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우연 사이

의 다중 우주 연결 시스템

2차 by chun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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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상이 멸망했다.

사실 오늘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시계의 분침이 방금 12를 지나쳤고 사람들간의 약속에 따르면 멸망은 어제의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런 약속을 따질 사람이 그녀 이외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약속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자신이 잠들기 전까지를 하루로 치기로 했다. 유일한 인간인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자 그것이 곧 이 세계의 약속이 되었다. 

모든 생명이 사라진 와중 그녀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마침 그녀는 다른 차원을 연구하는 다중 우주 연결 시스템에 접속해있었고 이 우주의 멸망은 그녀를 빗겨갔다. 이 우주에 속해있던 그녀의 일부가 날아갔을진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그녀는 살아남았다. 혼자서. 홀로.

인류는 모두가 외로움을 타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동료를 갖길 원했고 동족을 찾길 원했다. 급격하게 발전하는 우주 기술에 힘입어 새로운 지구를 발견했고 또 다른 우주의 태양계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곳 중 어디에도 또다른 인류는 없었다. 외계인의 부재에 실망해 자살한 UFO 지지 단체의 인원이 열셋, 광활한 우주에 우리만이 존재한다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자살한 천체물리학자가 다섯, 다른 깨끗한 행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다 우주 사업 투자에 실패해 자살한 갑부가 셋. 참고로 유일신을 모시며 자신들이 유일한 인류라 주장하던 종교 지도자는 서른명이 신의 다른 흔적을 찾지 못해 절망에 빠져 죽었다. 인류는 모두 외로움을 탔고 우주를 넘어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형제를 찾고자 했다. 그렇게 개발된 기계가 다중 우주 연결 시스템이었다. 원래 다른 우주를 살펴보던 망원경을 상하좌우에 또다른 스피커와 마이크, 렌즈를 붙여 확장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아니면 굳이 새로운 기계를 만들 희망까진 없었다고 봐도 좋고. 그녀는 텅 빈 지구에서 다중 우주 연결 시스템에 올라탔다.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차원이동학자들의 의견대로 정말 다른 차원이 과거, 혹은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면 사라진 사람들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출발 좌표의 이름 지구를 지우고 차원 A를 기입했다. 지구라는 이름은 더이상 그들의 터전을 대변하지 못했다. 이 태양계, 은하, 우주, 차원전부에 주인이라곤 그녀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그녀가 태어난 이곳을 차원 A라고 명명했다. 이제 그녀는 다른 차원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고 운이 좋다면 동료를, 운이 더 좋다면 진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다중 우주 연결 시스템의 문을 닫았다.

여담으로 그녀의 직업은 다중 우주 연결 시스템의 내부를 스케치하러 견학 온 미니어처 제작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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