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아스타브]심장(心臟)

※승천아스타리온x타브(체형1 시스젠더 여성)/일부 설정 및 묘사의 경우 Lord Ancunin(@AscendedPaleElf)의 트윗을 인용하였습니다.

발더스 게이트 3 by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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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_반려께서_연서를_보내셨습니다


가장 찬연하게 생의 환희가 넘실거리는 명막한 봄 바다, 내 불멸의 연인께

 

사랑이란 무릇 아무리 속삭이고 예찬할지언정 결코 해소할 수 없는 갈증과 같아, 제 하나뿐인 주인께서 말씀하신 양 저 또한 가히 애달플 따름입니다. 당신께서 시종장을 통해 보내주신 편지를 받는 순간 그리움이 먹먹하여, 백여 년 가까이 어디에서도 꽃피우기는커녕 뿌리조차 내리지 못했던 제 고독한 삶이 물안개처럼 밀려왔다가 춘풍에 스러집니다.

 

동시에 당신을 만나기까지 어떻게 기구한 목숨을 부지했는지 섬뜩한 의문이 서립니다. 그럼에도 제 품에 안겼던 당신의 연서. 어느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거니와 만물을 긍휼히 굽어보는 가군께서 제 보잘것없는 사랑을 원하신다며 글월을 적어주시니, 저는 몇 번이고 당신이라는 정원에서 찬란하게 꽃을 틔울 수 있으리란 환희에 더없이 안도합니다.

 

당신만이 제게 마음껏 흐드러지며 내내 시들지 않도록 허락해 주시는 만큼, 목이 부르트다 못해 목소리를 모조리 잃고, 두 손이 펜과 함께 닳아 더는 글 한 줄조차 쓰지 못할지언정 어느 순간이고 당신을 향한 이 무저갱과 같은 연심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하루가 다르게 켜켜이 쌓여 어느 순간 당신께서 더는 감당하지 못하도록 무거워지겠지만, 저는 도통 두렵지 않아요.

 

의심이 서린 가운데 사랑이 움트지 못하듯, 오히려 당신께서는 어쩌면 고난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그 순간을 기꺼이 기다리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만에 하나 당신께서 저를 저버린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제 세계의 종말일 터. 그렇다고 한들 저는 “영원한 사랑이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였으니 그조차도 황홀경에 젖어 꽃봉오리를 닫고 썩어 문드러질 수 있답니다.

 

노틸로이드가 추락한 해안 절벽에서 아스타리온, 당신과 마주했던 이래로 황폐하게 메마른 영혼에 포악하게, 또는 걷잡을 수 없이 뿌리박은 연모는 딱새 둥지에서 부화한 뻐꾸기 새끼와 같아 그간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부정하다 여겼던 원망과 죄악감을 추락시키며……이윽고 당신이 모르던 나를 불살랐답니다. 영원히.

 

잠시 펜을 멈추고 더는 맥동하지 않은 제 심장,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요. 아스타리온, 우리가 농락하고 이윽고 숨마저 끊었던 악마, 라파엘을 기억하시나요? 라파엘이 당신에게 빛 한 점 내리쬐지 않은 서늘한 지하에서 읊었던 검은 미사의 진실, 당신이 앞으로도 안향하실 영광된 축복을 처음 들었던 순간……, 아, 저는 모순되게도 어떤 예언을 계시받았어요. 당신의 기도를 외면한 신이 아닌 제 이기와 심욕으로부터.

 

왜 그간 지난하고 기구한 삶을 끝내지 않았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어요. 제 심장은 칠천의 영혼을 희생해 다시 태어날 당신에게 가장 먼저 바쳐야 할 제물이었음을.

 

언젠가 당신께서 심장이 박동하지 않아 두렵지 않으냐고 여쭤보셨어요. 안쿠닌 성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시종조차 물린 채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침실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았던, 절대자를 쓰러뜨리고 뜻을 함께했던 동료와 뿔뿔이 흩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가을이었지요.

 

당신께서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두 눈동자는 차마 감추지 못한 초조가 금방 사그라질 불씨처럼 연약하게 일렁거렸어요. 함께 여행하던 과거에 어스름이 무르익어 셀룬이 드높아지고 모두가 서로의 천막으로 돌아가거들랑 당신은 저를 끌어안고 길고 가느다란 귀가 접히면서까지 심장 박동을 듣길 골몰하셨으므로, 저는 단순히 그 순간을 돌이킬 수 없어 못내 아쉬우셨나 생각했답니다.

 

뒤늦게 당신의 진심이 무엇인지 이해하였으나 제 대답은 그때와, 하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다르지 않답니다. 제 심장은 언제나 당신을 위해 존재했답니다. 아스타리온, 당신의 심장이 더는 뛰지 않았을 때 제가 잠시 대신 간직하고 있었을 뿐. 당신께서 마땅히 거머쥐어야 할 수많은 생의 사치와 함께 시냇물이 강으로 흘러가 이윽고 광막한 바다로 다다르듯 이 또한 순리였으므로. 이제는 모든 게 마땅히 존재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고 말씀드려요.

 

그래요, 명백한 순리였어요. 당신께서 의식을 치른 사당에서, 제가 제물의 잔해를 불태우며 사취와 함께 풍겼던 안개는 오래전 무너지고 매장되었으나 때때로 후덥지근한 피 냄새가 코끝을 건드리며 제 눈을 가려요. 동시에 낯선 숨결이 뒤이으며 제 손을 붙들고 사당으로 이끌어요. 당신이 다시 태어난 돌의 요람으로.

 

눈을 뜨거들랑 저는 아스타리온, 당신 앞에 서 있어요. 그리고 저는 기나긴 세월의 굴욕에서 벗어나 가장 날카롭게 벼린 검을 쥔 채 늠름히 서 있는 승자를 고요히 응시해요. 당신은 곧 제게 다가와 팔목을 잡아채 가까이 당기며 당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요. 손끝으로부터 빠르게 퍼지는 생소한 훈기가 제 체온과 맞닿아 엉키며 이윽고 열이 오르고……, 동시에 모순되게도 우리가 적과 맞서며 뺨과 온몸에 튀었던 피는 싸늘하게 식어가요.

 

그렇기에 나는, 당신에게 붙들리지 않은 손을 뻗어 뺨에 묻은 피를 훔치고 미소 지었답니다. 당신이 더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온전하게 자유를 거머쥐었음을 기뻐하면서요.

 

더는 우리 부부 외에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옛일이지만, 당시를 곱씹거들랑 저도 모르게 숨죽이고 신경을 온통 곤두세운 손바닥 아래로 박동이 서서히 격랑처럼 몰려오는 착각이 일어요.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허상 대신 아주 사소하고 간지러운 통각이 따끔따끔하게 눈 밑을 찌르죠. 곧이어 차가운 눈물이 제 뺨을 적신답니다. 그리고

“내 귀가 얼얼할 정도로, 아주 시끄럽게 맥동하고 있어.”

라고 저를 끌어안아 속삭이던 당신의 음성이 지하로부터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그 한마디는 명성이 자자한 바드의 훌륭한 연주와 자연이 부르짖는 다양한 가락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해요, 내 사랑.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답고 늠연한 개선가가 있다면 당신께서 미사를 마치고 읊조렸던 말씀이 아닐까요. 만에 하나 과거로 회귀해 다시 한번 그 개선가를 들을 수 있다면 저는 당신과 함께 몇 번이고 제 손을 피로 붉게 물들일 거예요.

 

아, 옛 추억을 돌이켜 회상하던 중 바다를 떠돌다 낯선 모래사장까지 밀려 도착한 쪽지가 담긴 유리병처럼, 당신께는 미처 말씀드리지 않았던 밀담이 떠올랐어요. 당신의 안쿠닌 부인은 남편께 도통 비밀을 만들지 않으나, 친자매나 다름없던 가장 소중한 친구와의 대화였으니 모쪼록 이해해주셔요.

 

이제는 다정한 달빛에 감싸여 영면에 잠든 제네벨 또한 제가 당신께 속닥인다고 해서 화내지는 않겠지요. 잠시 어쩔 수 없다는 양 귀여운 콧잔등을 찡그리며 황당해하다가,

“프레데리카. 네가 그렇게 증명하지 않아도 우리의 뱀파이어 로드께서는 널 끔찍하게도 사랑할걸? 그래도 네가 행복하다면 내가 어떻게 말릴까. 마음껏 이야기하도록 해. 네가 내게 밤 난초를 찾아주었듯이.”

라며 쓴웃음을 지으리라 믿어요.

 

실은, 한동안 줄곧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스스로가 이제껏 행복에 겨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침대맡에서 당신께 속닥거리고 싶었어요.

 

당신께 제 영혼과 생명을 송두리째 바치고 영원히 종속되었던 직후, 저는 어느 순간부터 셀루네 석상 앞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곤 하는 제네벨을 몰래 찾아갔답니다. 그녀는 가까스로 재회한 부모를 제 손으로 떠나보내고 돌아온 밤처럼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나 조용히 상념에 잠기곤 했어요. 그 모습이 마치 점점 차오르는 달과 같아 한참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고자 마음먹었답니다.

 

그러나 제네벨은 기민하게도 제 인기척을 눈치챘고……, 제게 다가와 손을 맞잡고는 한참 침묵했어요. 제가 더는 삶을 구가하지 못함을 알았을 테니까요. 달빛이 구름에 이지러지며 저희 둘을 송두리째 가렸을 때 제네벨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저를 끌어안으며, 아, 제 소중한 친구는 망설이지 않았어요. 밤바람이 유독 차고, 제 몸 또한 싸늘할 텐데도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죠.

 

“내게서 ‘나’를 찾아준 내 가장 소중한 친구. 너는, 네 심장을 바침으로써 ‘너’를 찾았구나…….”

 

아스타리온, 내 당신. 제네벨의 한 마디는 제게 그야말로 영원한 사랑의 증명이어요. 그녀의 말처럼 당신께서 존재하시기에 저는 오랜 방황을 마치고 뿌리를 내리며, 오로지 당신의 프레데리카로 만개할 수 있었답니다.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 노래하고 연주하며 동식물을 보살피던 상부 도시의 드루이드, 실바너스의 어린 딸, 어미를 불태워 죽인 끔찍한 계집애. 무릎 꿇어 고개를 조아린 채, 당신께서 피로 칠갑이 된 태양의 관을 씌어주시는 순간 앞서 두서없이 늘어 놓인 호칭은 모조리 검의 해안에서 이는 파도에 쓸려 사라졌어요. 그리고 시선을 마주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순간, 당신은 계절의 순환이 멈춰 도리어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저를 다정히 감싸고 계시군요.

 

동시에 저는 환희에 차서 느낀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제일 요란하게 뛰는 당신의, 우리의 심장 박동을……. 당신의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 저 또한 늘 언제나 당신만의 단 한 송이뿐인 꽃로 존재하리라 감히 약속드려요.

 

사랑해요, 아스타리온.

 

고매하고 우아한,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꽃. 프레데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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