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아래에서
2014. 6. 15 / 겁쟁이 페달 - 마나미 산가쿠 드림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깐, 마나미 군이 잘 데려다줘.”
“네, 걱정 마세요.”
잘 가―, 하는 인사가 이어지고 다들 반대쪽 골목길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힐끔 옆에 선 산가쿠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고 있던 얼굴에 표정이 사라진 것 같아서 살짝 숨을 삼켰다. 큰일이다. 역시 여기선 빨리 도망치는 게…!
“선배.”
“으, 으응?”
몰래 한두 발자국 발걸음을 옮겼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색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자 산가쿠가 싱긋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내가 연상인데…!
“술 안 마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요?”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자 산가쿠의 신발이 점점 가까워졌다. 내 앞에 선 산가쿠가 슬쩍 내 턱을 감싸 쥐고선 고개를 들게 했다. 눈이 마주치자 고교 시절에 비해서는 확실히 큰 모습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쭉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낯설다니, 아이러니 했다.
“나한테 전화한 건 기억하죠?”
“…내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산가쿠한테 전화를 걸었었나?
그냥 가볍게 저녁을 먹고 가볍게 한 잔 하자는 말에 응했다가…, 전화를 걸긴 했었던 것 같다. 근처에 산가쿠가 살고 있기도 했고, 무슨 생각으로 전화를 걸었는지는 기억이 안 났다.
“다짜고짜 나오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아니요.”
“그럼, 지금 당장 안 오면 키스 안 해준다고 했던건요?”
“내가?!”
둘이 있을 땐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나, 내일 어떻게 얼굴 보지? 아니, 나 그런 말 한 기억이 없는데?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거리자 산가쿠가 손을 잡아 끌었다.
“집에 데려다 줄게요.”
“미안.”
“미안한 줄 알면 똑바로 걸어요.”
“…나 진짜 많이 안 마셨는데.”
이렇게나 정신이 멀쩡한데,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선 기억이 없다. 드문드문 기억이 끊겨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뺨에 닿아오는 것에 깊게 숨을 들이 마시자, 폐 속까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되게 조용하다.”
“밤이니까요.”
“응, 그러게….”
가게들도 문을 닫고 간간히 켜져 있는 가로등 불빛만이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하늘에 별들이 가득해서 날씨가 좋으면 은하수가 보일 정도였다. 간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별들을 보고 있으니 전에 같이 갔었던 플라네타리움이 떠올랐다.
“플라네타리움 또 가고 싶다.”
“주말에 가요.”
“진짜?”
“네, 그러니까 주말에 꼭 시간 비워 놔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이번엔 달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달을 보고 있으면 어릴 적일이 생각나 힐끔 산가쿠를 올려다보자 산가쿠의 시선은 앞만을 향하고 있었다.
“어렸을 땐 달을 보면, 달이 나를 따라오는 건 줄 알았어.”
내 말에 산가쿠가 하늘의 달을 올려다봤다. 차를 타고 가던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달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아서, 손만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아서 엄마에게 달이 나를 따라와, 하고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 땐 그랬는데 지금은….
“나 달한테도 질투 해야 하는 거 아니죠?”
“뭐?”
“달이 선밸 따라가면, 난 달로부터 선배를 지켜야 하는 거잖아요.”
“…닭살 안 돋아?”
내 말에 왜 그래야 하는 지 모르겠다는 듯한 시선이어서 그저 웃음만 났다.
진짜 얘 천연이야, 천연.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꽤나 오래 알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모습엔 여전히 적응이 잘 안 됐다. 익숙해졌다 싶으면 더 큰 걸 한 방 먹이기 때문이려나.
“진짜 약속해요. 나 없는 곳에서 술 마시지 않기.”
“…응.”
“또 이런 일 생기면 그땐.”
“그땐…?”
의미심장한 말에 힐끔 올려다보자 마나미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무엇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마무시한 일일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표정이 펴져서 안심했다. 분명 내 쪽이 연상인데 왜 매번 휘둘리는 것 같지?
“다 왔다.”
“네.”
보통은 여기서 잘 자요, 라던가 내일 봐요, 라던가 작별의 말을 하고선 가는 게 맞았는데, 오늘의 산가쿠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여전히 내 옆에 서 있었다.
“…안 가?”
“들렸다 가란 말도 안 해요?”
“들렸다 갈래?”
“네.”
정돈이 안 되어있을 집안 풍경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긴 했지만,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어서 그냥 웃어넘기면 되겠지, 싶었다. 같이 들어가기로 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어서 한 발자국 발을 내딛자 덥석 산가쿠가 내 팔을 잡아왔다.
“왜?”
“나라고 너무 신용하고 있는 건 아니죠?”
“…맞을 걸?”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쪽, 하고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무슨 재롱이냐는 듯이 쳐다보자 산가쿠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데리러 왔으니깐 키스 해주는 건 유효한 거죠? 그렇지만, 지금 선배한테 술 냄새 나니까.”
“…윽.”
“주말엔 제대로 키스 할 수 있게 술 마시지 마요.”
“누굴 주당으로 아나.”
얼른 들어가라며 등을 떠밀어오는 터라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허물 벗듯이 옷을 벗고 침대에 눕자 생각보다 잠이 오지 않아서 핸드백 안에 핸드폰을 꺼내들자, 통화이력에 산가쿠의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나, 진짜 전화했구나. 심지어 그런 말도 했고.
「 잘 자, 오늘 고마웠어. 」
메일을 보내고 한 참 천장을 쳐다보다 보니 잠이 들었다.
원래 꿈을 잘 꾸는 편은 아니었는데, 간밤엔 꿈을 꿨다. 하늘 가득히 별이 가득해서 그 수에 압도당해 은하수를 쳐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덥석 손을 잡아와 쳐다보자 산가쿠였다. 그리고 꿈의 산가쿠는 저 별이 가지고 싶으냐고 묻고선 곧 하늘로 손을 뻗어 은하수를 한 주먹 움켜쥐고선 내 손 위에 은하수를 뿌려줬다. 손안에 별이 반짝반짝 빛이 나서 그걸 하늘에 뿌리자 산가쿠의 몸에 별들이 내려앉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런 꿈을 꿨어.”
“선배, 진짜 나랑 별 보고 싶었나 봐요.”
“그랬나봐.”
수업이 끝나고 카페에서 만난 터라 산가쿠는 앞에 놓인 잔에 스트로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러더니 곧 일어나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디가게?”
“플라네타리움, 지금 가요.”
“지금?”
“네, 은하수는 못 가져다줘도, 플라네타리움엔 데려가 줄 수 있어요.”
플라네타리움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전세 낸 기분으로 의자에 기대 눕자 천장에 별들이 가득했다. 천장을 뚫어져라 훑어보고 있자 손을 잡아오는 손길에 쳐다보지도 않고 천장의 별자리들만 쳐다보고 있자 삐걱, 하고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 너무한 거 아니에요?”
“…뭐가?”
“나랑 별이 보고 싶었던 거잖아요. 나도 보고, 별도 봐요.”
어린애 같은 산가쿠의 말에 웃음이 터지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싫은 건 아니어서 산가쿠의 손을 깍지 끼어 잡았다. 다시 의자에 기댄 산가쿠의 귓가에 살짝 속삭이듯이 말했다.
“좋아해, 아주 많이.”
“선배가 날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더 선밸 좋아할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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