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도서관
라오루 AU - 산죠란
도서관은 언제나 낡은 종이 냄새로 가득하다. 책 높이를 맞춰 하나하나 진열하고 있으면 묘한 정돈감이 느껴진다. 산죠 란은 깨끗한 책등을 손으로 살짝 쓸어본다. 그 제목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책은 하나의 세계며 삶이었다. 그는 언제나 타인의 삶-이야기와 책에서 무언가를 얻어내곤 했다. 어디선가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창문 너머로 모여 있는 사서들이 보인다. 미소짓는 이엔과 그런 이엔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이. 그는 푸른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최근엔 이엔이 웃는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지. 란은 책등에 손을 올린 채였다.
"요즘 사서들이 썩 기분이 좋진 않은가봐?"
책장 사이로 걸어오는 것은 관장이었다. 그는 책장의 책들을 잠시 훑어보다가, 이내 그만두고 만다.
"너만큼 묵묵히 일해주는 사서는 없지만. 이대로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괜찮아... 곧 다들 의욕이 날테니까..."
란은 옅게 웃는다. 초대장을 보내는 것은 도서관의 몫. 책을 찾아 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은 사서들의 몫. 서로가 서로의 역할이 있었으나, 동정심에 눈이 가려 자신의 역할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서들이 대다수였다. 죽어나가던 직원들을 겹쳐 보는 걸까?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 결정될 뿐인데도. 란 또한 모든 것을 눈에 담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자극을 주지는 못했다.
"초대장을 보내줘... 생각해둔 게 있거든..."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상대는 그저 필사적이었다. 그가 바라는 책이 도서관에 있는 한,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에 반해 사서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다. 이윽고 잠시간 생겨난 틈을 상대가 찔러넣는 순간. 이엔의 눈 앞에 푸른 빛이 번쩍였다. 이엔은 눈을 질끈 감는다. 곧 이어질거라 생각한 고통은 이어지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검은 쇠사슬에 묶인 상대였다. 쇠사슬 끝에는 란이 옅게 미소 짓고 있다. 이렇게 아슬아슬할 줄은 몰랐어... 이정돈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고있지 않았으면 큰일이었네... 속삭이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자, 마지막은 이엔이 해야지."
등을 쓸어주는 손길마저도. 이엔은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강하게 검을 쥐었다. 왜 이엔이...! 하고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스카프를 맨 사서였다. 그러면 네가 해도 괜찮아... 그렇게 할래? 이엔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상대를 보았고, 푸른 스카프를 맨 사서를 보았고, 마지막으로는 란을 보았다.
"남에게 떠넘겨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면 그걸로도 괜찮아..."
이엔은 걸었고, 검을 들었다. 곧 쏟아지는 저주의 말과 함께 빛이 터져나온다. 또 한 권의 책이 낭독된다. 병상에서 죽어가는 동생의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면 란은 감흥 없이 팔짱을 꼈다. 떨어지는 책을 받아낸 것도 란이었다. 넌 마음이라는 게 없어? 푸른 스카프를 맨 사서가 속삭였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경멸. 그리고 분노. 란은 그 감정을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사서를 그만둘거야?"
그들 모두 도서관에 매여 있는 몸이었다. 빛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들은 도서관 밖으로 나가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그만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란은 굳이 물었다.
"아니면... 할 일을 떠넘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위안 삼을 거야?"
란 자신이라면. 그 어떤 고통과 슬픔도 없이 접대할 수 있었다. 혼자서 접대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도 확실했다. 그야말로 도서관이 바라는 사서 그대로였다. 그런 것으로 정말 되겠어? 그의 목소리는 내내 다정하기만 하다. 경멸도, 분노도 없다.
"우리 모두 같네... 그렇지?"
같은 일을 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같았다. 이엔이 몸을 흠칫 떨었다. 란은 다정하게 이엔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한껏 몰았으니 다음은 감싸줄 차례였다. 애정어린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그가 무심코 그 체온에 기대왔다. 끝까지 몰아낸 것이 그인데도, 마치 다정한 조언을 건넨 것처럼. 울 것 같은 표정의 이엔을 폭 끌어안으면 기댈 곳이 없다는 듯이 마주 안겨오는 것이었다. 죽음도, 슬픔도, 그에게 있어선 자극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떨림 만은. 란은 기쁘게 웃었다.
같이 책을 읽을까?
밝은 햇살처럼 웃을 수 있는 이 상냥한 이를 진창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어째서 이리도 짜릿할까. 스스로도 악취미라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란은 그다지 반성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움찔거리는 이 작은 몸을 제 곁에 두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미덕이라거나, 사랑이라거나 하는 그런 간지러운 단어를 붙이고 싶다면 얼마든지 좋았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어차피 이 작은 도서관에는, 도망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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