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구치

영수증

사와굿 러닝중 로그

‘그 녀석… 제대로 해야 할 텐데…’

그렇게 걱정하는 거 치곤 사와구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야 오늘은 3개월은 넘게 기다린 로랜스 소설 작가 ‘아토 치사구’의 신작 『바다의 흩뿌린 별이 되어』 의 발매일이었으니**.** 웬만해선 부활동을 빼지 않는 사와구치에게도 이 날만큼은 중요했다. 하필이면 이날 당번이 걸릴게 뭐람! 학교 근처 서점에서 작가의 친필 사인회가 열리지만 않았아도 이상한 후배에게 300엔이나 더 내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계획에 없는 지출은 안하는 주의였거늘…

그동안 사와구치가 산노미야하고는 크게 엮인 일이 없었다. 애초에 사와구치는 후배들에게 다정하고 사근사근한 선배가 아닌 것이다. 부에 자주 들락날락 하는 애라면 모를까, 매일 알바해야 한다며 슝 가버리는 후배를 오래 기억하기는 선배 입장에서도 힘들었다. 그렇게 돈돈돈 하다가는 언젠가 쫄딱 망하고 말텐데. 서점 안에서 지갑 안을 살펴본 사와구치는 속으로 후배에게 악담을 날렸다. 많이 얇아졌어도 원하던 책은 살 수 있기에 망정이지.

표지가 잘 뽑혔네. 깔끔하게 그려진 밤바다에 은박으로 수면과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표현한 것을 본 사와구치가 감탄했다. 아토 작가는 섬세한 감정선을 그대로 살려내는 배경묘사와 단순한 관계성에서 복잡한 심리묘사를 이끌어내는 치밀함으로 유명했다. 연애소설을 쓰면서도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짜릿함을 준달까. 그러면서도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면 밀려들어오는 여운이 대단했다. 로맨스 소설에는 정통한 사와구치도 감탄했을 정도니까.

책을 사서 계산할 동안 서점 직원이 자신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의문스레 눈썹을 꿈틀거리는 표정이 불만을 표시하는 걸로 느껴졌는지 직원이 화들짝 놀라 영수증을 내밀었다. 낚아채듯 잡아든 사와구치는 작가 친필 사인회 현장으로 가 줄을 섰다. 왜 자꾸 힐끔거리는거야? 사와구치는 제 모습을 한번 살펴본다. 이 교복 때문인가? 설마.. 산노미야가 알바하던 곳 중의 하나라던가?

에이, 설마. 사와구치는 쓸데없는 걱정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그 웃기는 이름 때문이라도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감출 것 까진 없었고, 그녀가 산노미야 카네키라는 후배에 대해 잘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가 악의적으로 소문을 퍼트릴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매일 수전노마냥 돈을 모으고 선배한테도 흥정을 했지만 아이들한테는 따듯하게 대해주는 걸 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사와구치는 가능하다면 숨기고 싶었다.

‘별로 자랑거리도 아니고… 만약 그 애가 듣게 된다면…’

로맨틱한 이름이네! 귀엽고, 예뻐. 마치 너 같아.

애써 지워내려고 할수록 추억은 부러 잔잔한 수면 위를 뚫고 올라왔다. 한때는 계속 입 안에 머금고 싶었으나 이제는 마져 삼켜내지도 못할 정도로 쓰게 변해버린 것들… 멍하니 책 표지만 내려다보는 사와구치의 두 눈이 과거 어딘가에서 헤엄치고 있다가…

“다음 손님!”

“아, 네!”

직원에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온다. 자신의 차례에 사와구치가 쭈뻣거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뒤에서 직원이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동경하던 작가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에 들떠 제대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토 작가의 짙푸른 눈이 사와구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우와… 엄청 잘생겼네. 남자였다니 의외…’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아, 사와구치… .. 그, 여기에 제가 써서 보여드리면 안될까요?”

아토 작가는 흔쾌히 공책을 펼쳐 주었다. 사와구치는 아직 남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레 말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사와구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으니…

“사와구치… 로망, 맞으신가요?”

“네..네! 저… 작가님! 저 정말 팬이에요! 작가님의 책 전부 사서 읽었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슥슥 사인을 하고 건내주며 웃는 작가의 건치가 환했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사와구치가 알았더라면 바보같이 두 뺨을 붉히며 있지도 않았을 테지만.

“얼굴에 꽃이 잔뜩 피었네요. 귀여워요.”

“… 네?”

그제서야 사와구치는 자신이 부실을 나오기 직전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해냈다. 다급히 가방 안에서 손거울을 찾아봤으나 이제 자신은 그런 걸 들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는 걸 떠올렸다. 급한대로 핸드폰의 까만 액정을 거울삼아 비춰보니 히마와리가 정성스레 그려준 알록달록한 꽃들이 아직도 얼굴에 가득했다.

“그 녀석.. 산노미야…!!!!”

크르르릉, 민망함에 갈곳 잃은 분노가 향하는 곳은 자신을 마지막으로 봤던 후배였다. 이 자식이 선배한테 얼굴 좀 지워야 하지 않겠냐고 말도 안해? 돈만 받으면 다야? 새빨개진 얼굴로 쌩하니 서점을 나와버리면서도 사와구치는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어떻게 만난 아토 작가님인데! 어쩐지 날 보고 키득키득 웃고 있더라니! (아마 그는 그런 의도로 웃은게 아닐테지만, 사와구치가 그걸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유는 없어 보였다.)

“용서 못해! 산노미야…! 다음에 만나기만 해봐라!”

머릿속에서 몇번이고 산노미야의 그 멍하고 나른한 얼굴을 북북박박 구겨버리는 사와구치가 좋은 선배가 될 길은 멀고도 험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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