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ㅡ 수만 번째 시린 겨울
<조우?>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한달 뒤.
[크리스마스]
연말 행사들로 바쁜 주선에게도
드문 휴일이 찾아왔다.
연인,가족,저마다의 소중한 사람들끼리
애틋한 시간을 보내고는 했지만…
엘리샤는 그런 것도 없이 혼자 침실에서
창 밖을 보며 시간을 날리고 있었다.
가족은 애초에 연을 끊고 산 지 오래에 생사불명,
그렇다고 연인이랄 상대는 더더욱 없었으니…
그나마 있는 가족같은 사이의 주선 동료들은
이미 휴가를 떠나고 곁에 없었다.
로즈는 안과 함께,세인티는 오빠인 그리티와 함께.
“에휴…그렇다고 이런 날까지 바쁘게 일하실
주군을 괴롭히는건 또 도리가 아니잖아…
심지어 주군께서 거절하실 분도 아니고.
혼자서라도 밖에 나가볼까? 아니면 주군 일이라도
좀 거들어서 해드려야 하는건가…?“
그때,엘리샤는 진지하게 자신의 주군에게
또 다른 초능력이 있는걸까 의심하게 되었다.
- 똑똑
“흐익!”
“엘리~ 안에 있어? 이렇게 즐거운 날에 왜 혼자
방에 꿍하니 있는거야.“
“앗,아아…주군…깜짝 놀랐잖아요…”
“아하핫,미안. 일단 나 들어가도 되는거지~?”
“아…! 문 열어드릴게요!!”
“아냐~ 나도 손 있어. 내가 알아서 들어가~”
마치 쓸쓸한 엘리샤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듯,
루시아는 알맞게 찾아와 엘리샤의 곁을 지켰다.
루시아는 말을 잇는 내내 엘리샤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들 자기들끼리만 놀러나가서 우리 엘리가
많이 외로웠겠다- 그렇지?“
“어쩔 수 없죠 뭐. 제가 남매랑 부부 사이에
끼어들면 그것도 그것대로 모양이 이상하지 않아요?“
“하긴…네 마음도 이해가 가네~ 날 찾지 않은 것도
다 날 배려하려던 엘리의 예쁜 마음에서
나온 거겠지? 그래도 엘리,남을 행복하게 해주자고
네 행복까지 갉아먹히지는 마. 일단 너부터
행복해야 남들도 도울 수 있는 거니까.
앗,그렇다고 나쁜 짓은 금물이야-?“
“에이,주군! 제가 아직도 사리분별도 못하는
어린이로 보이시는건 아니죠? 실망입니다~“
“그럴 리가 있니~? 우리 엘리는 어릴 때부터
아주 성숙하고 의젓했는걸. 응? 아주 내가 낳을걸~
싶더라니까.“
“부끄럽게 왜 이러십니까아…주구운…”
“진심인데~ 이걸 몰라주다니~!”
그렇게 침대 맡에 걸터앉아 한참을 대화하던
두 사람이었다.
루시아는 문득 창 밖을 바라보다가,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바깥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몇번을 보내는 겨울이지만,이렇게
눈이 새하얗게 뒤덮인 모습은 질리지 않는거 같아.
나는 그런 순백의 세상을 바라보는걸 참 좋아해.
엘리 네게도 그런 소소한 행복이 있니?“
“소소한 행복이라…”
평소 어떤 질문이건 막힘없이 답해내는 엘리샤지만,
이런 질문에는 도통 쉬이 답을 해낼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평생을 군인으로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특별히 추억이라고 할 만한 기억이 없는듯 했다.
그나마 추억이라고 불릴 만한 기억은…
엘리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로 자리잡았고.
“글쎄요,잘 모르겠습니다. 주군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군인으로서 길러져 왔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기억을 더듬다 보면 전부
전장에서 구르거나,훈련하다 구르거나 -
그런 기억밖에 떠오르질 않더라고요.“
“괜찮아~ 그건 단지 지금의 너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발판이었다고 생각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네가 무너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게. 그리고 우리에게 시간은 많아!
앞으로의 순간들을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는
시간은 더더욱 많지. 그러니 당장은 좋은 추억이
없대도 괜찮아. 나랑,그리고 주선 동료들이랑
함께 만들어보자. 급하지 않아도 되니까.“
“네,주군. 그러고 보니 저는 주군께 늘 도움을
받기만 하네요. 주군께 도움이 되겠다고 해놓고선.“
“무슨 소리야? 네 존재 자체가 내겐 이미
큰 도움이 되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인걸.
꼭 네가 무언가를 해내야만 그게 도움을 주는건
아니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더라.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
너무 급급한 걸까? 그 잠깐의 깨달음조차
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제가 주군께 그렇게나 큰 의미가 있는 놈이에요?
주군께서는 워낙 모두를 사랑하시고 아끼시니
제 존재의 크기가 그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후후,그럼.“
함께 지내고 알아온 시간이 얼마인데,
그것도 모르냐고 책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상대를 미워하기보다
오히려 더 감싸안아 끌어들이기를 택했다.
루시아는 늘 그래왔으니까.
자식같은 아이들인 주선은
더욱이 사랑으로 보살피는 그녀였으니까.
“엘리 말대로 나는 모두를 사랑해.
내 몸은 하나라 모두를 같은 크기로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작게나마 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어.
친구로서,동료로서,만백성의 어머니로서.“
“대단하시네요…아무리 그래도 미워하는 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혹시 주군께서는
모두를 사랑하라고 만들어진 천사형 기계같은건
아니시겠죠? 그게 아니고선 말이 안 되잖아요.“
“…야아! 그게 뭐야~ 오글거려. 됐어!
됐어,다 됐고~ 우리도 밖에 놀러나가볼까?
이런 날에 놀아야지 또 언제 놀겠어?
어,음…이런 날까지 상사랑 같이 있는건
좀 별로려나~?“
“상사라뇨! 그런 딱딱한 관계로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만…“
“오-케이! 그럼 특별하게 꾸미고 나가볼까?!”
“ㅖ…?”
특별하게 꾸민다라…엘리샤의 사고방식으로는
고작 해봐야 옷을 화려하게 입는다거나,
분칠을 하고 나간다거나 정도였다.
루시아가 예상 밖의 제안을 하기 전까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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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각,또각
"으하아…설마 했는데,서로의 평소 스타일을
바꿔서 입어보자는 거셨군요…“
“나름 신선하고 재밌지 않아? 엘리 네가 항상
포니테일만 하고 다니는거 보면서,난 네가
머리 풀면 진짜 이쁠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 더 이쁠 줄이야~ 반했어.“
“ㄱ,그런가요? 근데 맨날 묶은 머리만 해서
풀고 다니는건 좀 어색하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훈련할 때는 묶은게 더 편해서
매번 묶고 다니기만 하거든요.“
“그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둘이 나오니
진-짜 좋다! 우리 뭐부터 해볼까? 엘리는
나랑 해보고 싶은거 있어?“
“글쎄요…제가 노는 법을 몰라서요!”
“그럼 내가 재밌는걸 여럿 소개시켜줄게!
잘- 봐뒀다가 나중에 써먹어. 알겠지? 엘리?“
“넵,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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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계 외곽지역.
- 뽀드득,뿌드듯
“여기는 올 때마다 거리 풍경이 많이 변하네.
세월의 흐름이라는건 어쩔 수 없나봐.“
“…어,그렇네.”
세인티와 그리티는 자신들이 어릴 적에 살던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리 좋은 기억은 없지만,어쨌거나 지금의 남매를
있게 해준 곳은 고향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리티는 썩 반가운 느낌은
아니었던거 같지만.
“세인티,넌 여기 오는게 좋냐? 난 여기 오기만 하면
소름이 다 돋던데.“
“응? 난 좋아. 고향에 오면 오빠랑 지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니까. 근데 그때는 워낙
살기 힘들었던 때니까…오빠는 싫어하겠지?“
“어,싫어. 그때로 돌아가면 돈 준다고 해도
절대 안 가고 싶을 정도로.“
그때,예민한 기를 기지고 있던 그리티는
저멀리 골목 쪽에서 수상한 기척을 느꼈다.
스스슷…
“왜 그래,오빠?”
“너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봐.
하,ㅆ…놓칠거 같은데!“
“어?”
그리티는 그리 말하며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세인티는 순간 당황했지만,이미 사라지고 없는
오빠를 따라나설 방법은 없었다.
…
그리고 그것은 폭풍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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