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쓴 소녀
👓안경을 쓰면 이세계로 이동하는 정매인의 이야기.
길게 길렀던 푸른 머리카락이 단숨에 단발로 싹둑 잘렸다.
그야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내 의지와 관계없이 바닥에 나풀거리며 날아다니는 걸 보니까 굉장히 심란했다.
내 머리카락 돌려내!!!
◆
18살의 생일이 지나면서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는데 보통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주면 다들 알게 되는 자신의 초능력을 난 이제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초능력이 안경을 쓰면 이세계로 가고 벗으면 다시 돌아온다는 초능력이었다.
무슨 양판소도 아니고….
그러나 엄마는 이 초능력은 유전이라면서 자기도 이런 초능력을 가져서 왔다 갔다 했다나 뭐라나 해서 충격 받았다.
그래서 엄마가 안경사였던 건가.
아무튼 엄마가 새로 맞춰준 안경을 쓰고 이세계로 왔더니 어떤 잘생긴 남자가 검으로 내 머리를 삭둑 잘라버렸다는 얘기였다.
"괘, 괜찮으세요?"
내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흑발의, 마치 소설 속에 나올법한 외모를 가진 남성은 내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그렇게 물어봤다.
너 같으면 괜찮아 보이겠니.
“아니요….”
“그… 정말 죄송합니다!”
머리카락을 잘린 나보다 더 허둥지둥해서 고개를 숙여 사과하니까 웃기긴 했다.
“괜찮아요.”
나는 낯선 수풀로 뒤덮인 언덕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나무 밑동에 앉아있었다. 이러한 환경 때문인지 주위에는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턱대고 와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아가는 걸 보고 있자니 굉장히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단발 하고 싶긴 했으니까…. 아니야, 그래도 칼단발이 되다니!
“저, 저기요? 성녀님?”
성녀님? 방금 처음 만난 사람한테 지금 성녀님이라고 불린 건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내가 갈 수 있는 이세계는 로판 세계였던 건가?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성녀요…?”
“휴,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렇게 오셨는데 설명이 부족했죠? 제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안경을 둬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건 괜찮은데요….”
그런데 어째서 이 사람은 서양인처럼 생겼고 여긴 로판 세계인 것 같은데 말이 이렇게 통하는 거지?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많았지만 이 사람은 내게 우호적으로 대해주고 있으니 천천히 물어보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근데 제가 방금 여기 처음 와서요, 혹시 이 세계에 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절 성녀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당신도 저에 관해서 아는 눈치인 거 같은데.”
“아, 성녀님은 방금 처음 오셨다고 했으니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겠군요.”
내가 왜 갑자기 성녀가 된 거지. 자꾸 성녀라 부르면 오글거려 죽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냥 이세계로 오는 초능력이 있어서 실험해본 것뿐인데 여긴 어디고 전 왜 성녀인 거죠?”
“그럼 길지도 모르겠지만 설명해보겠습니다.”
그는 검을 검집에 넣어두고 내게 장황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곳이 베리누스 제국이라는 것과 자신이 에일 베리누스라고 소개했다.
내 머리카락을 베어버린 이 사람은 바로 이 베리누스 제국의 2황자라고 한다.
정말 로판 같은 설정이다.
그리고 내가 성녀인 이유는 안경 때문이라는데, 베리누스 제국에서는 어디선가 랜덤으로 안경이 발견되고 그 안경을 통해서 성녀가 세계를 왔다 갔다 움직인다고 한다.
성녀는 황족들을 도와주고 선한 성품을 지녀서 모두의 동경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녀는 신분상 황제와 동급이라고 하며 성녀가 지지한 황자는 장래 성군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 들으니 흔한 로판에 나올법한 설정과 굉장히 닮았다.
엄마는 대체 이런 로판에서 뭘 했었던 거지.
단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여긴 판타지 설정이 성녀님 빼고는 없다는 것일까?
“그러면 성녀님이 이렇게 오시게 되셨으니 성녀님에 대해 잘 아는 루아니 공작에게 가보도록 하는 게 어떤가요? 저도 성녀에 관해서는 전해 들은 지식뿐이라서, 선대 성녀와 가장 가까이 지낸 루아니 공작에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엄마랑 사이좋았던 사람이 있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의 흑역사를 파헤쳐주지.
“일단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왕 와본 김에 신기한 로판 세계를 많이 알아보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여기 사람들은 다 나에게 우호적인 것 같으니까.
“네, 그러면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출발하시죠.”
그렇게 나는 그 성씨가 기억이 안 나는 뭐시기 공작에게 찾아가게 되었다.
2황자를 따라 수풀 언덕에서 내려와 보니 내가 있던 곳은 황궁 안에 있는 언덕이었다.
2황자가 혼자서 자주 검술을 연습하는 언덕이라고 한다. 그래서 언덕 아래에 사용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성녀님이 이렇게 나타났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곤란해질 수 있으니 모자를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선 시녀를 시켜 큰 모자를 가져왔다.
그 모자를 써서 안경이 잘 안 보이도록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래도 보일 사람은 보였겠지만.
그래서 바깥 구경도 잘 못 해봤다.
“왜 성녀는 대단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가리고 다녀야 하는 거죠?”
“높은 위치일수록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맞는 얘기인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2황자는 사용인들을 시켜 마차를 구해서 그걸 타고 공작저로 향했다.
“그… 공작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검 하나는 기가 막히게 다루시는 분이죠. 20년 전쯤에 일어났다고 하는 전쟁의 영웅이라고도 불리시는 분입니다."
검을 잘 다룬다면 뭐, 유명해서 성녀랑 황족이랑 친분이 있겠구나.
나는 로판에 흔히 잘 나오는 북부공작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럼 공작님은 선대 성녀님과는 무슨 관계예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무척 사이가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흠, 사이가 좋다면 뭐 사귀기라도 했었나.
로판과 다르게 우리 엄마는 여기 사람이랑 사랑에 빠지진 않았었구나?
저택까지의 거리는 짧아서 금세 도착했다.
공작이면 높은 귀족이니까 황궁이랑 가까운 위치에 저택이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저택은 컸다. 예술적인 면에서는 심플했다. 심플이 최고라고 하지만 오히려 이곳은 저택의 외관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공작은 예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인 게 틀림없다.
마차에서 내리고 보니 저택 앞에서는 누군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미리 연락도 없이 이곳은 어쩐 일이신가요, 황자님?"
2황자에게 말을 건 사람은 중년 쯤으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뒤에는 기사들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이 남자가 바로 그 공작이구나. 전쟁영웅이라며 왜 기사들을 데리고 있는 거지.
"당신이 쭉 기다리고 계시던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럼 뒤에 계신 분이……."
엄마랑 가장 친했던 사람이라며. 날 왜 기다리지? 엄마는 이 세계에 지금 오지 않는 것 아닌가? 엄마한테 내 얘기를 듣지 않았으면 내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를 텐데.
"성녀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공작은 나를 보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미소를 보고 엄청 놀랐다.
아무래도 평소에 잘 웃지 않는 사람 같았다.
“네….”
공작을 따라 들어간 저택 내부는 어둡지만 은은한 불빛이 있어 마치 고대 도서관과 같은 느낌이었다.
공작은 우리를 집무실과 같은 곳에 데려와 홍차를 직접 내주었다.
나 홍차 싫어하는데.
그래도 직접 차려준 게 있어서 예의상 한 입 먹어봤다. 그리고 그대로 내려놓았다.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다. 그래도 여기서 뱉어버릴 순 없어서 입안에 머금고 있던 액체는 꾸역꾸역 삼켰다.
"루아니 공작, 우린 선대 성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듣고자 갑자기 오게 되었습니다. 성녀님이 방금 이곳에 처음 오셔서요."
루아니 공작은 2황자의 그런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공작의 모습을 보고 내가 갑자기 말을 꺼내도 괜찮을 분위기여서 내가 먼저 물어보고 싶은걸 입에 담았다.
"저기, 혹시 선대 성녀랑 무슨 사이였었나요?"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공작의 표정은 갑자기 이상해졌다. 이상해졌다고 하기보단 감정을 참는 느낌?
……진짜로 엄마랑 사귀었었던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순간 내 머리를 퍼뜩 지나가는 생각에 알아차렸다.
알아차려 버렸다.
너무 빨리 알아차려 버렸다.
이 사람이 혹시 내가 도망가버렸다 생각한 내 생물학적 아빠인가 하고. 그제야 그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과 닮았다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흐… 헉.”
그러면 엄마에 관한 건 안 물어보나? 엄마는 거의 일하거나 집에 있어서 이쪽 세계로 올 시간도 없었을 텐데 왜 안부 같은 것도 안 물어보지.
그럼 엄마가 나 몰래 계속 왔다 갔다 거렸다는 거야? 그렇기에는 이때까지 나한테 비밀로 할 이유도 없고. 사이가 나빴던 거야?
내가 눈치를 채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보였는지 그 사람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2황자는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물어봤다.
“혹시 아는 사이인가요?”
“아니요. 전 하나도 몰라요, 이 사람에 대해서.”
나는 진실만을 얘기했다. 나는 진짜로 아빠에 관한 것을 이때까지 몰랐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건,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성녀님은 2황자가 황태자가 되도록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방금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놓고 갑자기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불러놓고 다짜고짜 도우라고? 그것도 처음 보는 딸한테!?
어처구니가 없다.
"왜 2황자를 황태자로 만드는데 제가 도와야 하는 거죠?"
"그건 바로 제일 유력한 후보인 1황자는 성격이 쓰레기이기 때문입니다."
2황자가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내 말에 대답했다. 내 앞에서 계속 바른 말을 쓰던 2황자가 갑자기 쓰레기라고 표현하다니…….
"1황자는 일반 평민이었으면 범죄자로 감옥살이를 하고 있을 만큼의 일을 저질렀습니다, 성녀님."
"구체적으로는 어떤 일을 했는데요?"
"가볍게는 도둑질부터 뇌물을 받고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부하에게 미루며, 여자까지 놀다가 버리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지요. 성질은 저렇게 급한 사람도 없지요. 사용인들이 조금만 신경에 거슬려도 화를 내니……."
그 말을 들어보니 1황자는 쓰레기가 맞았다.
그런데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뭐 어쩌라고.
내가 굳이 이 일을 왜 도와야 하나.
"그래서 제가 감히 부탁드리는 겁니다. 성녀님, 부디 절 황태자로 만들어주세요. 1황자만은 안됩니다."
2황자가 반짝거리는 외모로 날 바라보며 설득하려고 해보았지만 나는 외모에만 흥미가 갔지 황태자에 관한 건 별로 흥미가 가지 않았다.
"일단 조금 생각해보고 나중에 얘기해드릴게요."
2황자는 그래도 이런 부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빠는 그러면 안 되지.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지.
“그게 할 말의 전부였다면 전 돌아가 보도록 할게요.”
그 후로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안경을 벗고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
이게 내 첫 번째 베리누스 제국의 여행이었다.
보통 신기하고 해야 하는데 이렇게 기분이 더러워지다니.
아무래도 유온이에게 다 털어놓아야겠다.
◇
처음으로 베리누스 제국을 방문한 다음날, 나는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와 평소와 같이 학원에 들러서 공부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유온이에게 떠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안경을 쓰면 다른 세계로 가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능력을 썼더니 다른 세계로 이동했고, 너랑 비슷한 나이대의 2황자가 검술 연습을 하고 있어서, 그 검기로 네 머리카락이 단발이 됐다는 소리야?”
내 친구 하유온은 내가 설명한 일들을 가볍게 정리해주었다. 이런 간단한 요약정리를 잘하는 친구다.
유온이는 가슴께까지 오는 긴 곱슬머리에 왼쪽은 진녹색, 오른쪽은 레몬색으로 되어있는 반반 머리를 하고 있다. 게다가 눈은 파란색이다.
본인은 모르는 듯하지만 사람의 시선을 모으는 듯한 외향을 하고 있다.
하여간 유온이가 내 말을 요약해서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난 그 말에 긍정했다.
“응.”
유온이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얼굴을 팍 구기며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내가 헛소릴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보다.
"스트레스 많이 받고 악몽을 꾼 거니? 괜찮아?”
이 논리적인 친구는 절대로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긴 일반인도 보통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이런 얘기는 안 믿지.
“진짜라니까!”
“요즘 그런 내용의 소설 엄청 많아. 갑자기 길게 기르던 머리를 잘라서 변명이라고 하는 얘기지? 괜찮아, 네 파란 머리엔 단발도 잘 어울리니까.”
단발이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다. 가발을 쓸 수도 없어서 계속 이 머리카락인 상태로 다녀야 하는데.
“근데 넌 단발보다는 장발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래? 그래도 단발 한 번쯤은 해보고는 싶었는데 어울린다니까 다행이다. 그래도 장발이 더 잘 어울린다 하니까 이제부턴 계속 길러야지.”
유온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나서 그 뒤를 물어봤다.
“그래서, 그 뒤에는 어떻게 됐는데? 머리카락이 잘리고 나서.”
“이런 헛소리를 믿어주는 거야?”
“응. 지금 네가 이렇게 꿈 얘기를 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얼굴이 증명해주고 있거든, 거짓말이 아니라고.”
이렇게 논리적인 면도 장점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올바른가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그리고 거짓말이라면 네가 갑자기 이런 괴상한 얘기를 꺼낼 리 없잖아.”
갑자기 괴상한 얘길 꺼낼 수도 있지, 참.
“그래서 그 뒤로 2황자가 나보고 안경을 쓰고 베리누스 제국에 나타난 사람은 성녀래. 안경 쓴 사람이 막 과거에도 나타나서 그들이 도와준 황자들은 나중에 다 성군이 된다나? 그런 얘기가 대대로 내려 왔다고 하더라고.”
내 초능력은 유전된다고 했으니 분명 엄마나 그 위의 조상들이 베리누스 제국으로 가서 도와준 이야기가 내려온 게 분명하다.
나는 유온이에게 내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간단히 알려주었다.
이렇게 직접 말로 내뱉어보니 정말 이상한 경험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설이라는 건 대부분 미화되기 마련이야. 성녀의 이미지만 좋다면 정치를 말아먹은 황제도 어지간한 큰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 한 성군으로 포장될 수 있어.”
맞는 말이다. 좋은 일을 하나 하면 나쁜 일을 해도 조금 포장되는 일이 있었으니까.
“요즘 유행하는 소설 속으로 빙의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네. 그리고 네가 주인공 같아. 다른 점은 네가 세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점일까.”
나도 정말 소설 같은 세계라고 생각했다. 현대 사회에 살던 내가 갑자기 가보니 무슨 황자랑 만나고 황제나 성녀 같은 이야기를 하고 그랬으니.
“으음, 그러고 나서 2황자가 선대 성녀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루아니 공작이라는 사람에게 날 데려다줬는데 집 나간 줄 알았던 아빠가 거기 떡하니 있는 거 있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온이는 아빠를 만난 것에 관해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할지 외면 받아왔던 걸 위로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유온이도 친하니까 내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다. 한 부모 가정에서 이때까지 아빠를 모른 채 살았는데 만났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내 얘기지만 유온이에게 남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나도 아직 마음 정리가 되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괜찮아. 난 별로 아빠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기엔 이미 아빠라고 아까 말했지만. 하여튼 그냥 남이라고 생각해서 상관없어. 갑자기 아빠인걸 알아봤자 평생 만난 적도 없을 텐데 뭐.”
“그래? 그럼 다행이네.”
“그래서 일단 2황자 황태자 만들기 프로젝트는 고민해보겠다고 하고 돌아왔어.”
“황태자 만들기 프로젝트?”
“응. 베리누스 제국에서는 아직 황태자를 정하지 않았다던데 1황자가 황제 되었다가는 폭군이 될 게 분명하대. 그 아빠라는 자식도 2황자를 지지한다는데 공작이라서 계급이 높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성녀니까 더 가세해달라는 얘기지.”
호칭을 자식으로 바꾸었다.
“그 2황자는 우리랑 나이 비슷한 사람이야?”
2황자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그는 흑발에 잘생기고 키도 컸으니까 아마 나와 나이가 비슷한 느낌으로 보이긴 했다. 근거 없는 추측이었지만.
“응. 우리랑 비슷하게 보이던데.”
유온이는 유심하게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10대 후반에 벌써 황태자가 될 정도라면 지금 사회는 안정적이긴 글렀겠네. 중세시대에는 아이를 낳는 연령이 현대 사회보다 훨씬 어려. 보통 황제가 되는 경우는 전 황제가 죽거나 암살당했을 경우야. 그래서 보통 2황자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황제를 하고 있어야 해. 지금 황제가 즉위하기 전 황제가 돌연사하거나 암살당해 죽어서 그로 인한 여론과 갑작스레 즉위하게 된 지금 황제로 인해 경기가 불안정할 거야. 아직 황태자를 지정하지 않은 이유도 그런 이유겠지. 그리고 나로선 네가 그 세계로 이동하면서 네가 차지하는 만큼의 질량이 늘어나 그 세계에 끼칠 영향이 더 궁금한데. 영향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그 영향을 알아챌 일은 없을 거고. 더 얘기하다간 네가 잘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할게.”
유온이는 세상의 모든 걸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한다. 조용한 성격인 유온이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이유는 그만큼 나와 친하고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하는 내용도 어려워서 난 조금 이해를 못했지만, 조용히 듣고 있기로 했다.
“갑자기 이런 능력이 있다고 나한테 고백해오니 실험해보고 싶은 게 많아지네. 그래서 너는 이제 그 세계에 관해서는 어떡할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갑자기 다른 세계로 가게 되었는데 아빠는 그쪽 사람이었다고 하고 2황자가 황태자 되는 걸 도와달라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방금 이곳에 온 사람한테 그런 걸 부탁하다니 이제 와서 갑자기 또 열불이 오르네.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는데 이런 이야기를 믿어주는 유온이가 신기해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렇게 내게 초능력이 있어서 그 세계로 가버리게 된 이상 그 세계를 아예 무시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도와주는 것도 기분이 좀 그랬다.
항상 난 이 애매모호함이 문제였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따지고 보면 너에게는 다른 세계가 하나 더 생긴 거잖아. 이런 걸 그냥 없었던 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그 세계에서 깽판이라도 치고 다니면 되지 않아? 어차피 안경만 벗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으니 위험부담도 크게 없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사는 이 세계의 대체재와 같은 느낌으로 삼으라는 얘기였다. 심심풀이로 방문하는 세계.
어차피 그곳에 생물학적 아버지가 있기도 했고 유온이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그곳에 가는 건 그다지 나쁜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런 거 같네. 어차피 내가 진짜로 사는 세계도 아니니.”
그냥 유온이 말대로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 대로 해볼까 싶었다.
“그럼 이제부터 2황자를 황태자로 만들 생각이야?”
일단 나는 그 세계에 관해서 잘 모르고 2황자는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으니 그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내가 뭘 한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했고.
“응! 뭐, 난 아직 그 세계에 관해 잘 모르니까. 난 성녀니까 일단 부탁하는 대로 들어줘 보려고. 조언 고마워. 유온이는 역시 똑똑하구나.”
“아니, 내가 똑똑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바보인 거야.”
유온이는 항상 내가 똑똑하다고 칭찬하면 저런 말을 덧붙인다. 진짜 똑똑하니까 내가 저렇게 말해주는 건데…….
유온이에게는 내 말을 들어주고 믿어준 감사의 표시로 찐한 포옹을 해주었다.
◆
유온이에게 상담을 받은 후 그 세계로 가보려고 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 고등학생이었었다.
한가한 시간이 별로 없는, 휴일 없이 매일 공부해야 하는 그런 고등학생이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초능력을 써서 베리누스 제국을 가지 않고 엄마에게 베리누스 제국의 이야기와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이때까지 나한테 초능력을 숨겨왔던 일은 내가 상처 입을까 봐 숨겨왔던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이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도와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이때까지 미혼모로 날 키워줬으니 감사한 마음이 더 커서 엄마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문제는 아빠다.
엄마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인데 어떻게 임신을 시킬 수가 있어. 안 그래도 미혼모로 살기 정말 힘든 나란데.
그동안 유온이도 나에게 그 세계에 관해서 물어봤다. 대체 그 세계에서 말은 어떻게 통하는지, 외관은 어떤지, 어느 정도로 발전된 세계였는지, 소설처럼 판타지 요소 같은 건 있는지, 다른 세계로 이동할 때 내 옷도 함께 이동했는지.
물어볼 것도 참 많았다.
하지만 유온이가 진짜로 내 말을 믿어준다는 얘기였으니 나쁠 건 없었다.
그에 관한 대답은 그냥 평범하게 한국어로 말이 통했고, 외관은 흔히 아는 서양인과 같은 모습이었으며 역사책에 나오는 중세와 같은 느낌이며 판타지틱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고 내 옷도 같이 이동했다고 대답했더니 유온이는 흥미가 있다는 표정을 하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몇 가지를 더 물어봤는데 난 별로 쓸데없는 일들이라 생각해서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유온이가 또 무슨 과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어차피 내 머리론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으니 그냥 혼자 알아서 생각하게 두기로 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해주자면 내가 사는 세계엔 초능력이 전 세계적으로 공인되어있다.
약 15년 전부터 공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직 사회적 면에서는 어색한 점들이 크다고 한다. 초능력으로 인한 문제도 종종 발생한다고 하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직업들도 많이 생겼다.
‘초능력’이라고 계속 부르고 있지만, 과학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로 사람의 재능의 일부와 비슷하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일어난다곤 하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은 초능력이 훨씬 많다.
예를 들어보자면 그림을 잘 그리는 재능과 같은 면도 그 사람의 초능력이라고 한다. 그러면 초능력이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부를 법도 한데 아직 능력 앞에 초가 붙어있는 호칭인 게 미스터리이다.
나와 같은 경우에는 과학적인 면과는 크게 동떨어져 있는 초능력인 것 같지만 말이다.
◆
그렇게 며칠 후 시간을 비워 다시 가본 베리누스 제국에서 처음으로 만난 건 큰 방에서 정리를 하는 시녀였다(하녀일지도 모른다).
여기는 어디지.
뭔가 고급스러운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게 비싸 보이는 방이었다. 처음에 왔을 땐 풀숲에 있던 것과는 완전 반대였다.
테이블 위에는 깃펜도 있어서 여기가 중세시대라는 걸 알려줬다.
여긴 아무래도 황궁이라고 하지 않으면 납득되지 않을 만큼의 화려함이었다.
아무래도 그 2황자가 내 안경을 자신의 궁으로 가지고 온 것 같다.
“저기, 안녕하세요?”
내가 말을 걸자 그 사용인은 열심히 일하다가 그제야 날 보고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사람은 하얀 곱슬머리를 하고 나보다 좀 작은 키의 귀여운 여동생과 같은 느낌의 소녀였다.
"아, 안녕하세요. 성녀님."
사용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초롱초롱한 맑은 눈빛이 날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은 귀여웠지만 아무래도 날 너무 열심히 바라보는 모습이 성녀라고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저기, 여긴 어디죠?”
“여긴 2황자님의 궁 안입니다.”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그럼 2황자님은 어디 계시죠?”
“2황자님은 지금 1황녀님의 처소에 계십니다. 성녀님이 오셨다고 전달해드릴까요?”
일단 나는 이곳에 관해 잘 모르니 2황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전달하는 것까진 좀 부담된다고 할까.
처음에 여기로 와서 만난 게 2황자랑 아빠뿐이었으니 아무것도 모른 채 막 움직이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내가 가만히 기다리기 시작하니 그 사용인도 내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내가 먼저 그 사용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 이름 물어봐도 되나요?”
“제 이름은 슈크예요. 성녀님은 저와 같은 시종인에게는 존댓말을 쓰지 말아 주세요. 선대 성녀들도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신경 써주셨다고 하지만 성녀님의 위엄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슈크는 신분제 사회에서 당연하게 할법한 말을 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존댓말을 쓰겠다는데 그걸 말려야 하는 사용인이라니.
“신분제 사회에서는 항상 이렇다니까. 그보다 왜 저한테 이렇게 속사포로 존댓말을 쓰지 말아 달라고 설명해주시는 거예요?”
내 말을 들은 슈크는 당황해하며 푹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그게 저는 선대 성녀님들도 포함해서 성녀님들을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은 너무 순수하고 솔직하고 귀여워서 마음에 들었다.
이름도 슈크림이다, 나중에 2황자에게 슈크림이 나랑 같이 다니게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슈크림에게는 편하게 말을 계속 걸고 싶었지만 그냥 신분을 이유로 말을 놓기에는 마음에 걸렸다.
존댓말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쓰는 말이니까. 초면이고 귀여운데 당연히 슈크림에게 존댓말을 써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슈크림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슈크림은 그래도 계속 존댓말을 쓰는 내 말투를 보고 의아해했으나 내가 물어보는 질문에 잘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슈크와 대화를 하던 도중 2황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성녀님? 언제 오셨던 건가요. 바로 오셨다고 전달해주시지….”
“얼마 안 됐어요. 그보다 황자님 모습을 보니 얘기해둘 게 잔뜩 쌓여있는 얼굴이네요. 저와 얼른 물어보고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내 말대로 2황자는 물어볼게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기도 하고 말이지.
2황자는 슈크와 자신을 따라온 사용인들을 물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치 계약을 맺는 사람처럼 물어봤다.
“충분히 생각해보셨습니까?”
“네, 일단 저는 황자님이 황태자가 되시는 거에 동의하고 도와드릴 생각이에요. 제가 도와드리는 게 크게 위험해 보이지는 않고 이쪽에 사는 사람에게 볼일도 있거든요. 그리고 1황자가 별로라고 하기에 도와드리고 싶네요.”
내 속마음은 그냥 놀고 싶은 마음이 더 클지도 모른다.
내 속마음을 모르는 2황자는 내가 협력하겠다는 소리에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너무 기뻐해서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렇게 협력한다고 말하고 나서 내 협력을 받기로 한 2황자에게 먼저 이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보기로 했다.
“먼저 저, 성녀에 관한 얘기나 황자님은 제가 오기 전에는 어떻게 해서 황태자가 될 계획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권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세요.”
“베리누스 제국의 현재 권력은 황제가 다 가지고 있어요. 아무래도 선대 황제께서 성군이라고 평가받으셨고 지금 황제는 선대 황제 폐하의 아들이니까요.
아직 황태자가 정해지지 않은 이유는 황제 폐하께서 아직 황제의 지위에 오른 지 몇 년 되지 않았고 젊어서 정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계신 중이에요. 폐하 외에는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만요.”
유온이가 나에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이 세계를 와본 적도, 본 적도 없는 유온이가 이곳에서 사는 2황자보다 잘 아는 느낌이 들었다.
“성녀님이 저와 같이 다닌다면 기본적으로 귀족이나 평민의 지지율이 어느 정도 늘 거예요. 하지만 그걸로 1황자 형님을 완벽하게 이기기에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됩니다.”
“잠시만요, 지금 1황자에 비해 당신이 밀리는 이유가 뭐죠? 그냥 나이순 때문에 그런가요?”
“1황자 형님은 황후 적통 아들이고 전 황비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제 위로는 1황녀가 있죠. 그나마 나은 점은 황후와 저희 어머님 모두 돌아가셨다는 점일까요.”
나이순으로도 밀리고 태생 순으로도 밀린다. 이 차이는 이런 사회에서 정말 이기기 힘든 조건이다. 대체 어떻게 황태자가 될 마음인 건지.
“그걸 먼저 말씀해주셨어야죠.”
“죄송합니다. 설명해 드리려고는 했는데…….”
“일단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는지 말해주세요.”
“그런데 정말 저를 도와주시는 게 맞죠?”
그의 말을 들은 순간 갑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가 왜 나를 못 믿는지, 내가 당신의 편을 들어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하던 중 깨달아버렸다.
이 세계는 중세시대이기 때문에 현대에서 온 내가 가장 상식적이고 똑똑하다, 게다가 권위도 높은 성녀이기 때문에 모두가 내 말을 들어줄 거란 착각.
자신이 신분이나 시대로 먼저 차별했으면서 신분 따윈 상관없는 척, 오히려 없애야 한다는 느낌으로 모두에게 존댓말을 하는 꼴을 보였다. 자신이 오히려 득을 많이 보고 있는 입장에서.
그래서 그걸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증명하려고 했다.
“네, 제가 증명해드릴게요. 어떻게 증명하면 될까요?”
2황자는 그런 말을 한 날 가만히 쳐다보더니 괜찮다고, 말해준다고 했다. 어떻게 된 심경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믿어주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먼저 저번에 소개해드린 루아니 공작과 저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1황녀…….”
2황자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멈췄다.
“설마 그 두 명이 끝인가요?”
“……네.”
너무 막막한 상황이다. 겨우 2명?
아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방금 2황자가 말한 건 자신이 완벽히 믿고 있는 배신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인물만 말했을 것이다. 응, 분명 그렇다. 그래야 한다.
“그러면 일단 어떻게 할지 대책을 짜도록 해야겠네요…….”
나랑 2황제는 머리를 부여잡고 먼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러다 갑자기 2황자가 뭔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내게 말했다.
“타이밍을 잡기 어려워서 말씀 못 해 드렸는데 성녀의 권위는 황제와 동급이기 때문에 존댓말을 제게 사용하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태자도 아닌 일개 황자에게 존댓말을 쓰는 건…….”
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까지 떠올릴 일이었나. 아까 슈크림도 나한테 이 얘기 이미 했어.
그래도 계속 존댓말을 쓰는 건 이제 기만하는 기분이 들어 그만두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네?”
“그리고 보니 자기 이름도 아직 안 밝히고 있었네요. 저는 매인이라고 해요. 18살이고 학생이라 바쁘기 때문에 이쪽 세계로는 자주 못 와요.”
“저도 같은 나이입니다. 이름은 처음 만났을 때 들으셨겠지만 에일 베리누스라고 합니다, 이 베리누스 제국의 2황자입니다. 성녀님은 공부를 아직 열심히 하시는군요.”
저도 학교 다니기 싫지만 모두 다 학교를 다녀서 어쩔 수 없이 다니는 거예요. 저도 공부하기 싫답니다.
하여튼 내 아이디어에 동갑이라니 더욱 잘 됐다.
“동갑이셨군요. 그러면 잘됐네요. 말 놓으실래요?”
“네?”
“이렇게 생각해봤어요. 아까 성녀는 황제와 동급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저희가 서로 말을 놓으며 친숙한 모습을 보여줘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당연히 성녀와 친밀하고 성녀가 도와주는 2황자가 황제가 되어야 되지 않겠냐는 약간의 마음을 평소에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거죠.”
그야말로 성녀의 친구는 성군이 될 거라 생각하게 만드는 작전이다.
“과연…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 같네요.”
“그럼 먼저 황자님이 말을 놓아주세요.”
“아니요, 성녀님이 먼저 편히 말 놓으셔야죠.”
“제가 그런 말 놓는 데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황자님 먼저…….”
“신분이 낮은 제가 먼저 놓으면 안 되죠.”
“그래도 제가 먼저 하는 건 좀 어색한데.”
“아뇨, 아뇨.”
그렇게 형님 먼저, 아우 먼저처럼 양보하다가 결국 말 놓는 데엔 실패했다.
◆
그렇게 2황자와 실랑이를 한 뒤 우리는 먼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든든한 아군인 1황녀를 먼저 찾아가보기로 했다. 루아니 공작은 전에 한번 찾아가봤으니까.
2황자는 시간이 괜찮냐고 물었지만 일부러 주말에 하루 시간을 내서 온 거라 뽕을 빨아먹고 가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괜찮다고 했다.
황녀라고 하면 난 뭔가 위엄이 있고 아름다운 고귀한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만난 1황녀는 내가 예상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성녀님.”
1황녀는 2황자와 비슷한 외견에 말투도 2황자와 비슷했다. 2황자와 같이 흑발에 상냥하고 친절하다는 말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날 환영해주었다.
“전 메일 베리누스라고 합니다. 베리누스 제국의 유일한 황녀로 주로 황자들에 관해 보조를 맡아 일하고 있답니다.”
메일이란 이름은 2황자의 이름인 에일과 비슷했다.
황녀는 1황녀 혼자밖에 없나?
궁금해져서 2황자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황제의 자식들은 1황녀와 1황자, 자신 이렇게 세 명이 전부라고 했다.
아니 그러면 도대체 왜 1황녀라고 부르는 거야? 1은 좀 빼고 그냥 황녀라고 불러도 되잖아.
2황자를 도와주는 사람 중 1황녀 외에 왜 도와주는 형제가 없나 생각했었는데 애초에 그 형제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황제라면 원래 자식들 주렁주렁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전 매일이라고 해요.”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자 1황녀는 웃었다.
1황녀의 모습을 보고 이제야 발견했는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1황녀는 내가 방에 들어온 시점부터 단 한 번도 눈을 뜬 적이 없다. 들어와서 나에게 말을 걸 때도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는 눈빛을 띠자 1황녀가 설명했다.
“벌써 알아채신 건가요. 네, 사실 저는 앞을 잘 볼 수 없답니다. 어디에 어느 정도 크기의 색깔이 있는지. 그 정도밖에 구분하지 못해요.”
그제야 나는 감긴 눈에 관한 진실을 알았지만 눈을 감고서도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난 소리도 내지 않은 채로 들어왔는데…….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은 2황자가 해주었다.
“누님은 검술에 일가견이 있어서 보지 않고도 타인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도, 1황자 형님도 누님에겐 검술론 발끝에도 못 미치죠.”
처음 왔었을 때 2황자도 검기만으로 내 머리카락을 잘랐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강하다니 1황녀가 갑자기 대단해 보였다.
“에일, 지금은 내 검술 얘기할 때가 아니잖니.”
“네, 누님.”
1황녀는 부드럽게 2황자에게 말했지만 부드러움 안에는 확실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전혀 생활에는 문제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 강해 보였다.
1황녀가 2황자에게 말하자 바로 깨갱대는 부분이 마치 현실 남매 같았다. 진짜 현실에서도 그들은 남매이지만.
“저희 에일 베리누스를 황태자로 만들어주신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 걱정이 돼요. 에일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그에게 집니다. 그리고 성녀님의 안위도 걱정이에요.”
내 안위에 관한 거라면 솔직히 정말 위험할 때엔 안경만 벗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건 없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손대지 않고 얼굴만으로 안경 벗기기 테크닉 연습도 할 생각이었고.
“저로선 별로 말 드릴게 없네요. 전 2황자가 차기 황제가 되는 게 가장 괜찮다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2황자도 자신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저에게 밝혔고요.
하지만 2황자가 그만둔다고 하면 저도 꼭 밀어줄 생각은 없어요. 어디까지나 2황자의 의지고 저는 그걸 돕고 있는 거예요.”
“신기하네요. 성녀님은 아무런 대가 없이 에일을 도와주시는 건가요?”
“……네.”
“어째서요? 성녀님께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인간이라면 이게 옳다는 이유로 대가도 없이 무조건 사람을 도와주지는 않아요. 하물며 성녀님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잖아요.”
내가 2황자를 도와주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심심풀이다. 시간 때우기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퍽퍽한, 공부만 하는 일상생활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즐기러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실 그대로 말할 수가 없다. 이 세계로 와서 당신들을 도와주는 내 행동이 현실 생활에서 도피하기 위해 한다는 행동인 걸 그들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행동하는 와중에 나 혼자 그냥 놀러 왔다고 말해버리면 그들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1황자만도 못한 악인이 되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위선자였다.
“저도 능력이 생겨 이쪽 세계로 오게 되었는데, 기왕이면 이쪽 세계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게 좋잖아요. 저는 위험에 빠지더라도 안경만 벗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별로 위험하지는 않아요.”
내 말을 들은 1황녀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간 채 내 방향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성녀님 설득은 안 될 거 같네요. 네 마음대로 해보렴, 에일.”
이제껏 1황녀와 내 눈치를 보고 있던 2황자는 그제야 안심한 듯 알겠다고 대답했다.
누님 앞에서는 기를 못 펴는구나.
“그럼 1황녀님도 저희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네. 전면적으로는 일단 서로의 눈치를 봐야 돼서 크게 협력은 못할 것 같지만요.”
2황자 말대로 1황녀는 2황자를 신뢰하고 있었고 능력도 좋아 보여 좋은 전력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저희는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님.”
나와 2황자는 아까 있었던 방으로 되돌아가 나와 다시 대화를 나누어보려고 했다.
“잠깐만요.”
갑자기 1황녀가 나를 불러 세우기에 그 말에 뒤돌아봤다.
“성녀님, 혹시 저만 따로 보실 수 있을까요?”
◆
잠시 메일이 나만 따로 불러서 둘끼리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고 왔다. 메일은 내가 사는 세계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휴대전화에 대한 얘기로 수다를 불태우고 왔다.
메일은 정말 멋있는 언니와 같은 느낌이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2황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메일과는 금세 말을 놓고 말았다. 마음속으로도 이름으로 부르고 있고.
그동안 2황자는 내가 처음 왔었던 방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있었네요?”
“네, 이런저런 얘기하다 보니 딴 얘기에 빠져버려서…….”
“그리고 보니 성녀님에 관해서는 언제 공표할지 의논을 나눠보는 게 좋겠네요.”
“제가 이곳에 온 것에 대해 아직 다른 사람들은 모르나요?”
“네. 성녀님에 관해서는 아직 루아니 공작이랑 누님이랑 저밖에 몰라요. 아, 이곳에서 일하는 사용인들도 알겠군요.”
사용인이라고 하니 생각났는데 슈크림에 관해서 2황자에게 얘기해두기로 했는데 까먹고 있었다.
“오늘 처음 왔을 때 본 그 사용인이요, 앞으로 제 담당으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처음 보셨다면 아마 정리하는 역할로 있던 사용인이었을 텐데…….”
“괜찮아요. 전 여기서 별로 하는 것도 없으니……. 어차피 별일 안 할 텐데 무슨 상관이겠어요?”
“성녀님이 편하시다면 불러오겠습니다.”
2황자는 바로 다른 사용인을 불러 슈크림을 데려왔다.
“슈크리, 아니 슈크!”
“앞으로 넌 성녀님 전속 담당을 맡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슈크림의 표정은 매우 밝아 보였다.
“잘 부탁해요.”
내가 손을 내밀자 슈크림은 영광이라고 하며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그래서 친숙하게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줬다.
이렇게 슈크림과 인사하고 나서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성녀에 관한 걸 언제 공표할지 의논을 나눠보도록 할까요?”
슈크림은 방 밖에서 대기시켰다. 이제부터 내 전속이었으니.
“성녀님이 나타나셨다는 걸 공표한 뒤 성녀님이 저를 따르시게 되면 당연히 1황자 형님 측에서는 저를 경계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일단 제가 있다는 걸 비밀로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도 거기엔 동의를 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요?”
2황자는 내 눈을 보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눈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걸 바라봤다.
“성녀님이 쓰고 계신 그 안경 말입니다.”
“이 안경이 왜요?”
“안경은 성녀님만 쓰는, 그야말로 성녀님이 성녀님이라는 표식이지요. 그런데 안경을 벗으시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 버리니…….”
“확실히 얼굴에 쓰는 물건이니 어딜 돌아다니다간 금방 들통 나겠네요.”
“네. 그렇다고 베일과 같은 걸로 얼굴을 감추자니 그런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것도 성녀님이라고 홍보하는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고 대타를 내세워도 어차피 성녀가 2황자 편을 든다는 걸 보여주는 건 마찬가지고 공표하기도 어렵고…….
그럼 일단은 제가 최대한 성녀라는 걸 들키지 않도록 1황자의 눈을 피해야겠네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안경을 벗지 않고 숨기려면 꽤 힘들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럼 혹시, 여기에 1황자의 심복이 있는 건 아니겠죠?”
“1황자 형님은 저를 별로 경계하지 않으셔서 아마도 없을 겁니다. 한명 정도라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1황자 측에 심어놓은 심복은 있나요?"
"네, 당연하죠. 꽤 옛날부터 있었는데 1황자 형님은 모르시는듯합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말에 의하면 1황자는 어지간한 바보처럼 느껴졌다. 2황자를 황태자로 만드는 게 불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가능성도 느껴졌으니 이제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진짜로 심복이 없을까? 2황자는 안전 불감증인가, 아니면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의외로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이때까지 별 승산 없는 걸로 보였나요?”
“아, 네.”
내가 솔직하게 답해줬더니 2황자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그런 모습이 웃겨서 소리 내서 웃었다. 그러자 2황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나와 같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 세계로 넘어 온 지 벌써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난 바쁜 사람이니 슬슬 이 정도 했으면 뽕은 빨아 먹었으니 돌아가야지.
“그럼 전 돌아가 보도록 할게요.”
“벌써요?”
2황자는 더 말을 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네. 제가 바쁜 편이라서. 그럼 다음번에는 황자님께 반말하는 연습하고 올게요.”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성녀님의 안경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또 제 안경이 왜요?”
“성녀님이 돌아가시면 안경이 떨어져서 부서질지도 모르겠다 싶어서요. 전에 처음으로 성녀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거든요.”
확실히 내가 돌아간 뒤에 남는 안경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안경을 벗으니까 안경을 든 채로 원래 세계로 돌아왔으니.
내가 사라지면 이 세계의 안경은 덩그러니 혼자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는 건가.
그러면 큰일이지. 잘못 떨어지면 안경알이 박살 날지도 모르니까.
“안경의 안전에 대해 생각을 못했네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푹신한 소파 위에서 안경을 벗으면 되려나?”
“더 간단한 방법이 있어요.”
“뭔데요?”
2황자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에서 안경을 뺏어갔다.
◇
아, 그러면 됐구나. 이렇게 간단한 방법은 생각도 못 했다. 난 바보인가?
하여튼 나는 내가 안경 쓰기 전에 앉아있었던 내 침대 위로 돌아왔다. 안경은 내 침대 위에 떨어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남이 벗겨주면 내가 현실 세계로 돌아왔을 때 내 안경이 어디 떨어져 있을 줄 모르니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어차피 그쪽 세계로 넘어갈 때엔 내 침대 위에서 안경을 쓸 것 같으므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그냥 계속 안경을 빼달라고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안경의 안전에 관해 생각하고 있던 도중, 엄마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벌써 돌아왔니?”
엄마는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어봤다. 그래서 잠시 속이 뒤틀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세계로 가서 아빠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고 있는데 내가 즐거워 보이나?
그런데 어떻게 보면 즐기고 있는 건 맞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즐기고 있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일을 당해놓고 화도 내지 않는 건가.
그래서 나는 화냈다.
“엄마는 지금 이 상황이 재밌어?”
그런 내 말에 엄마는 왜 화났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어봤다.
“왜 그래? 엄마는 그냥 내가 어렸을 적과 똑같이 왔다 갔다 하는 딸 덕분에 옛날의 나를 보는 느낌이라…….”
“그래서 아빠는 날 줄곧 무시했고, 난 아빠의 생사도 몰랐고?
난 아빠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아기였을 적에 도망간 줄로만 생각했지, 이런 일들을 숨겨놓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무슨 아빠 사진도 없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 그렇다고 엄마가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해준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어렸을 때는 네가 상처받을까 봐 말 못했지, 그리고 커서는 이때까지 이렇게 숨겨온 것에 대해 네가 안 믿고 상처만 입을까 봐 미뤄왔던 게…… 지금이 된 거야.”
엄마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세계를 얘기하는 엄마랑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마치 아빠와 대화한 느낌의 대화였다.
저번에 나누었던 대화와 똑같았다. 그리고 아마 미래에도 이런 대화를 또 나눌 것이다.
나도 객관적으로는 두 분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납하는 건 다르다. 나는 이해는 했지만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비상식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는가? 이성을 가지고 있었으면 이런 일을 벌이면 안됐다.
대체 엄마가 베리누스 제국에 갔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끼리 자식을 낳는 거야?
상식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태어나는 자식의 기분을 헤아리지 않았다.
나는 그냥 엄마와 대화하는 걸 포기하기로 하고 엄마를 방 밖으로 내쫓았다. 나중에 성녀에 관해 공표된 후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엄마와 아빠에 관해 묻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보니 엄마도 내 나이 쯤 되었을 때에 이런 경험을 했을 텐데. 그럼 유온이와 2황자의 말을 따르면 부모님이 도와준 건 선대 황제인 건가?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
날 성녀, 성녀하며 부르는 걸 듣다 보니 놀랍게도 나는 성녀라는 호칭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성녀라는 것에 아직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오늘은 공휴일이라 유온이가 우리 집에 와서 나와 친히 대화를 나누어주었다.
유온이는 정말 오랜만에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거라 나는 좀 들떴다.
"이상하네, 아무리 봐도 왜 이렇게 너한테 상냥하게 대해주는지 잘 모르겠어. 성녀한테 그만큼의 영향력이 있다는 얘기일까."
유온이에게 내가 베리누스 제국에서 들은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려주었더니 유온이는 이런 감상평을 남겼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뭔가 내가 예상한 느낌이랑 다른 말투로 극진하게 날 대하긴 했어.”
생각보다 조상들이 베리누스 제국에서 대단한 일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네 초능력에 관해 몇 가지 말해줄게 있어."
"뭔데?"
"다른 세계로 이동할 때 옷이 같이 이동함으로써 생긴 가능성이야. 대부분의 동물은 옷을 입지 않아. 그런데 너와는 별개로 있는 옷이 같이 이동한다는 건 이 능력을 다르게 사용할 방법을 제시해주는 길일지도 몰라. 첫 번째는 무의식의 이동이야. 처음에 말한 옷이 같이 이동한다고 하면 네 안에 바이러스가 침투되었을 경우 그것은 다른 세계로 같이 이동할 것인가? 만약 같이 이동하지 않는다면 감기에 걸렸을 때 이동한다면 감기 바이러스가 사라져 감기가 그냥 나을지도 몰라. 두 번째는 종합해서 내가 생각한 가설이야. 옷이 같이 이동하는 건 네가 생각하기에 옷이 너의 일부라 생각해 같이 이동하는 것. 다시 말해 너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건 전부 같이 이동한다는 거야. 둘도 없는 네 신체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건 같이 이동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지."
유온이의 설명은 평소와 같이 논리적이고 길었다.
너무 길어서 일부분 내용을 놓치긴 했지만 그래도 신기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휴대전화가 그쪽 세계로 같이 이동된 거구나."
“뭐? 휴대전화? 어지간히도 휴대전화를 좋아하는구나, 휴대전화가 몸의 일부가 됐어. 그거 중독이다, 중독.”
당연하다, 휴대전화는 내 몸의 일부이다. 아마 요즘 대부분의 사람도 그럴걸?
“그래서 내 초능력이 그러면 왜? 그야 옷이나 휴대전화 같은 건 내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니까 같이 딸려온 거잖아.”
“그래서 난 몇 가지 실험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
유온이는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 하얗고 네모난 물건을 꺼내 내게 다가왔다.
“뭔데, 뭔데?”
나는 뭔지 몰라서 일단 무서운 표정을 한 유온이의 반대편으로 뒷걸음을 쳤지만 금세 유온이에게 잡혀버렸다.
유온이는 아동용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비타민을 들고 있었다.
유온이는 그 비타민을 강제로 잡은 나에게 억지로 먹였다. 나는 입에 들어오는 비타민제를 꾸역꾸역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무슨 비타민이야?”
“약국에서 애들한테 주는 그 비타민C야. 익숙하지?”
“근데 이걸 왜 나한테 먹인 거야?”
“내가 아까 설명했잖아.”
언제? 아니 내 초능력에 관한 실험이랑 내가 비타민 먹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지?
“일단 빨리 안경 써봐.”
“안경?”
일단 나는 뭘 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유온이에게 안경이 씌워졌다.
안경을 쓰자마자 보인 건 슈크림이었다.
“슈크, 좋은 점심이에요.”
나는 강제로 안경이 씌워져서 당황했지만 일단 침착한 척 슈크림에게 인사했다.
내가 도착한 장소는 저번에 왔었던 그 2황자의 궁에 있던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성녀님, 혹시 잠옷 차림으로 여길 오신 건가요?”
생각해보니 내 옷차림은 잠옷이었다. 온종일 집에 있느라 유온이가 집에 놀러 와 대화하던 와중에도 그냥 잠옷 차림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실수했다.
“옷을 갈아입고 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아, 맞다.”
슈크를 부를 때 뭐라고 불러야 할지 호칭이 애매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그냥 슈크라고 하면 반말을 하는 느낌이 들어 불편했다.
아니, 그냥 반말을 하자고 할까 하는 마음이 들어 나이를 물어봤다.
"나이가 혹시 어떻게 돼요?"
"17살이에요.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성녀님을 모시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아하, 지나다니는 사람이 시녀인지 하녀인지 구분을 못했었지만 이걸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슈크림은 시녀였구나.
게다가 슈크림은 나보다 한 살 연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면 저랑 말 놓으실래요?"
"네? 그러면 안 돼요. 저랑 성녀님은 신분이 다르니까요……."
"그러면 둘끼리 있을 때만은 안 될까요?"
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라보자 슈크림은 어떻게 할지 망설였다.
슈크림은 아직 순수하고 미성숙해 보여서 1황자 쪽으로 갔으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르겠단 느낌이었다. 엄격하고 딱딱한 내 이미지상의 시녀들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어때요?"
"일단, 성녀님은 옷 먼저 갈아입으시고 다시 오시는 게 좋으실 것 같아요!"
슈크림은 고민되어서 그런지 일단 내게 해야 할 일을 시켰다.
"알겠어요. 그럼 일단 안경을 벗겨주실래요?"
"여, 영광입니다."
슈크림은 안경이 대단한 보석이라도 되는 듯이 손을 벌벌 떨면서 천천히 나에게서 안경을 가져갔다.
그러자 나는 다시 유온이의 앞으로 돌아왔다.
"여기, 안경."
유온이가 내가 이동했을 때 떨어진 안경을 이미 책상 위로 올려뒀었던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늦게 돌아온 거야?"
"미안, 네가 기다리고 있었지?"
"잊어먹고 있었냐."
유온이가 내 팔을 때렸다. 나는 에헤헤하고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보다 이게 실험 결과야."
유온이는 휴지를 내게 내밀었다. 휴지는 노란색 액체로 적셔져 있었고 거품 같아 보이는 것도 있었다.
"으윽, 더러운 색깔이네. 이게 뭔데 나한테 보여주는 거야?"
"이게 네가 먹었던 비타민이야. 네 입속에 들어가서 녹아서 지금 이런 상태가 된 거지. 넌 비타민 먹었을 때 비타민이 네 몸에 흡수되어 내 몸의 일부가 될 거란 생각을 하고 먹었니?"
"아니, 누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비타민을 먹어……."
"그러면 넌 네 몸에 흡수되는 것도 아니고 흡수되지 않는 것도 아닌 ‘무의식'인 상태에서 먹었다는 거지?"
"응. 말하자면 그렇겠지?"
"그러면 무의식 상태라면 다른 세계로 같이 이동되지 않는다는 얘긴가……."
생각에 빠져들듯이 생각하는 유온이는 내가 아는 유온이의 모습과 꽤 달랐다.
보통 같으면 별로 움직이려는 행동을 하지 않을 텐데.
"너 갑자기 되게 활발하다. 너 원래 별로 안 움직이잖아."
"그야 당연하지. 신기한 걸 알아버렸잖아. 네 초능력은 실험해 볼 가치가 있어."
또 즐겁게 얘기하다 보니 슈크림이 생각났다. 슈크림은 내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아까 저쪽 세계로 갔다 오면서 얘기한 애가 있거든? 그래서 다시 말하러 가봐야 할 거 같아. 그런데 옷이 아직 잠옷이네."
"잠시만, 잠시만. 그러면 실험을 하고 가야지. 금방 끝나."
유온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연필꽂이에서 매직을 꺼내 내 팔에 '바보'라고 낙서를 했다.
이거 유성은 아니겠지?
"다음은 네 팔에 쓴 낙서도 같이 이동하나에 대한 실험이야. 알겠지? 꼭 거기에서도 바보라고 적혀있는지 확인해야 해?"
나는 잠옷에서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서 다시 안경을 썼다.
두 번째 실험이었다.
다시 베리누스 제국으로 가면 슈크림에게 다시 반말을 하자고 말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까와는 공기가 달랐다.
똑같은 장소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슈크림과 2황자도 같이 있었다.
"그렇다고 성녀님의 안경을 함부로 만지는 것은……."
2황자가 슈크림을 혼내는 도중 내가 왔나보다. 둘 다 혼내고 혼나는 도중 갑자기 나타나 버린 날 쳐다봤다.
"성녀님, 그 팔에 있는 글씨는 뭔가요? 왜 바보라고……."
2황자가 나보다 먼저 내 팔의 바보를 봤나보다. 저번 실험과는 달리 이번에는 낙서가 같이 나와 이동을 했구나.
아니, 잠시만. 그보다 글씨를 어떻게 읽는 거지? 말이 통하는 건 내 초능력의 보너스라 생각하고 넘길 수 있었는데 글씨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다.
"황자님, 이 글씨를 어떻게 아시나요?"
"아, 역대 성녀님들은 전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셨거든요. 그래서 그 언어를 가르쳐주신 분들도 계세요. 그래서 일종의 교양어로 내려오고 있어요. 귀족들은 대체로 다 배웁니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선대 성녀님들……. 난 소설에서 빙의한 주인공이 왜 자꾸 자신들의 언어로 기록 남겨두는지 진짜 궁금했는데 진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여기에도 암호학 공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려고. 한글은 배우기 쉽단 말이야.
그러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하기 싫은 것들도 닮는다고 하니까. 나중에 미래의 나도 여기 사람들에게 한글을 알려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유온이와 내 초능력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2황자의 양해를 구하려고 했다.
"저기, 황자님. 제가 할 일이 있어서 이쪽 세계로 좀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은데, 이해해주실 수 있나요?"
"성녀님이 움직이시는 거니까 상관없지만 대체 그럴만한 일이 뭐죠?"
"몇 가지 제 능력에 대해 시험해볼게 있어서요."
2황자와 슈크림은 동시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설명하자면 복잡하고 솔직히 나도 뭘 하는지 자세히 몰라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되나 시험해보는 실험이라고 말해줬다.
아까 유온이의 말에는 알아듣는 말만 적당히 맞장구쳐준 거였다. 유온이가 하는 말의 반 이상은 못 알아먹었다고 봐도 됐다.
"그러면 일단 다녀올게요."
2황자가 안경을 벗겨줘 나는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갔다.
돌아가자마자 유온이가 내게 물어봤다.
"어땠어? 내가 생각하기엔 거기서도 쓰여 있었지? 잉크가 바닥에 남아있지 않았거든."
돌아왔더니 유온이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응. 팔에 바보라고 낙서 되어 있어서 2황자가 이상하게 쳐다봤어."
"이번에는 아마 네가 팔에 쓰여 있으니 잉크가 스며들어 지워질 때까지 내 일부가 될 거란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을 거야.
아, 아까도 무의식이긴 했는데 그건 그냥 아무런 생각도 안 했다는 의미고 이건 네가 깨닫지 못했을 뿐 알아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의미야."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
"그래서 다음에 할 실험은 뭐야?"
"이제는 이런 액체 말고 고체로 실험을 해봐야지."
고체? 무슨 작은 물건이라도 가져가 보는 실험을 하려고 하나보다.
유온이는 콘센트에 꽂혀 있던 휴대전화 충전기를 뽑아서 내 주머니에 넣었다.
"휴대전화를 쓰려면 배터리가 있어야지. 그러니 휴대전화 충전기도 네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아?"
요즘에는 충전기도 밖에 돌아다닐 때 필수로 챙기곤 하니까. 뭐, 휴대전화와 같다고 생각하긴 하다.
유온이는 약간 얼떨떨한 나에게 그냥 안경을 또 씌워줬다.
내가 말한 대로 다시 돌아가자 이번에는 슈크림만 있었다.
"황자님은 어디 가셨어요?"
“자기가 할 일은 없을 테니 성녀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게 두시고 황자님은 일하시겠다고…….”
“아하, 그러면 또 이걸로 실험해본 거니 다시 갔다 올게요.”
“네.”
돌아가기 전 확인한 주머니는 묵직한 게 충전기도 그대로 있었다. 역시 현대인에게 휴대전화는 물론 충전도 중요했다. 할 게 없을 땐 당연히 휴대전화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요즘 사람은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할 테지만.
다시 돌아왔더니 유온이는 아까보다 더 흥분상태였다.
“너는 휴대전화 충전기도 네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구나.”
“응. 보기보다 내가 훨씬 더 휴대전화를 사랑했나 봐. 휴대전화 너무 좋아. 휴대전화 만만세!”
“그러면 갑자기 큰 도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시험해보자.”
“이번에는 뭐하게?”
"매인아, 우리들은 일심동체지?"
"갑자기 그건 왜?"
“실험의 일환이야.”
“뭐, 일심동체까진 아니지 않아?”
"아니, 빨리 그렇다고 대답 해. 날 너라고 생각해봐.”
“어째서?”
“그래서 나를 데리고 가줘."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까지 데리고 이동이 가능한 건가?
"널 데리고 내 초능력을 이용해 세계를 이동하라는 소리야?"
"응. 분명 이론상 가능해. 네가 날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동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유온이가 나와 같다는 생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온이는 내게 다가와서 날 꼭 껴안았다.
유온이랑 나는 동일 인물……. 유온이도 나고 나도 유온이다…….
집중하다 안경을 쓰려고 눈을 뜨는 순간 우당탕하며 누군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유온이가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내가 집중하는 동안 유온이가 내 안경을 씌워줘서 이미 베리누스 제국으로 왔나보다.
한 번 만에 바로 성공해버려서 당황했다. 내가 이렇게 집중력이 강했나?
“성공이네, 나는 온전하지 못하지만.”
유온이는 넘어져 있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런 실험들도 생각해내서 성공하다니, 유온이는 역시 똑똑하구나.”
"아니, 내가 똑똑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바보인 거야."
"성녀님, 이 분은?"
슈크림은 나랑 같이 오게 된 유온이를 보고 동공이 좌우로 흔들렸다. 역대 성녀 중에서 이런 이동을 시도해본 사람은 없었나 보다.
"전 하유온이라고 해요. 이것저것 능력에 관해 실험해보다가 같이 오게 되었어요."
유온이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슈크림에게 인사했다. 평소 같으면 정말 어색해 할 텐데 오늘따라 이런 실험을 하느라 평소와 다르게 활기찬 기운이 느껴졌다.
“선대 성녀님들은 이렇게 사람을 데려온 적은 없었는데…….”
조상님들 사이에선 유온이와 같은 친구가 없었나 보다.
내가 슈크림에게 유온이가 어떻게 왔는지에 대한 대화를 잠깐 하는 사이에 유온이는 이미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고 있었다.
“여기는 접객실인가?”
“네. 여러 개 있는 응접실 중에 하나로 이 응접실에 올 만한 위치에 있는 분들은 황자님의 궁에 올 일이 없어서 성녀님 용으로 쓰고 있어요. 오더라도 다른 응접실로 보내버리면 되고요.”
여기 응접실이었구나. 이때까지 내가 숨어있는 이 익숙한 방이 무슨 방인지도 몰랐네.
유온이는 슈크림의 말에 수긍하더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냐고 물어봤다.
“전 2황자의 궁에서 일하고 있는 시녀, 슈크 커브라고 합니다. 이번에 새로 성녀님 전속이 되었습니다.”
슈크림의 성은 커브였구나. 왠지 돌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뭘 돌려야 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황자님은 어디 계세요?”
“아까 내가 실험해본다고 왔다 갔다 해서 일한다고 가셨어.”
“그럼 이러는 건 어때? 나는 안경을 쓰지 않았어.”
당연한 말이다. 유온이는 시력이 나쁘지 않으니까. 나도 시력이 나쁘지 않지만 초능력 발동을 위해 안경을 썼지.
“그래서?”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는 거지, 너 대신.”
“뭐!?”
유온이는 오늘따라 너무 활발했다. 평소 같으면 혼자 틀어박혀 있는 걸 좋아할 텐데 이렇게 나서서 구경하려고 하다니.
“시녀님과 말만 맞춰서 돌아다니면 괜찮을 것 같은데.”
“뭘 할 생각이야. 정신 차려, 유온아. 어디 아프니?”
“난 지금 제정신이고 별일 안 할 거야. 그냥 시찰?”
시찰이라니. 대체 뭘 하려고 밖에 나가려고 하는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뭐, 괜찮겠지. 넌 여기 자주 올 수 있는 입장도 아니잖아.”
“응. 벌써 진학 준비로 여러모로 바쁘니까. 그냥 주위만 둘러보고 올게.”
문제가 생기면 안경을 벗어서 같이 돌아가면 되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어찌어찌 유온이가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로 결정이 났다.
유온이 입장에서는 다른 세계로 관광 온 기분으로 돌아다니고 싶은 걸 거라고 생각했다.
슈크림이 바로 2황자의 허락을 받아오겠다고 나서서 바로 돌아왔다.
2황자에게선 마음대로 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2황자의 허락이 왜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2황자는 이 의견에 동의했다. 슈크림은 유온이와 같이 다니는 걸로 되었으니 다른 시녀가 잠시 내 옆을 지키기로 했다.
“그럼 다녀올게.”
“응, 기념품 사와!”
“뭔 헛소리야?”
유온이는 그렇게 대답하며 슈크림과 밖으로 나갔다.
그와 바통터치로 다른 시녀가 내 곁을 지키러 들어왔다.
처음 보는 시녀는 내게 갑작스러운 부탁을 해왔다.
“성녀님, 혹시 사인 받아도 될까요?”
사인? 여기서는 성녀가 아이돌 같은 존재인가? 성녀가 인기가 있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난 아직 한 일도 없는데…….
“어디에다 하면 될까요?”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그 시녀는 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종이를 받아들고 뭐로 쓰면 되려나 생각하다 처음부터 테이블 위에 예쁘게 장식되어 있던 깃펜이 있던 걸 떠올렸다.
“이거 써도 되나요?”
“네. 여기 있는 물건들은 다 성녀님이 쓰도록 두어진 물건들이니까요.”
중세시대니 깃펜을 쓰는 건 당연했지만 나는 처음 써보는 거라 깃펜이 마냥 신기했다. 펜 끝에 살짝 잉크를 묻히고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필기체로 적었다.
잉크가 조금 번지긴 했지만 처음 쓰는 것 치고 이 정도면 꽤 잘 썼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그 시녀는 내 사인을 받고 굉장히 기뻐해 주었다.
“그런데 사인은 왜 해달라고 하신 거예요?”
“아, 제가 성녀님 팬이라서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도 성녀님의 팬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성녀님들은 전부 제국의 평화를 가져다주시고 신분이 낮으신 분들도 챙겨주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경한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녀의 전설로 동경하는 사람이 많구나.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로선 이런 호의가 부담스럽긴 했다. 하지만 부담스러워도 기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녀들이 전부 착하고 남을 위할 것이라는 그 믿음이 대단해 보였다.
그런 믿음이 종교처럼 변해 ‘성녀’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닐까?
이렇게 다른 시녀와 대화해보고 나서야 다른 사용인에게 신경이 쓰였다.
계속 이 세계로 넘어오면 이곳에서 활동해야 할 텐데, 모두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얼마 안 가서 소문이 퍼질 것 같았다.
사인을 해주고 나니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들어서 그 시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제가 해준 사인은 이제 어떡할 거예요?”
“액자에 넣어서 가보로 만들어 집안 대대로 내려줄 생각이에요.”
이런 수다를 떨었다.
사인을 해준 시녀와 잡담을 하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유온이와 슈크림이 돌아왔다.
“그럼 사인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둘이 돌아오자 나에게 사인을 받은 시녀는 내게 사인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다시 인사하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유온이에게 이 베리누스 제국의 황궁 감상평을 물어봤다.
“여기는 어때?”
“네가 말한 대로의 인상이었어.”
아무래도 유온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잘 둘러보고 온 것 같았다.
“마지막 실험이야.”
아직도 실험이 끝나지 않았던 건가. 그런데 이미 여기로 넘어왔는데 실험을 할 수 있나?
“아까도 마지막 실험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내가 함께 가져온 이 머리끈을 테이블 위에 두고 돌아가자. 네가 날 외관적, 전체적으로 인식해서 내 팔에 끼고 있던 머리끈도 같이 딸려왔으니 나와 떨어지면 이 머리끈도 같이 원래대로 이동할 것이냐에 대한 실험이야.”
내가 가져온 것들을 이 세계에 두고 갈 수 있느냐에 관한 실험이구나.
유온이는 팔에서 머리끈을 빼서 내게 보여주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플라스틱으로 된 리본 장식이 달린 평범한 머리끈이었다.
슈크림은 우리를 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이 무슨 실험을 하는지 아직 이해를 못한 거겠지.
이제 슬슬 갈 때가 왔다. 오늘은 유온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와 준 거라 유온이와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했다. 여기에만 계속 있다면 유온이는 섭섭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이따가 저녁 시간 즈음에 다시 올게요. 2황자님께도 전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내 안경을 툭툭 건드리자 슈크림은 내 안경을 벗겨주었다.
원래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까지 실험을 한 시간은 2시간도 걸리지 않았는데 벌써 지친 기분이었다.
지쳐서 유온이에게 지쳤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 주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온이는?
몇 가지 떠오르는 가능성으론 베리누스 제국에서 돌아오지 못한 것과 멀리 떨어진 상태로 돌아온 가능성이 있다. 어찌 되었건 다시 안경을 써야 했다.
안경을 다시 써보니 그 앞에는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유온이가 보였다.
“나를 데리고 갔어야지…….”
내가 놓고 가버려서 많이 당황했나보다. 이럴 때 유온이는 굉장히 귀여웠다.
“미안. 내 집중력이 떨어졌나 봐.”
유온이는 내게 안겼다.
“돌아가자.”
나는 알겠다고 하고 다시 슈크림에게 안경을 벗겨달라고 했다. 슈크림은 이렇게 안고 있어야지만 같이 가지는지 궁금해 해서 그건 내 심리적인 문제라고 답해줬다.
돌아오고 나니 이번에는 유온이가 넘어지지 않고 내 침대에 안착했다.
“나랑 떨어져 있으면 타인이라고 생각해버리는구나.”
“떨어져 있으니까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아닐까?”
“심리적 거리에 따른 초능력의 효과…….”
유온이는 바로 회복했는지 원인을 파헤쳐보려고 하고 있었다.
겨우 유온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
오늘이 공휴일이라 오랜만에 유온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와 줘서 이러한 실험도 할 수 있었다.
원래 유온이는 내신을 챙겨 수시로 대학에 가려고 인원이 적고 평균 성적이 낮은 학교로 들어가서 1학년 때부터 항상 내신 성적 유지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공휴일에 시간 내서 우리 집에 와주었다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랑 유온이의 성격이 다른데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나도 궁금하다. 나도 유온이와 이런 방법으로 친해질 줄은 몰랐다. 우린 학교도 한번 같이 다닌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유온이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설명해주겠다.
유온이와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다닌 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유온이는 누구나 당연하게 예상했겠지만 이과다. 왜냐하면 수학과 과학 탐구 영역에는 강하지만 국어와 영어 같은 언어 영역에서는 약했기 때문이다.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과를 선택한 거겠지.
그래서 마찬가지로 나도 이과로 가려고 했기 때문에 학원에서 수학과 영어 수업을 같이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이틀은 매주 얼굴을 봐왔다.
유온이의 첫인상은 이상한 애였다. 사실 지금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유온이는 항상 무표정이었다. 그래서 어디서 만든 안드로이드인지 의심한 적도 있다.
하지만 예쁜 아이였으니까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 내 눈길도 끌었고.
유온이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떠드는 웃긴 이야기에도 별로 웃지도 않고 언제나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웃긴 이야기를 할 때 유온이가 웃으면 모두가 유온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학원은 먼저 문제를 푸는 사람이 검사받고 틀린 문제까지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방식이다.
학원이 끝나는 마지막 시간이 수학이었기 때문에 유온이는 항상 빨리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형이 나오는 부분을 공부하기 시작하자 유온이는 점점 늦게 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유온이는 식에는 강하지만 도형에는 약한 것 같았다.
유온이와 말을 트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유온이가 늦게 가게 된 날, 나는 오히려 틀린 문제가 별로 없어 집에 일찍 갈 수 있게 되었다.
천천히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뒤에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유온이가 있었다. 유온이랑 집이 같은 방향이었다고 생각하던 도중 유온이는 나를 재치고 빠르게 앞질러 갔다.
그래서 난 유온이가 나에 대해서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 저렇게 빨리 걸어가는 건가 궁금해서 유온이처럼 발걸음을 빠르게 해보았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집에 도착했다. 유온이는 내 앞에서 아직도 걸어가는걸 보니 나보다 학원에서 더 멀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소리가 들렸다, 멜로디를 노래하는 소리. 누가 부르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내 주위에는 나와 유온이밖에 없었다. 아무도 노래를 부를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 노래는 유온이가 불렀다.
유온이가 부르는 멜로디는 클래식 같았다. 평소와는 다른 게 유온이도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노래를 부르는구나 하는 생각에 말을 걸었다.
“뭔 노래 부르는 거야?”
유온이는 이상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놀라더니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내가 듣는 클래식.”
유온이는 자신이 노래 부른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클래식 좋아해?”
유온이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냥 뭐.”
유온이는 나랑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유온이의 인간다운 면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기뻐서 계속 말을 걸었다.
“우리 집도 같은 방향인데 매일 학원 끝나고 집에 같이 가자.”
유온이는 내 예상과 다르게 알겠다고 했다.
후에 왜 그랬냐고 물어봤을 때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아직 친하지 않은 애한테 바로 거절하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나와 반대로 생각하는 친구였다.
그날로부터 매일 같이 집에 돌아가면서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나만 계속 말을 했지만 점점 유온이도 내 질문에 대답을 길게 하기 시작했다.
학원에서는 문제를 틀렸을 때 얼굴을 눈을 가늘게 뜬 표정을 봤다. 문제를 풀면서 넋 놓는 장면도 봤다. 본인이 말하기에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귀여운 변명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적은 시간 만에 친해졌다. 유온이는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아이였다.
평범하게 웃음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같은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지만 정말 친한 절친 사이가 됐다. 그건 이 이후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
유온이랑 떠들고 같이 밥도 먹고 저녁 시간에 돌아가는 걸 배웅해주고 돌아왔다.
오랜만에 온종일 유온이랑 있게 되어서 기뻤다. 그래서 내가 베리누스 제국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들려줬다.
그리고 보니 두고 왔던 그 머리끈은 어떻게 됐더라? 내 방구석을 여기저기 뒤져봤지만 유온이의 머리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거기에 있겠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유온이가 가고 난 뒤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서 아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안경을 썼다.
방에는 낮과 똑같이 슈크림이 대기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일찍 오셨네요, 성녀님.”
오랜만이라는 농담은 가볍게 무시당했다.
“아까 처음에 하던 말 계속해볼까요?”
“네?”
슈크림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오늘 처음에 왔었을 때 나누었던 그 반말하자는 얘기 말이다.
“둘끼리만 있을 때는 말 놓자고 했는데, 어려울까요?”
“네, 죄송해요.”
이때까지와는 슈크림과 다르게 딱 잘라 거절당했다.
저렇게 계속 거절하는데도 몰아붙이기는 미안했다. 그래서 여기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그럼 저만 친하게 반말을 써도 될까요.”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거니까 당연하죠.”
나는 슈크림의 말을 듣고 바로 반말을 써보았다.
“슈, 슈크.”
“네, 성녀님.”
슈크림은 예상하던 말을 내뱉었지만 나보다 어린 나이에 이렇게 일을 하는걸 보니 기특하고 귀여웠다. 1살 차이였지만.
“슈크림이라고 불러도 돼?”
“슈크림? 귀여운 말이 뒤에 붙었네요. 마음에 들어요.”
슈크림은 다행이게도 마음에 들어 했다. 싫어해도 부를 것 같았으니까 다행이었다.
슈크림에게 반말을 쓰기 시작하니 사용인들에겐 일단 하대를 해야지 자연스러울 텐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반말을 쓰기엔 좀 마음이 걸렸다. 난 뼛속까지 유교가 깃든 한국인이었다.
“그럼 황자님에게 성녀님이 오셨다고 전달할까요?”
그리고 보니 내가 저녁 시간 때 온다고 이미 말해두고 갔는데 왜 2황자는 없지?
“그런데 내가 오늘 왔었을 때 저녁 시간 때 온다고 황자님께 전달하라고 하지 않았어? 여기는 우리보다 저녁 시간이 더 빠를 거라 생각했는데.”
“성녀님이 사는 세계에서는 낮에 저녁 식사를 드시나요?”
“저녁 식사니까 당연히 어둑어둑한 저녁에 먹지?”
“성녀님이 저녁 시간 때보다 빨리 오셨어요. 그래서 아직 황자님은 일하시는 중이랍니다.”
분명 오후 7시가 넘었었는데? 여기선 저녁의 개념이 다른가?
“저녁은 해 떨어지고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 아니야?”
“네, 맞아요. 아무래도 저희 둘은 지금 말이 통하지 않는 거 같은데, 직접 보여드리고 설명할게요.”
슈크림은 그렇게 말하고 방에 쳐져 있는 커튼을 젖혔다.
창문 밖의 풍경은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확실히 저녁 시간은 아니었다.
분명히 유온을 배웅해주고 내 방에서 시간을 확인했을 땐 7시가 넘었었다. 더욱 정확히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확인했다.
휴대전화의 시각은 오후 7시 20분이었다.
뭐야, 이랬던 거야? 나는 휴대전화로 확실히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간단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이 영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국은 우리나라와 9시간 시차가 있다. 9시간까지는 아니지만 이곳도 내가 사는 세계와 시간이 다른 것이다.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내가 사는 한국과 시간이 똑같을 거라 생각했다. 여긴 유럽의 중세풍이었으니 오히려 한국과 시간이 같으면 이상하다.
어차피 이세계라 뭘 해도 이상하지만 일단 그랬다.
“그냥 제가 사는 세계랑 이 세계의 시간이 다른 거였네.”
말하긴 했는데 이 개념을 이해할 수 있나? 그리고 보니 여긴 아직도 천동설을 믿지 않을까. 뭐라고 설명하지.
“아, 그런 거였군요.”
내 걱정이 무색하게 슈크림은 간단하게 이해해주었다. 생각해보니 지동설이든 천동설이든 멀리 떨어진 국가에는 태양을 늦게 보니까 상관없었다. 난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 이 세계는 내가 아는 과학적인 사실과 다르게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그냥 생각을 그만두었다. 더 머리를 굴리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2황자였다.
“일찍 오셨네요, 성녀님. 지나가다가 말소리가 들리기에 들렀더니 벌써 오셨네요.”
다음부터는 이렇게 얘기하지 말고 몇 시간이나 하루 단위로 얘기해야겠다. 그 개념은 동일했었다.
2황자가 오자 나는 다시 황궁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네,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는 어떤 거 같아요?”
“똑같죠. 그런데 성녀님을 계속 숨겨두는 건 못할 거 같아요. 사용인들 사이에서 소문을 막기는 힘들겠더군요.”
“그럼 역으로 그 소문을 이용해보는 건 어떨까요? 성녀의 소문만 무성한 상태에서 저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오히려 2황자 궁에 성녀가 있다는 소문으로 지지율이 오를 수 있고 1황자 쪽에서는 진짜 성녀가 있는 줄은 모르니 섣불리 행동도 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그럼 어느 정도는 이렇게 소문이 퍼지게 두는 게 좋겠네요.”
이 상황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냥 뜬금없이 궁금해져서 물어봤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성녀만 있어요? 성남과 같이 부르는 남자는 없었나요?”
말하고 보니 어색하다. 성남이 뭐냐 대체.
“이때까지 저희 제국을 방문한 성녀들은 전부 여성이라고 들어서 아는 바가 없네요.”
흐~음. 멋대로 의성어를 붙여버렸지만 사실 별생각 없었다.
그럼 내 유전되는 초능력은 여성 한정으로만 유전이 된다는 얘기구나. 아니면 이때까지 첫째가 전부 여자라 여자에게만 유전되었던가.
나랑 2황자가 짧게 대화하던 동안 슈크림은 빠르게 홍차를 타왔다.
윽, 다음에는 홍차 싫어한다고 말을 해둬야겠다.
예의상 한입 마시고 내려놓았다.
“슈크, 고마워.”
2황자는 나의 말에 놀랐다. 내가 반말을 쓰는 걸 처음 봐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러고서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살짝 한숨을 쉬었다.
자신보다 슈크림과 먼저 반말 튼 것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밖에서 사용인이 들어왔다.
“황자님, 갑자기 1황자님이 찾아오셔서 뵙겠다고 하십니다.”
1황자가 갑자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소문을 듣고 바로 찾아왔나.
“1황자 형님은 기분파라 자기 멋대로 움직이거든요. 성질이 급하고 뭐든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독선주의이죠.
성녀님은 돌아가셔서 내일 이후에 와주세요. 오늘은 1황자 형님이 여기서 성녀님의 안경을 찾으러 돌아다닐게 분명합니다.”
나는 여기선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그의 말에 따랐다. 이렇게 빨리 돌아갈 거였으면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다.
◇
다음 유온이와 만나는 날에도 한결같이 유온이에게 베리누스 제국에 관한 얘기를 했다.
“역대 성녀는 여자밖에 없었다……. 그럼 초능력은 여성 유전자로 하여금 유전된다는 얘기구나.”
“아니, 사실 유전되는 자식이 이때까지 여자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따지면 뭐, 딸이 두 명 이상 있을 때 누군가에게 유전될 것이냐? 둘 모두에게 유전되는지도 궁금한데.”
“그거는 첫째한테만 유전된다고 엄마한테서 들었어.”
“안경이 발명되어 보급되었을 때부터라고 생각하면 몇 대 되지 않으니까. 예시가 적어서 잘 모르겠어.”
이렇게 유전 관련된 얘기를 했지만 사실 이건 나와 딱히 별 상관없었다. 이미 나에게 있는 능력이니까.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2황자를 황태자로 만들 수 있을지 조언해줄 수 있어?”
“일단 간단히 내 생각대로 말해볼게. 넌 조용히 있다가 성녀인 걸 발표해도 가만히 있어. 네 이야기를 들어보면 1황자는 아무래도 급하고 답답해하는 성격이니까 1황자를 자극할만한 무언가의 일을 일으켜야 해.
빨리 황태자가 되거나, 아니면 2황자를 제거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하도록.”
“그러면 어떡해? 우리한테는 아무 승산이 없는데.”
“네 말에 의하면 1황자는 멍청하니까 우리는 머리로 이겨야 해. 그러니까 1황자가 2황자를 견제할만한 무언가를 계속하자고 해. 그래서 간단히 말하자면 1황자를 홀로 유인해서 그곳에서 죽여 버리면 돼.
잔인하고 애매모호한 말이지만 그래도 내가 자세히 제시해 줄 수는 없어. 내가 그곳에 직접 사람들을 경험해본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라 정확히 이게 맞는 일이라고는 못 해줘.
네가 내 조언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지는 네가 그곳에 가서 직접 끼워 맞춰야 해.”
죽여 버리라는 말은 직접적으로 잔인했지만 그 세계의 사람들은 중세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원래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알겠어. 유온이는 역시 똑똑하다니까.”
"아니, 내가 똑똑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바보인 거야.
그리고 그 1황자가 거대한 일, 예를 들어서 황제를 암살이라도 해버리면 그에 맞춰서 어떻게 할지도 미리 작전을 세워놔야 해."
확실히 맞는 말이다. 작전을 세워두고 상황이 변해버리면 그 작전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상황에 대처도 못한다.
“일단 2황자랑 얘기를 많이 해둬야겠네. 그래서 이제 따로 놀러 오는 건 어려워?”
“아무래도 그렇지. 공부하고 연습해야 할 것도 많으니까.”
"그럼 그쪽 세계로도 같이 안 올 거야?"
"응. 나중에 언젠가는 갈지도 모르겠다."
아쉬웠다. 유온이와 같이 갔을 때 둘이서 여행하는 기분이었는데.
“힘들겠네. 나도 공부해야 되는데. 아니다, 우울해지니까 이런 얘기 그만하자.”
“그만하자고 하기에는 이미 너희 집에 도착했는데.”
내 집이 눈앞에 보였다.
“언제 왔대?”
“원래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제 도착할지 생각을 하지 않게 되니까.”
하여튼 나랑 유온이는 내 집 앞에서 헤어졌다.
집에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도 이제 대학 준비를 해야 되는데 이렇게 자꾸 다른 세계로 놀러 다녀도 되는 것인가.
그리고 보니 방금 하던 얘기와 전혀 상관없이 든 생각인데 메일은 색깔과 어느 정도의 크기 정도는 시력으로 구분이 간다고 했다.
그러면 그냥 시력이 매우 안 좋을 뿐이지 않나? 안경을 써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세계에서 시력 측정을 할 수도 없고 안경을 제작하기엔 더더욱 힘들다.
또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지만 다음에 베리누스 제국으로 이동할 때에는 메일을 위해 시력측정기를 어떻게 하면 가져갈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전기가 필요하고 엄청 커서 솔직히 저거랑 나랑 동일 인물이라 생각하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시력측정기를 검색해봤더니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어떤 사이트에 간이로 시력검사를 할 수 있는 이미지가 올려져 있었다.
◆
나는 유온이에게 들었던 작전을 2황자에게 얘기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우리에게 승산은 그런 방법 정도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 돌발 상황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나요?”
“일단 1황자가 황제나 황태자가 되도록 두고 상황을 봐서 끌어내리는 게 최선인 거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된다고 치면 1황자 형님이 권력을 잡아서 저를 끌어내리려 할지도 몰라요.”
“그렇네요. 황제가 된다면 그냥 죽여 버리려고 할 수도…….”
“그래도 일단 되게 해두고 방심할 때 바로 처리해버린다는 방법도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이곳의 사람들은 유온이가 말할 때에도 느꼈지만 현대 사람인 내가 보기에는 좀 잔인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게 아직은 잘 와닿지 않는다. 나는 살인에 관해 엄격한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그런지 작전에서는 1황자를 죽이는 것에 동의할지도 모르지만 동의한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그 문제에 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사회에 살면 누군가가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2황자와 의논 후 메일에게도 찾아가 설명했다.
“언니가 하실 건 적당히 중립을 지키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1황자를 유인해 죽일 때 도와주시면 될 것 같아요.”
“음……, 알겠어.”
메일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언니한테 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미리 다운받은 간이 시력검사 이미지를 휴대전화 화면에 띄웠다.
“이게 뭐야?”
“이거는 시력이 얼마나 좋은지 검사하려고 만든 사진이에요. 이걸로 언니 시력을 검사해서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해요.”
나는 사이트에 사용법이 적혀있는 대로 메일에게 시력 측정을 했다. 안과에 가서 한쪽 눈을 가리고 모양을 맞추는, 똑같은 측정이었다.
다행히도 메일의 시력은 크게 나쁘진 않아서 간이 시력검사 이미지로도 시력검사가 가능했다.
메일의 시력은 왼쪽, 오른쪽 두 군데 모두 0.3에 있던 모양은 구분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시력이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시력이 나빴으면 더 가져와서 측정해야 돼서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언니, 언니의 시력 정도면 똑바로 보이게 할 수 있어요.”
“진짜로?”
내 말을 들은 메일은 정말 기뻐 보였다. 그야 자신이 계속 못 봐왔던 앞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건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다.
2황자도 성녀님이 나타나서 다행이라며 메일에게 다행이라고 기뻐하듯이 말했다.
“다음에 올 때 꼭 볼 수 있는 도구를 가져올게요.”
엄마한테 부탁해서 메일을 위한 안경을 맞춰서 가져오려고 생각하고 있다. 안경은 성녀의 증표라 쓰기 어려울 수도 있어서 렌즈도 가져올 것이다.
이대로 메일이 시력이 나쁜 채 계속 앞을 보고 있다면 시력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현대 문물을 들여와서 도와줄 수 있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니 1황자 형님이 소문은 도는데 성녀가 있다는 증거가 정확히 없으니까 성녀님을 찾아내려고 이 잡듯이 샅샅이 찾아보고 다니십니다. 그래서 조만간 성녀님의 존재를 발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 1황자는 정말 성질이 급한가 보네요. 이렇게 빨리 사람들 앞에 드러내야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그거랑 상관없이 처음에 만났을 때 생각해보니 2황자님께선 별로 안 놀라셨었잖아요? 그건 왜 안 놀라신 거예요?”
“성녀님이 나타나시기 전에 이미 선대 성녀님이 찾아오셔서 저와 루아니 공작에게 말씀해주시고 가셨습니다. 언제쯤에 성녀님이 나타나실 수 있다는 걸요.”
엄마가 이미 내가 초능력을 쓰기 전 2황자와 아빠한테 내가 간다는 걸 말해 두었었다는 얘기이다.
또 한 번 마음이 상했다. 왜 자꾸 나에게 비밀로 하고 이런 일들을 몰래 하는 건지.
나는 일단 메일의 시력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준비하기로 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
엄마에게 짜증은 났지만 일단 안경 때문이라도 속을 삭히고 안경과 렌즈를 부탁했다. 메일의 시력은 별로 낮지 않았기 때문에 가게에 있는 재료만으로도 금방 만들 수 있었다.
엄마에게 와서 안경이랑 렌즈를 부탁하는 와중에 이제 와서 엄마의 가게에 관심이 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시력이 좋아서 이때까지 안경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안경사이긴 하지만 내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엄마의 장사 도구였을 뿐이었다.
이런 걸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거지.
안경과 관련되고 나니 안경에 대해 관심이 커져서 이제야 안경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가게에 있는 안경 진열장을 순서대로 훑어봤다.
요즘 사람들은 전자기기 때문에 눈이 나빠진 사람들도 많아서 안경들을 많이 쓴다. 패션으로도 쓰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서 그런지 안경의 종류는 굉장히 많았다.
가게에 있는 안경들을 전부 구경한 뒤에 인터넷으로 바로 검색해서 안경에 대해 찾아봤다.
검색을 해서 나온 안경들에게 내가 시선이 간 건 안경의 안경알이 아니라 역시 안경테였다.
안경테는 정말 대단하다! 나는 안경테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그냥 뿔테안경이랑 동그란 안경 정도만 알고 있었다.
무언가 큰 게 내 머리 위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아니, 거짓말이고 전에 한 번 있었다.
하여튼 그만큼 충격적이고 놀라웠다. 내가 왜 안경에 대해 이때까지 잘 모르고 있었을까. 내 이상형이 안경이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안경이 너무 좋아져서 이제 내 안경도 소중히 다룰 것이다. 그리고 안경이 없으면 이제 살아가지 못할 것 같다. 안경은 내게 초능력을 사용할 수도 있게 해주었으니까.
내가 딱 안경에 빠져드는 순간에 엄마가 메일을 위한 안경과 렌즈를 가져와서 엄마한테 안경에 관해 물어볼 수 있었다.
안경사가 되려면 안경광학과에 진학을 해서 안경사 국가공시를 합격해야 될 수 있다고 한다.
다행이었다, 나는 이과였으니까.
갑자기 이렇게 진로를 정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차피 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목표를 가지고 노력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직업도 그 직업에 대한 무언가를 좋아해야 오랫동안 계속 일할 맛이 날 테니 이게 일석이조인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좋은 내 반응이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게 생기고 그리고 그걸로 하고 싶은 목표가 생기고.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이라 대학교 학과 생각은 미래 얘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했다.
엄마에게 메일을 위한 안경과 렌즈를 받고 나서 나는 렌즈를 껴본 적이 없었으므로 메일에게 설명하기 위해 미리 렌즈를 껴보기로 했다.
설명을 해야 하는데 나도 렌즈를 껴본 적이 없으면 메일은 내가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들을 테니까.
나는 시력이 좋으니까 도수가 없는 컬러렌즈로 껴보게 됐다.
난 렌즈를 평생 껴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었다.
화장실에서 낑낑거리며 렌즈를 눈에 넣어보려고 하는데 역시나 바로 들어가진 않았다.
눈에 렌즈를 가까이 대면 눈이 자동으로 감기고 눈을 손가락으로 강제로 뜨게 하면 눈이 아팠다.
렌즈를 끼는 건 정말 몸에 대한 모순적인 일을 해야 해서 힘들었다. 눈은 눈에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반사적으로 튕겨내려고 했으니까.
온갖 렌즈를 끼는 사람들을 존경하며 그렇게 30분 동안 끙끙댄 결과 왼쪽 눈에 렌즈를 넣는데 성공했다.
인터넷을 참고해보니 30분 정도면 그래도 빠른 편이라고 한다.
그곳에는 눈에 무언가를 넣는 걸 꺼릴 텐데 한참 걸리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이 되었다.
과연 메일은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지 렌즈를 낄 수 있을까?
◇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계속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그들을 왜 돕는지.
그저 재미? 심심풀이? 예전에는 심심풀이로 하는 일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 세계는 대체 뭘까? 내가 지금 거기에 가서 도와주는 게 나에게 가치가 있는 일일까?
그래도 내 마음은 그곳에 가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2황자를 황태자로 만들어주기로 약속도 했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아빠와의 갈등도 있으니까…….
마음이 그 세계에 있으니 이성적으로는 쓸데없는 시간을 허투루 쓰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그만둘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심심풀이라고 생각하고 다니던 내 모습이 무색하게 이미 그 세계는 내게 있어서 심심풀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다 보니 뇌 속에서 많은 매인들이 서로 토론을 나누었다.
‘난 그것도 이해 안 갔단 말이야. 왜 자꾸 책에 빙의한 주인공은 원작에 집착할까.
네가 빙의한 시점부터 네가 빙의한 캐릭터의 행동과 완전 일치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비효과가 일어나 완전히 바뀌거나 가변역사와 불가변역사 이론에 의해 아예 노력하지 않아도 바뀌지 않을 건데.
그냥 뭘 하든 완전히 바뀌거나 원작대로 진행한다는 이론밖에 남지 않는데 왜 그런 쓸데없는 노력을 하는 거야.’
유온이처럼 생각해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만약에 유온이가 빙의했으면 어떡했을지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중세풍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다 보니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슬슬 수능 공부해서 안경광학과를 목표로 공부하고 그리고 유온이는 아마 의대를 갈 거고. 같은 대학교 가면 좋겠다. 대학교 가면 이제 만날 시간이 거리를 이유로 적어질 거 같은데. 지금 벌써 그런 거 걱정하기보다는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리고 보니 유온이의 초능력은 뭐지? 쓴 적도 말한 적도 본적도 없으니까 별 영향 없는 초능력인가보다.’
‘생각해보니 아직 1황자 이름을 모르네. 아직 얼굴도 모르고. 그럼 난 1황자의 뒷담만 계속 들은 건가. 혹시 내가 모함을 들어서 유도당하는 게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니지. 그러면 엄마랑 아빠의 사이도 이상하고 그럴 리가 없지. 그런데 지금 난 뭘 생각하는 거지?’
토론이라기 보단……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는 것에 가까웠다.
“매인아.”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학원이었었다.
내 앞에는 아직 다 풀지 못한 수학 문제집이 놓여있었다.
딴 생각은 그만하고 문제나 다시 풀어야겠다.
그렇게 나는 하던 생각을 접은 채 얼른 문제를 다 풀어서야 겨우 집에 갈 수 있었다.
교실에서 나와 보니 유온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다가 다음 시간까지 해오라 받은 숙제까지 이미 다 풀었어. 오늘 왜 이렇게 늦게 푼 거야?”
“아, 그게……. 데헷☆”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딴 생각에 빠져있던 내 잘못임이 분명했다.
“바보야, 말 뒤에 별 붙여서 변명해도 소용없어.”
역시 유온이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사실 그쪽 세계가 걱정돼서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좀 지나있더라…….”
“조금이 아니라 많이야.”
“하여튼 그래서 늦었어.”
“내 생각에는 굳이 이 바쁠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인데 네가 다른 일을 하는 게 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유온이가 하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난 이제 한창 공부할 시기이고 방금 전처럼 딴 생각을 하다가 문제를 늦게 푼 것처럼 내 실생활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알았다.
게다가 우리 집도 방임주의니까 내가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미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버렸다. 인간관계가 쌓였고 할 일들이 생겼다. 그래서 난 그 세계에 가는 걸 그만둘 수가 없다.
그러니까 슬슬 내가 사는 세계에 더 집중하려고 노력해야겠다. 질질 끌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2황자를 황태자로 만드는데 힘을 써버리면 내 미래가 힘드니까.
“나도 좀 그렇긴 한데, 이렇게 알고 나서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나라면 별로 신경 안 쓸 텐데.”
“그건 너니까 그런 거고. 나는 내버려 둘 수가 없더라고.”
“뭐, 너에 대해선 네가 제일 잘 아니까. 네가 어떻게든 잘 관리할 거라고 생각해.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면 알려줘? 궁금하잖아.”
“알겠어. 이렇게 유온이한테 매번 도움을 받는다니까. 역시 똑똑해.”
“아니, 내가 똑똑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바보인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후 일주일 정도 그 세계로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쪽에서는 성녀의 진위로 소란스러울 시기이고 나도 집중하지 못한 만큼 공부하느라 바빴다.
내가 이제 다시 베리누스 제국으로 가게 된다면 성녀에 대해서 공표하게 될 것이다.
제멋대로인 마음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피해가 없도록 생각해서 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은 좀 긴 게 아닌가 걱정하긴 했지만 괜찮을 것이다. 약속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1황자를 경계하고 아직 성녀인 걸 공표하지 않았으니 괜찮다.
하지만 메일에게 눈에 대해 기대시켜놓고 늦게 가는 거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오히려 이때까지 평일에 시간 내서 그 세계로 갔던 게 신기했다. 학교도 가고 학원도 가면서 공부하느라 바쁜데 그만큼 시간을 내서 다른 일을 하고 싶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
나는 메일을 위해 엄마한테 부탁했던 안경과 렌즈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동안 날씨는 벌써 상당히 더워져서 이제 반소매만 입고 다녀도 더웠다.
다시 베리누스 제국으로 가기 위해서 안경을 썼다. 이젠 내 안경에도 애착이 생겨서 소중하게 다루고 있다.
내 앞에는 익숙한 방이 비쳤다. 익숙한 얼굴, 슈크림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성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보는 슈크림의 모습은 귀여웠다.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귀여울 수가 있는 거지!
“그럼 황자님께 성녀님이 오셨다고 전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이것 좀 메일 황녀님께 전달해줄 수 있어?”
나는 슈크림에게 가져온 안경과 렌즈를 전했다.
“이건 다른 안경인가요? 이건 뭔지 모르겠지만 좋은 물건이겠죠?”
“응. 이 안경을 쓰면 메일 황녀님이 어느 정도 잘 볼 수 있게 될 거야. 이건 렌즈라는 건데 눈에 모양 맞춰서 넣으면 잘 볼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니까 나중에 내가 같이 봐주기 전에는 쓰면 안 되지만. 그래서 안경 쓸 수 있도록 전달해줘.”
렌즈는 꼭 내가 보는 앞에서 써야 했다. 잘 못 다루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황녀님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제야말로 황자님에게 성녀님이 오셨다고 전달하겠습니다.”
슈크림은 그렇게 말하고서 밖에 있던 사용인을 불러 2황자에게 말을 전달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2황자는 금방 왔다.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오랜만이네요, 황자님.”
체감 상으로는 별로 오랜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건 이 세계가 그렇게까지 내게 있어서 필사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아서인가. 그러면 내게 오랜만이라고 말을 건넸던 이들은 나를, 성녀를 필사적으로 원한다는 의미겠지.
“성녀님도 이미 예상하고 계셨겠지만 이제 슬슬 한계가 다가온 거 같아요. 슬슬 폐하께서도 아셔서 정확히 대답을 원하시는 눈치이시거든요.”
언제 공표할지 의논을 나눈 게 쓸모없어진 것 같다. 정작 숨기는 시간이 오래가지 않았으니.
그리고 보니 황제에 관해서는 내가 아직 들은 게 없어서 잘 모른다. 황제는 어떤 사람이지?
“알겠어요. 그런데 공표하고 나서 이제 어떻게 할지가 문제네요. 대체 성녀는 어떻게 공표하고 또 전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죠?”
“성녀님의 등장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릴 거라 생각하고 그 후로는 사교를 위해 여러 파티에 참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성녀님들은 온종일 저희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알고 있으니 파티에 참석하면 영광으로 생각하거나 성녀님에 맞춰서 시간을 정해주실 테니 시간상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등장을 축하하는 파티라니 어감이 조금 이상했지만 이해는 갔다.
“파티의 예의라던가 말투라던가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요?”
“네. 부주의하게 행동하지만 않으면 괜찮습니다.”
2황자랑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누군가가 말로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가 있던 방문이 열렸다.
방문을 연 건 내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형님, 기별도 없이 여긴 웬일이십니까?”
갑자기 들어온 사람에게 그렇게 묻는 2황자에겐 대답 하나 없이 그 사람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사람이 1황자구나. 어머니가 다르다고 하지만 메일과 2황자와는 외견이 닮았다. 머리색은 갈색으로 달랐지만.
“당신이 성녀님이십니까?”
1황자는 예상과는 달리 정중한 말투로 내게 물어봤다. 하지만 들은 게 있어서인지 꺼림직했다.
“아, 네.”
“성녀님, 저는 캘란 베리누스라고 합니다.”
이름이 캘란이었구나. 1황자, 1황자라고 부르고 다니다 보니 이름에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보다 황제의 자식은 3명인데 혼자서만 이름이 돌림자가 아니라니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
“에일, 너는 성녀님을 발견했으면서 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지.”
그렇게 말하는 1황자는 위압감이 강했다. 확실히 체구도 커서 무섭다.
그러고 나서 나랑 2황자를 훑어보더니 자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걸 다 티 나게 행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하는 걸 보니 그렇게까지 멍청이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바보 같아 보였지만…….
“파티 준비는 그럼 네게 맡기도록 하지.”
바로 2황자한테 시키는 모습이 정말 어이없었다.
방금 2황자가 말한 대로의 일이 그대로 나버려서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1황자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1황자가 나가려고 뒤도는 순간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밟고 넘어졌다. 방 안은 조용했기 때문에 웃음을 참으려고 이를 꽉 깨물었다.
옆에 있던 2황자도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1황자는 급히 일어나더니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1황자가 넘어졌던 이유는 머리끈을 밟았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실험하고 있을 때 유온이가 두고 간 유온이의 머리끈. 리본 모양 플라스틱 장식이 달려있었으므로 그걸 밟고 넘어졌나보다.
우리는 1황자가 나가자마자 같이 웃었다.
나는 웃으면서 유온이의 머리끈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도 이 머리끈을 안 치워두고 여기 계속 남아있던 게 신기했다. 내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둔 걸까?
“예언을 하셨네요.”
“그냥 예상한 대로 말했을 뿐인데 형님이 그대로 움직여주셨네요.”
“그러면 이제 1황자가 시킨 대로 파티 준비를 하셔야겠네요.”
“네, 이제 파티에서 성녀님을 모두가 보게 됩니다. 저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성녀님도 그날 입을 드레스나 장신구, 대사도 준비하셔야 됩니다.”
큰일 났다. 무슨 드레스만 고르는데 몇 시간 걸리는 거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대사도 외워야 한다니.
“하, 하하. 적당히 봐주셔야 해요?”
내가 헛웃음을 짓는 데에 2황자도 마주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웃는 걸로 느껴지지 않았다.
2황자는 밖에 있던 사용인들을 불러 날 끌고 가게 시켰다.
“안 돼. 슈크림, 날 살려줘!”
내가 슈크림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슈크림은 웃으며 내게 이렇게 답했다.
“안 됩니다, 성녀님.”
믿었던 슈크림에게 배신당했다.
나는 슈크림을 포함한 사용인들에게 잡혀가 메이크샵 같은 곳에 가게 됐다.
현대와는 다르게 생긴 화장품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난 그곳에 강제로 앉혀져 한 시간 동안 화장을 받았다. 화장 같은 건 귀찮아서 친구들한테 몇 번 받아본 게 다였는데 이렇게까지 화장이 오래 걸리는 건 줄 몰랐다.
그보다 이 시대의 화장품 건강에 괜찮을까?
그렇게 화장을 받다가 겨우겨우 사용인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거울에 그 결과물을 비춰봤는데 거울에 비친 건 내가 아니었다.
대체 누구냐 넌!?
“성녀님이에요.”
내가 마음속으로 말한 얘기에 슈크림이 대답했다.
슈크림은 내가 화장을 받는 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슈크림은 원래 무슨 일을 하던 시녀지?
“그리고 보니 슈크림은 나랑 일하기 전까지는 뭐 했어? 어린 편이니까 차나 간식 같은걸 나르는 역할?”
“주로 정리 업무를 보고 있었어요. 황자님이 보시는 업무의 서류 정리 쪽이요.”
내 생각보다 슈크림은 더 대단한 인물이었다.
“대단하네, 황자님이 일하는 것들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만 일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런가요? 그 후로는 성녀님의 안경을 황자님이 발견하시고 나서부터는 안경을 지키는 일을 맡았답니다.”
그러면 내가 두 번째로 이 세계로 왔을 때 슈크림과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구나. 그러면 2황자한테 따로 슈크림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어도 슈크림이 내게 전속되었었겠다.
“그런데 보통 시녀가 아니라 호위기사 같은 사람이 내 주위에서 지키지 않나?”
“저는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호위기사의 역할도 할 수가 있었거든요. 황자님의 업무를 돕는 일을 하다 보니 당연히 황자님 가까이에서 일하기 때문에 검술을 배웠었어요. 다행히도 재능이 있어서 금방 익힐 수 있었습니다.”
슈크림은 정말 내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것보다 시간은 괜찮으신가요? 벌써 화장 때문에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응. 그런데 파티 날짜랑 시간은 어떻게 맞추지?”
“황자님이 그걸 성녀님께 물어보라고 지시하셨어요. 성녀님이 오실 날짜랑 시간을 알려주시면 그때로 정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파티 준비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려?”
“이미 예상하던 일이라 조금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2주 정도면 준비가 다 될 거예요.”
“그럼 딱 2주, 14일 뒤 오늘 왔던 시간에 올 수 있는데 그렇게 가능해?”
저번에 왔을 때 시간이 내가 살던 세계와 달랐기 때문에 시간을 이렇게 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네. 그런데 성녀님이 할 일이 많겠군요. 이제야 겨우 화장 테스트를 했고요. 그다음 남은 건 드레스, 구두, 장신구 정하기와 황족과 귀족들에 관한 역사와 관계에 관해 익혀두셔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모두에 앞에 드러낼 때의 대사를 외우셔야 하고요, 행동 대처와 예의에 관해 교육을 받으셔야 할 겁니다.”
2황자가 말할 때보다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그냥 성녀 사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2주 동안 다 하기에는 너무 많지 않아?”
“그래도 성녀로서의 격을 맞추기 위해선…….”
평소엔 귀여웠지만 일할 땐 엄격한 슈크림이었다.
“너무 많은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에이~, 나 바쁜 사람이야.”
내가 생떼를 부리면서 사정사정하자 그나마 할 일이 줄어들었다.
입을 옷 같은 건 사이즈만 재서 알아서 맞추도록 하고 기본적인 교육만 간단히 받기로 했다.
◇
그렇게 한창 파티를 위한 교육을 받던 도중 나는 내가 살던 세계에서 나를 위한 일을 했다.
토요일에 있는 엑셀 자격증 시험을 위해 유온이와 카페에서 같이 함수를 외우기로 했다.
같이 가기로 한 카페는 케이크가 맛있다고 유명해서 기대되었다.
“너, 지금 공부할 생각은 없고 먹을 생각만 하고 있지.”
유온이가 정곡을 찔러서 뜨끔했다.
“에이, 공부하는데 맛있는 거 먹으면 좋잖아.”
“하긴, 그건 맞는 말이지.”
“아 맞아, 이거.”
나는 가져온 머리끈을 유온이에게 건넸다.
“어디서 주었어?”
“당연히 저쪽 세계지.”
“그럴 줄 알았어.”
“처음엔 대체 무슨 실험하나 잘 몰랐는데 하고 나니까 알겠더라고. 역시 똑똑한 사람이 곁에 있어야 좋다니까.”
“내가 똑똑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바보인 거지만. 이왕 있는 초능력은 최대한 활용해서 써보는 게 좋잖아. 편견에 사로잡혀서 무조건 이건 이럴 것이다, 저건 저럴 것이라고 미리 정해버리면 그걸로 끝이야. 이왕 초능력이 있는데 최대한 활용해봐야지.”
“응. 나는 만화에서 초능력 써서 순간이동 같은 거 할 때 옷도 같이 따라오잖아. 그런 걸 그냥 판타지 세계의 법칙 같은 걸로 생각했어. 아마 모두가 다 그러겠지. 하지만 초능력이 존재하는 이상 이미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현실이잖아. 네가 한 실험은 만화에서 순간이동 할 때 옷이 어떻게 따라올 수 있을까 생략한 설명에 관한 실험이지?”
“뭐, 그런 거긴 한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한 거니까 그렇게 대단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돼. 그야 아직 밝혀지지 않은 건 궁금하잖아? 그래서 실험해본 게 다야.”
“그런데 이 머리끈 어떻게 생각나서 챙긴 줄 알아?”
“아니.”
“2황자랑 얘기하다가 갑자기 1황자가 쳐들어왔는데 들어와서 2황자한테 화내다가 나가면서 머리끈 밟고 넘어졌다?”
그 말을 유온이는 머리끈을 탁탁 털었다.
“안 웃겨?”
“아니, 웃기기보다는 밟아서 더러워졌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머리에다가 하는 거잖아.”
“그렇네?”
나도 유온이를 따라 머리끈을 탁탁 털어주었다.
얘기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 이름은 허니링베리유니콘 카페. 괴상한 짬뽕으로 만든 이름이다. 그래도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을 훌륭한 작명이다.
문을 여니 종소리가 들렸다.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알록달록한 케이크들이 날 환영해줬다.
가게도 깔끔하고 사람도 적어서 쾌적하게 케이크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맛있겠다…….”
“침은 흘리지 말고.”
진짜로 침을 흘렸나 입 아래를 닦아봤지만 아무것도 없는 맨살만 느껴졌다.
“그리고 저기, 주문하려고 하는데 확인도 안 하고 딴생각하시면 안 되죠, 근무시간인데.”
유온이가 이제 드디어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빨간 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눈길이 갔다.
“…….”
유온이한테 혼난 사람은 계산기 앞에서 시무룩해졌다.
“그럼 이제 일하실 기분이 드신 분? 저는 초코 무스 케이크랑 망고 스무디 주세요.”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유온이 말에 대꾸했으면 뼈를 두들겨 맞아 울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보니 선배는 왜 여기서 일하고 계세요? 고3이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학교라 알고 있었나보다. 유온이가 어떤 애인 줄 아니까 별 대꾸를 안 한 거였구나. 하긴 유온이는 내성적인데 저렇게 모르는 사람한테 시비 걸긴 어렵지.
“나 베이킹 좋아하니까…….”
“이제 여름 다 됐는데 수능도 얼마 안 남았고 그리고 상업적으로 디저트를 만들어서 팔려면 자격증 소유 자격이 어쩌고, 저쩌고.”
뒷말은 내가 잘 듣질 않아서 왜곡됐다. 유온이가 학교에서도 다른 학년이랑 알고 지낸다고 생각하니 유온이의 엄마가 되어서 딸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선배에게 잔소리를 들어놓고 있었지만……. 그래도 잔소리를 한다는 건 그 사람을 걱정해서 해주는 거니까.
그 잔소리를 듣는 사람도 안경을 쓰고 있어서 살짝 관심이 갔지만 이내 유온이가 말을 걸어서 그쪽으로 관심이 쏠렸다.
“그래서 너는 뭐 시킬 건데?”
난 진열장에 있는 케이크를 보고 역대 최대의 고민을 했다. 오늘은 티라미수가 먹고 싶었는데 케이크의 정석은 역시 생크림에 딸기이기도 하고 그런데 저기 있는 블루베리 케이크가 예뻐 보이고…….
“고민되면 그냥 제일 싼 걸로 해.”
이대로 고민해봤자 제자리걸음일게 분명해서 그냥 유온이의 말을 듣기로 했다. 나는 생크림 딸기 케이크를 주문하고 나서 진동벨을 받고서 자리에 앉았다.
“누가 들고 올지 진동벨 전달 게임 하자.”
내 말을 들은 유온이는 정말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싫어. 네가 가지고 와.”
“알겠어.”
진동벨은 금방 울려서 결국 기에 눌린 내가 들고 왔다.
케이크는 유리창 너머로 봤던 모습보다 더 맛있어 보였다.
“그리고 보니 아까 대화했던 여기 직원이랑 아는 사이야?”
“우리 학교의 복장 불량한 선배야.”
유온이는 학교에서 선도부장을 맡고 있다. 게다가 학교 인원수도 정말 적은 학교라 전교생의 얼굴은 다 익히고 있을 것이다.
뭐 그건 그렇고 내 중요한 일은 케이크였으므로 케이크를 한입 먹었다. 그리고 내 혀는 환상의 나라로 가버렸다.
정리해둔 공책을 펼쳐보니 전에 써둔 함수들이 가득했다. 종이 한가득 펼쳐진 수학의 향연에 정신을 놓을 뻔했지만 유온이가 도와준 덕분에 어느 정도 외울 수 있었다.
역시 유온이는 똑똑하다니까.
이 이야기의 후일담은 내가 자격증 합격했다는 얘기로 끝이다.
그리고 다음번에 저 선배와 만나면 유온이에 대해 몰래 물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얼굴을 외워두었다.
◆
시간은 금방 지나 벌써 파티를 하는 날이 왔다.
나는 안경을 쓰자마자 많은 사용인들에게 둘러싸여서 파티 준비를 했다. 사용인들은 옷을 입히느라 바쁘고 2황자는 파티를 관리하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나만 할 짓이 없어서 멍하니 있었다.
“성녀님, 시간 다 됐어요.”
벌써!? 큰일 났다.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다들 귀족들이 와있을 테고 황제도 처음 보니까 너무 긴장됐다.
무엇보다 외운 대로 말할 수 있겠지?
내 손이 카페에 있던 진동벨처럼 울렸다.
“일단 진정하죠.”
언제 2황자가 들어온 거지?
2황자가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정도로 난 긴장하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이런 파티에 익숙한 사람이 오니까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내가 뭔가 잘못하더라도 2황자가 어떻게든 수습해주겠지.
2황자는 내게 손을 올리라고 팔을 내밀었다.
나는 2황자에 팔에 손을 올리고 일어났다.
“후……. 파티장에 가면 메일 언니도 있겠죠?”
“네. 황족과 귀족들은 거의 다 모였으니까요.”
생각해보니 2황자와 같이 들어가면 내가 완전 2황자 편이라는 게 모두한테 알려지는 게 아닌가? 뭐, 2황자가 알아서 어떻게 될지 생각하고 한 일이겠지. 조만간 다들 알게 될 것 같기도 했고.
문 앞에 도착해보니 황제가 밖에서 뭐라고 발표를 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언어로 얘기하고 있었으므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 파티의 주인공인 성녀님의 등장이 있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황제가 아니라 장기자랑 사회 보는 사람인 줄 알았다.
2황자와 같이 장내로 들어가 모두의 주목을 끌어당기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평생 평범한 사람으로 살 거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신선했다.
파티는 부잣집 사람들이 하는 교류 파티와 같은 곳에 간 느낌이었다. 테이블이나 커튼 같이 흔히 다들 쓰는 가구들도 비싸 보였다.
이게 상류사회라는 것인가.
나는 외웠던 대사를 말하면서 버벅거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내 소개가 끝난 뒤 나는 뭔가 상석 같은 곳에서 앉아있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을 걸진 않았다. 그보다 자기네끼리 뭔가 속닥거리거나 어딘가로 가버렸다.
역시 파티는 화려했다. 궁중 악사들이 클래식을 막 연주하고 샹들리에가 화려해서 예뻤다. 그런데 샹들리에는 어떻게 관리하는 거지. 불나면 어떡해.
하여튼 쓸데없는 샹들리에 고민은 그만두고 내 옆엔 2황자가 붙어있어서 가끔 말 거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별로 할 필요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갑자기 황제가 내게 말을 걸었다. 황제와는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깜짝 놀랐다.
“성녀님은 언제부터 이쪽에 오게 되셨나요?”
황제는 내가 생각한 모습과 달랐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여서 그렇게 늙지도 않아서 말하자면 회사에 있을법한 꼰대 성질이 있는 상사의 느낌이었다. 아직 꼰대와 같은 소리를 하는 건 못 들었지만.
“아직 얼마 안 됐어요, 하하.”
나는 헛웃음으로 어색함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성녀님은 선대 성녀님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여기 사람들은 성녀가 유전된다는 걸 모르나? 정확히 말하면 성녀가 유전되는 게 아니라 초능력이 유전되는 거지만.
“네, 조금? 아하, 하하하하…….”
그 후로 황제는 연거푸 나에 관해서 물어봤다.
원래 사는 세계는 어땠냐는 얘기부터 정말 쓸데없는 것까지 물어봐서 버스에서 갑자기 말을 거는 아저씨 같았다.
저 멀리에 앉아있는 메일은 안경을 쓰지 않은 채 눈을 감고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안경은 성녀만이 쓸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물건이므로 내가 줬던 안경을 함부로 남의 앞에선 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전에도 계속 다른 파티에서도 이렇게 가만히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슬퍼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추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강제적으로 춤을 배우게 하다니 이런 사회는 역시 문제라니까.
2황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춤을 춰주시겠습니까?”
큰일 났다. 나는 춤에 대해서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멍청이인가, 분명 파티니까 춤을 추는 게 당연한데.
“저 춤 하나도 출 줄 모르는데요……?”
귀족들이 파티에서 추는 사교댄스란 뭘까. 사교댄스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은가. 왈츠라던가 탱고라든지. 사교댄스 대회 같은 곳에서도 되게 많은 종류의 춤을 추는 거 같던데.
문제는 어떤 춤이던 난 하나도 못 춘다는 현실이었다.
“괜찮아요, 성녀님. 저는 사실 초능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네? 갑자기 여기서 초능력이요?
여기 사람들도 초능력이 있는 건가? 말투로 보아선 2황자 혼자서 가지고 있다는 느낌인데.
“그렇게 쓸모 있는 능력은 아니라 얘기하지 않고 있었지만, 저는 사람의 움직임을 원하는 대로 유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대단해 보이지만 유도할 수 있는 부분이 무의식일 때 정도의 몸짓 일부 정도라 거의 원할 때는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의지가 강한 사람은 그마저도 통하지 않거든요.”
“그러면 그 초능력으로 춤을 추면서 제가 어떻게 움직일지 유도해주신다는 얘기인가요?”
“네. 제 능력은 강제적이지 않아요. 그냥 상대방에게 이렇게 하면 좋을 거 같은 느낌을 줄 뿐이에요. 그걸 따라오는 걸 결정하는 건 성녀님이에요.”
“알겠어요. 그럼 제가 이 파티의 주인공이니까 춤 정도는 춰줘야 되지 않겠어요?”
2황자는 말없이 웃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에 내 손을 올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 반대 손은 자연스럽게 2황자의 어깨에 올려졌다. 이게 유도라는 건가. 감각이 신기했다.
2황자를 따라 춤을 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더니 그가 자신의 초능력으로 유도한 건가. 내 초능력보다 훨씬 더 멋있어 보였다.
“와아, 신기하네요.”
고개를 들어 2황자를 보니 2황자는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난 2황자와 말을 한 적은 많지만 눈을 마주친 게 지금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몸에 힘을 빼고 자신은 춤을 출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편안하게 몸을 맡겨요.”
이때까지와는 달랐다. 2황자와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며 작전과 상관없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는 작전 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구나.
“멋있는 댄스를 출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제야 처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했다. 내 안의 에일에 대한 호감도가 비즈니스 관계에서 친구로 상승했다.
우리 둘은 내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가운데로 나가서 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가 대체 무슨 춤을 추는지는 잘 몰랐지만 마냥 즐거웠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춤을 추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내 손발은 음악에 맞춰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선을 그었다.
에일의 초능력은 나를 아름답게 춤을 추는 성녀님으로 꾸며주었다.
조종당하는 생각은 들지 않고 내가 그렇게 움직이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초능력이었으므로 나는 별로 불쾌하지 않게 춤출 수 있었다.
이때까지의 성격을 봐서 에일이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무의식중 악용이 가능하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니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 사람들도 이렇게 똑같이 초능력도 있어서 그냥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는 역사책에 나오는 옛날얘기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내가 과거의 세계로 시간 이동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나라에서 쓰는 초능력 측정 기계는 객관적으로 초능력에 관해서 문장으로 정리되어 내 초능력에 관해 알려주지만 이제는 전혀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언어로 정의하는 것의 전제부터가 전혀 객관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세계로 이동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다른’이 어떤 다른 세계를 의미하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만약 ‘다른’의 의미가 진짜 과거의 세계라서 과거의 세계로 이동해 지금 내가 과거의 시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이 나라가 쥐도 새도 모르게 멸망해서 역사에 남아있지 않은 거라면? 내 머리 속에서 온갖 만약에 이랬다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떠올랐으나 이내 생각을 그만뒀다.
어차피 이렇게 계속 생각을 해본다 한들 내 초능력에 관해서 내 주민등록증도 잘 모른다. 내 조상도 잘 몰랐을 것이다. 이 세계의 사람들도 모른다. 나도 잘 모른다.
아마, 아무도 모른다.
◆
이제 내 얼굴은 사람들의 뇌리에 이번 대의 성녀님으로 콱 박혔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인지 바로 다음 일정이 잡혔다.
루아니 공작은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로 선대 성녀님과 친했기 때문에 내가 공작의 저택으로 공식적인 방문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후계를 넘겨받는 느낌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걸 왜 루아니 공작이 하는지는 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대 성녀는 엄마지만 루아니 공작은 아빠니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문제는 이곳 사람들은 루아니 공작이 내 아빠인 줄 모른다.
그래서 나로선 지금 좀 곤란한 상태다. 아직 화가 다 안 풀렸는데 억지로 만나야 한다. 사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거절할 분위기도 얘기할 수 있는 사정도 없었다.
아니, 그냥 에일에게 아빠인 걸 밝힐까 고민이 들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이때까지 말하지 않은 걸 그냥 다 말해버리는 것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만나보고 어떻게 할지 일단 정하기로 했다.
파티 후에 나는 임시로 숨어있던 에일의 궁에 있던 응접실이 아닌 다른 거처를 얻었다. 탑은 황궁 가까이에 있었고 역대 성녀들이 계속 머물렀던 탑이라고 한다.
탑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진 않고 5층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곳의 모든 건물들은 2층을 넘는 건물이 엄청 드물게 있었으므로 탑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통 탑은 마법사와 같은 사람들이 머물던데. 성녀는 신전 같은 곳에 머물고.
나로선 여기서 자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큰 건물에서 나 혼자 있다는 게 불편했다. 하지만 슈크림이 따라오고 원래 탑에서 일하던 사람들과도 인사하다 보니 외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탑은 회색 벽돌 같은 문양으로 되어있고 붉은 깃발이 꽂혀있어서 랜드 마크와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탑으로 이사 오고 나서 모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녔다.
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모두 내게 친절하게 인사해주었다. 아무래도 성녀는 없을 때가 많은 사람이라 일이 힘들지도 않을 것이다.
마치 내가 엄청 가끔 오지만 월급을 잘 주는 사장 같은 느낌이겠지.
나는 탑의 중간층인 3층에 있는 갈색빛의 아늑한 방을 내 주거지로 삼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안경을 쓰고 벗는 곳 말이다.
방에는 푹신한 소파와 그 위에 쿠션이 있고 테이블도 내가 쓰기에 넉넉해서 마음에 들었다.
내가 계속 있었던 에일의 궁의 응접실과 비슷한 느낌의 방이었다.
그렇게 탑으로 이사 와서 짐 정리를 하고 있자니(짐이라고 하기엔 별게 없었다.) 메일이 탑으로 놀러 왔다.
“꽤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요, 언니. 놀러 와줘서 고마워요.”
나는 메일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러자 메일은 눈웃음으로 답했다.
나는 메일을 탑의 응접실로 데리고 왔다. 탑에 있는 방중에 제일 고급스러운 응접실이다.
탑에 이사 오고 나서 처음 맞는 손님이기 때문에 극진하게 대해주려고 했다.
들어오고 나서 사용인들을 물리니 그제야 메일에게 안경을 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제 쓰셔도 돼요, 안경.”
메일은 내 말을 듣고서야 안경을 꺼내서 써봤다. 안경을 쓰고 눈을 똑바로 떠서 주위를 둘러보는 게 방금 처음 안경을 쓴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안경을 쓴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렸다. 내 주변 사람 중에서는 친구나 엄마밖에 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안경을 쓴 사람이 주위에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메일의 안경을 쓴 모습을 보니까 확 느껴지는 기분이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
중세시대의 고급스러운 옷과 근대 문물의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이었다.
뭔가 안경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 흥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으니 안경에 관한 얘기는 이쯤 끝내도록 하자.
“안경 받으시고 처음 쓴 거예요?”
“쓸 시간이 없었고 다른 사람의 시선도 있었으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메일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래서 어때요? 잘 보여요?”
“응. 신기하네. 게다가 성녀님과 같은 안경이라니 너무 기뻐.”
다행히도 시력이 잘 맞았나보다. 간이로 시력을 측정한 게 다라서 걱정했는데.
“그러면 나중에 안경을 썼을 때 조금이라도 잘 안보이게 되면 꼭 말해줘야 해요? 그리고 같이 줬었던 렌즈도 가지고 있어요?”
메일은 렌즈도 꺼내서 내게 보여줬다.
“이거는 눈에 넣어서 쓰는 안경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이건 겉으로 보기에는 티가 안 나니까 안경과 달리 쓰는 방법을 익히면 언제나 쓰고 다녀도 괜찮아요.”
내 말에 메일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하지만 렌즈는 사용 방법이 중요해요. 일단은 제가 6개월 정도 사용 가능한 렌즈로 가져왔어요. 6개월, 그 180일 정도요.”
시간 개념처럼 개월도 다를까 봐 부가 설명을 붙였다.
“렌즈를 끼는 방법은 일단 손을 먼저 씻고 일단 여기서 이렇게 꺼내요.”
나는 직접 렌즈 통에서 렌즈를 꺼내며 설명해줬다. 렌즈를 검지 위에 올려놓고 끝부분이 이렇게 돌출되어있는 게 반대로 뒤집힌 거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눈에 끼면 돼요. 그 외에 주의사항은 잘 때랑 목욕할 때와 같이 물과 많이 닿는 상황일 때는 꼭 빼고 이 렌즈 통에 들어있는 액체로 렌즈를 씻어야 해요.”
나는 이렇게 주의사항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나서 메일에게 해보라고 했다.
메일은 내가 다시 넣어둔 렌즈를 꺼내서 왼쪽, 오른쪽 눈에 각각 렌즈를 넣었다.
넣었다? 벌써 성공했다고?
나도 집에서 실험해봤을 땐 30분 만에 성공했는데. 인터넷 보니까 그것도 빠르게 하는 편 같았는데 대단했다.
“렌즈는 그럼 걱정 없겠네요.”
이걸로 메일이 렌즈를 못 끼면 어떡하느냐에 대한 내 걱정도 덜었다.
“그리고 보니 언니는 초능력이 뭐예요?”
“초능력? 무슨 이야기야? 뭐, 염력으로 컵 같은 물건 들고 그러는 거? 그런 건 없는데.”
초능력이 없다고? 그러면 에일은 대체 뭐였던 거지? 이 세계에는 아직 초능력에 관해서 밝혀지지 않은 건가.
그러면 에일은 혼자서 초능력을 자각했겠구나. 생각보다 에일이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줄 알아서 이대로 착착 진행해 나가면 되겠다.
“모르시면 괜찮아요.”
메일도 자신의 초능력에 관해 알면 좋을 텐데. 나라에서 쓰는 초능력 측정기기를 훔쳐 올 수도 없으니 아쉬웠다.
그래도 자각하지 못한다는 건 능력의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면 혹시 이 세계에는 모든 사람이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편견을 가지지 않고 생각해야지. 모든 나랑 내가 살던 세계 기준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시간 개념과 같이 나도 모르는 착각에 빠지는 거다.
메일에게 렌즈에 대해서 알려주다 보니 벌써 시간이 꽤 지나서 메일은 돌아갔다.
그러면 이제는 슬슬 루아니 공작저에 가야 될 타이밍이다. 시간이 아니라 타이밍으로 생각하니 중세 유럽에 맞는 고급한 느낌으로 말한 기분이 들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루아니 공작저에 날 데려갈 에일이 왔다.
“방금 메일 언니 왔다 갔는데~.”
“아까 앞에서 마주쳐서 인사하고 왔어요.”
에일은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얘기했다.
파티 이후로 에일과 나는 사적인 대화를 많이 나눠서 진짜 친구와 같은 관계가 됐다.
이제야 서로에 대해 알게 된 느낌이랄까. 아직 존댓말을 쓰는 건 여전하지만.
“그러면 가도록 할까요?”
에일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파티 때와 똑같았다.
“네, 네.”
당연히 나는 손을 잡았다.
에일이 타고 왔던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향했다.
루아니 공작저는 전에도 에일과 같이 간 적이 있으므로 익숙했다. 하지만 전에는 안경을 가리느라 급급해서 밖을 쳐다볼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내가 성녀인걸 알고 있고 마차도 누가 봐도 여기 성녀님 타고 있습니다라며 홍보하는 외관을 갖추고 있어서 나는 내 마음껏 바깥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밖을 쳐다보다 보니 뭔가 멋있는 건물이 나와서 에일에게 무슨 건물인지 물어봤다.
“와아! 저 집은 뭐예요?”
“저기는 1황자 형님이 쓰시는 궁입니다.”
뭐라고? 아직도 황궁 안이었다는 말이야? 괜히 황제가 아니구나, 괜히 제국이 아니야. 이때까지 지나가면서 봤던 연못과 큰 건물들이 내 뇌 속에서 지나갔다. 그래서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거구나.
창문을 열고 구경하고 있었더니 추워져서 그만 창문을 닫았다.
“으으, 그리고 보니 오늘은 좀 쌀쌀하네요.”
“이제 점점 더 추워질 거예요, 곧 겨울이니까요.”
“네?”
설마하니 시간처럼 계절도 다를 줄이야. 내 쪽은 이미 여름인데 여기는 추워서 이제 안경 쓸 때만 겨울옷 꺼내서 입고 와야 하나 걱정이 들었다. 추운 건 질색인데…….
“여기 겨울에는 어느 정도로 추워요?”
“으음, 눈 올 때가 제일 추운데 맨손으로 다니면 손이 얼 거 같은 정도예요.”
일단 눈이 온다는 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싫다…….
“전 겨울이 제일 싫어요.”
“저도 겨울은 추우니까 싫습니다.”
“저희 의견이 통하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런데 여기는 히터도 없을 텐데 겨울에 추우면 난방을 어떻게 하지? 여긴 온돌도 없잖아.
“여기는 겨울을 어떻게 지내요? 장작으로 벽난로에서 불을 피우나?”
“기본적으로는 그렇죠? 당연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따뜻하니까요.”
추워 죽겠다.
“하하하하, 따뜻하겠네요.”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추우니까 롱패딩을 입고 오자. 그리고 손난로도 들고 오자고.
◆
아빠를 만나고 나서는 별 얘기 안 했다. 아빠는 그냥 요즘 엄마를 못 봤는지 엄마의 근황을 물어볼 뿐이라 그냥 안경원에서 안경 잘 팔고 있다고 얘기했다.
아빠에게는 자세히 말해줄 마음이 없었다.
중요한 건 2황자에게 내가 네 자식인 거 말해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아빠는 2황자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한 고민은 시간 낭비였다.
전에 왔을 때에는 분명 눈치 없이 우리보고 아는 사이냐고 물어봤었는데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가. 그러면 에일은 정말 배려를 잘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분위기를 파악해서 넘어가려고 그런 말을 꺼냈을 테니까.
“알고 있었어요?”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루아니 공작님의 딸이라는 걸요.”
“아, 네. 성녀님은 공작과 닮으셨어요.”
“제가요?”
나도 그야 처음 봤을 때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남의 입에서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황자님 말고도 다른 사람도 이 사실을 아나요?”
“아니요, 저만 알고 있을 겁니다. 공작이 제게만 알려줬거든요.”
“아, 그렇군요. 공작이랑 많이 친한가 봐요?”
“아무래도 저를 지지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후계자에 관한 문제도 제가 조언을 했고요. 공작은 계속 결혼하지 않은 채 후계자만 있을 뿐이거든요.”
“공작에게 후계자가 있어요?”
“네.”
후계자라니, 후계자라니! 당장 보고 싶었다. 왜 이때까지 내게 아무도 후계자가 있다는 얘길 안 해준 거야.
외동인 나는 엄마와 단둘이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동생이 갖고 싶었던 적이 한둘이 아니다. 후계자는 따지고 보자면 내 동생과도 같은 존재니까 보고 싶었다.
양동생이 인성이 쓰레기만 아니라면 정말 아껴줄 자신이 있었다.
“그 후계자라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에일은 내 질문을 듣고 공작에 관한 질문 대신 후계자의 질문을 하는 거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보다 4살 많고 공작의 후계자니까 검술에도 일가견이 있고요, 좀 무뚝뚝한 사람이네요. 공작과 비슷한 분위기죠.”
동생이 아니었네, 오빠였네. 갑자기 급 우울해졌다.
친구들한테 오빠에 관한 험담을 엄청 많이 들어서 오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오빠에 대한 나쁜 감정들이 쌓여있었다.
그보다 오빠라고 하니까 나한테 무신경했던 아빠가 이 사람 때문에 내게 무신경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생인가 생각했을 때의 기분이 반전됐다.
아빠한테는 이미 양자식이 있으니까 난 필요 없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심술궂은 말이 나왔다.
“제 주위는 생각보다 검술에 관련이 많네요. 후계자도 검술에 관련이 있고 루아니 공작도 검, 메일 언니도 검, 황자님도 첫 만남이 검술로 제 머리를 벤 거였고요.”
“그건 제가 일부러 한 게 아니라…….”
에일은 사과하느라 내게 쩔쩔맸다. 에일은 생각보다 놀리는 맛이 있는 친구였다.
“나중에 그 후계자랑 만나게 해주실 수 있나요?”
“네, 당연하죠.”
이렇게 성녀에 대한 공표도 끝났으니 난 이제 이 세계에서 뭘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 이제 전 뭘 하면 되죠?”
에일은 내 질문에 대답 대신 두 손가락으로 편지를 하나 꺼냈다. 벌써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우리가 사이좋다고 생각하다니, 생각하다니!
물론이지, 이렇게 친한 친구가 한명 더 생기다니 기뻤다.
이젠 장난도 좀 치고 그런 사이가 되었으니까.
“이곳에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는 에일에게서 편지를 바로 뺏어갔다. 바로 편지를 펼쳐보니 편지지는 뭔가 화려한 모양으로 장식되어있기는 한데 뭐라고 적혀있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언어야? 못 읽는 언어를 제게 보라고 주시다니요, 황자님.”
“설명해 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뺏어가셨습니다, 성녀님.”
에일은 그렇게 내가 빼앗아갔던 편지를 다시 가져간 뒤에 편지를 읽고 내게 설명해주었다.
에일이 설명해준 편지는 티파티의 초대장이라고 한다. 아까 메일이 탑에서 나갈 때 나와 티파티에 같이 가겠다고 말하는 걸 까먹어서 에일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티파티!
귀부인이랑 영애들이랑 서로 차 뿌리고 돌려 까고 그러는 곳!
그러나 영애는 본래 윗사람의 딸을 높여 부르는 단어로 내가 제일 윗사람이니까 영애라고는 부를 수 없다. 그러면 레이디!
“갈게요.”
“어, 얼굴이 가까워요.”
너무 가고 싶은 나머지 에일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말았다. 에일은 내가 너무 얼굴을 들이밀어서 놀랐는지 얼굴이 빨갰다.
그나저나 티파티라니 그 소문의 티파티, 너무 기대된다.
“그래서 그 티파티는 언제예요?”
“성녀님이 정기적으로 오신다고 약속하셨던 그 일요일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에일은 잘생긴, 명함 뿌리고 다니는 영업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면 누님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에일은 마차에서 내려서 손을 잡아줬다. 언제 도착했던 거지? 시간 개념을 잊어버린 채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면 저는 여기서 가보도록 할게요.”
“네, 잘 가세요.”
에일은 인사하고서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티파티를 간다는 게 신나서 손을 붕붕 흔들며 에일을 배웅해줬다.
너무 격식 없나? 뭐, 상관없지만.
◆
내 첫 번째 티파티는 나(성녀)의 사교계 데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탑의 사람들은 발에 불똥이 튄 것처럼 급하게 준비했다.
내가 시작하자고 한 일이지만 난 한가하고 다른 사람들이 더 바빴다.
하지만 난 갑자기 곤란에 처했다.
“맞다, 파티가 있으면 옷을 새로 맞춰야 됐지…….”
그 짓을 또 해야 하다니. 수치만 재는데도 지쳤었는데 체력이 저질인 고등학생한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이번에는 곧 겨울이 되니까 하얀 색상으로 맞추도록 해요. 눈이랑 어울리니까요.”
나보다는 슈크림이 머리카락이 하얘서 더 눈이랑 어울릴 텐데.
잠시 슈크림에게 하얀 의상을 대입해봤더니 눈의 여왕이 따로 없었다.
“색깔은 솔직히 상관없는데 그냥 내가 별로 안 움직였으면 좋겠어.”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지 않고 살아요. 이번이 사교계 데뷔니까 의상에도 힘을 줘야죠.”
슈크림이 데뷔라고 하니까 뷔페가 생각나서 배고파졌다. 게다가 슈크림 이름이 슈크림이라서 더 배고파졌다.
“배, 배고파…….”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어디에서는 막 코르셋 조인다고 파티 전에 못 먹게 하던데 거식증으로 토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고 파티에 오는 거 아냐? 너무 무섭다 이 중세 사회!
“사람은 말이야, 원한다면 충분히 먹고 옷도 마음대로 입을 자유의 권리가 필요해.”
“성녀님은 이미 그러시고 계시는데요……?”
확실히 내가 먹을 거나 내가 입고 온 현대 의상으로 지적받은 적은 없지.
“그, 그렇지?”
“그러니까 격식에 맞는 의상을 만들어야죠. 파티에서 의상은 기본 예의니까요!”
정론이다. 돌려줄 말이 없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슈크림을 비롯한 사용인들에게 또 끌려 나갔다.
“배고프니까 먹을 것 좀 줄래?”
“네, 성녀님.”
아까 슈크림에게 들은 대로 난 호의호식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의 나 너무 좋게 살고 있는데?
슈크림은 내게 간단한 크림빵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우걱우걱 먹으면서 사용인들이 하라는 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끌려갔으면서도 배고파서 먹을 걸 먹으면서 준비하다 한두 시간 만에 겨우 하얀 드레스와 보석을 맞추고 도망쳐 나왔다.
난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데 필사적이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느라 탑 밖으로 빠져나와서 좀 달렸더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아, 환장하겠네.”
그래도 다행이다. 일단 안경이 있으니까 누구나 날 성녀라고 알아볼 테니 위험에 처할 걱정은 필요 없었다.
“저기, 성녀님?”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가 마차에서 내려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마차를 보니 안게 있다. 돈이 많구나. 부자고 귀족이구나.
역시 어느 세계든 돈이 중요하다. 조선 시대 때도 귀족이 돈 없어지니까 신분도 사고 팔고 하지 않았는가.
그건 그렇고 나한테 말을 건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사실 저번 파티에서 본적이 있는데 보고서도 잊은 얼굴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금발에 왕자님 같은 이미지가 카사노바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 사람, 사람 여럿 울렸겠는데?
외관이랑 상관없이 난 이 사람을 몰랐으므로 누군지 물어봤다.
“저기, 누구세요?”
“아, 죄송합니다. 저는 케이스 루아니라고 합니다.”
케이스? 이름이 보관함이래, 하하 완전 웃겨.
아니 그것보다 성이 루아니잖아. 이 사람이 에일에게서 들었던 아빠의 후계자인가?
“안녕하세요. 전 성녀예요.”
이 사람이 그 후계자라고 하길래 날카로운 말이 나갔다. 그나저나 나한테는 왜 말을 건 거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건이 뭔가요?”
그는 내가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 보였다.
“성녀님이 아무도 대동하시지 않고 혼자 길거리에 돌아다니고 있어서요. 혼자 이렇게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마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러면 이제 어떡하죠?”
“제가 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길도 모르고 사람도 없었으므로 그냥 태워다 준다 해서 그가 타고 온 마차에 타기로 했다.
그는 날 에스코트해서 마차에 태워줬다.
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마차에 타서 탑까지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방 쪽에서도 굳이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지루해서 바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슈크림이 나한테 달려왔다.
“성녀님,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나도 도망친 걸 지금 절찬리 후회 중이야…….”
“네? 아무튼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이분이 날 발견해서 데려다주셨어.”
“아, 다행이네요.”
슈크림은 그와 그의 수행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들은 별일 아니라며 말하곤 돌아갔다.
이렇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건 참 오랜만이다. 1황자한테도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는데. 하긴 1황자는 나에겐 간접적인 인물이고 케이스 루아니는 직접적인 인간이니까.
이제 계속 마주칠 텐데 어쩌지?
자꾸 고민하다 보니 뇌에 과부하가 걸렸다. 이제 그만 고민하기로 하고 시간도 슬슬 돌아갈 때가 되어 슈크림에게 인사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
오늘 자 내가 얻은 교훈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대로 하다가는 큰코다칠지도 모른다.”였다.
◆
티파티는 여태 도망치면서 맞춘 하얀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가게 되었다.
내 피눈물이 담긴 의상일지도 모른다.
이건 쓸데없는 상식 얘기인데 한국에서 원피스라고 부르는 옷은 본래 영어로는 원피스라고 불리는 옷들도 드레스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는 모른다.
티파티에는 같이 가자고 먼저 얘기를 꺼낸 메일과 마차에 타고 가게 되었다.
“성녀님, 그렇게 기대돼?”
“당연하죠. 처음 가보는 거잖아요.”
“그 말을 들으면 레이디 리파인도 좋아하겠다.”
어이없지만 이때까지 티파티를 기대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때까지 어떤, 누가 주최하는 티파티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제야 레이디 리파인이 이 파티를 주최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의 저택에서 파티가 이뤄지겠다고 알았다.
“레이디 리파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후작의 외동딸이고 사교계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이라서 제가 같이 먼저 가자고 했던 거예요. 성격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특이한 사람?”
“특이한 사람?”
메일에 말에서 특이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귀족인데도 불구하고 내 상상 그 이상을 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도착한 곳은 보통 귀족의 집이라고 하면 생각 날 만한 정원이 있고 적당한 크기의 분수가 있는 큰 저택이었다. 여기서 크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크다는 얘기였지 황궁에 비하면 엄청나게 작은 수준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있었다. 정문에서 이곳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성녀님과 황녀님.”
사용인들은 이런 파티가 익숙한 듯이 여기저기 빠르게 이동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일하는 모습이 체계적이었다.
이번 티파티는 슬슬 추워졌기 때문에 실내에서 이루어진다고 들었는데 정원에 온실 같은 건 정원에서 보이지 않았다. 온실은 아직 이 시대에선 개발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럼 저택 안에서 하겠네.
티파티는 실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내에서 하게 된 기념으로 저택을 먼저 소개해주고 티파티를 시작한다고 한다.
매년 이렇게 해왔다고 메일이 설명해줬다. 매년 저택을 소개해주면 나 말고는 아마 다 저택에 관해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이런 설명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대단했다.
저택 입구까지 다가가자 그 레이디 리파인을 볼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빨간 머리에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메일이 특이하다고 했으니 그야말로 빨간색답게 악역 같은 느낌의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주위에 티파티에 참석한 레이디들이 줄줄이 같이 서 있는 것도 그런 느낌이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오셨네요, 성녀님. 절 기억하시나요? 저도 성녀님의 등장을 축하하는 축하 파티에 참석했었답니다.”
미안하지만 그때 정신이 없어서 내게 다가와서 인사했던 사람들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 아마도요?”
“어차피 바쁘셔 보였으니 기억할 리가 없죠~. 황녀님도 오랜만이에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았던 건가.
“네, 여전히 잘 지내시는 것 같네요, 레이디 리파인.”
“그러면 이걸로 다 모였으니 이제 저택 내부를 소개해드리도록 할게요.”
외관과는 다르게 수다스럽고 털털한 사람이었다. 말의 속도가 빨라서 랩 하는 줄 알았다.
레이디 리파인을 따라가 들어간 저택은 확실히 부잣집과 같은 기운이 풍겼다. 황궁이나 탑은 부잣집이라기에는 너무 규모랑 이미지가 달라서 신기하기만 했었다.
레이디 리파인은 자신의 집을 자세하게 설명해주면서 돌아다녔다.
“이 방은 저희 아버님이신 리파인 후작께서 쓰시는 집무실이에요. 궁에서 일하고 돌아와 서류 업무를 여기서 보고 계시죠.”
이런 레이디 리파인이 설명하는 상태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는데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기 처음 방문해서 이렇게 설명해줘도 신선해서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리파인 후작도 이런 성격이라면 국무회의 같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다.
이렇게 둘러보니 이 저택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호텔과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저기 다양한 용도의 방이 많았고 사용인들도 활기차서 전체적으로 저택이 기운 넘쳐 보였다.
레이디 리파인이 자세히 설명해주기는 했지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려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겨우 설명을 마치고 한 시간 반이란 시간이 지나서야 우리들은 드디어 티파티를 시작했다.
티파티는 저택 가운데에 있던 식당 같은 곳에서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티파티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어색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느낌이었다. 어색하고 지루해서 잘 뻔했다.
하지만 다과는 맛있어서 처음에는 몇 개 주워 먹다가 나중에는 눈치 봐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입안에 쑤셔 넣었다. 아무도 못 봤겠지?
차도 홍차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내가 다과에 심취하고 있던 도중 내 흥미를 끌 만한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보니 레이디 리파인, 약혼자님과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그건 바로 치정과 관련된 얘기인 것으로 보였다.
세상에서 남의 얘기 훔쳐 들을 때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 중 최고로 꼽히는 주제이다.
“아, 연락은 잘 없지만 그럭저럭 지내고 있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얘기를 갑자기 꺼내다니. 내가 당연히 모르는 얘기인 줄 다들 알고 있을 텐데 눈치를 주는 건가? 그런 일이 있을까 봐 메일과 같이 온 건데.
실제로 눈치를 주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겠지만 무섭다, 사교계……!
레이디 리파인의 말을 들은 사람은 대놓고 흐응~이라면서 코웃음을 쳤다.
내가 무시당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라 즐거웠다. 이제부터 서로 돌려 까기로 말하는 말싸움의 시작인가!?
하지만 코웃음을 똑똑히 들었을 레이디 리파인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사교계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는 거구나. 포커페이스가 대단했다.
말하는 것도 털털하고 속도 털털해서 메일이 특이한 사람이라고 설명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현대에서 살았으면 직업이 갬블러였을 것이다.
내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메일이 귓속말로 물어봤다.
“레이디 리파인이 왜 사교계에서 유명한지 이제 알겠어?”
“으음, 포커페이스를 잘 하고 험담도 잘 넘겨서요?”
메일은 내 평가에 놀란듯해 보였다. 뭔가 틀렸나?
“아니, 그가 유명한 이유는 바로 눈치가 없어서야.”
눈치? 방금 그건 포커페이스가 아니라 그냥 눈치가 없어서 자신을 험담하는지도 몰랐다는 얘기인가.
“신분은 후작 영애이고 차기 후계자이기 때문에 높은 편이지만 눈치가 없어서 딱 이용당하기 좋다고 여겨진 거야. 그래서 모두가 파티에 참가하며 친해지려고 하는 거지.”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그런 소설 주인공에게 초반 구해지는 그런 조연과 같은 느낌을 풍기는 성격이었다.
악역이 아니라 주인공과 친해질 조연 같은 사람이었구나.
“그걸 가족들은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 거예요?”
“그런 깊은 얘기까지는 나눠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몰라.”
이런 얘기를 듣고 레이디 리파인을 쳐다봤다.
첫인상과는 완전히 달라진 레이디 리파인이 즐겁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래서 외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되는 것이다.
결국엔 난 별 얘기도 하지 않은 채 티파티가 끝났다.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아서 다행이었다.
티파티가 끝나고 방문한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 나는 가지 않고 레이디 리파인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남았다. 메일도 먼저 돌려보내고 난 뒤였다.
“성녀님? 왜 안 돌아가시고 왜 아직도 남아계시나요?”
그냥 바로 눈치가 없어서 걱정되어서 말하고 싶었다고 말해버리면 이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레이디 리파인은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단 다른 말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레이디 리파인은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 일단 여기 서서 계속 대화하기는 그러니 다른 방으로 가실래요?”
“아, 넵.”
레이디 리파인은 나를 둘이서 앉을만한 의자가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그래서 성녀님은 여기에 혼자 남으셔서 자신에 관한 걸 물어보시려고 한 거예요?”
레이디 리파인은 자신이 생각해도 그건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눈치 없다며. 전혀 그렇지 않은데?
“사실은 아닌 거 알고 계시네요.”
“당연하죠. 바보도 아니고 그런 걸 물으러 저한테 오진 않죠.”
이 사람 연기 천재인가? 아까 드라마 보는 거 같다고 생각한 게 다 연기여서 진짜 드라마라니. 모두가 연기에 다 속아 넘어간 거구나.
여기 여우주연상 하나 주세요.
“성녀님은 저를 걱정해서 남으신 거군요?”
“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 말은 다른 사람들도 제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얘기겠네요.”
“그런데 일부로 숨기고 계신 거 같은데 저한테 이렇게 말해도 괜찮나요?”
“딱히 숨기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말을 안 할 뿐이지. 그리고 조용히 있는 게 이득이기도 하고요. 성녀님은 착하신 분이니까 이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초면인데 성녀라고 착하다고 자신에 대해 이렇게 술술 말하다니 이쪽 세계 사람들의 성녀에 관한 믿음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대화해본 레이디 리파인은 자신의 주위에 이득이나 손실이 되는 부분을 잘 생각하는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레이디 리파인은 유온이와 비슷한 과로 보였다. 외향적이다는 점이 달랐지만.
“저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다들 저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접근해요. 매번 비슷한 사람들만 접근하는데 제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죠. 은근슬쩍 뭔가 가져가려고 한다니까요?”
“그런 사회니까요.”
“네, 맞아요.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제 걱정해주셔서 이렇게 말해주시는 성녀님은 역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네요.”
내가 과연 무언가 이득을 얻기 위해 대화하는지 아닌지 아직 판단이 서기 힘든 대화량인데.
“그래도 아까처럼 약혼자 얘기 같은 말을 할 때면 따끔하게 말해주셔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제 약혼자 얘기요? 그게 어딘가 문제가 있는 얘기였나요?”
어딘가 이상했다. 방금은 눈치가 빨랐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그만큼 약혼자와 무슨 큰일이 있나?
“아까 약혼자에 관해서 얘기하니 다른 사람이 코웃음을 쳤잖아요.”
“네, 그랬었죠. 얼마나 자신도 약혼자를 가지고 싶었으면 그랬을까요…….”
이건 뭐지? 눈치가 없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제가 눈치가 좋아진 이유는 역시 계획적으로 살아서인 거 같아요. 아까 이득을 얻으려고 접근하는 사람들 얘기를 했었잖아요. 그 사람들 덕분에 일을 할 때 숫자 같은 것들에 집착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도 잘 정리를 해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돼서 알아채 버리는 거 같아요.”
이제야 이해가 갔다. 눈치 스탯을 전부 전략 쪽에다 뺏긴 거구만.
방금 전 유온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건 취소다.
“그러면 제 눈치에 관한 얘기는 여기까지 해두고 제 티파티는 어땠나요?”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네, 물론이죠.”
“처음이라서 신기하고 재밌긴 했는데 지루하긴 했어요.”
“원래 귀족들의 대화라는 게 다 그렇죠.”
나는 레이디 리파인이 친절하게 대해줘서 마음에 들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믿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쁘지는 않은 일이라 별 생각 없었다.
“레이디 리파인, 저는 당신의 이름 쪽을 모르는데 성씨 쪽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제 이름은 앤이에요, 앤 리파인.”
이름을 앤이라고 들으니까 느껴왔던 인상을 포함해 별명이 바로 지어졌다.
그 별명은 바로 빨강머리 앤이었다. 레이디 리파인은 바로 빨강머리 앤이었던 것이다.
“레이디 리파인께선 굉장히 재미있으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정말요? 다른 사람한테서는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럼 저희 친구로 지내보지 않을래요?”
그는 벌써 나와 친해진 느낌이었다.
“네. 갑자기 티파티에 오게 되어서 걱정했는데 친구를 사귀게 되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친구끼리는 반말을 쓰는 거예요. 알겠지?”
앤은 벌써 날 친구로 취급해주었다. 성녀에게 이렇게 반말을 갑자기 쓰는 당당함이 그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먼저 반말을 쓰자 난 자연스럽게 반말로 대답할 수 있었다.
“이제 날 이름으로 불러줘, 이름! 그리고 보니 성녀님은 이름이 뭐였지?”
“내 이름은 매인이라고 해.”
“매인? 신기한 이름이네. 하지만 난 성녀님이라고 불러야 해. 왜냐하면 내가 계급이 더 낮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계급 사회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나보다.
“그럼 난 앤이라고 부를게.”
“응!”
앤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말괄량이 같은 성격이었다.
이곳에서도 친구가 생겨서 기뻤다. 나도 마음 탁 터놓고 쓸데없는 얘기를 할 친구가 이곳에서도 필요했으니까 비록 눈치가 없더라도 수다스럽고 사랑스러운 앤은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려고 하교하는 중이었다. 나는 학원을 다니느라 야자를 하지 않으니까 저녁 시간이 되기 조금 전의 시간대였다.
학교와 집은 좀 걸어가야 되는 시간이 있어서 나는 딴 생각을 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아무 생각이나 하면서 가던 도중 길에서 만났다. 저번에 유온이와 갔던 카페에서 일하던 유온이의 선배를.
그리고 보니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 그냥 적색 머리에 안경을 쓴 외관만 알고 있었다.
안경? 그리고 보니 안경을 쓰고 있던 사람이었지. 안경이라 하니까 갑자기 되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안경은 최고다.
하여튼 그 사람이 보여서 난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안경을 쓰고 있고 유온의 선배였으므로.
“저기, 안녕하세요?”
그 선배도 책가방을 매고 있는걸 보아하니 학교 끝나고 바로 나온 모양이다.
“유온이 친구였던 사람?”
다행히도 카페에서 난 별말 안 해서 선배는 날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배는 날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선배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랑 말하는 게 어색해 보였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굳이 계속 말을 붙였다.
“저기, 유온이는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요.”
“무서워.”
“네?”
무섭다니. 아직 이 선배는 유온이와 그렇게 친하진 않은 건가? 딱 내가 처음 유온이를 봤을 때 안드로이드 같다고 생각한 감상평과 비슷했다.
“그리고 잘 도와줘, 무섭지만.”
후에 들은 말로 선배도 유온이의 상냥함을 알고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은 감정적인 면이 부족하고 눈치가 없다고 많이들 말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은 그런 감정적이고 눈치를 보는 면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면이 더 큰 것일 뿐이다. 감정적인 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상처를 안 입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유온이는 감정적이고 눈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무시하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면이 앞서는 것일 뿐이다.
내가 그 뒤를 더 말해보라는 손짓을 하니 이어서 말했다.
“선도부장이라 맨날 내 옷이 이상하다고 잡지.”
그제야 선배의 옷차림을 확인해봤는데 확실히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대충 입고 다니니까 유온이에게 걸릴만하다고 생각했다.
유온이는 학교 내에서 인원이 단 둘이서 운영되는 선도부의 부장이기 때문에 매일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모든 학생들의 복장을 검사한다.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키지 않으면 무조건 잡을게 분명하다.
유온이 머리카락이 제일 잡을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또…….”
“또?”
선배는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아니야.”
아니라고 부정하면 더 묻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말해달라고 졸라봤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물어보고 싶은 기분이 들거든요?”
“그러면 선생님에 관한 얘기 들은 적 있어?”
“선생님? 선생님 얘기는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데……?”
“모른다면 됐어. 말해도 잘 못 알아먹을 거야.”
선생님과 무슨 충돌이라도 있었나?
이런 말을 하는 선배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아 맞다, 선배 이름은 뭐예요?”
“백천야.”
“저는 매인이라고 해요!”
천야 선배는 안 물어봤는데 왜 갑자기 혼자서 말하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사람도 유온이와 같이 사람 사귀는 데에 서툰 사람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감사의 인사를 마친 뒤 다시 집으로 가는 길로 향했다.
유온이네 학교 사람들은 다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학교 그 자체가 특이하기 때문이다.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을 정도로 인원이 작은, 마치 시골 학교처럼 인원이 적은 학교다.
하지만 연극부가 유명해서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2군으로 연극 지망생이 반, 나머지는 놀러 학교 다니는 애들이 반. 이 둘에 속하지 않는 내신을 따려고 들어간 소수의 사람이 바로 유온이다.
그래서 방금 천야 선배는 어떤 쪽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베이킹을 좋아해서 카페에서 일할 정도인걸 보니 저 선배도 미래에 관해 열정 있게 노력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부러워졌다.
그리고 보니 유온이와 안 만난 지 꽤 오래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학원 덕분에 일주일에 이틀은 보는데 저번 주에는 유온이가 학원을 오지 않았다.
메시지로 이유를 물어봤었는데 개인적인 일이라고 말해서 굳이 자세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유온이가 무언가를 숨기는 건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래도 이번 주에는 볼 수 있으니까!
◆
나는 앤이 나도 파티를 한번 열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그 조언에 따라 나도 간소한 파티를 열기로 했다. 사실 내 취향대로 파티를 한번 즐겨보고 싶어서 열었다.
열게 된 파티는 입식 파티로 먼저 탑의 1층 홀에서 음악가들의 음악을 감상하고 먹고 떠들다가 시간이 되면 다들 야외로 나가서 불꽃놀이를 구경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무조건 홍차는 뺐다.
자세한 계획은 내가 세우지 못하고 슈크림이 세워줬지만 말이다.
역시 넓은 건물에 산다는 건 참 좋았다. 미래에는 꼭 돈을 벌어서 건물주가 되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불꽃이 이 세계에서 존재했다. 조선 시대에서 총 같은걸 사용했으니 그렇게 신기한 건 아닌가?
초대장은 어쩔 수 없이 예의 상 백작 이상의 지위를 가진 귀족 가족들에게 전부 뿌리게 되었다. 그 아래의 귀족들은 연줄이 있거나 뭐 그러면 알아서 같이 왔겠지.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보낸 사람은 메일과 에일은 당연하고 그 외에는 앤이랑 케이스 루아니, 1황자하고 앤의 티파티에 참석했었던 사람들 몇 명이 있었다.
루아니 공작은 뭐, 무시했다.
1황자는 대체 왜 오는 거야. 아니, 이유는 알겠다만 안 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새로 맞춘 옷을 입으며 사색에 잠겼다.
이번에는 사실 무도회 같은 게 아니고 음악을 듣는 고상한 파티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쳐다볼 때 마음대로 파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이런 음식을 먹으려면 천문학적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여기서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 한다.
절대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파티를 연 것이 아니다, 츄르릅.
슈크림은 이번 파티를 준비하면서 제일 많이 도와준 오늘의 MVP이지만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게 슬펐다.
하지만 슈크림은 내게 괜찮다고 해주었다.
“괜찮아요. 음악이랑 불꽃 관리도 해야 해서 바쁘거든요.”
슈크림은 정말 천사다.
준비를 다 마치고 슈크림과 대화하던 도중 차례차례로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고 곧 시작할 시간이 됐다.
이렇게 별로 한건 없었지만 직접 파티를 준비하는 게 엄청나게 힘든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내가 참석할 때도 지쳤는데.
나도 이런 사람들 모여서 즐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사람은 안 하던 걸 갑자기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파티 같은 건 이제 가지 않을 생각이다. 너무 힘들다.
어찌어찌 시간이 다 되어서 파티를 시작했다. 메일과 에일은 황족이니까 지위가 높아 늦게 들어올 것이다. 1황자를 빠트렸는데 그도 동일한 이유이다.
그래서 먼저 앤을 찾기로 했다. 나한테 이런 짓을 시킨 장본인이니.
앤을 찾으려 눈을 굴려보니 케이스 루아니가 보였다. 그래서 일단 패스하고 다시 찾았다.
앤은 와인을 마시며 혼자 서있었다.
벌써 와인을 마시다니. 난 미성년자라 못 마시는데. 그 맛이 궁금했다.
그의 주위에서는 무언가 비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다가가 앤을 불렀다.
“앤!”
내가 앤을 부르며 다가가자 앤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후작 영애이신데 이렇게 무시당해서야……. 본인은 눈치도 못 채고 있고. 그래도 이용당하는 데엔 도가 튼 성격이라 다행이지.
앤은 저번과는 달리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목의 선이 드러나 우아해 보였다. 드레스도 머메이드 드레스 같은걸 입고 있고. 그래서 그런지 빨강머리 앤이라는 호칭이 이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와줘서 고마워. 머리 묶으니까 잘 어울린다.”
“응, 내가 파티를 열라고 했는데 당연히 와야지.”
“나한테 왜 그랬어…….”
“뭐가?”
“파티 여는 거 너무 힘들어서 나는 이제 이걸 마지막으로 은퇴하기로 했어.”
“파티 여는 게 힘든가?”
그야 앤은 파티를 자주 여니까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전문가가 힘들지 않다고 해도 난 힘들다고…….
그렇게 파티 여는 게 힘들다는 투정을 하고 나서 어차피 나도 같이 다닐 사람이 없고 앤도 지켜줄 겸 같이 있기로 했다. 앤은 혼자서도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괜찮지 않았다.
약혼자라는 사람은 대체 뭘 하는 건지!
그렇게 얼마 안 있어서 메일과 에일이 왔다. 남매끼리 아주 사이가 좋아 보였다. 둘이 같이 온 걸 보니까 갑자기 그들은 약혼자가 없는지에 관한 생각이 들었다.
둘과 인사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에게 파티에 관한 칭찬도 들었다. 내가 한건 별로 없지만 그래도 내가 총 책임자이니 뿌듯했다.
음악가들이 음악이 아주 절정으로 연주를 시작하기에 나는 앤과 같이 본격적으로 음식 탐구에 나서기로 했다.
내가 준비한 음식이지만 평소에는 이런 많고 비싼 음식의 종류를 먹기 힘드니 최대한 많은 음식을 먹어둘 계획이었다.
앤은 나보고 매우 웃긴다고 해주었다.
가장 먼저 다가간 테이블은 디저트 테이블이었다. 디저트 말고도 주식과 같은 음식도 있었지만 영양분이나 음식 순서에 상관없이 그냥 몸이 이끄는 대로 먼저 갔다.
나는 사실 마카롱을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마카롱은 양에 비해서 비싼 편이기 때문에 자주 못 먹었다. 그래서 여기가 참 좋았다.
여기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모두 수제작으로 과자를 만들기 때문에 가격이 비슷비슷해서 마카롱을 많이 사둘 수 있었다. 신난다!
게걸스럽게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예의를 지켜서 먹기 시작했다. 앤은 그런 나를 보고서 웃었다. 앤은 안 먹는 건가?
“앤, 앤은 디저트 안 먹어?”
“난 음악을 듣고 있는 중이라 끝나면 먹으려고. 나는 예술 분야에도 관심이 있으니까. 파티를 열다 보니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이 가더라고.”
앤은 자신이 흥미가 있는 분야에서만 엄청나게 능력을 드러내는 타입이구나. 그래서 저번의 티파티에서도 다과가 맛있었구나.
“음악 다 끝나면 다 같이 밖에 나가서 볼게 있어서 못 먹을 걸?”
“뭔가 준비한 게 있구나?”
앤은 그게 뭔지 기대된다며 그제야 마카롱을 하나 잡아서 먹었다.
“달고 맛있네. 내가 먹은 마카롱 중에서 중상위권이야.”
난 인사만 해봤지 잘 모르는 탑의 주방장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생각해보니 나처럼 이렇게 마음대로 생각 없이 음식을 먹는 건 나에게만 허용된 특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귀족 여자들은 보면 허리가 붙는 드레스를 입는데 그러면 외양을 꾸미는데 어쩔 수 없이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
그러면 다이어트 하느라 굶고 먹고 토하고 거식증 걸리고 건강이 망가지고 인생이 망가지고…….
정말 여자들이 살기 힘든 시대이다.
“앤, 혹시 다이어트 같은 걸로 안 먹는 건 아니지?”
“에이, 누가 요즘 건강도 신경 쓰지 않고 굶고 다녀. 건강이 망가지지 않게끔 음식을 조절하는 식이요법이 있어서 다들 괜찮아.”
괜스레 이게 더 악질이란 느낌이 들었다.
“관심을 저쪽으로 돌리시고 본인은 음식을 먹으려고 파티를 준비하신 겁니까?”
에일이 어느새 메일과 같이 내 앞으로 다가와서 장난쳤다.
“겸사 겸사죠. 맛있는 거 먹으면 행복해지잖아요?”
내가 했으면서도 참 맞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먹으면서 행복해하고 있잖아?
“그건 맞는 말이지, 에일. 저 웃음을 봐.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는 표정이지?”
“맞는 말이라서 더 웃기네요.”
둘은 날 놀리고 있었지만 음식 때문에 행복한 기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봐주었다.
“이제 슬슬 음악이 끝나겠네요.”
에일이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음악이 끝났다. 한참 절정일 때 먹기 시작했으니 지금쯤이면 끝날만 한 시간이다.
나는 다음으로 준비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박수를 짝짝 쳐서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지금부터 다 같이 탑 밖으로 이동할게요. 여러분을 위해서 제가 준비해둔 게 있습니다.”
사람들은 뭘 준비했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다.
좋았어, 이게 바로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지.
사람들은 안내에 따라 차례차례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혼자 나가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대체 언제 왔었는지 모를 1황자였다.
“성녀님, 아까 바쁘신 것으로 보여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그리고 할 얘기가 있어서요.”
아까 내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왔나보다. 파티를 열어놓고 음식 먹는 날 보고 대체 뭔 생각을 했을까.
“무슨 일인가요?”
“다음에 꼭 성녀님과 단 둘이서만 만남을 요청하고 싶어서요. 가능할까요?”
“그러면 제가 다음번 오는 날에 오고 나서 연락을 드리도록 할게요. 탑은 황궁이랑 가까워서 금방 오실 수 있으시니까요.”
어쩔 수 없이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으니까.
“영광입니다.”
1황자는 그렇게 말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뭔가 잘생긴 사람이 꼬리치는 기분이라 묘했다. 그래도 난 얼굴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역시 내 정신력이란 대단하다.
내게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1황자는 밖으로 향했다. 모두가 밖에 나가고 나서야 나도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모두 탑 밖의 정원에 모여서 뭘 하려나 기대하고 있었다.
“많이들 기다리셨죠. 지금부터 곧 시작할 예정이니 기다려주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대기하고 있던 슈크림에게 시작하라는 표시를 보냈다.
신호를 보낸 후 얼마 안 있어서 첫 불꽃이 팍하고 터지기 시작했다. 큰 소리가 들리고 화려한 불꽃이 터지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의 관심은 불꽃에 집중되었다.
초겨울 정원에서의 불꽃놀이 쇼, 마치 동화에 나오는 분위기라 내가 준비했지만 불꽃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람들도 다들 예쁘다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이번 파티는 성공이었다.
“성녀님 저…….”
이번에 말을 건 건 케이스 루아니였다. 이로써 파티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내가 기억하는 모든 사람이 내게 말을 건 게 된다.
“무슨 일인가요?”
이번에도 1황자와 같이 대꾸했다. 둘 다 좋은 감정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이렇게 말을 걸게 된 건 성녀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루아니 가문 가주님이 선대 성녀님과 친하셔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래서 뭐라는 거야? 왜 횡설수설하게 말하는 거야 뭐라는지 못 알아먹게.
그래서 다시 물어봤다.
“그래서 왜 말 거신 거죠?”
나는 웃지만 웃는 게 아닌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가주님이 선대 성녀님과 친하셔서 저도 성녀님과 친분을 쌓는 게 좋은 거 같아서요.”
당사자 앞에서 말 걸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을 걸었단 걸 말하면 대체 나보고 뭘 어쩌란 건지.
“아, 예.”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당신과 별로 친해질 생각 없단다.
“그러면 다음에 고민 상담을 받아주실 수 있으신가요?”
방금 무슨 대화를 했는지 잊어버렸나? 방금 친해지자고 해놓고 고민 상담을 해달란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대체 무슨 고민 상담을 받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지긴 했다.
“나중에 연락을 해드릴게요.”
그래서 수락해버렸다. 궁금증이 이겨버렸다.
“당신은 뭐 어떻게 부르면 되죠?”
“제 이름인 케이스 뒤에 경이라고 붙여 불러주시면 됩니다. 저는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거든요.”
이러한 대화를 하고 작위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자랑하는 말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 마음속이 꼬였는지 꼬인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케이스 경은 그렇게 내가 친구 하자는 말을 받아준 줄 알고 기뻐하는 표정으로 인사하고 인파 속으로 돌아갔다.
이젠 그냥 케이스 경이 이상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불꽃이 배경으로 터지는 환상 같은 배경에서 나눈 대화였지만 속 내용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럴 거면 불꽃놀이 다 끝나고 말을 걸지 그랬어.
케이스 경과 대화를 하고 있어서 그 케이스 경이 돌아가고 나니 나는 혼자였다. 앤은 이미 먼저 나갔었기 때문에 어디 있는지 찾기 힘들었다.
그렇게 주위에 아는 사람이 있나 찾고 있는데 불꽃놀이 시작의 지시를 끝내고 쉬며 불꽃놀이를 혼자 쳐다보고 있는 슈크림을 발견했다.
“슈크림.”
슈크림은 불꽃놀이에 엄청 집중하고 있었던지 내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불꽃놀이를 엄청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방해하는 대신 그냥 슈크림 옆으로 가서 같이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이렇게 불꽃놀이를 보니까 문득 유온이와 불꽃놀이를 봤었던 날에 유온이가 떠올랐다.
그때 본 불꽃놀이는 오늘처럼 이런 화약으로 만들어진 과학적인 발명품으로 만든 불꽃이 아닌 초능력으로 하는 불꽃놀이라 사람들이 많이 몰렸었던 기억이 난다.
유온이는 가기 싫어했었는데 내가 졸라서 같이 가줬다.
초능력으로 만든 불꽃이라 하니까 나는 당연히 불꽃이 터지는 걸 신기하게 쳐다봤다. 초능력으로 하는 불꽃놀이라 기대한 면이 있었지만 내게 보이는 모습은 똑같았다.
그래서 실망하고 있던 내게 유온이는 불꽃이 다르게 보였는지 별로라고 얘기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는데 유온이는 자세하게 대답해주었다.
초능력이랑 과학적 산물이랑 보이는 건 똑같지만 느낌이 다르다나? 이럴 때를 보면 유온이가 나보다 더 감성적인 것 같다.
그때 불꽃놀이를 봤었던 기억은 정말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이번에는 그 과학적 산물로 불꽃놀이를 감상했지만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
내가 했던 약속에 맞게 1황자랑 만나야 한다. 기분은 싫었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다음에 여기 왔을 때 처리해버리기로 결심해서 다음번에 오자마자 연락을 드리겠다고 했었는데 너무 빨랐던 게 아닐까.
난 어쩔 수 없이 1황자에게 탑으로 오라고 연락을 보냈다.
연락을 보내라는 지시하면서도 엉엉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슈크림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금방 1황자가 왔다. 늦게 와도 상관없는데. 마치 과외 선생님을 기다린 기분이었다.
“정말 오자마자 불러주셨군요.”
뭐지? 내가 낚였던 건가. 그런 생각이 드는 말이었다.
“네, 약속했으니까요.”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런 정신승리를 일단 이루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렇게 성녀님과 독대로 만남을 요청한 이유는 바로 제 아내 때문입니다.”
아내를 핑계로 성녀인 나를 어떻게든 구워삶으려는 거 아닌가.
아니, 그보다 아내? 이 사람 기혼자였어!? 뭔가 날 꼬셔보려는 분위기가 있어서 난 당연히 미혼인 줄 알았네.
나 혼자 김칫국을 마셨던 거구나…….
“황자님께서 아내가 있으신 줄은 방금 처음 알았네요.”
“아, 성녀님은 모르셨나요?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바로 성녀님이 모르실만한 그런 문제 때문에 제가 성녀님을 찾아온 거니까요.”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제 아내인 황자비, 라리스 베리누스가 궁 안에 혼자 계속 틀어박혀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참석했던 세 개의 파티 모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던 거구나. 내가 궁금해서 대부분의 귀족들은 세 파티 중 하나라도 거의 참석했을 텐데. 그래서 내가 존재를 몰랐던 거구나.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말하지?
“그랬던 거군요…….”
뭔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일단 무난한 답변을 해주었다.
“그래서 성녀님이 제 아내와 같이 대화를 나눠주셨으면 하는 제 염치없는 바람을 말씀드리러 이렇게 찾아뵌 것입니다.”
과연. 틀어박혀 있는 자기 아내도 구하고 나로 인한 지지도 얻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좋은 작전이었다.
나도 왜 1황자에게 아내가 있다면 이렇게 틀어박혀 있는지 궁금했다.
1황자는 황태자로 큰 지지를 받는 인물이니까 아내라면 꽤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의 영애였을 것이고 1황자비이니 권력이 자기 마음대로 무언가 할 만큼 크게 생겼을 텐데. 그냥 틀어박혀 있는 기분을 잘 모르겠다.
혹시 1황자비는 1황자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일단 긍정의 답변을 했다. 대화를 나눠보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인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성녀님은 황태자로 누구를 생각하시나요?”
느닷없이 돌직구를 맞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러분. 저에게 힘을 주세요.
“그, 글쎄요? 하하, 제가 아직 그런 건 잘 모르겠네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하하하.”
일단 얼버무렸다. 1황자가 믿을지 안 믿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굉장히 당황했다. 여기 오게 된 지는 벌써 두 달 정도 되었지만 1황자는 내가 언제 처음 왔는지 모를 테니까.
“하긴 그러실 수도 있죠.”
다행이게도 1황자는 내 말을 믿어준 눈치이다.
“그럼 벌써 용건을 다 끝내셨는데 저번 파티에서 불꽃놀이에 집중하고 어두워서 못한 탑 정원을 구경해도 될까요?”
왜 갑자기 정원을 구경하겠다는 거지.
나도 탑의 정원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그냥 파티 준비하느라 정원 한번 쳐다보고 정원에서 불꽃놀이 좋겠다며 생각했을 때 힐끗 쳐다본 게 다다. 그리고 그냥 탑 앞마당에서 불꽃놀이를 했었지.
“구경하실 거면 저는 제 정원에 관해 잘 모르니 사용인을 시켜서 안내하도록 시키겠습니다.”
내 정원인데 내 정원을 잘 모른다는 말도 웃기다.
“아니요, 그럼 저랑 탐험하는 것처럼 같이 다니시면 되죠.”
나는 이제야 알았다. 1황자는 말려 들어 갈 수밖에 없는 페이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러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지금 정원에 1황자와 같이 반강제로 나와 있는 상황이다.
정원은 정원이라는 이름답게 식물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탑이 내가 없고 엄마도 여기 오지 않았을 때에도 열심히 관리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줬다.
그런데 아직도 왜 1황자가 정원을 나랑 굳이 같이 구경하고 싶다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나를 꼬시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아내까지 있는데. 그냥 호감을 사려고 하는 행위인가?
잘 모르겠지만 이왕 나온 김에 나도 내 탑의 정원을 둘러봐야겠다.
탑의 정원은 꽤 크기가 컸다. 꽃밭이 여러 군데 있고 허브나 일반 식물들도 자라고 있었다. 정원 중간에는 쉬라고 정자가 있었다. 그리고 보니 정자는 동양 쪽 이미지가 강한데 유럽에서는 뭐라고 부르지?
“이 가제보에서 잠시 쉬었다 갈까요?”
가제보구나. 영어가 아닌 거 같은데. 뭐, 영어가 아니더라도 영어권에서 쓰는 단어들은 꽤 있으니까. 가라오케도 그렇고.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면서 1황자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나는 정원 구경하는데 진심으로 심취해있어서 이제야 알았다.
우릴 따라온 시녀한테 차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이번에는 제대로 홍차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키고 나니 1황자는 또 뜬금없이 자기는 화장실 간다는 얘기를 돌려 말하고 갔다.
순식간에 난 혼자가 됐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 세계 사람들은 다들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거 같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 성격도 좀 이상한 거 같다.
그나저나 내 주위에 지금 아무도 없는 이 타이밍이 최적이었다. 무엇에 최적이냐 설명하자면 바로 도망이다. 주위에는 꽃밭이 있어서 사람도 잘 안 보여서 도망가면 끝이다.
가뜩이나 1황자랑 어이없는 대화를 나눠서 정신이 피곤했다. 우발적인 행동을 저질러버렸다.
나는 또 저번에 도망쳤다가 후회했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도망갔다.
나는 당연히 도망가는 것이기 때문에 탑을 향하는 방향이 아닌 다른, 아직 가보지 않은 방향으로 도망갔다. 왔던 길로 가게 되면 탑으로 돌아가는 게 되니까.
그래서 내가 차 타달라고 부탁했던 시녀와 만났다.
“성녀님, 왜 여기 계신가요?”
“그게 도망가던 도중이라……. 차는 그냥 아까 거기에 둬주세요. 그런데 왜 여기로?”
“여기가 탑으로 가는 지름길이거든요. 아, 그리고 2황자님이 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음, 알겠어요.”
시녀는 그렇게 인사하고 가제보로 가는 방향으로 갔다. 에일은 내가 정원에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날 기다려줄 테니 이 정도 도망치는 건 문제없다.
도망가면서 노래가 술술 입에서 나왔다. 이렇게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건 오랜만이라 신났다. 그래서 그런지 내 앞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렇게 뛰어다니며 도망치던 도중 발밑이 허전했다.
허전했다? 가뜩이나 도망가는 중이었는데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던 도중 나는 아래로 떨어졌다.
생각보다 낮은 곳은 아니었던지 나는 엉덩이만 조금 아플 뿐 멀쩡했다.
나는 바닥에 파여 있던 구덩이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위로는 해가 보이고 나는 지금 구덩이에 빠졌다. 해가 직통으로 날 비추고 있어서 너무 눈부셨다.
나는 당황해서 위를 향해 소리쳤다.
“에일, 빨리 날 구해! 네 킹메이커가 죽어간다, 지금!”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야자타임이었다.
아니, 왜 정원에 이런 큰 구덩이가 존재하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이거 파둔 거 누구야. 탑에서 일하는 할 짓 없는 기사냐? 나중에 찾아가주마.
난 지금 혼자서 도망쳐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멍청한 모습이 되었다.
한참 그렇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지르고 있자니 누군가가 내 소리를 듣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일인가?
그 사람은 구덩이 아래를 쳐다봤다. 그러나 나는 햇빛을 직통으로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서 그 사람이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구해드리겠습니다, 성녀님.”
목소리가 1황자였다. X됐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다음부터는 절대 도망 안 가. 도망치면 내가 개다.
1황자는 밧줄 같은 끈을 가지고 와서 날 직접 끌어올려 주었다. 1황자의 악력이 부족했으면 꼼짝없이 다른 도움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내가 다 올라오고 나자 1황자가 내게 물어봤다.
“그런데 그런 곳에는 대체 왜 들어가 계셨던 겁니까?”
“그게 가볍게 주위를 돌아다니다 바닥을 못 보고 그만, 하핫☆”
나는 명랑소녀 풍으로 변명했다.
1황자는 뭔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을 짓다가 표정 관리하면서 사람이 그럴 수도 있다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럼 저는 슬슬 시간도 늦었으니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돌아간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너무 기뻐서 잘 가라고 너무 밝게 인사해버렸다. 그러자 1황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하고 돌아갔다.
드디어 갔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