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기사] 피도란스 단편
제목은 맨 아래에
피도란스는 때때로 울적해지곤 했다.
수련이 원하는만큼 풀리지 않아서. 며칠 전부터 가려고 벼르던 식당이 문을 닫아서. 명예와 기사로서의 삶, 그리고 세상에 대한 고찰... 이유는 다양했고, 평범했고, 심각했으며, 어쩔땐 사소하기까지 했다.
평소 살갑고 쾌활한 그의 모습을 익히 아는 이들은 그 이면의 모습을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기사, 푸른 승냥이는 특유의 낙천적이고 호쾌한 성격으로 가라앉은 기분을 툭툭 털고 금방 일어나 다시 나아간다. 그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피도란스였다.
하지만 털어낸 것은 기분일 뿐이다.
그를 애초에 눅진한 기분에 빠뜨린 원인은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있다. 해결되지 않은, 혹은 새로운 고민들은 언젠가 다시 아무도모르게 그를 울적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하아..."
...이런 생각들로 피도란스는 지금 울적해하고 있었다. 삶이란 고통의 연속이라 했던가? 선택의 연속이라 했던가?
아니, 고통이든 선택이든 그런 건 상관없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든 아무도 모를 외고뇌의 순간을 홀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면,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지닌 기사의 존재는 얼마나 모순적인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누군가는 끔찍하리만큼 외로운 순간을 기사는 막아낼 수 있나?
눈앞의 적을 베고 등뒤의 존재를 지키는, 자신의 검이 닿는 범위 내의 움직임. 그것은 과연 진실된 의미에서 명예와 세상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음. 방금은 조금 건방졌어."
피도란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다. 지금하기엔 확실히 건방진 생각이었어."
그는 임무 중 적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던 마을을 떠올렸다. 또, 부상당한 동료들을 떠올렸다. 그 밖에도 눈과 검이 닿는 곳에서조차 온전히 지켜내지 못한 존재들은 수두룩했다.
한데, 그가 닿지도, 보지도 못한 고통을 막지 못했다며 어찌 자책할 수 있겠는가?
천릿길도 한걸음부터.
코앞의 불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너머의 불은 보지도 못하는 법이다.
"아."
새삼스럽게 들리는 니젤의 소음이 피도란스를 깊은 상념에서 끌어냈다. 상인과 시민들이 잔뜩 오가는 길에 우두커니 서있던 대검을 든 기사를 곁눈질하던 사람들이 아닌 척 걸음을 바쁘게 움직인다.
피도란스는 머쓱하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갈 곳을 찾아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익숙한 인형들을 잡아냈다. 이제 막 이름을 받은 신입기사들은 얼굴에 어두운 기운 한 점 없이 저들끼리 속삭이다 작게 웃었다.
"좋을 때구만~"
아니지.
피도란스가 멈칫했다.
사람은 모두 가슴속에 각자의 고뇌와 우울을 안고 있으면서도, 타인 역시 그리하리란것은 쉬이 떠올리기 어려워한다. 다른 이들이 피도란스를 그저 성격좋고 호쾌한 인물로 생각하듯이. 또, 피도란스가 저들을 아무런 근심없는 젊고 어린 기사라고 생각하듯이.
피도란스는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외쳤다.
"기린! 사슴! 여우!"
아직은 조금 낯선 이름을 불린 어린 기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짧게 친 푸른 머리의 기사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식사하러 가는 거면 혹시 좀 끼워주지 않을래? 나도 마침 배고팠거든."
"뭐... 상관은 없습니다만.."
다른 두명도 흔쾌히 동의하자 피도란스가 감사를 표했다.
"오늘은 내가 살게. 나도 한번쯤은 후배들 앞에서 멋진 모습 좀 보여봐야지."
사슴은 그의 너스레에 함께 키득댔다. 친구의 웃음에 다른 이들도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한결 긴장이 풀린 모습에 피도란스도 함께 웃었다.
피도란스는 언젠가 이들이 힘든 순간에 외롭지 않았으면 했다. 누군가의 내밀한 고민을 캐물을 순 없는 노릇이지만, 언젠가 홀로 괴로워할때 한번쯤 자신을 떠올려 주었으면 했다.
비단 이 후배들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모두가. 피도란스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한명쯤은 떠오르길 바랐다.
가까이에서 본 후배들의 얼굴엔 여전히 근심 한 자락 없다. 물론 '겉보기에는 그랬다'지만, 만일 진정 그렇다면 또 어떤가? 누군가는 타인의 밝은 모습에 위안을 얻곤 하더랬다. 그러니 피도란스는 지금은 이걸로 만족했다.
이들과 함께 먹은 저녁식사도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웠다.
<피도란스 : 어느 봄날, 좋아하는 식당의 닫힌 문 앞에서 울적히 생각하다.>
끝!
작중에서 보여지는 피도란스는 성격이 구김살 없이 정말 좋은데, 걔도 나름대로 고민에 힘들어한 적이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쓴 글.
좋아하는 식당이 문을 열지 않아 상심한 피도란스가 낙담하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이어나갔다는 느낌입니다.
별거 아닌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한 고찰을 타인을 향한 관심과 호의로 마무리하는 피도란스가 보고 싶었어요.
제목을 마지막에 쓴 이유는 읽는 사람이 피도란스가 대체 뭐 때문에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명예까지 거론되는 거창한 숙고의 원인이 맥빠질 정도로 허무한 것이었다면 좋겠다 싶기도 했고요.
아, 피도란스가 동기조보다 선배라는 설정은... 뭐, 당연히 날조입니다.
자기 전에 우다다 쓴 글을 조금 다듬어서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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