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엔 그르니에

나를 보낼 당신에게

이방인들 도련님유모 AU

소재주의: 신체적 체벌. 후반부 문체가 다소 개저문학같음.

흉한 날이었다. 눅눅한 안개가 소매를 적시고 뼈마디마다 엉겨붙었고, 빛바랜 잎사귀들은 변덕스러운 바람의 뜻대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루시엔 그르니에는 벤치에 앉아 몸을 구부정하니 수그렸다. 햇살을 즐길 만한 계절은 아니었으되 일어설 마음 또한 들지 않았다.

그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모호한 표현이겠으나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에 양해를 구한다. 이 루시엔 그르니에라는 자는 타고나길 감정이 무뎠는데, 어리던 그의 흉곽을 열어 심장을 꺼냈더라면 피가 바짝 말라붙은 모습을 볼 수 있었으리라. 햇볕에 오래 내어둔 책의 잉크처럼. 허나 온전히 ‘텅 빈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가슴에 열망 하나 품지 않고선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루시엔은 더더욱 제 감정을 분간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감정의 주인보다는 정원사, 혹은 사육사에 가까운 태도였다.

위장이 뒤틀리고 행동이 초조해진다면 그것은 분노의 징조였다. 말을 쉽사리 이을 수 없고 얼굴의 근육이 떨린다면 슬픔을 느끼고 있을 공산이 컸다. 술에 취한 듯이 머리가 가볍고 웃음이 많아진다면 쉽다. 기쁨은 무해한 감정이므로 있는 그대로 두어도 좋았다. 분명히 짚어내긴 어려우나 기분이 편치 않다면 헛기침부터 하는 식으로, 그는 신체적인 반응과 추상적인 감정을 밀접하게 결부시켜 이해했다. 그의 유모 역시 그런 그를 곧잘 받아들였다. 결혼 전일 그를 보내며 유모는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

“숨을 참고 침을 삼키면 얼굴이 불그무레해집니다. 목소리를 조금 떨고 눈을 크게 뜬 채 조용히 웃는 건 저보다 당신이 더욱 잘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루시엔은 사랑을 알았다.

어쨌든 지금의 그에게로 돌아오자. 루시엔은 세 시간째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종종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일어나야 해.” 그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몇 해 전 친구의 머리통에 연거푸 총알을 박아넣은 이후로 그의 삶은 갑작스럽고 격렬한 변화를 맞이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불꽃으로 화(化)하려는 양 즐겁게 사는 그였기에, 이래야 한다느니, 저래야 한다느니 하는 지루한 말버릇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를 보라. 다른 모든 범부와 다를 게 없이 납처럼 무거운 팔다리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일어나서, 편지를 마무리하고. 이만 부치도록 하자…. 입만 움직여 되뇌이는 그의 어투에선 진한 무기력이 묻어나왔다. 별 것 아닌 일이 이토록 괴로운 이유는 제 결심에 대한 배반인 까닭이다. 오 년, 남은 햇수가 정해져 있음을 통보받은 날 그는 맹세했다. 어떤 의무에도 복속되지 않고 현재만 좇아 살기로. 그러나 죽을 날이 차츰차츰 가까워 오는 것이 느껴지자 의지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유모. 그는 나직하니 중얼거렸다. 에이바 오설리반, 나의 유모. 어떤 말로도 탓하지 않고, 가진 것 하나 없는 그를 따라 영국까지 넘어온 붉은 머리의 여인. 머리를 자유롭게 풀어헤친 채로 그와 같은 삶을 산 사람. 분에 겨운 싸움에 휘말려 살갗이 너덜너덜해진 밤이면 그들은 한 쌍의 짐승처럼 몸을 붙이고 누웠다. 상처를 핥아주듯이 연고를 발랐고 무언의 이해를 나누며 시선을 맞댔다. 그때는 참 좋았더랬다.

건강은 수 년에 걸쳐 나빠졌다. 그는 지척까지 다가온 끝을 직감했다. 가슴을 움키고 가쁜 숨을 다스리다 문득 유모의 등을 보노라면 저 아래에서 염려가 치고 올라왔다. 내가 죽으면.

내가 죽으면 홀로 남겨지는 나의 유모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영국이라는 이방에서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 독신 여성의 몸으로.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긍정적인 전망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리하여.

남몰래 배신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초점 없는 눈이 발밑을 돌아다니는 개미떼를 하릴없이 좇았다. 비가 떨어지기에 그는 몸을 구부려 손으로 개미굴의 입구를 가려주었다. 개미는 거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모래알을 굴려 입구를 막았다. 그 모습이 꼭 ‘우리가 비를 한두 번 겪어보는 줄 아느냐’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시엔은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인기척 하나 없는 집이 그를 맞이했다. 그는 물에 흠뻑 젖은 머리를 털고 겉옷을 벽에 걸어두었다. “에이바?” 그가 소리내어 불렀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외출한 것일까. 아니다, 현관에 단화는 그대로 있다. 잠을 청하는 중일지도. 루시엔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바닥에 고이기 시작한 물웅덩이를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수건이라도 받쳐두어야겠다 싶어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예상치 못하게도 방의 불은 켜져 있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멈추어 섰다.

“에이바?”

이런.

폐에서 공기가 빠져나가고 위장이 까마득히 내려앉는 것 같다면 그것은 두려움이다. 루시엔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분명 서랍장에 넣어두었던 편지 꾸러미가 책상 위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추천서. 소개장. 옛정에 호소해 이 사람을 사용인으로 거두고 인격적으로 대해 달라 부탁하는….

하나도 빠짐없이 상대의 동의 없이 작성된 글들.

루시엔 그르니에가 의무감으로 말미암아 시들었다면 이바 오설리반은 마땅한 분노로 으스러지고 있었다. 소리 없이, 조용히. 두 손을 모아 종이를 구긴 이바의 시선이 루시엔을 향했다. 그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설명하십시오.” 나직한 명령은 최후 변론의 기회. 그러나 마땅히 할 말이 없었기에 옅은 숨을 쉬는 게 고작이었다. 루시엔은 눈을 내리감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당신을 염려했습니다.”

“보다 나은 변명을 생각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에이바, 당신은… 아일랜드인에다 독신 여성입니다. 이곳은 영국이고요. 생계 수단이 필요해질 겁니다. 제게는 책임이 있어요.”

“제 삶의 책임은 오롯이 제 것입니다. 여태 당신이 저를 존중한다 믿었고요. 그런데 당신은 종내에 나를 손에서 손으로 넘길 물건 취급하시는군요.”

노기 서린 음성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더 들어줄 게 없다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난 이바가 양쪽 팔뚝의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회초리를 잡았다. 그 순간 그는 이바 오설리반이 아니라 뤼시앵 그르니에의 유모였다. 루시엔이 배밀이를 할 때부터 젖을 먹여 키우고 그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 여인이 다시금 제 권위를 딛고 일어섰다.

“의자 위로 올라가세요. 잘못했다고 하지 않으면 매질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루시엔은 더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다소 맥이 풀린 낯으로 이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바짓단을 걷어올렸다. 의자 위로 올라가 자세를 반듯이 하자 회초리가 휙 소리를 내며 종아리로 떨어졌다. 짝, 나무에 살이 감기는 소리가 매서웠다. 두 번, 세 번 매질이 이어지자 하얗게 질린 피부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번져나갔고 결국 횟수가 두 자리로 넘어갈 즈음엔 피가 비쳤다. 그러나 루시엔은 움찔거리고 휘청이면서도 신음 한 번 내는 법이 없었다. 평소엔 고통을 드러내는 일에 거리낌이 없던 그가 오늘만큼은 악착같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버티고 있었다. 잘못했다는 말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연거푸 팔을 휘두르던 이바의 얼굴에선 어느새 절로 눈물이 흘렀다.

마침내 서른아홉 번째 매가 떨어질 무렵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루시엔의 다리가 꺾이며 마른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고, 이바는 울음을 터뜨리며 들고있던 나무 회초리를 바닥으로 팽개쳤다. 얼굴을 감싸쥐는 두 손이 많이도 떨렸다. 루시엔은 그것이 고통스러웠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다리에선 피가 흐르지만, 그 무엇도 상관하지 않게 되는 것. 상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감정. 그것이 고통이었다.) 그는 앞으로 비척비척 기어가 이바를 끌어안았고 목부터 어깨로 이어지는 살결에 고개를 파묻었다. 창밖은 어두웠다. 차라리 천둥에 두려워 떠는 아이가 되고 싶은데 그는 한 번도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게 저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 되더라도.” 끊어질락 말락 이어지는 목소리. 진심을 전하기는 변명보다 쉬웠다. 다만 아플 뿐이었다. “당신 웃는 날이 많았으면 합니다….”

“그건 내가 정하는 일이에요. 당신이 없는 곳에서 웃느니 이 자리에서 우는 걸 택할 겁니다. 몇 번이라도요. 그거 압니까, 뤼시앵? 나는 매일 아침마다 당신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상상을 해요.”

이바 오설리반은 숨을 쉬듯 속삭였다. 심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인의 손끝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을 대하듯 루시엔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들은 루시엔이 무모했던 순간들, 그가 때론 피 흘리고 때론 약에 취한 채로 템즈 강변의 거리에 누워있던 날들을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그때를 탓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되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루시엔은 눈을 크게 뜨더니 목소리를 조금 떨었다.

“유모.”

“나는 당신이 당신의 삶을 어찌하든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딘가에 쓰러져 죽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단 말입니다.”

“유모….”

“그러니 감히 말하건대 내가 당신보다 더 당신을 사랑합니다.”

“에이바, 제발!”

“헌데 그런 내게 이런 식으로 위하는 척을 하려 듭니까?”

가슴이 미어져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루시엔의 목에서 괴상한 소리, 비참한 짐승 같은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제 안에서 몸부림치는 감정이 느껴지는데 그게 도무지 무엇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가 무게를 실어 밀자 바닥에 앉아있던 이바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묵직한 쿵 소리가 났다. 그들은 살을 부대끼고 울거나 움키며 바닥을 굴렀다. 아아. 하고 싶은 말들, 변명 아닌 말들이 너무도 많았다! 유모, 사랑하는 유모. 저 편지는 찢어버릴 겁니다.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어요.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주워섬기는 문장들.

사실 상관없었다. 그가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것임을 이바는 말 없이도 이해했다. 그것은 잠시의 방황이었다. 미래를 염려해 현재를 저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 그는 성서를 읊듯이 거룩하게 입술을 떨면서 루시엔의 이마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혼란은 끝났다. 그들이 작별하는 일에는 준비가 필요치 않았다. 오직 이 순간만이 실재하기에.

카테고리
#기타
  • ..+ 13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