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傳達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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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한 칸의 세상에 너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 진단메이커 온통 하얀색이었다. 색이라고는 눈을 찌르며 내려온 나의 검은 머리카락 뿐. 아니, 이것 또한 색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터였다. 해 보았자 병실 천장의 불투명한 전구가 깜박거리다가 힘이 다하면 찾아오는 어둠과 같은 종류였으니까. 나는 유리조각 하나 없는 네모난 방에서 내 모습조차 보지
천천은 다정한 사형이었다. 제 사제라면 껌벅 죽었고, 사제를 부를 때의 목소리는 다른 때보다 상냥했으며, 맛있는 건 전부 사제에게 양보하고, 사제가 잘 때 늘 자지 않고 곁을 지켰다. 천성이 밝은 탓도 있을 터지만 유독 사제를 살갑게 챙기려 드는 것은, 저들이 함께한 세월과 그 속의 약속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도리는 제 얼굴을, 그리고 그에 난 흉터를 더듬
그날은 정말이지 온 하늘의 별이 전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타오르는 점들이 공중으로 높이 솟구쳤다가 최고점을 찍고 맹렬히 추락했다. 바람을 가르고 유성이 후두둑 낙하하면, 내 주위로 서 있던 인영들이 후두둑 형체를 잃고 바닥과 맞닿았다. 축제였다, 별들의 축제. 인간의 손으로 쏘아 올린 별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날이었다. 재앙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던가.
아주 깊은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끝없는 물이 폐 안으로 굽이치고, 텅 빈 몸에서 울리는 메아리가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 막혀 산산히 부서져 나가는 꿈. 나는 의탁할 길이 없이 수초처럼 흔들리다가 바위에 부딪혀 먼 바다로 가루가 되어 나아갔다⋯ ⋯살려 줘,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를 반기지 않는 파도가 지평선 너머로 내 몸을 꽂아버린다 해도, 살고 싶었다
白犬前行黃犬隨 백견전행황견수 흰둥개가 앞서 가고 누렁이가 따라가는 野田草際塚纍纍 야전초제총류류 들밭 풀가엔 무덤들이 늘어섰네. 老翁祭罷田間道 노옹제파전간도 제사 마친 할아버지는 밭두둑 길에서 日暮醉歸扶小兒 일모취귀부소아 저물녘에 손주의 부축받고 취해서 돌아온다. - 이달(李達, 1539~1612), <제총요祭塚謠>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해가 뜨면 달이 지고. 달이 뜨면 해가 지고.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보아 온 지 어언 600년이 다 되었던가. 변화무쌍한 하늘의 운행을 제하고는 단조로운 일상이라 생각하였다. 그런 그의 생에서도 기억에 남을, 이례적인 하나가 될 오늘. 싸늘한 바람이 방울을 흩트려 놓는 오후. 상해를 입히지 않는 대련, 홀로 하는 수련, 임무를 위한 견제, 가벼운 몇 초의
봄이었다. 도쿄에서 맞는 첫 봄. 토오노 시즈카는 들뜰 수밖에 없었다. 4월에 시작되는 신학기는 시즈카가 도쿄에서 내딛는 첫 발걸음이자, 부단히도 노력해 온 지난 3년의 결실이었다. 테니스의 왕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도쿄 내 고등학교 중 최고의 테니스부를 목표삼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3년.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는 정말이지 눈밭에서 뛰노는 강아지
*등장하는 모든 오컬트적 정보는 뇌피셜과 허구임을 밝힙니다.* 발을 들이면 들일수록 어두워지는 실내. 들리는 소리라고는 저 밖에 꽂아두고 온 깃대가 바람에 요란스레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숨소리. 피부로 느껴지는 눅눅한 공기와 그것을 애써 헤치며 나아가는 가냘픈 등불. 저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역한 냄새와 그에 반응하여 토악질을 내놓는 몸을 가까스
겨울이었다. 차에서 내려 밤사이 내린 버석한 눈을 밟으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한겨울의 바람이 높게 올려 묶은 새하얀 머리칼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쾌적한 공기와 대조되는 무거운 침묵이 몸을 감쌌다. 가볍게 입김을 내어 덕지덕지 따라붙은 한기를 몰아내고 곧장 대기실로 향했다. 40분쯤 뒤에 올라갈 무대를 위하여. 륜은 이번 공연의
그에게 사랑이란 이렇게도 생경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경로이자, 어젯밤 잠시 스쳐 지나간 꿈보다 허황된 감정이었으며, 부유하는 공기만큼이나 의식하지 않았던 개념이었다. 낳아준 이들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과거의 자신들을 제 피붙이에게 투영하기 바빴고, 기대와 의무감에 갇혀 내몰리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섰다. 비로소 그곳에서 선뜩하니 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