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존나 박사와 노란 고양이 1.
냐-.
나요한의 집 앞에 누런 고양이(일반적으로 치즈냥이라고 불리는 종으로 아주 귀엽게 생겼으나 나요한은 그저 누런 놈이라고 부름.) 가 나타난 것은 어느 여름날 아침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침 조깅을 위해 운동복 차림으로 정해진 시각에 아파트 단지를 나서던 나요한은 화단 앞에서 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신에게 걸어오는 고양이를 목격했다. 사실 나요한 박사는 옆에서 외계인이 지나가도 신경도 쓰지 않을 정도로 주변에 무심한 사람이라 하마터면 그 고양이도 지나칠 뻔했다. 고양이가 바로 발 앞까지 기어 와서 울어대지만 않았다면.
냐아!
“뭐야, 이거.”
물론 나요한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슬쩍 지나친 후 다시 걸어갔다.
냐아!!
하지만 고양이는 다시 나요한의 발치에 나타났다. 이번엔 제아무리 나요한이라도 슬쩍 피해가기 어려웠다. 왜냐, 고양이가 나요한의 발등 바로 위로 달려들었으니까.
“앗쉬! 너 뭐야! 비켜! 저리 꺼져!”
냐!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나요한이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면서 자신의 발등에 올라 탄 고양이한테 성질을 냈다. 천하의 나요한 박사가 고양이한테 성질을 내면 고양이가 알아 들을 거라고 생각을 한 것일까? 아니다. 그는 원래 열받으면 아무 것에나 성질을 빡빡 낸다. 그저 고양이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을 뿐이다.
하지만 고양이도 만만치 않았다. 고양이는 본디 인간을 아래로 보는 족속으로, 나요한의 말을 들어먹을 리가 없었다. 고양이는 태연하게 나요한의 발등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꼬리를 한껏 꼬며 외쳤다.
냐!
“아, 존나 짜증나네.”
나요한은 어지간해선 ‘존나’라는 욕을 하지 않는데 그건 나요한의 미국 이름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도 ‘존나’라는 욕을 한다는 건 진짜 개 빡쳤다는 뜻이다. 나요한이 이렇게 열받은 이유는 단순히 고양이가 자신의 조깅을 방해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깅을 5시 45분에 시작해야 하는데 벌써 이 고양이 놈 때문에 1분이나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겨 짜증이 난 것이다.
나요한은 자신의 발등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고양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서는 화단으로 다시 옮겨놓으려 했다. 하지만 고양이가 그렇게 순순히 움직일 리가.
냐아악!!
털을 바짝 세우고 꼬리를 치켜들며 이를 드러낸 고양이는 나요한의 손 사이로 쏙 빠져나가서는 나요한을 사납게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고양이의 동공이 세로로 접히며 밝은 호박빛의 동공이 드러났지만 종족이 다른 나요한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뭐야. 저리 안 가? 너 때문에 내 아침 조깅이 1분이나 늦었잖아!”
손목의 스마트워치의 시간을 고양이에게 가르킨들 알아들을 리 없건만. 나요한은 자신을 노려보는 누런 고양이를 향해 성질을 내고서는 황급히 조깅 코스를 향해 뛰어갔다.
그날 나요한은 하루종일 기분이 불쾌했다. 순전히 조깅을 1분 가량 늦게 뛰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아침 식사도 1분 늦게 시작해서 1분 늦게 끝났고, 출근도 1분 늦게 했다. 업무도 1분 늦게 하게 되고 점심도 1분 늦게 먹게 된 것이다.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었다. 도대체 왜 조깅하는 길에 난데없이 고양이가 나타난 것일까.
“지금 그딴 걸 발표라고 하는 거야? 15페이지에서 그래프가 하나도 안 맞잖아!”
하필 오늘 실험 발표가 있었던 임주환 연구원은 자신이 제대로 잘못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 발표가 어제였다면 저 존나 박사에게 조금은 덜 깨졌을까? 차라리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내일로 미룰 걸 그랬나? 하필 오늘 존나 박사의 심기가 유달리 불편할 줄 알았다면 절대 발표날짜를 오늘로 잡지 않았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죄송하면 다야?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냐!”
“다시 써오겠습니다. 지적하신 부분을 보완해서…….”
“진작 그렇게 써와야 했을 거 아냐! 발표 한두번 해봐?”
오늘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임주환 연구원은 괜히 서러워졌다. 분명 시키는 대로 실험하고 결과를 내서 발표자료를 만들었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깨져야 하는 것일까. 존나 박사가 아침에 고양이를 만났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 수모를 당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 임주환 연구원은 그저 자신에게 이러한 불운을 가져다 준 신을 원망했다.
흰 연구원 가운을 펄럭이며 임주환 뿐만 아니라 모든 연구소의 연구원들의 멘탈을 한번씩 조진 후 연구실로 돌아온 나요한은 씩씩거리면서 책상 앞에 앉아 시간을 확인했다. 6시 1분. 아침의 그 고양이만 아니었어도 6시 정각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자 또 짜증이 났다.
“불쾌한 고양이 새끼.”
나요한 박사는 저 혼자 중얼거리면서 사무실 문을 걸어 잠갔다. 창문을 잠그고 창문 블라인드를 걷어 내렸다. 사무실 불도 끈 후에, 책상 위의 스탠드만 하나 켜놓고는 라텍스 위생장갑과 필터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러고는 책장 맨 아래에 있는 오래된 서류상자를 열어 먼지가 가득 쌓인 종이서류를 꺼내 들었다.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열어 작은 먼지 털이를 꺼낸 나요한은 종이 서류 위에 잔뜩 쌓인 뽀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러자 서류의 제목이 드러났다.
[1999년 5월 의료기록 – 담당의사: 김진수. ㅇㅇ마리아요양원]
서류 위의 먼지를 닦아가며, 나요한 박사는 먼지 속에 파묻혀 아무도 관심없을 오래된 기록을 찬찬히 살폈다.
정확하게 9시 1분 0초가 되자 나요한 박사는 미련없이 작업을 중단하고 퇴근을 했다. 아직도 훤한 연구실이 몇 군데 있긴 했지만 산속에 있는 터라 연구소 주변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 가득히 들려올 뿐. 연구소 앞마당은 나무를 베어낸 터라 훤히 시야가 트여 여름밤의 별빛이 환히 빛났지만 나요한은 달이 둥실 떠서 맑은 밤하늘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곧바로 주차장으로 걸어가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별 생각없이 관성에 따라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에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꾸려던 찰나,
“아아아악!”
나요한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차의 시동을 껐다. 그리고는 황급히 실내등을 켰다.
냐~
웬 고양이가 보닛 위에 앉아서는 나요한을 보더니 입을 벌려 하품을 찌익 했다. 하마터면 고양이를 실은 채로 차를 후진할 뻔했다! 만에하나 저 망할 고양이가 차에서 떨어졌는데 그걸 모르고 차를 움직이느라 고양이가 차에 깔려 죽기라도 한다면!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뭐야, 저거! 아침 그놈이잖아!”
보닛 위의 고양이를 유심히 살피던 나요한이 짜증을 냈다. 자동차 실내등의 구린 조명으로 살펴보긴 했지만 등짝의 누런 무늬라든가, 기다랗고 재수없는 꼬리, 호박색의 땡그란 눈에 약간 툭 튀어나온 얄미운 입모양까지, 분명 아침의 그 망할 고양이가 맞았다!
“훠이. 훠이. 저리가!”
냐아아아.
나요한은 차에서 내려 보닛 위의 고양이에게 손짓을 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나요한을 비웃기만 할 뿐 (적어도 나요한의 시점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꼼짝하지 않았다.
“안 꺼져! 나 퇴근해야 된다고!!”
냐아아아아~
어쩐지 고양이에게 조롱당하는 느낌이었다. 나요한 박사는 살면서 어느 인간에게서도 느껴본적 없는 굴욕적인 감정에 치를 떨었다. 이제까지 남에게 굴욕을 준 적은 수없이 많아도 자신이 굴욕받은 적은 없었건만. 천하의 천재 박사 나요한이 이런 수모를 겪다니! 치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감히 고양이 주제에!
쓸데없이 고양이에게 진지해진 나요한은 얼른 고양이의 허리를 붙잡고 차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고양이의 몸은 그저 늘어지기만 할 뿐, 차에서 쉽사리 떼어지진 않았다.
“뭐야, 이거!”
고양이의 유연함을 간과한 나요한은 당황했다. 분명히 눈으로 볼 땐 짧았는데, 고양이의 허리가 쭈욱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나요한은 하는 수 없이 고양이의 엉덩이를 쿡쿡 찌르면서 쫓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캬아아악!
엉덩이가 찔리자 심기가 불편해진 고양이도 성질을 내며 나요한에게 항의를 했다. 하지만 나요한은 남의 불쾌함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인간이었다. 고양이가 자신을 노려보든 말든 고양이가 보닛에서 폴짝 뛰어내리자마자 차에 얼른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비켜라! 이 고양이 새끼야!”
자신이 상당히 유치해졌다는 건 자각을 못한 채, 누런 고양이가 자신을 향해 꼬리를 세우는 걸 뒤로하고 나요한은 황급히 차를 빼서 주차장을 벗어났다. 그 망할 고양이 때문에 퇴근 시간이, 이미 늦은 1분에 더해서 10분이나 더 늦었다는 사실에 짜증을 내면서.
나요한 박사의 연구소 주차장에서 아파트 주차장까지는, 규정 속도를 준수할 경우 차로 정확하게 25분 39초가 걸린다. 최단 경로이자 최적 경로로서, 이보다 더 빠른 방법으로 연구소에서 집까지 오는 길은 순간이동을 사용하거나 항공기를 이용하는 것 뿐인데 둘 다 불가능하다.
아무튼 나요한 박사는 평소보다 11분 늦게 퇴근하는 바람에 자신의 퇴근 후 맥주 타임이 11분이나 줄었다는 사실에 분통해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서류 더미에서 자신의 몸에 옮겨왔을 먼지더미를 털어내려면 얼른 화장실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현관에 들어선 나요한 박사는 형광등을 켜자마자 그 상태로 얼어붙었다.
냐아아아.
“아아아악!!”
고양이 한 마리가 나요한 박사의 거실에서 울고 있었다. 심지어 솜방망이 앞발을 혀로 야무지게 핥아대면서 나요한을 향해 눈을 깜박이기까지 했다.
분명 아침과 퇴근길에 나요한을 방해했던 바로 그 누런 놈이다!
나요한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현관문이 열려있는지, 집안 창문이 열려있었는지 확인했지만 모두 단단히 닫혀 있었다. 나요한의 집은 아파트 15층이라 고양이가 외부에서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고양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거나 자신을 뒤따라 왔단 말인가? 그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양이가 자신의 뒤에 따라와야지 왜 자신보다 먼저 집안에 들어와서 태연하게 집주인 행세를 하고 있느냔 말이다.
“야, 고양이! 너 뭐야!”
냐아아아.
고양이한테 정체를 묻는다고 한들 고양이가 대답을 할까. 고양이가 설사 대답을 하더라도 나요한이 대답을 알아먹을 리가 만무. 나요한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집안으로 들어와 고양이를 붙들어 집 밖으로 내쫓으려 했다.
냐아아아아!!
하지만 나요한이 고양이의 궁댕이를 붙잡기도 전에, 고양이는 순식간에 나요한의 손이 닿지 않을 소파 밑 구석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대체, 너 뭔데!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나요한이 소파 밑을 들여다보며 고양이를 향해 소리를 꽥 질렀지만 고양이는 태연하게 울기만 했다.
냐아아아.
나요한은, 이를테면 별안간 갑자기 둘리를 집안에 들인 고길동의 심정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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