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 개인 연습작
어렸을 때부터 겁이 없었다. 주사를 맞는 것도, 혼자 귀신의 집을 들어가는 것도, 높은 곳에 올라가 소인국이 된 지상을 바라보는 것도, 성혁에게는 모두 쉬운 일이었다. 높은 곳은 특히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학창 시절에는 옥상 열쇠를 선생님이 아니면 성혁이 관리할 정도로 높은 곳에 진심이었다.
직업을 선택할 즈음에는 ‘고공작업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의 만류가 있었음에도 성혁은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뜻을 굽힐 줄 몰랐다. 모름지기 사람은 높은 곳을 욕심내야한다는 부모님에게, 성혁은 내가 일할 곳이 높은 곳이라며 말장난을 건넸다.
월급이니 연봉이니 신경 쓰지 않았던 철없는 고공작업자는 어느새 베테랑 고공작업자가 되었다. 단순히 높은 곳을 보려고 일을 시작했는데, 성혁은 어느새 돈에 더 진심이었다. 조금은 후회가 생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 다른 직업을 갖자니 가장 자신 있고, 할 줄 아는 일이 고공작업 뿐이었다.
새로 취직한 건물은 이름도 높이도 아주 높았다. 정계 거물과 내로라하는 재벌들이 자주 모이는 타워였다. 성혁이 이 건물에 취직한 건 모두 돈 때문이었다. 타이밍 좋게 빈자리가 나 재빠르게 이력서 넣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기대하던 첫 출근날, 건물의 높이만큼 성혁은 자신이 높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작업을 위해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 즈음 성혁의 옆에 유명한 재벌, 그러니까 기업 회장이 다가왔다. 사람 좋은 미소를 품고 건넨 말은 오늘도 수고하시네요, 였다. 말하는 게 꼭 건물 주인 같았지만, 정작 진짜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저게 진짜 높은 사람인가. 부러움에 괜히 심통이 난 성혁은 고개를 힘껏 꾸벅이는 동료들과 다르게 건성으로 고개만 까딱 흔들었다.
작업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는 마주치지 않았다. 자신보다 일찍 건물을 나섰는지, 아니면 더 오래 머무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뒤로 올라가는 길에 몇 번 더 마주쳐도 처음 만난 날처럼 인사가 오고 가지는 않았다. 먼저 인사할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지만 성혁은 이런 게 다 무슨 상관인가 싶어 생각을 멈췄다.
퇴근길.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동료와 성혁이 올랐을 때, 성혁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즐겨보는 뉴스 페이지로 넘어가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천 그룹, 천 중석 회장 탈세 의혹.’이란 헤드라인 밑으로 뇌물, 횡령... 돈으로 벌일 수 있는 범죄가 그의 이름을 꾸며주고 있었다. 그 사람의 추락을 의미했다. 기부나 사회 복지를 위한 투자와 재단도 꽤 있었을 텐데. 댓글을 보니 사람들은 그것을 잊은 지 오래였다. 성혁은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른 동료도 성혁과 같은 기사를 확인했는지 이거 봤어? 하며 휴대폰 화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럴 줄 알았다, 갖고 있던 재산은 얼마인가, 한순간의 추락했구나, 꽂아준 뇌물은 얼마인가, 받은 뇌물은? 신나게 떠드는 소리는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했을 때 겨우 멈췄다. 아무런 말도 않던 성혁도 보고 있던 뉴스 페이지의 뒤로 가기를 눌렀다.
다음 날 출근길, 옥상을 향해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멀미하는 것마냥 울렁거리는 기분도 들었다. 지난 저녁 나누었던 천 회장의 이야기가 떠오르더니 귓가에 추락을 속삭이는 천 회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성혁은 심호흡을 크게 뱉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성혁은 허한 속의 배를 괜히 문질렀다. 아침이 얹힌 거겠지, 하며 어울리지 않는 이유를 붙이면서.
오늘 작업은 꽤 간단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시설이 멀쩡한지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성혁과 그의 동료는 가방에서 작업을 위한 도구와 추락을 방지하기 위한 줄을 꺼냈다. 어쩐지 매듭을 묶는 성혁의 손이 떨렸다. 제대로 묶이지 않는 건 덤이었다. 꼭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손이 움직였다. 천 회장의 고개 숙인 모습이 떠올랐다. 두어 번 더 풀고 묶고를 반복하니 그제야 매듭이 팽팽하게 잘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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