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ㅡ [너]라는 이름
[절망]의 폐허 속 유일하게 끓어오른 빛
- 처억
"환복 완료했고,머리 손질도 끝! 음- 좋아 좋아.
오늘도 최고로 멋있고 든든한 기사로서의
하루를 시작해볼까? 이안 슈그니 글로리아,
힘내자!“
여느 때처럼 자신에게 하는 응원을 마친 안은,
씩씩하고 용맹한 발걸음으로
천계군 사관학교로 향했다.
세상 모든걸 다 가진 듯한 당당한 발걸음,
다만 그 체구와 덩치에서 나오는 위압감과는 달리,
강아지같이 순한 인상을 가진 그에게는
오늘이 올해 들어 가장 기쁜 날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오후 1시에 로즈가 수업을 온댔지?
업무같은건 얼른 해치워버리고 나도 로즈가 하는
강의나 들으러 가야겠다~ 에헴~!“
그날 수업을 듣는 병사들은 몰랐을 것이다.
살다살다 천계 성기사단 최고 사령관인 사람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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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쯔읏…
“그 같잖은 지역 하나 장악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네까짓놈들 능력이 고작 그정도인가?“
“닥쳐! 그렇게 불만이면 네가 직접 다녀오던지.
에초에 그녀석한테 쫄아서 정면돌파 못하는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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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그락 잘그락
“앗차차- 마계에 회의가 있었다는걸 까먹었네.
정신이 없어서 그만. 얼른 가야겠다!“
루시아는 서둘러 집무실 문 앞에
부재중 팻말을 걸어둔 후,마계로 향했다.
오늘 마계에 정기회의가 있었다는걸
까먹은 탓이었다.
부랴부랴 마계로 가서 복장을 점검한 루시아는,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
- 끼이익…
“휴우,다행이다. 아직 대신들은 안왔네.”
“…살면서 별 일을 다 보는군. 루아 네가
평소 오던 시간보다 10분이나 늦을 줄은.“
“휴우,요즘 너무 정신이 없었어서 그런가-
아니면 나도 이제 늙을 대로 늙었나?“
“그럼 뭐 어때? 얼른 와서 착석히지. 아마 곧 있으면
대신들이 올 테니.“
“아,응!”
루시아는 싱긋 웃으며 두 상석 중
비어있는 루시퍼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루시아가 앉아서 머리를 정돈하자,
루시퍼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뒷머리를 만져주며 말했다.
“루아,굳이 머리 같은거 안 만져도 예뻐.”
“아히히,그래도 루시 너랑 둘이만 있으면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그래도 마왕비로서의
체면이 있지. 안 그래~?“
“마왕비로서의 체면이라는거,내가 재정립해도
괜찮을거 같군. 왕족이나 귀족이나 신분에 맞는
고귀함을 갖춰야 한다는거,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으니까.“
“근데 그걸 적통 왕족인 네가 하니까
정말 기분이 이상한데? 사실 나도 애들 앞에서
일 때려치고 싶다고 한 적이 몇번 있긴 하지만…“
“그럼 너도 할 말이 없네,루아.”
“으…한 방 먹었네.”
그렇게 루시퍼와 루시아의 만담이 끝나갈 무렵,
때맞춰 대신들이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근래엔 루시퍼와만 회의를 진행했어서 그런지,
마계에서도 만인의 다정한 어머니로 통하는
루시아를 본 대신들의 얼굴에 햇살이 내려앉았다.
루시아는 싱긋 웃으며,그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들 오랜만이에요,잘 지내셨지요?”
“우,예에! 마왕비 폐하.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뭐 매일 똑같죠. 오늘도 잘 부탁해요.”
“예,마왕비 폐하.”
대신들은 저마다 속으로 만만세 마왕비,
마왕비 폐하를 마왕으로!라고 외쳤지만…
안타까운 대신들.
그 소리를 마왕 루시퍼가 전부 간파해내고
있었으리란걸 누가 알았을까.
‘저 빌어먹을 새X들…
그래,더 찬양해라! 나도 루아에게
마왕위 넘기는걸 벼르고 벼르는 중이란 말이다!‘
?…
우리 마계 패왕이 뭔가 좀 이상한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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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군 사관학교/3층 <특별 강의실>]
“병결 1명 제외 전원 출석 완료했으니,
수업을 진행하겠다. 오늘 주제는 불법 공학 무기
소지자와 대치 상황 발생 시,그 대응법에 대해
알아볼 거다.“
일정하지만 또박또박한 어조로 강의 주제에 대해
설명한 로즈는,미리 지참해온 공학 무기 모형을
꺼내며 기사들에게 공학 무기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건 품번 024-628,발포 시 마도공학으로
위력이 상향된 실탄으로 인해 주변이 초토화되는
고위험군 살상무기다. 마도•생명공학은 이미
고대 천상계 시절에 허가받은 자 외에는
전면금지된 사실을 알고 있겠지?“
“예!”
“이런 불법 사제(私製) 공학 무기에 대응하려면
먼저 공학 무기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 마법 공학 무기의
기초와 발포 원리,그에 맞는 대응법을 알려주겠다.“
로즈가 굳이 마도공학 관련 강의를 진행하는 이유는,
최근 정보부에서 미심쩍은 마법과 무기를
사용해 혼란을 야기하는 소수 집단이 있다는
보고를 들은 이유에서였다.
더군다나 공학 관련 자료는 이미
고대 천상계 시절에 소실되거나 굳게 봉인된
내용이 대부분이니… 이런 쪽으로는 대처가
미흡할게 뻔하기도 하고.
그렇게 공학 무기 관련 자료를 꺼내기 위해
업무용 가방을 뒤적이는데…
빼꼼
“…”
마치 도둑놈마냥 문 틈 사이로 빼-꼼하고 보는
저 덩치만 큰 애는 대체 누구냔 말인가.
“하아ㅡ 후임들 보는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그렇지?
선임으로서 참 좋은 것만 가르치네.“
“하하핫,미안 미안~ 나 청강해도 되나?”
“네가 하는 짓이 청강인건 또 아는거니…”
“헤헷-”
“얼른 착석해. 마침 딱 시작하려던 참이니까.”
“넵!”
로즈의 강의는 무척 깔끔하고 핵심적인 내용만
잘 골라 들려주기 때문에,그 부산스럽다던
기사들도 조용히 로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런 연설력이라면,내일 아침 해는 서쪽에서
뜬다는 개소리를 해도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약 50분 간의 수업 후,잠시 쉬는 시간.
로즈는 자리에 앉아 다음 수업 내용들을
미리 정리하고 있었다.
물론 누군가는 로즈가 혼자인걸
죽어도 못본다는 심정인지,그녀의 곁에
지독하게 붙어있었지만.
“로즈! 네 강의는 정말이지- 최고였어!
이런 천재를 못 알아본 천계 교육부는
크게 반성해야해 (=.= )“
“근데 그 교육부,관련 부서들은 우리가
책임자 아니었니? 군사 교육,생활 교육같은거.
그럼 반성하는건 우리겠네?“
“엏,그건…생각을 못했네! 하지만 과거엔
다른 놈들이 책임자였잖아. 로즈 로즈,그냥 널
우리 군 사관학교 정식 교수로 채용해버려도 돼?
네가 우리 사관학교 교수가 된다면,
기사들에게도 엄청난 동기부여가 될 거야!“
“미안. 이런 강의도 시간 짬내서 겨우 오는거라
힘들어. 그래도 이정도나마 오니 효과는
톡톡히 보고 있잖아? 그렇지?“
“네가 바쁘다면 어쩔 수 없지! 바쁜데도 시간 내서
비정기적으로나마 와줘서 고마워~“
“그래. 너도 고생이 많아,이안. 음-……
요즘 자주 못봤던거 같은데, 별다른 일은 없고?“
별다른 의미없이 안부처럼 물어본 말이겠지만,
안은 그것마저도 좋다고 히히- 웃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응! 나야 별 일 없지. 로즈도 무슨 일 없는거지?
휴우,바쁘지만 않으면 맨날 찾아갈 텐데 (、._. )“
“어,나도 별 일 없어. 오늘 점심 같이 먹을까?
오늘은 그정도 시간은 날거 같은데.“
“응!! 좋아 좋아! 수업 열심히 듣고 초청교수님이랑
1:1 데이트, 완전 좋잖아!“
“…”
‘대체 뭐가 저리 해맑은 건지. 고작 밥 한 끼
같이 먹는 것 뿐인데.‘
그건 로즈가 안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잘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안이 사는 세상 속에서,로즈는 저 하늘 위 별보다
더욱 반짝이는 존재였으며,자신의 모든걸
걸고서라도 꼭 지켜내야만 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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