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밀회>

첫 만남 이후로 줄리아는 미오에게 밖으로 나올 수 없냐는 얘기를 더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늘 정해진 시간에 그녀는 창문을 넘고, 나무를 타고, 미오의 방 창문 앞까지 다가와선 종이로 대화를 나눠주었다. 미오는 그림책의 단어를 조합해야만 얘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지만, 줄리아는 천천히 미오가 단어를 고르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미오는 줄리아에게 자신이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물었다. 엄마와 딸이란,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저번의 그 작고 어린 인간은 당신의 딸이었는지에 대해. 줄리아는 느릿느릿 만들어지는 문장을 보며 웃곤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다.

[글쎄. 가족에는 여러 관계가 있으니까 말야. 피로 이어지든 아니든, 함께 살면 가족이 아닐까? 내 가족만이 진짜 가족의 형태라고는 할 수 없겠지. 네게도 네 가족이 있잖아?]

[그건 내 여동생이었어. 로잘린이라는 이름이었지. 아. 소개가 늦었네. 나는 줄리아야. 줄리라고 불러도 돼.]

미오는 줄리아의 대답에 웃다가도 '가족'에 대한 얘기를 곱씹으면 얼굴이 어두워졌다. 잠시 고민하던 미오는, 너도 가족끼리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는지에 대해 묻고, 줄리아는 창백해져선 그건 아니라고 부인했다. 부부라면 모를까, 엄마와 딸은 그러지 않고, 절대로 그래선 안된다면서.

미오는 줄리아의 대답에 혼란스러워졌다. 엄마와의 세계가 전부였던 미오에게 그건 잘못된 세계라는 진실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여태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일을 당하고 살았는가. 그 사실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졌다. 엄마에게 나는 딸이 아니었던 건가? 그렇다면 여태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키워진 거지? 엄마는 날 딸로서 사랑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그 사랑한다는 말은 무얼 의미했던 거지?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미오를 보고 줄리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무거운 진실을 감당하기에 미오는 너무 어렸다. 줄리아는 미오를 달래주려는 듯, 창문에 조용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머리 근처에 그림자가 지자, 미오는 울상이 된 얼굴을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줄리아의 손은 마치 제 머리를 쓰다듬듯 창문 위에 닿아있었다.

미오는 애틋하게 그 손을 바라보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유리 너머로 줄리아의 온기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창가에서 떨어지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

라며, 줄리아가 사과하고 있었다. 미오는 도리질했다. 이 행위만으로도, 이 만남 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구원받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미오는 앞으로도 따뜻한 그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스키조 부인은 그들의 밀회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키조 부인은 미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조용히 돌려 말하며 그녀를 압박했다.

“슬슬 밤공기가 찬 게 몸에 좋지 않을 것 같구나. 커튼을 다는게 좋을 것 같은데 미오는 무슨 색 커튼이 좋니?”

“네?”

“미오도 슬슬 사생활이라는 게 필요할 텐데. 이러면 옆집에서 창문을 통해 방 안이 다 보이니까 가릴 게 있는 편이 좋겠구나. 미오도 그렇게 생각하지?”

“저, 그러면 햇빛을 볼 수가….”

“낮에 잠깐 걷는 것 정도는 문제없단다. 미오. 커튼을 달고 싶지 않니? 엄마가 미오 생각해서 얘기한 건데, 미오는 마음에 안 드니?”

미오는 커튼을 달지 않기 위해 나름의 반론을 시도해 보았지만, 엄마의 표정은 시무룩한 목소리와 달리 완고했다. 그건 이미 정해진 대답을 요구하는 말이었다.

“…아뇨. 마음에 들어요. 커튼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그래. 역시 우리 딸. 그럴 줄 알았단다. 우리 착한 미오가 엄마 말을 안 들을 리가 없지. 엄마가 다 우리 미오 생각해서 해주는 건데.”

“…….”

미오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게 사생활이 없다면 그 원흉은 창문 너머의 줄리아가 아니라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는 그녀일 터인데. 무어라 거절조차 하지 못하고 미오는 그저 가만히 스키조 부인이 커튼의 색부터 두께까지 알아서 척척 골라주는 걸 듣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미오의 방에는 연분홍색 두꺼운 커튼이 달렸다.

스키조 부인은 커튼이 잘 달렸는지 시험해 본다는 이유로 커튼을 걷었다 치길 반복하며 커튼이 움직이면 얼마나 큰 소리가 나는지를 미오에게 각인시켜주었다. 스키조 부인은 커튼은 언제든지 걷었다 쳐도 된다고 했지만, 사실상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만 커튼을 걷고 치는 게 허락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시간에 커튼 소리가 나지 않으면 스키조 부인은 미오의 방에 찾아와 커튼을 확인하고, 손수 쳐 둔 다음 돌아갔다.

창을 통해 줄리아와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것도 이렇게 빨리. 미오는 방에서 소리를 낼 수 없기에 아마 줄리아도 창문 밖에 와도 두드리거나 하는 식으로 미오에게 신호를 줄 수 없으리라. 그렇게 밀회가 끊길 것만 같았다.


어느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세게 부는 밤이었다. 미오는 창문을 가린 커튼을 보며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줄리아를 만나지 못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빗소리에 줄리아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지는 않을까. 그리한다고 해도 제가 별달리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더 듣고 싶었다.

탕탕탕.

“…….”

탕탕탕

“…….”

탕탕탕

“…?”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것치고는 제법 규칙적이었다. 미오는 네 번째 두들김이 있기 전에 조용히 일어나선 조심히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 소리가 나지 않도록, 커튼 아래로 들어가 창문을 바라보면, 창밖에 줄리아가 비바람을 맞으며 있었다. 깜짝 놀란 미오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을 뻔했다.

줄리아는 전과 같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미오도 수줍게 똑같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커튼 달았구나. 덕분에 얼굴 보기 힘들게 됐네.]

줄리아가 주섬주섬 꺼내 보인, 비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종이에는 그리 적혀 있었다. 미오는 제가 엄마를 거절하지 못한 탓에 달린 커튼의 감촉을 등 뒤로 느끼며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미오는 미안함을 담아 고개를 살짝 숙였다. 비구름보다도 짙은 어둠이 미오의 얼굴에 드리웠다.

[괜찮아. 네게도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줄리아는 이번에도 창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뺨에 가까운 위치였다. 마치 제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것만 같아서 미오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미오의 눈에서 흐르는 것만은 여전히 검었기 때문에, 줄리아의 앞에선 울어선 안 된다며 애써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새삼스레 제 불완전함이 와닿아 서러워졌다.

[미오. 책, 가져올 수 있어? 너랑 얘기하고 싶어.]

마치 나오기 전에 미리 할 말을 다 적어온 것처럼 줄리아는 젖은 종이를 바꾸기만 했다. 그 과정에서 물에 젖은 종이가 찢어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지. 미오는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커튼에서 나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번개가 쳤고, 어느샌가 열린 방문 너머엔 스키조 부인이 있었다.

언제부터 그녀가 거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비바람 소리에 엄마가 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한 건지, 줄리아에게 한눈이 팔려 알아채지 못한 건지. 어느 쪽이든 스키조 부인에게 밀회를 들켰다는 생각에 미오는 구토감이 올라왔다. 손에 땀이 났고,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서늘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스키조 부인이었다.

“미오. 안 자고 뭐 하니?”

“어, 엄마… 저… 그, 빗소리가 듣기 좋아서….”

“‘창밖 구경’을 하는 건 좋지만, 그건 낮에 하는 게 좋지 않겠니?”

“처, 천둥번개가 쳐서… 반짝반짝… 하는게 시, 신기해서….”

“천둥번개가 신기한 건 알겠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구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렴, 미오. 침대에 가서 누우렴.”

“저, 비 오는걸 조금 더 보고 싶어요….”

“하아…. 어쩔 수 없구나. 그럼 엄마랑 같이 보자. 그리고 오늘은 같이 자자꾸나.”

그리 말하며 스키조 부인은 창가로 다가갔다. 이대로라면 커튼이 걷히고 줄리아가 엄마와 만나버린다. 만약 그렇게 되면…. 엄마가 그녀를 혼내면 나는 엄마를 막을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혼낸다 따위의 가벼운 정도에서 끝날까? 엄마가 그녀를 2층 창문에서 밀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런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 만약’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어느샌가 스키조 부인은 창가에 와 있었다. 미오가 그녀를 말릴 틈도 없이 스키조 부인은 커튼을 활짝 걷었다. 하지만 걷힌 커튼의 너머에는 비바람에 나뭇잎이 몇 개 붙은 창문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미오는 아무도 없는 창문을 보며 이제 정말로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렇게 비바람이 치는데 창문을 넘어 비를 맞으며 이웃집 2층 창문으로 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었는가. 미오는 마음속에서부터 무언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반면, 스키조 부인은 아무도 없는 그 창가가 마음에 들었는지, 커튼을 걷은 채 돌아와선 미오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두 모녀가 잠을 청한 뒤, 창가에 사람 그림자가 재차 기웃거렸다.

‘아슬아슬했구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줄리아는 추위에 떨며 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밖과 달리 따스해 보이는 어둠 속에 잠들어있는, 누가 봐도 가족처럼 곤히 잠든 두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줄리아에게는 그것이 썩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미오가 아침에 창문을 걷었을 때, 창틀에 젖은 종이쪽지 하나가 끼워져있었다.

[내가 만약 너를 거기서 꺼내주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해? 네가 거기서 나오길 원한다면 네 그림책의 아무 페이지나 찢어서 여기 꽂아줘.]

미오는 다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줄리아가 저를 이곳에서 꺼내주겠다는 것보다도, 줄리아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미오는 쪽지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가 스키조 부인에게 들킬라 입에 넣고 삼킨 뒤, 방에 널린 책을 둘러보다가 어느 한 페이지를 찢어서 창틀에 꽂았다.

[그렇다면 줄리엣은 태양이구나. 솟아라 아름다운 태양아. 시샘하는 달을 없애라.]

그리고 또 다음날, 창틀에는 [이틀 뒤, 밤에 데리러 올게.]라는 쪽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저번의 쪽지와는 재질이 다른 종이였다. 미오가 종이를 뒤집어보면, 책을 찢어 남긴 쪽지였던 건지 어느 문장이 적혀있었다.

[로미오, 당신 이름을 벗어 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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