑 비상재가동 프로토콜 필요하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뇌가 XXX에 달린 자식들, 듣도보도 못한 욕설 십 수 개의 나열과 짧은 푸념이 혼합된 그의 중얼거림도 똑똑히 기억했다.

사태가 정리된 직후 단풍이 운기군을 비롯한 기타 장수종 나부랭이들의 대표로 감사를 표했지만 응성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를 박박 갈면서 ‘배에 기름만 낀 XX 공조사 XXXXX들 이번 프로젝트 담당자 다른 데로 보내든지, 나를 보내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그 XXXX들 별뗏목 닻 대신 매달아서 천외로 사출시켜 버릴 거니까.’라고 했다.

제 친구가 살인을 저지르고 유폐옥에 갇히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단풍은 그의 말을 우아하게 순화해서 책임자들에게 전달했다. 문제의 아무개들은 곧 다른 부서로 전출되었다. 응성은 그날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퍼마시면서 앓던 이가 하나 빠진 것 같다고 했다. 그제야 시원하게 웃었다.

“뭐냐니까. 빨리 얘기해. 나 시간 없어.”

응성의 말이 단풍을 상념에서 끌어냈다. 단풍은 말없이 소매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응성은 그가 내민 환상극 관람 초대권 두 장을 수련 장인이 만든 조잡한 폭탄 보듯 노려봤다.

<영낙천도영걸전: 죄업을 쏘아 떨어트리는 화살>. 초대권에 적힌 타이틀 로고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금박을 씌운 건가. 응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장용 티켓 같은 걸 굳이 실물로 만들 필요가 없는 시대임에도 일회용 물품을 뽑아내고, 이런— 쓸데없는 사치까지 곁들이는 꼴을 보면 배알이 꼴렸다.

“이게 뭐.”

“보러 가자.”

“왜.”

그렇게 안 보일지 몰라도 응성은 나름대로 인내심을 바닥까지 끌어 쓰는 중이었다. 단풍은 이 선주에서 자신의 말을 존중하는 몇 없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오만하고, 말도 별로 없고, 사소하게 사람 성질을 긁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런 녀석이 바쁘니까 당분간 보지 말자는 자신의 통보도 무시하고 찾아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신책부에서 보낸 거야.”

단풍이 설명했다. 그치고는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여전히 불충분했다. 응성은 제 귓등에 얹은 연필을 만지작거렸다. 상부에서 용존에게 환상극 초대권을 보냈다. 단순한 선물? 그럴 리가. 타이틀을 보니 수 천년을 지겹게 우려먹은 <수렵>과 <풍요>의 전투를 또 소재 삼은 눈치고, 전쟁 영웅으로 위명을 떨치고 있는 용존에게 관람을 종용했다는 것은 정치적 선전이 필요하다는 뜻이렸다.

“경원이 녀석한테 가자고 해.”

“회의 때문에 부재 중이야.”

“경류는.”

“수면 부족인 건 확실하군.”

“….”

경류가 어디 그런 장소에 자의로 얼굴을 들이밀 인물이던가? 응성도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뱉어놓고 바로 후회했다. 백주까지 호명하지 않은 것은 이미 그의 일정을 알고 있어서였다.

“하….”

응성은 제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비녀를 쑥 잡아당겨 뽑았다. 숱 많은 머리칼이 꽃잎 퍼지듯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몇 시간짜리 극이냐?”

“두 시진.”

“하여간 장수종 놈들 시간 낭비는…. 기다려 봐. 씻고 온다.”

작업실 바로 옆에 간이 욕실이 붙어있었다. 욕실 출입구 옆에 설치된 나무 칸막이에 지저분한 작업복이 턱턱 걸렸다. 샤워 공간은 불투명한 유리 벽으로 분할해 놓았는데 외부에서 들여다볼 수 없도록 투과되는 빛을 차단하는 기능이 딸려 있었다. 물론 응성은 절친한 친구 앞에서 내외할 만큼 섬세한 인물이 못 되었다. 쏴아아…. 뜨거운 물이 응성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게 보였다. 곧 수증기가 차올라 벽을 희부옇게 물들이고, 그러지 않아도 모호하던 응성의 실루엣까지 꼼꼼히 덮었다.

샤워를 하면서도 응성은 연신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단풍에게는 낯선 가설과 계산식이 대부분이었다. 단풍은 그 말소리를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이국적인 음악처럼 흘려들으며 설계대 주위를 눈으로 훑었다.

예상대로 뭘 먹고 마신 흔적이 전혀 없다. 나부 용존을 주치의로 두는 호사를 누리면서도 의사가 내리는 진단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이런 일에 일일이 성을 내봤자 진만 빠진단 걸 알면서도 단풍은 가벼운 짜증을 느꼈다.


“흐어아아암.”

응성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환상극이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영상 도입부부터 시끄러운 효과음과 음악으로 떡칠을 해놓은 덕분에 그의 하품 소리는 바로 묻혔다. 백 명 남짓한 선주 명사들만 초청한 소규모 시사회 형태의 관람이라 분위기가 꽤 엄숙했다. 채신머리 없는 행동을 하는 남자를 향해 몇몇 관객이 뾰족한 눈길을 보내려다가, 그의 옆에 앉은 단풍을 발견하고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좀 잔잔한 작품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무의미하게 펼쳐지는 이미지의 파노라마를 보는 것처럼 물끄러미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단풍은 생각했다. 화려한 액션 활극을 선보이고자 하는 감독의 야망은 모든 걸 지나치게— 시끄럽게 만들었다. 응성은 극이 시작되고 초반 일 식경 정도를 꾸벅꾸벅 졸다가, 고막에 때려 박히는 와장창 쿵쿵 소리에 못 이겨 다시 눈을 떴다. 단풍은 그가 더 눈을 붙였으면 했다. 하지만 응성은 벌건 눈을 부릅 뜨고 스크린을 노려보더니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단풍은 수첩을 곁눈질했다. 거친 필체와 스케치가 빼곡했다. 응성은 아이디어 노트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일주일이면 모든 페이지가 낙서로 꽉 차서 새 것으로 바꿔야 했다. 단풍의 시선은 곧, 재미도 영양가도 없는 환상극을 열렬히 주시하는 응성의 옆모습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백야 대련 당시에 그가 어땠을지 상상이 갔다.

스크린 안에서는 천궁의 사명을 믿는 주인공이 요란하게 은하를 날아다니면서 <풍요>의 추종자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있었다. 우주에서의 전투라.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 중 하나는 갤럭시 레인저를 상당히 좋아하는 모양이다. 보통은 그 정도의 정보값을 얻는 게 최선일 장면을 보고 응성은 잘도 영감을 받았다.

“그게 뭐지?”

환상극이 끝나려면 아직 한 시진이 넘게 남았다. 단풍은 모처럼 발견한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단풍의 물음은 혜성과 충돌한 우주선의 파열음(쾅! 콰광! 쿠구궁!)에 막혀 응성에게 제대로 닿지 않았다. 그는 아예 좌석 옆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어깨가 맞붙자 그제야 응성이 눈을 들었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가 고작 한 뼘 남짓했지만 응성의 호흡과 맥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게, 뭔데. 아까보다 느리고 크게 입을 움직여 묻자 응성이 대답했다.

저격 보조 팔 보호대.

궁수가 쓰기엔 무거워 보이는데.

화기(火器) 전용이야. 여우족들한테 왜 이런 게 필요하겠어.

그쪽 병종은 수도 적은데 굳이….

앞날을 봐야지, 앞날을.

응성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오늘의 첫 웃음이다. 단풍의 신경이 그 입술에 쏠린 사이에도 응성은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손 떨림을 보정하고,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는 인공지능 기능 삽입. 일견 터무니없게 들리는 아이디어지만 응성의 모든 성과는 그런 유아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단풍은 알아먹기 더럽게 힘든 글씨들을 샅샅이 읽어가며 딴지를 걸었다.

그런 기능을 삽입하려면 무게가 상당할 텐데.

옥조 기판 몇 개 붙이면 되는데 무거울 게 뭐 있어.

코어를 써도 괜찮은 건가?

어떤 점에서?

과열되기 쉽지. 그렇다고 가동률을 제한하면….

성능이 제대로 안 나오겠구나.

응성은 비전문가의 첨언을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평범한 사람의 어리석은 질문은 견디지 못하지만 친구는 예외다. 오히려 그런 참견을 환영할 때가 많았다.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사고를 전환시켜 준다면서.

그걸 두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건데. 경원은 응성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했고 단풍은 뭐가 됐건 특별 취급을 받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크흠, 커흠!”

스케치 몇 장을 더하면서 논의하는 동안 목소리가 너무 커진 모양인지, 뒤쪽 객석에서 누군가 우렁차게 헛기침을 터뜨렸다. 단풍과 응성은 시선을 교환했다. 여기 재미없지. 나갈래? 어, 제발 좀. 무대를 망칠 계획을 짠 아이들처럼 면면에 슬며시 떠오른 얄궂은 웃음.

파지직, 슉, 쿠웅! 약왕을 모시는 악당 조연의 심장에 빛의 화살이 명중함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관람을 방해하던 그들의 뒤통수를 스크린보다 더 열심히 노려보던 사내는 갑자기 모습을 감춘 그들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목 마르다.”

작업실로 돌아오자마자 응성이 말했다. 단풍은 칼같이 대응했다.

“차 가져와.”

“내 주방에는 찻잎 같은 거 안 키워.”

“그럼 그냥 물을 내오든지.”

“또 잔소리냐. 저— 밖에 우물에서 직접 떠와.”

단풍은 주방으로 가는 응성의 뒤에 따라붙었다. 응성은 술 저장고에서 가장 좋은 물건을 꺼내는 동안 그를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빈속에 술은 안 된다는 단풍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술병을 깨먹은 전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몇 번의 사고를 거치면서 용존께서도 학습이란 걸 하셨는지 섣불리 병을 뺏으려고 들진 않았다.

혼자였으면 인스턴트 식품이나 까서 안주 삼았을 텐데. 상대가 상대다보니 상차림에 시간이 좀 걸렸다. 응성은 시들기 시작한 오이를 냉장고에서 꺼내 으깨고 견과류도 좀 볶았다. 조리 중에 몇 개는 슬쩍 집어먹었다. 단풍은 뒤에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먼저 작업실로 들어갔다. 굳게 닫힌 창문을 열어서 환기하고, 책과 잡동사니 때문에 물건 둘 곳 없는 테이블 위를 대충 치웠다. 술과 안주를 들고 방에 들어온 응성이 그 모습을 보곤 낄낄거렸다.

“슬슬 장가가셔도 되겠어, 용존 나으리.”

“시끄러워.”

설계대를 등지고 앉은 단풍의 앞에 접시와 젓가락이 놓였다. 응성은 머리를 고쳐 묶고 외출 전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이거 진짜 좋은 술이야. 구하느라 힘 좀 썼다.”

라벨이 붙어있지 않았지만 단풍은 병에서 풍기는 냄새로 응성이 내온 것이 어떤 술인지 눈치챘다. 인연 명주. 인연경 심해수를 증류시켜 만드는 고급 술이다. 애주가로 유명했던 방호의 명장이 자주 찾았다고 해서 영웅호걸의 음료라고도 불렸다. 외부인들은 단순히 특별한 일을 기념할 때 마시는 술 정도로 인식하는 눈치지만….

“장가는 네가 가야겠군.”

“음. 안주 괜찮지?”

단풍의 농을 요리에 대한 칭찬으로 받아들인 응성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단풍은 그가 내온 술의 기원을 설명해 줄까 하다가 말았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이 일화를 듣고 웃을 기회를 줘야 할 것 같았다.

단풍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 응성이 잔을 들었다. 기대를 숨기지 않은 얼굴로 잔의 내용물을 대번에 제 입에 털어 넣은 응성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니, 이거 맛이 왜 이래?”

이럴 리가 없는데, 하고 한잔을 더 따라 마신 응성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의 눈이 곧 단풍에게 향했다. 이 자식이….

“너 내 술에 물 탔지?”

“….”

“기껏 좋은 술 내왔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에라.”

응성이 젓가락 던지는 시늉을 했지만 단풍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말로 할 때 들었어야지.”

“어휴…. 됐다, 됐어. 너랑 무슨 얘기를 하냐 내가.”

“시연회 끝나고 동천으로 와. 더 좋은 걸 대접할 테니.”

“별로기만 해봐라.”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단풍은 응성의 짜증이 금세 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응성이 김이 빠졌단 얼굴로 수첩을 다시 꺼냈다. 곧 상영관에서 못 다한 토론이 재개되었다. 부실하게나마 뭘 먹은 덕분인지 새로 떠오른 아이디어에 대해 설명하는 응성의 목소리가 한층 높고 빨랐다. 활기찬 심장 소리, 얇은 피부 아래 빠르게 도는 피, 굽이치는 맥박. 단풍은 감각만으로 그의 상태를 관찰하고 새로운 진단서를 썼다. 세 시진 정도 재우고 일어나면 조찬을 함께 할 것. 이후 짧은 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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