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장 전

WORLD

세계관

언제나 눈이 덮인 땅 위의 백금색 신전. 돌보는 사람이 없으나 성스러운 힘이 태초부터 깃들어 성역으로 불리는 장소. 

모든 생명은 그곳으로부터 시작됐으며 마지막 또한 그 자리에서 시간을 기다린다.

이것은 거대한 종막에 맞서 싸우는 자들의 서사시.

기록을 남길 도서관도 불타고 노래를 전달할 음유시인의 수도 줄었지만,

그럼에도 분명 남게 될 당신의 이야기….


0. 프롤로그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이다. 천 년도 되지 않았다. 이 세계는 여신 세레스께서 만드셨다고 알려진다. 달과 꽃, 초목의 여신. 그리고 이 별의 성계신. 신께서는 가장 깨끗하고 맑은 달빛으로 세상을 빚으셨다. 첫 숨을 불어넣은 생명은 꽃이었다. 아주 여리고 작은 들꽃 한 송이를 시작으로 꽃밭이 평야를 내달렸다. 적막한 땅이 향기로 가득 찼다. 그 다음은 풀과 나무였다. 빗물이 흙에 스미듯 생명력이 대륙의 북쪽 끝부터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까지 퍼져나갔다. 세레스가 자리했던 장소는 순식간에 울창한 숲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숲 어딘가에는 그분이 직접 심은 세계수가 존재한다고들 말한다. 생명의 근원. 별을 수호하는 신성한 나무. 대부분의 생명체가 스러진다 해도 이 세상만큼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기둥.

이곳은 빛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는 것은 진리다. 필연적으로 빛에는 그림자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림자의 세계 역시 존재한다. 훗날 사람들은 빛의 세상을 정면, 그림자의 세상을 이면이라고 부른다.  세레스는 세상의 기반을 다진 후 정면을 다스릴 주신 오딘을 눈뜨게 했다. 오딘이 품은 첫 번째 의문은 이것이었다.

'그림자의 세상을 다스리는 이도 있습니까?'

'아니. 그곳은 아직이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란다.'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다. 사람을 세 종족으로 나눠 산, 땅, 바다에 심은 뒤 세레스는 몸을 물렸다. 오딘은 각각을 엘프, 인간, 인어라고 명명했다. 대륙이 있고 바다가 있으며 사람이 있으니 남은 것은 시간의 흐름이었다. 그는 세레스의 이름을 따서 날짜를 센다. 세르 1년은 창조의 날을 뜻한다. 오딘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고,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고, 깨달음을 얻으려 종교에 몸을 바치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준다. 빛의 세상, 정면은 그렇게 문제 없이 평화로이 시간만을 보내며 나이를 먹을 듯했다. 영원히 그럴 것이라 바랐다. 모두가.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평화가 있다면 폐허도 있다.

세르 450년 즈음이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발화점을 알 수 없는 불이 붙었다. 꺼뜨릴 수도 잠재울 수도 없는 불꽃은 사람 하나를 살라먹고 소멸했다. 낮과 밤에 각각 두 개의 태양과 달이 떴다. 동물과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다. 인어가 아님에도 물속에서 숨을 쉬는 엘프와 인간이 목격되는가 하면, 수중 호흡이 불가능한 인어가 발견되기도 했다. 세계의 규칙이 엉망이에요. 누군가 말했다. 이런 일이 현재 세르 990년까지 이어진다. 

이쯤에서 뒷면의 이야기를 하자. 그림자의 세상, 이면을 침략하려는 마물이 있다는 것은 대부분이 알고 있는 상식이다. 사람들이 질문을 구하니 사제가 대답하고, 사제는 주신으로부터 목소리를 들었을 테니까. 신앙이란 그런 것이고 신실한 믿음은 진실이 되곤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마물의 머리를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고서는 그것을 죽일 수 없다. 그리고 마물은 '무언가'에 이끌려 이면을 공격하고 점령하려 든다.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아는 이도, 알면서 감추는 이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갓난아이가 아닌 이상 안다.

본격적으로 정면에 마물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은 세르 479년이다. 그것은 물속에서, 산 속에서, 인간이 기르는 가축 속에서 발생했다. 마물은 먹지도 잠들지도 않는다. 대화 또한 불가능하다. 도서관이 불타 기록으로도 보존되지 못한 푸르고 맑은 고향. 마물은 삶의 터전을 짓밟고 폐허로 만들었다. 오딘이 지휘하는 군대도, 그가 부리는 늑대와 까마귀 무리도 이윽고 등장한 마물의 지휘관 앞에서는 종전을 부르지 못했다. 속도만을 늦출 뿐이다. 신이 막을 수 없는 게 있다니. 세계는 항전을 멈추지 않았음에도 지금은 마지막 희망만을 바라보는 지경이 되었다. 

당신은 끝을 앞둔 정면에서 세상을 지켜낼 생명체의 마지막 희망.

이것은 사명과 운명, 필연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이야기.


1. 빛의 세상, 아셰이르.

안녕? 당신의 고향이 궁금하고 이름도 궁금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요. 그러니 당신도 제게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세요. 이름도, 나이도,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아는지도. 알고 싶은 게 많은 눈빛이잖아요. 하지만 알려줄 수 있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꼭 이곳저곳을 발로 걸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게 될 거예요. 그럼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말해볼까요?

이곳의 이름은 아셰이르. 빛의 세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많이 배운 학자나 선생님들뿐. 세레스 여신님이 빚으신 세계의 정면이에요. 날짜는 창조의 날을 세르 1년으로 삼아 세고요. 한 해는 열두 달, 한 달은 30일 남짓. 사계절이 뚜렷해요. 북반구와 남반구의 계절이 다르지요. 시간은 시, 분, 초로 나뉘는데... 아, 이건 알고 계시나요? 이야기를 보채지 않으셔도 돼요. 이제 정말 아셰이르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한때는 아름다웠다던, 마지막을 바라보는 어린 세계를 소개해드릴 테니.

대륙은 세 개예요. 지도에서 북쪽의 대륙은 에이르. 서쪽의 대륙은 프레이. 동쪽의 대륙은 라와르라고 불러요. 세 대륙의 사이에 신성한 해역 엘리바가르를 두는 모양으로 지도를 그리곤 해요. 제국이 있는 프레이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이주하지 않은 사람들은 라와르에 살지요. 에이르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요. 사실상 교류를 이어간 대륙은 프레이와 라와르 뿐인 거지요. 모든 종족이 공용어를 사용해요. 지역과 대륙이 달라도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시네요?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창조의 날, 아셰이르는 여신의 축복을 받았어요. 세계수로부터 떨어진 신비롭고 놀라운 결정이 그 증거가 되었지요. 그것을 부르는 이름은 지역마다 다르다지만, 보통 '빛의 씨앗'이라고 불러요. 언제든 빛을 잃지 않으면서 정령들을 끌어모으는 특징이 있거든요. 덕분에 주변에서는 자원도 많이 나지요. 빛의 씨앗은 총 여섯 개예요. 이것의 놀라운 힘을 확인한 사람들은 전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전쟁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싸우다가 욕심을 접어두고 평화를 유지하는 쪽으로 끝났어요. 어쩌면 사람이 아닌 것과 맞서야 할 미래를 느껴서였을지도 몰라요. 역사는 재미 없으신가요? 그럼 지역 설명을 듣고 나서 마저 알려드릴게요. 우선...

엘리바가르. 

이곳은 대부분의 인어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바다예요. 왕족도, 귀족도 없이 여기서는 모두 같은 권리를 가져요. 엘리바가르는 물의 정령이 풍부해 피를 뿌리거나 각국의 오염물질로 바다가 더러워져도 하루면 다시 정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어요. 바다 깊은 곳에 빛의 씨앗, 인어들의 표현으로는 '엘리안'이 있어서, 엘리바가르의 정령들은 그곳에서 힘을 얻거나 탄생했어요. 투명한 물빛 바다는 맑고 깨끗해 깊이를 알 수 없기로 유명했지요. 바다를 사이에 둔 대륙의 위치 상 이곳을 건너는 이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빠져 죽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정령과 인어들이 의미 없는 죽음을 방관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인어를 믿고 궂은 날씨에 배를 띄우기도 했었지요.

지금의 엘리바가르는 바닷속에 마물의 기지가 들어서도 항전할 수 없게 되었어요. 정령이 넘치던 바닷속은 이제 힘을 빌리기에도 곤란한 상황이에요. 엘리안이 깨지고, 그 파편을 뭍으로 가져와 오염된 땅속에 묻었더니 근처의 정령들이 힘을 잃었거든요. 사람들이 엘리안의 복구에 힘쓰는 동안 마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어들의 터전을 빼앗았어요. 신성한 해역의 바닷물은 탁해졌고, 수중 생활에 맞게 진화하고 적응한 마물들은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심해로 끌고 간다고 알려져 있어요. 엘리안의 복구는 마침내 성공했으나 힘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엘리바가르에서 살아갈 수 있는 종족은 인어 뿐이에요. 세력을 넓히는 마물을 피해 살 뿐이지만요. 

프레이 대륙의 제국 돌로리아스.

아셰이르에는 규칙 같은 속담이 있었어요. 산과 숲은 엘프의 것. 강과 호수, 바다는 인어의 것. 땅은 인간의 것. 돌로리아스의 영토는 프레이의 절반을 차지해요. 산맥 전까지 남쪽 땅이 제국의 것인 셈이지요. 과거에는 이름만 들어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위대한 학자들이 머무르는 탑도 있었어요. 한때는 산맥 너머까지도 제국의 영토였다면 믿어지시나요? 과거의 어느 황제는 프레이를 전부 점령하려 들었고, 라와르까지 넘봤어요.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지요. 세르법을 두고 황제의 이름을 따와 인간들만의 달력을 만들기도 했을 정도였거든요. 제국의 전성기가 끝난 지금도 황제력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요.

말하다 보니 전부 과거형이네요. 저명하던 탑은 마물의 공격에 무너져 흔적도 찾을 수 없고, 황제는 빛의 씨앗 '안나'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타 지역의 빛의 씨앗을 노리고 있어요. 그것이 더 있다면 마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거예요. 현 황제의 이름은 아에테르 비타 프레테리아 돌로리아스. 귀족과 평민 사이에 확실한 벽이 있으나, 전쟁영웅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주겠다는 선언이 있었어요. 그렇게 나서는 사람들은 같은 생명체와 무기를 부딪치기도 전에 마물에게 죽임을 당해요. 황제가 말하는 전쟁이 과연 누구와의 전쟁인지도 모르고 참전하는 사람도 숫자가 제법 되어요. 무엇과 싸우든 살아남는 이가 드물어 영토를 하사받은 이가 있어도 다음 전쟁에 참전해 죽어나가는 게. 제국의 일상이에요.

보르의 도서관.

포괄적인 지명은 보르. 다스리는 이도 없고 왕국도 제국도 아니지만 지식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은 모두 보르로 모인다고 해요. 보르는 도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화국이라고 보시면 되어요. 이곳에는 왕이 없고 대표자들이 모여 같은 지위를 가지고서 의견을 내지요. 폐쇄적인 분위기지만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도서관 문을 열어준대요.

사토 속에 묻힌 찬란했던 과학도, 세계 아셰이르의 역사도 모두 도서관에 기록되었어요. 직접 드나들며 집필하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적히는 문장도 있었지요. 세르 100년을 맞이해 지식을 집대성할 장소로 본격적인 도서관이 완공되었어요. 중심에는 빛의 씨앗, '티이아'가 자리했고요. 도서관이 지어지기 전에는 알음알음 지식을 공유했다고 해요.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 중 이런 말이 있어요. 그때 책 귀퉁이에 했던 낙서까지도 완벽하게 똑같이 복제되어 보르의 도서관에 꽂혀 있을 것만 같다고요. 신비함이 감도는 장소였어요. 평생 책만 읽어도 다 읽지 못 할 것만 같은 양의 서적. 그것들이 자아내는 분위기와 기분 좋은 종이 냄새.

그런 도서관이 불에 타버릴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이상한 일이었어요. 분명 화재를 대비해 정령이 상시 머무를 정도로 프레이에서, 나아가 아셰이르 전체가 눈여겨 보던 공간이었거든요. 마물이 지식을 익히는 데에는 사실 큰 위험성이 없었지만, 지식의 창고는 결코 짓밟혀서는 안 될 재산이었어요. 문턱도 넘지 못하던 그것들이었는데. 방심하는 사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파란 불길이 번지더니, 도서관을 전부 태워버렸어요. 어떤 정령도 그것을 꺼뜨리지 못 했어요. 최상급 정령을 불러오는 이가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사람들은 상징적인 장소가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요. 도서관이 사라지니 그것이 한때 존재했노라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면 그 건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럼에도 지역을 부를 때는 보르의 도서관이라고 불러요.

모탈리티 산맥.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산맥은 프레이 대륙을 반으로 나눠요. 제국령에서 보르의 도서관으로 넘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소이자 장애물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돌아가는 방법이 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산맥을 넘어가는 게 일반적인 방법이에요. 산맥에는 다양한 엘프 종족이 살고 있어요. 산세가 그리 가파른 편이 아니었거든요. 완만한 경사의 산에는 인간도 마을을 꾸려 살곤 했어요. 빛의 씨앗 '모르스' 덕분에 맑은 강물이 흘러 식수로 삼기 좋았고, 독이 든 버섯은 아주 드물게 보였으며 맹수들은 식사를 산 속에서 스스로 구하니 사람들을 노릴 이유가 없었지요. 들짐승과 맹금을 길들이는 꿈은 산맥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산맥에는 제일 나이가 많은 이를 지도자로 삼는 전통이 있고요. 

산맥이 검게 병들었던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고 해요. 식용 식물들의 이파리가 그을린 것처럼 검어진 게 시작이었어요. 까닭 모를 병에 걸린 식물을 뜯어먹은 동물들이 하나둘 사납게 변했어요. 가축이 사람에게 이빨을 드러낸다거나, 육식 동물이 마을 하나를 습격해 사냥당한 일이 점점 빈번하게 일어났어요. 부족의 수호목까지 새카맣게 물든 뒤에야 병든 동물 고기는 익혀 먹어야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할 수 있음을 사람들은 알아냈어요. 늦었지만, 늦지 않은 처사였지요. 지금의 산맥은 빛이 한 점도 들지 않아 낮과 밤을 가릴 것 없이 컴컴해요. 산맥을 넘어가려면 꼭 등불을 들어야 하는데, 마물을 부르고 짐승을 유도하기에 좋아서 길눈이 밝은 사람과 함께 다녀야만 해요. 

라와르 대륙의 루메네.

루메네는 아셰이르의 계절 개념에서 비껴 나가 있어요. 이곳에서 보호하는 빛의 씨앗 '루모스'의 힘 탓이에요. 아주 강력한 정령의 기운이 눈과 바람의 정령을 다수 유도했기에 언제나 눈이 덮인 날씨를 유지하지요. 기온은 항상 영하. 쌓인 눈이 녹은 적이 없어 걸을 때는 빙판과 눈밭을 조심해야만 해요. 루메네는 세습군주제를 따르면서도 부족장들이 나머지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어요. 발론드와 교류하고 보르와 무역을 이어나가며 외부에 기대는 모양새지만, 루메네의 사람들은 전투에 능해요. 왕국의 기사단은 물론이고 경비병 하나하나의 실력도 무시할 수 없어요. 어린아이일 때부터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건, 맹수와 맞서 식량을 구해야 했던 환경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루모스의 힘이 강력해서일까요? 추위에도 꺾이지 않는 마물은 루메네를 포기한 듯 보였어요. 어쩌면 척박한 땅이기에 스스로 자멸할 거라고 판단을 내렸을지도 몰라요. 엘리바가르를 지나지 않으면 프레이까지 너무 먼 해로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보급로는 사실상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이미 루메네는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었지요. 

마물의 출현 이후로 루모스는 남은 힘을 모두 끌어 쓰듯이 맹렬한 빛을 냈어요. 성 안에 루모스를 위한 공간이 따로 있었는데, 순식간에 내부를 얼려버릴 듯 기온이 뚝 떨어졌대요. 정령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루모스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어요. 왕은 루모스를 성 밖에 내놓는 방법을 택했고, 설산 깊은 곳에 루모스를 두고 왔음에도 루메네는 눈폭풍에 휩싸였어요. 걷기 힘든 눈보라가 그치고 나면 고요와 함께 앞이 보이지 않는 화이트 아웃이 찾아오는 식으로요. 루모스를 파괴한다면 마물의 공세가 매서워질 테고, 이대로 유지한다면 루메네는 손 한 번 대지 않고 멸망할 거라고. 다들 말해요. 

루메네와 발론드 사이의 평야는 마물이 점령했어요. 그곳은 중립지역으로 꽃밭이 아름답고 초원이 넓게 펼쳐진 여러 자원의 출처였는데, 어디서 유래했는지 모를 마물은 평야를 본거지로 삼아 침략을 꾀하고 있어요. 아주 위험한 곳이에요. 어느 누구도 여기 발을 들여서는 안 돼요.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어요. 마물의 땅. 더럽혀진 장소... 부르는 이름은 많지만 이름을 붙이는 순간 단어가 갖는 힘이 마물을 더 두렵게 만드는 이유가 될까봐 이 장소는 정해진 지명이 없어요.

발론드.

아셰이르에서 제일 문화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어딘지 아시나요? 예술로 유명한 나라는요? 유일하게 축제를 여는 나라가 어디일까요? 바로 발론드예요. 이곳을 지키는, 음. 이곳과 어우러진다는 표현이 더 맞겠어요. 잘 어우러져 나라에 섞여든 빛의 씨앗의 이름은 '바르문트'. 다른 나라와 다르게 씨앗에 대한 특별 대우를 하지 않아 아무데서나 찾아볼 수 있어요. 비슷한 것을 많이 만들어 곳곳에 전시해뒀거든요. 잘 감이 안 오시죠? 어디에도 바르문트로 추정되는 조각품이 있는데, 그 중 진짜가 뭔지는 대부분이 모른대요.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하나. 현재 신권정치제의 통치자인 헤임달 뿐이에요. 그는 오딘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신탁을 전하기도 하지요. 대표적인 그의 업적은 오딘의 뜻으로 주최하는 축제 '달의 날'. 아셰이르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어요. 

축제가 열리면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지와 관계 없이 모두를 발론드로 받아들여요. 달의 날은 달이 두 개가 되었던 날에 그것이 사특하고 불행한 의미가 아니라는 오딘의 목소리를 듣고 열린 축제예요. 처음에는 작은 기념일 정도였는데 어느덧 각국의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나라의 특징이 되었지요. 달이 두 개가 뜨지 않아도 1년의 주기를 갖고 축제를 열어요. 맛있는 음식도, 거리의 화가와 악사들도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요. 

금광이 근처에 자리해 황금의 땅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마물은 금의 가치를 모르니 그곳을 망칠 생각은 못했다나요. 대신 마물의 지휘관이 전염병을 퍼뜨렸어요. 종족을 가리지 않고 인구가 줄어들었고, 어떤 치료법도 완치를 이루어내지 못했어요. 증상만 완화시킬 뿐이었지요. 산 채로 몸이 썩어들어가는 병은 노인에게 제일 큰 타격을 입혔어요. 어린아이와 청년층에게서는 그렇게 치명적인 수준으로 병이 악화되지는 않았는데, 이것이 바르문트의 능력이라는 말도 떠돌아요. 이상한 일이지요. 사람을 가려서 보호하는 것이 정말 세레스 여신의 뜻일까요? 발론드의 국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돌로리아스로 이민을 가는 추세예요. 현신하여 모습을 드러낸 주신 오딘의 거처는 발론드의 성당인데도요.

에이르 대륙의 영원의 숲.

태초에 세레스께서 처음으로 숨을 불어넣으신 곳이에요. 어두워지면 반딧불이가 시야를 빛으로 수놓지요. 은은한 빛의 춤에 이끌려 길을 잃기 좋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숲에서는 길을 잃어도 잃은 줄 모르거든요. 처음 보는 동물과 식물이 주의를 끌기 때문이에요. 뿔이 달린 말을 아시나요? 별가루를 뿌린 듯한 은빛 암사슴은요? 어디서도 맡아보지 못한 신비로운 향기를 따라가면 어느덧 숲 바깥일지 몰라요. 그것들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잡았다 해도 숲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 특색을 잃고 평범해지고 말아요. 연구를 해도 밝혀낼 수 없어요. 안내사항을 적으면 열 페이지는 순식간일 거예요. 규칙이 없지만 난잡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지진다고 해요. 아직까지도요.

산맥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검게 변하는 병이 숲에도 옮았어요. 하지만 숲은 새카만 이파리와 흙을 얻는 대신 순백의 세상으로 바뀌었지요. 흰 것들은 빼곡한 숲에 몸을 숨기고, 희지 못한 것들은 도망치다 마물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었어요. 불을 놓는 시도를 했으나 숲은 가장자리 일부만 붉게 물들었을 뿐. 불길이 번져 모든 생명을 태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숲에서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 역시 숲의 모든 지도를 알지는 못해요. 길이 계속 바뀌고, 인위적으로 남긴 이정표는 사라지고 말거든요. 그래서, 이 숲 어딘가에 대신전이 있다는 말 역시 소문이나 전설로만 취급되는 편이에요. 

마지막으로 대신전, 리프트라시르.

그러나 분명 대신전은 존재해요. 여신이 직접 심었다는 세계수의 수호 아래에. 찾아가는 길을 모르고 방향을 잃어도 그 자리에 언제나.

신전에는 사람이 일하지 않아요. 대리석으로 만든 백색의 여신상에 쌓인 먼지는 손으로 훑으면 뽀얗게 묻어나와요. 돌보는 사람이 없고 머무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방치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지요. 극지방에 위치해 계절의 변화가 거의 없다지만, 루메네보다는 포근하고 따스해요. 전해지는 정보는 이게 다예요. 그러나 아마도 성역에 세계수가 있을 거라고 믿어요. 최상층이든 바깥의 또다른 구역이든 숲을 보호하는 힘을 가진 나무가 분명 어딘가에 뿌리를 내렸을 거예요.

그곳으로 오세요. 그리고 지켜주세요. 우리의 세계를...

2. 마법.

이 차례가 왔네요. 마물은 '무언가'에 이끌린다고 했었지요. 그 무언가는 마법이에요. 

아셰이르의 사람들은 정령의 힘을 빌려 살아가요. 정령은 신의 것. 별도의 계약 단계가 없어도 바라는 이들에게 정령은 힘을 빌려주었고, 과학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며 살았어요. 탐구하는 이가 있었으나 연구 결과는 불타 없어졌으니까요. 그리고 전기 대신 불을 피우는 게 빠르고 편하며 자원의 소모도 없었거든요. 세계를 구성하는 힘이 정령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사람들은 믿었어요. 

그림자의 세상, 이면을 기억하시나요? 옛 발론드의 통치자는 주신 오딘의 말씀을 전했어요. 

'이면에는 용이 살고, 마물들은 용의 마법에 이끌린다. 그것들이 침식시킨 이면이 이미 함락되었다면 이면의 뒷면인 정면 또한 무사치 못하리라.'

그래요. 마법은 용의 것. 당신이 지니고 있는 마법 또한... 용의 것이라고 인식되는 게 아셰이르의 현실이에요. 진실은 알 수 없어요. 주신 오딘은 전투에 힘을 쏟느라 바쁘고, 성계신 세레스는 더는 부름에 응하지 않거든요. 당신은 느끼실 거예요. 이 세계의 또다른 근원을. 숨쉬듯 자연스럽고, 없어서는 안 될 심장 같은 그것을. 몸을 가득 채우는 마법을요. 마법은 정령의 힘보다 강력하고 빨라요. 당신을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 또한 이 마법을 느끼고 다룰 수 있어요. 탄생부터 지니고 있는 마법은 발현 시기가 제각기 다르다고 해요. 누군가는 태어난 순간부터, 다른 누군가는 이제 막 힘을 깨달았을지도 몰라요. 마력의 영향을 받아 노화 또한 진행되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 지점이 당신을 세상으로부터 격리했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언제고 당신만의 독자적인 힘을 소중히 여기세요. 마물이 마법을 쓴다는 오해와 당신을 향한 핍박의 시선에도 굴하지 마세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숨어 살았다면 이제는 바깥으로 나올 차례예요. 세계는 이제 정말 끝을 향해 떠밀리고 있어요. 도움이, 힘이 필요해요.

3. 연합군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들은 오딘의 목소리를 듣고 모인다. 계속되었던 전쟁으로 깊어진 감정의 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종족도, 국적도 상관 없이 마법을 지닌 이들이 전부 모인다. 총 인원은 서른을 넘지 못한다. 목적지는 리프트라시르. 구색을 겨우 갖춘 사람들에게 신전의 이름 일부를 따 연합군 '리프'라 명명한다. 하나하나가 평범한 아셰이르 사람들의 열 배의 위력을 지닌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각자 회상한다. 짓밟힌 고향을 떠나올 때 돌아본 그곳의 풍경이 어땠는지. 온 세계에 울려 퍼진 주신 오딘의 전언 중 몇 어절이나 기억하는지. 

“모두 들으라. 마물은 마법을 가진 이들이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끌린다. 마법을 가진 이들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리프트라시르에서 세계수를 보호하라.”

나가 죽으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목숨으로써 빚을 탕감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분노했을지 모른다. 부정하고 사명을 거부했을지도. 숭고한 희생을 각오하고 나온 이도 있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합군에게 공식적인 감투를 씌운다. 세계를 포기하는 것에 가까운 심정이나 실낱같은 희망은 꺼지지 않았다. 우리는 희망이고, 최후전술이자, 살아 숨쉬는 생명의 대표자다. 제국 돌로리아스의 황제는 우리에게 900년을 사수한 빛의 씨앗 ‘안나’를 맡기겠다고 비밀스럽게 전했다. 연합군 리프의 첫 번째 목적지는 제국이다.

그 사이 지휘관을 앞세운 마물은 신전을 향해 진격한다. 예배당에 모셔둔 세계수의 묘목이 서로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수호해야 하고, 마물은 아마도 그것을 소멸시키려 들 것이다. 성계신 세레스와 주신 오딘이 함께 지었다던 신전이 점령될수록 마물들의 기세는 등등해질 게 뻔하다. 우리는 지쳐가겠지. 소모될 병력이 없으니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몰릴 테다. 맞서 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생명체의 마지막 희망. 사명과 운명, 필연을 받아들여야 하는 탄생부터 특별했던 존재. 이런 이유들을 뒤로 치우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가.

시기가 이르다. 그럼에도 어린 세계의 황혼이 다가온다.


4.진영 선택

테네브라이: 이 세계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고쳐 쓸 수 없다. 헛된 발버둥일 뿐이다.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자. 

파르마티르: 그러나 희망은 남아 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한다. 참상을 되돌리고 이 세계를 유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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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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