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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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허공 위를 떠돌길 몇 분째. 내려앉을 기미 없이 어물거리는 모양새를 곁눈질로 흘끔거린다. 저 손바닥의 온도를 알고 싶다. “사람이 엄청 많아!” “하라주쿠니까.” 며칠 전부터 고대하던 첫 데이트. 데이트라는 단어가 이토록 간질거리는 거였던가. 사귄 지 한 달이 꼬박 넘어가고 있지만, 서로 임무가 바빠 밖에서 따로 만나
이타도리 유우지는 타인에게 살갑다. 창밖 너머로 보이는 웃음기 머금은 얼굴에, 성큼 옮기던 걸음이 우두커니 세워졌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말소리를 흘려넘기며 사토루는 일전 유우지에 대해 내렸던 정의를 재차 곱씹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 남을 따르게 하는 힘이 있는 녀석. 그 덕분인지 유우지의 주변엔 언제나 여럿이 모여있다. 누군지도 모를 이들에게 빙 둘러싸
“고죠 사토루가 봉인됐다.” 조악한 음질의 기계음이 고막을 긁는 생경한 감각. 귀에 내리꽂힌 비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눈을 깜빡여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메카마루의 생김새를 띈 동그란 괴뢰를 주시했다. 피가 차갑게 식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겪어본 적 없어 활자로만 보고 넘겼던 말을 이제야 이해한다.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의 찰나. 그 순간 알아
Day 1 “꽃을 고르는 안목이 좋네.” 제게 하는 말일까. 얌전히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던 유우지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눈을 붕대로 가린, 누가 봐도 수상한 행색의 사내가 이쪽을 보며 생긋 웃고 있다. 허벅지를 반쯤 덮는 넉넉한 바람막이 주머니에 양손을 끼운 채 여유로운 모습. 안목을 운운하는 걸 보아하니 눈이 아픈 사람은 아닌
단풍잎을 닮은 모양새를 띈 오동통한 손. 보드라운 살결이 손끝에 감기는 촉감이 사랑스럽다. 자그마하고 여린 손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본다. 자신의 손가락 두 마디도 채 되지 않는 작디 작은 손. 아이의 손을 끌어다 제 입가에 가져다 댄다. 통통한 손바닥에 입술을 대고 부부, 하고 소리 내어 간지럽히자 꺄르르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비단 외관만 보면 자
“고백은, 고맙지만… 미안.”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돌아온 대답은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상정 외랄까, 오히려 거절의 말을 던진 쪽이 울기 직전인 얼굴이라 좀 놀랐달까. 잔뜩 붉어진 낯을 감추고 싶은지 푹 수그러지는 동그란 머리통. 그와 함께 긴장감에 곰질거리는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본다. 누가 보면 차인 쪽인 줄 알겠네.
어릴 때부터 이상한 의무감이 있었다.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Flame 누군가 귀에 대고 지시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딘가에 홀린 듯이 남들을 도왔다. 작게는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돕는 것부터, 크게는 소매치기범을 잡아 표창장을 받기까지. 그 강박은 해가 지날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점차 강해져서, 진로를 정할 때도 별 고민 없이 소방관을
저울로 잴 수 없는 감정의 무게를 재고 싶어. 양팔을 벌려도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크기를 가늠하고 싶다. 사랑의 크기를 헤아린다면 커튼 틈새로 스미는 햇빛에 아침임을 깨닫는다. 창에 반사되어 쏟아지는 빛을 피해 보려 촉감 좋은 이불에 얼굴을 부빈다. 암막 커튼은 답답해서 싫다고 부러 얇은 재질을 고른 자신이 원망스럽다. 아무래도 다음 휴일엔
어슴푸레한 달빛이 커튼 틈새로 스미듯이 비친다. 지금이 새벽임을 대충 짐작하며 반도 뜨지 못한 눈을 한 채로 옆자리를 더듬거렸다. 매끈한 이불만이 손바닥에 감긴다. 옆에 있어야 할 아이가 없다. “유우지?” 당황한 그의 시야로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여 안도한다. 다행이다. 여기에 있어. 일순간 불안에 경직됐던 몸이 풀리는 걸 느끼며 유
“다들 오랜만이네?” 출장이라도 다녀온 듯 천연덕스러운 인사다. 사내의 경망한 음성이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쿠기사키는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한쪽 눈을 아무렇게나 벅벅 문질렀다. 봉인을 당해놓고도 사람이 변하질 않느냐며 한 소릴 늘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멀찌감치 뒤에 서 있던 메구미는 그렇게 쉽게 변할 위인이 아니라며 말을 거들었다. 이제야
연애를 시작했다. 선생님과 제자, 집행인과 사형수, 최강 주술사와 스쿠나의 그릇. 예사롭지 않은 관계성에 박차를 가하듯 하나를 더하게 되었다. 연인, 연인. 같은 음절을 계속 반복하며 입안에서 도록 굴린다. 그런 사이가 된 거구나. 선생님이랑 내가. 현관을 들어서면 바닥에 다닥 놓인 슬리퍼 두 켤레, 손을 씻으러 향한 욕실 세면대에 자리한 알록한 칫솔 두
고죠 사토루는 연애에 흥미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없었다’가 맞겠다. 그렇다고 연애를 안 했다던가, 하는 건 아니다. 죄다 한없이 가벼운 관계이긴 했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연애 횟수 자체는 적지 않다. 성욕 해소 용의 섹스 파트너.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연애에 성실히 임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을 소비해서 관계를 이어나간
“유우지-” 가볍게 울리지만 부드러운 음성. 사토루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품에 안고 있던 주해를 꽉 안았다. 멀리서 이름을 불린 게 방금인데 어느새 어깨에 손이 올려져 있다. 키가 190cm을 훌쩍 넘는 이 사내는, 굳이 날아다니지 않더라도 보폭이 커서 이동이 빠르다. 어깨에 내려앉은 무게감에 온 신경이 쏠린다. 이대로라면 주력 컨트롤이 흔들릴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