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도 둥굴레차! 의 겨울 합작 <흰겨울 소복이>

작업물 백업본입니다.

[건찬] 둥굴레차! 의 겨울 합작 <흰겨울 소복이>

겨울 감기가 그렇게 뜨겁더라.

 벌써 내리기 시작한 눈이 심히 거슬린다. 하얀 눈이 그 붉은 머리 위로 곱게 쌓이는 형태도 나름 나쁘지 않지만, 감기에 걸렸다고 끙끙거리는 붉은 머리가 밖에 나갈 리가 만무하다. 그러니까 누가 저런 머저리들과 밖에 나가서 놀라고 했냐. 괜히 밖으로 내뱉지도 못할 말을 입속에서 굴려본다. 저 머저리들은 눈에 관심 하나 없는 척, 눈 오는 게 당연하다는 눈치를 주더니 은근슬쩍 마당에 가득 쌓인 눈을 조물조물, 하다가 결국 그 눈을 똘똘 뭉쳐 던지고 놀더라. 매화장에도 이미 가득 쌓인 눈들이 유난히 예뻤지만 붉은 머리 위에 쌓였던 눈이 제일 예뻐 보였다. 순간 머리를 가득 채우는 망상에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누가 볼까 싶어 제 얼굴 높이까지 솟아오른 담장에 얼굴을 박았다. 담장 위에는 눈이 가득 쌓여있어서 얼굴을 파묻고도 아직 조금 더 눈이 아래에 깔려 있었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얼굴에 후, 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백호 공자가 미쳤나 봅니다…! 아냐, 쟨 원래 미쳤었잖아. 아하! 그렇군요! 자연스레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뒤를 도니 아무것도 모릅니다. 응, 우리는 아무것도.라며 괜히 더 성질을 돋우고 있다. 싸움이라도 냈다가는 골골대고 있는 녀석이 이 추운 날씨에 싸움을 중재하겠다며 밖에 나와서 괜히 더 심한 감기에나 들세라,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아꼈다. 웬일로 싸움을 걸지 않는 모습에 더욱이나 이상한 눈길로 보는 것은 느껴졌지만, 거기에 대고 주은찬이 걱정되니까 봐준다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괜한 말은 더 큰일을 벌이게 될까, 굳게 닫은 입을 더욱 악물었다. 그리고는 인상만 가득 찌푸리며 둘을 뒤로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이 뻔한 주은찬의 방으로 갔다. 새하얀 주위는 새빨간 그 머리랑 안 어울리는데, 둘이 섞이면 어울리는 것이 정말로 묘했다. 보나 마나 주은찬은 기침이나 하고 있을 터였다. 방문 앞에 다가간 것만으로도 이미 뜨거운 열기가 오를 것만 같았다. 춥다며 이불을 한껏 뒤집어쓰고도 모자라 패딩을 입고 숨만 겨우 내뱉고 있는 주은찬을 생각하니, 모자라게도 애완동물이 이불 속에 파묻혀 헥헥 거리고 있는 꼴이 떠오르더라.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어 최대한 끌어내리지만, 어려운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한참이나 방문 앞에 있으려니, 안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희끄무레하게 들려왔다. 아마 문 앞에 서 있는 탓이고 문이 얇게 막혀 있으니 밖의 상황을 그림자로써 언뜻 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백건…. 쿨럭,이야?

 ......어.

 느린 답변에 거슬렸던 모양인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 급하게 입꼬리를 내리고, 옅게 붉어진 얼굴을 순식간에 돌렸다. 워낙 집사람들이 포커페이스가 놀라우니 제 감정을 숨기는 것에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었다만 임기응변에는 익숙지 않은 터였다. 그 잠깐 사이에도 순식간에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열어젖힌 주은찬은 가득 상기된 얼굴로 얕게 숨을 뱉고 있었다. 뜨겁던 방 안에 차가운 바람이 들어갔으니 온도가 내려갔을 터다. 얼마나 후텁지근하게 해 두었으면 고작 문을 연 것 가지고 뜨끈한 바람이 새어 나올까. 새빨간 얼굴을 한 주은찬은 그렇게 뜨거운 방문을 열고 덜덜 떨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문간 앞에 서서 멍하니 주은찬을 보며 문을 안 닫은 탓인 듯싶었지만,

 백건?

 멍하니 서서 보고 있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야, 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신경 쓰이는 것뿐만 아니라, 고갤 갸우뚱하며 롱패딩 속으로 몸을 움츠리고는 모습이 왠지 조그만 강아지를 연상시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네가 제 얼굴을 봤다면 분명 이상한 표정이라며 인상을 찌푸렸겠지만, 넌 밭은 기침을 오래도록 하고 있어서, 차마 나를 볼 기회 같은 건 없었다. 그 사이에 표정을 되돌리고, 끝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가늘게 호흡하는 너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하아, 하고 얇게 숨을 내쉬며 숨을 들이켤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지 눈에 작게 맺힌 방울을 닦은 너는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그런 너를 멍하니 보다가, 네가 방울을 닦는 걸 느릿하게 보고, 웃는 걸 보고 나서야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

 아, 어. 어…. 들어간다

 뭐야, 격식 차릴 게 뭐가 있다고?

 아니 뭐, 그래도 환자니까….

 얼른 들어오기나 해, 추워.

 롱패딩을 질질 끌며 느릿하게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너를 보고는 손을 뒤로해 문을 닫았다. 얇은 창호지인 줄 알았던 문은 생각보다 두꺼운 듯해 네 감기가 더 크게 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따지자면 지금도 이미 충분히 네 몸 상태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지만, 굳이 뭐라고 하기에도 그랬다. 이 문이 얇다면서 여기만 현대 문으로 바꿀 수도 없고,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좋은 건 저 공자공자 거리는 검은 놈뿐이지. 단호한 굵고 짧은 숨을 뱉었지만, 곧 다시 너를 내려다보자 너는 저를 올려다보며 머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웃는 표정을 가만 보고 슬 자리에 앉았다. 뜨끈한 방바닥의 열기가 순식간에 몸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꽤 뜨거운 바닥인데, 정말 이렇게 두어도 괜찮은 걸까. 오히려 너무 더워서 몸을 해하는 건 아닌가. 아니면 혹 내 몸의 열기가 강해진 걸까. 자잘한 생각들 사이로 빠져들어 가기 전에, 네가 머쓱하고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꺼내는 걸 보자 네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 자잘한 생각들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

 나 진짜 괜찮은데,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친구가 아프다는데 걱정할 수도 있지.

 네가? 

 그래.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거든? 보나 마나 대련이나 같이하자고 말이나 하러 왔다가 아파 보여서 머쓱한 거 아냐?

 그럴 리 없잖아! 네 걱정 맞거든?

 목소리가 크게 나온 탓일지도 모르지, 네 표정이 평소보다 둥글어진 눈, 살짝 헤 벌어진 입, 그리고 수 초 지나지 않아 "그, 그, 그렇구나!" 하며 당황한 것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반은 장난으로 쓱 던진 말에 자신이 생각보다 크게 반응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픈 걸 알고 있으면서 대련을 하자고 하기에는 그렇다. 무엇보다 감정을 가진 상대에게 그런 짓을 할 리도 없다. 멍청한 주은찬이라는 말을 속에서 곱씹으며 슬 눈을 돌렸다.

 가뜩이나 뜨거운 방 안이 더 후끈하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잠깐 더 고민했지만 그 이후에 네게 더 말을 하기에는 머쓱한 부분이 있어 급히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너 또한 내 눈을 마주하지 못했고, 나도 네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 그래, 그럼, 나, 나는 밥 먹으러 가야겠으니까." 하고 너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며 방을 쏜살같이 나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으니 문은 너무 세게 닫혀서 되레 열리지 않게 하도록 끝까지 꾹 잡고 있다가 꽉 닫힌 것을 보고 한숨을 크게 내쉬며 네 방에서 슬 멀리 떨어져 나왔다. 들어간 지 5분은 됐을까. 자리에 앉은 지 몇 초 지난 것 같지도 않더니만 급하게 도망치듯 나온 것에 이상하게 저 멀리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던 놈들 둘이 멀거니 이쪽을 바라보고는 쑥덕거리고 있었다.

 청룡 공자, 오늘따라 진짜로 이상합니다. 백호 공자가…. 진짜 머리가 돌아버린 것은 아닌지요?

 그러니까 쟤는 원래 그랬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말이죠…. 저 아플 리가 없는 백호 공자가 아픈 표정으로 있지 않습니까. 얼굴도 붉어져서는!

 무시해, 무시. 그래, 너는 이거나 먹어.

 전부 들리게끔 말하는 게 아무래도 거슬리지만, 청룡이 둘이 논답시고 만든 작은 눈사람의 머리로 예상되는 것을 억지로 현무의 입에 가득 쥐어 넣으니 통쾌하기는 하다. 얼마나 세게 쥐었으면 가루처럼 바스러졌는지는 몰라도, 적당히 무시하며 방으로 들어가니 떠들썩한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쟤네 저러다가 주은찬 방문이라도 부수는 거 아냐? 그러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다시 밖으로 나가자니 정작 아무 일도 없으면 괜히 창피할 일을 만드는 것과 똑같고.

 백건은 흠, 하고 작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어디 탐정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검지와 엄지를 벌려 턱 아래에 대는 묘한 자세를 하고 고민했다. 들리던 목소리로는 아마 현우가 청가람에게 눈이라도 뭉쳐 던진 듯했다. 낯익은 짜증을 내는 목소리하고 보란 듯이 웃고 있는 저 웃음소리가 하도 익숙해서 딱히 주은찬이 따로 무슨 일이 있으리란 생각은 없었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어린 날들이 슬쩍 머리를 스쳤다. 주은찬이 사랑스럽다고 느낀 것도 느낀 것이었지만, 갑자기 친구가 그렇게 좋아진다는 것도 혼란스러웠었다. 아랫도리도 까던 사이였는데. 결국, 백건은 생각을 그만두고 그대로 이불을 쌓아둔 곳에 몸을 훌쩍 던졌다. 겨울이랍시고 차가운 옷장 속에 이불을 넣었다 뺐다 하는 건 괜히 이불만 차가워질 뿐이라며 청가람이 고갤 휘휘 젓던 탓이다. 무엇보다 자신도 썩 따듯한 이불이 싫지 않았기에 뭐라 할 말도 없었다. 그대로 백건은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뜨고는 핸드폰을 켜 무의미하게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애써 밀려오는 생각을 무시했다.

***

 은찬은 건이 방 밖으로 나가고도 한참을 꾸물거렸다. 롱패딩을 꽉 붙잡고 바닥 가득 깔린 이불을 멍하니 보며 흔들리는 눈길을 주체하지를 못했다. 왜 괜히 그런 말을 꺼내서는. 이미 은찬도 알고는 있었다. 눈치 빼면 시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까. 차오르는 생각들을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굳이 내 걱정이 맞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걸까? 그 대답을 듣고 싶었던 이유는 뭐고, 그 대답을 정확하게, 원하는 것을 들은 지금 이렇게 혼란스러운 이유는 뭘까. 그리고 백건은 왜 그랬을까. 왜 그런 답을 한 걸까.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럼, 나는,난 그걸로 만족하는 걸까?

정말로 이 관계로 나는 만족하고 있나?

이루고 싶다는 생각은?

 감기 때문에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겨울날 밖에 오랫동안 장갑 하나 끼지 않고 손을 바람에 맡겨 얼어붙은 손을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리지만, 곧 밭은 기침을 연속적으로 내뱉고는 조심히 이불을 끌어당겨 뜨거워진다고 느낄 정도로 전기장판 온도를 올렸다. 뜨겁게 올라오는 열기에 애써 붉어진 얼굴이 더운 것 때문이라고 넘기고 싶었다.

***

 백건은 어느새 제 옆으로 와 쫑알거리고 있는 현우에게 시선을 슬쩍 주었다. 그래서 왜 여기 있는데. 주은찬 간호나 하러 갈 것이지. 같은 방도 쓰면서. 혼잣말인 양 빤히 바라보며 언질을 주니 현우는 으쓱하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다가 독감이라도 옮으면 어떡합니까. 결국, 백건은 포기하고 다시 이불 위로 풀썩 쓰러졌다. 저런 현무를 위해 잠깐 고개를 든 게 아깝다. 아까워. 그리고 곧 주은찬과 같은 방을 쓰는 것이 저 녀석이라는 생각에 슬 고개를 다시 아래로 내려 현우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까 집어던진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져보다 셀프 카메라라도 켜졌는지 크게 흠칫하며 이게 뭡니까, 공자!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한심하기 짝이 없어 결국 몸을 돌렸다. 주은찬이랑 같은 방인 게 쟤가 아니라 자신이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자니 조금 전 그렇게 어색했던 방 안의 공기가 다시 생각났다. 숨이라도 턱 막힐 것 같아서 괜히 크게 숨을 들이켰다 다시 내쉬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만 하려고 했는데 입 밖으로 꺼내버렸나, 말똥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뭐가요? 하는 현우를 괜히 발로 밀어내자 현우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왜 그러냐며 백건의 발을 탁 쳐 내렸다. 심기를 살금살금 거스르는 저놈을 어떻게 치워버릴까, 하니 현우가 입을 열어서 다 안다는 듯이 어깨를 당당하게 으쓱인다. 다 압니다, 다 궁금하시겠지요. 그건 제가 다 알려드리겠습니다. 공자가 이것저것 다 궁금하신 이유는… 공자가 멍청하기 때문입니다! 아하하!! 

 네가 더 멍청해!! 

 그 말을 끝으로 어느새 현우는 바닥 저 멀리 처박혀 있고, 백건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성질에 괜히 현우를 몇 번 더 지그시 밟고는 문을 열고 제대로 닫지도 않고 멍걸이를 찾아 몇 번 이곳저곳에 박수를 치며 멍걸이를 찾나 싶더니, 주은찬의 방에서 발로 문을 닫고 슬 걸어 나오는 청가람과 눈이 마주쳤다. 와, 너…. 백건이 할 말을 잃은 것은 아마도 청가람이 온몸을 중무장했기 때문일 테다. 마스크도 쓰고, 무슨 이유인지 선글라스도 쓰고, 장갑도 끼고, 모자까지 쓰고는 텅 빈 하얀 죽그릇을 올린 작은 상을 조심히 들고 부엌으로 가다가 청가람은 가만히 백건을 보고 한숨을 낮게 쉬었다. 뭐냐고 물을 새도 없이 고갯짓으로 주은찬의 방을 가리키며 불러. 하고 딱 그 한마디만 한 청가람은 다시 부엌으로 종종걸음을 쳐 걸어갔다. 백건은 잠시 그런 청가람을 보다가 어느새 근처로 다가오고 있던 멍걸이도 뒤로하고 주은찬의 방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고작 5초 사이에 다 일어난 일이었다. 

***

 은찬은 머쓱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로부터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느새 저녁노을이 사뿐히 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낮과는 다르게 조금 더 서늘해진 밖과 가람이 맞추고 간 적절한 방 온도에 건은 티 나지 않게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은찬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가만히 방에 앉아서 건을 향해 고개를 올리고 있던 은찬은 너무 빨리 왔다며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천천히 익숙한 포커페이스의 표정을 한다. 너무 오랫동안 알아온 탓에 저 표정이 뭘 숨기려는지는 몰라도, 무언가를 숨기고자 하는 표정임은 알겠다. 건은 약간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

 음, 뭐, 별건 아니고, 그냥. 

 숨기는 게 뻔한 대답에 건은 이제 완벽하게 딱딱히 굳은 표정이 되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숨기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은찬은 자신의 표정이 들킨 것을 깨닫고 순간 낭패라는 표정이 되었다가 묘하게 굳어가는 얼굴을 애써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소꿉친구끼리의 이야기나 하자고~. 상냥한 것처럼 웃으며 얘기하는 은찬의 모습이 건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득 차오르는 성질을 죽이지 못할 것만 같아서 건은 방을 나서고자 했다. 굳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별 얘기 아니네. 간다.

 하지만 은찬이 붙잡았다. 은찬은 건이 언제나 입고 있는 수련복의 등에 가만히 매달린 국화매듭의 술을 잡았다. 그것도 꽤 세게. 건이라면 그것도 충분히 밀쳐내고 나갈 수 있었겠지만, 건은 가만히 멈춰 섰다. 뒤로 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앞으로 가지도 않고. 왜. 은찬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건은 결국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목소리 사이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분노가 차올라서 그런 것인지, 다른 이질적인 감정 때문인지. 아마 분노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은찬은 애써 반응하지 않으려고 하며 입을 열었다. 뜨거운 열기가 입을 열 때마다 새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머리는 뎅뎅 울리고, 고작 손을 뻗은 거로 멀미가 온몸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아서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나 지금 말하지 않으면 관계의 끝이 보일 것만 같았다. 은찬은 관계의 끝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지독한 관계라고 해도 그랬다. 은찬은 건을 끌어안았다. 겨우 알아낸 감정을 이대로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패딩도 이불도 어느새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지 오래라, 은찬의 어깨에는 헐렁한 잠옷 한 장이 있었다. 서늘한 기분에 은찬이 몸을 가볍게 떨자 건은 그 떨림을 고스란히 느낀 것처럼 순간 움찔했다.

 건아, 난, 나는 만족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적어도, 이런 식으로 감정 소비를 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 

 뭐?

 정말이야. 난, 이걸로 끝내고 괜찮아할 것 같지 않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

 건은 은찬이 하던 작은 독백들에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것이 독백으로 끝나더라도 어쨌든 중간에 자신이 물어봐야 답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진 건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은찬은 작게 외쳤다. 작지만 강렬한 단어였다. 가만히 있어. 보지 마. 건은 움찔하고 살짝 고개를 내리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그 사이에 밖은 해가 깔끔하게 져 있었다. 고작 몇 분 지난 것 같았는데. 은찬은 천천히, 꼭 잡고 있던 국화매듭의 술을 손에서 흘렸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건을 붙잡듯이 안고 있던 것을 풀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너와의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어. 그리고 은찬은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건이 그것을 막았다. 어차피 작은방 안, 그 안에서 뒷걸음질을 치고 뭘 해도 이불이 사방에 흐트러져 있고, 담요나 옷들도 흐트러져서 움직이기도 불편한 곳이었는데 뒷걸음질 친다고 해 뭐가 달라질까. 건은 곧장 몸을 돌려 은찬을 붙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한 손을 올려 은찬의 뺨에 손을 대고 고개를 살짝 돌려서, 입을 맞댔다. 은찬은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감았다가는 시야를 흐릿하게 한 물방울이 떨어질 것 같았기에. 깊게도 붙어서 떼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던 것이 분을 지나려고 할 즈음, 나른하게 떨어졌다. 떨어진 입술은 가는 은백색의 실을 남기고, 열려있던 한 쌍의 눈동자와 닫혀있던 한 쌍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했다. 

 그러면, 우리 친구 그만두고, 애인할까. 백건 특유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은찬의 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은찬은 어느새 붙잡았던 건의 어깨에 살짝 힘을 실었다. 응, 그러자. 어느새 주위가 조용해졌다 싶더니, 투명하게 비치던 창문 밖으로 눈이 오고 있었다. 근처 연한 불빛들이 새하얀 눈들을 보여주었다. 어느새 은찬이 계속 뱉고 있던 밭은 기침은 끝이 나 있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