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어느 날에
생 님 연성교환
비 오는 어느 날에
W. 하루나
유달리 햇살이 눈 부신 날이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구름은 폭신하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정도로 하얬기에 비가 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곤란한데.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지던 프시히는 제 옆에서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는 하랑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하랑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턱에 고여 떨어지는 것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프시히는 제 심장이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음을 깨달았다.
쿵, 쿵. 귓가에 어지럽게 들리는 이 소음을 하랑도 듣지 않을까 싶어 주먹을 꽉 쥐었다 편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어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거세게 쏟아지는 빗소리 외에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이 상황이 묘하게 불편했다. 랑아. 평소보다 더 달게만 느껴지는 이름의 울림이 혀끝에 감돌았다. 이상했다. 누군가의 이름이 이렇게 달았던가. 응? 그의 부름에 하랑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봄날 흐드러지게 핀 꽃의 색을 닮은 머리카락, 저를 담아내는 맑은 눈동자, 그리고 조금 더 붉어 보이는 입술. 거기까지 살펴본 프시히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프시히? 기분이 안 좋아진 걸까.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묻는 하랑의 목소리에도 그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맞추고 싶다.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면서도 유연하게 화제를 돌릴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비가 많이 오네. 그렇게 고심 끝에 입에 담은 말은 정말이지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러게…. 귀가 아플 정도로 커다란 빗소리 때문일까. 하랑의 대답이 유달리 희미하게 들렸다. 곁에 있는데도 제 옆에서 멀어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에 급하게 시선을 돌리니 하랑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너무 많….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엉뚱한 말이 프시히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하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말의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희미해지는 것은 역시 부끄러워서 그럴 터였다. 그래도 하랑이 제가 이 상황이 불편하여 말을 돌린 거라 여기는 건 싫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피며 말을 고르던 그는 하랑의 가녀린 어깨를 가볍게 감싸쥐었다. 역시 허락을 구하는 것이 좋을까. 입을 맞춰도 되겠느냐고 말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으나 말로 맺어지는 것은 없었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열기는 온몸 곳곳에 퍼져나갔다.
랑아. 조금 가라앉은, 엉망진창인 목소리였다. 상황을 파악하듯 프시히를 멍하니 바라보던 하랑은 그제야 청아하게 웃어버렸다. 그 웃음소리에 프시히가 멈칫하며 손을 떼려는 순간, 하랑은 대답 대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물기를 머금은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고 하얀 뺨은 그와 같은 이유로 붉게 물들었다. 아마 하랑의 심장 역시 저와 비슷한 빠르기로 뛸 테다. 랑아. 다시금 제가 아끼는 이의 이름을 입에 담은 프시히는 느릿하게 손을 올려 온기를 머금은 뺨을 매만졌다.
너와 관련되면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려. 말도, 이성도 하랑과 관련되면 평소의 저다움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아서 큰일이고. 뒤의 말은 쑥스러움을 가장하여 삼켰으나 하랑이라면 알아차릴 테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맞댄 입술은 불에 델 것처럼 뜨거웠고 혀끝에는 아릿하면서 잊을 수 없는 단맛이 감돌았다. 앞으로도 너에게만 이러고 싶어. 더운 숨을 내뱉으며 하랑을 제 품에 숨기듯 안은 프시히는 빈틈없이 입술을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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