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 및 기타 샘플

크레페커미션 13. [carry] 그, 또는 그, 혹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

1차 - 테리온x캐럴(BL)

커미션 페이지: https://crepe.cm/@haranging/14114

신청 감사합니다!

[carry] 그, 또는 그, 혹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캐럴은 그 말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했다. 불안은 영혼을 조금씩 얇게 삭혀간다. 알아챌 수 없도록 아주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익어버리는 영혼은 뒤늦게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다. 깜짝 놀라서 얼음물에 다이빙하면 환부의 고통은 잊어버리지만, 환부 외의 영혼이 얼어버리고 만다.

캐럴은 영혼이니 불안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편은 아니지만 우연히 읽었던 그 구절이 지금 자신에게 몹시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금 얼음물로 뛰어들어야해? 아니면 일단 참으며 팔짝팔짝 뛰어다닐까? 둘 다 답이 아니라면 뭐가 정답인 건데?’

캐럴은 자신이 성공적으로 불안을 제거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따라서 불안 또한 언제든 다시 날뛸 수 있는 것이다…….

캐럴은 팔짱을 끼고 눈앞의 연인을 보았다. 그래, 연인이었다. 확고부동한 연인이었다. 지금은 답지 않게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는 저게. 미안한 줄은 아는가 보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불쑥 화가 치밀었다.

‘미안한 줄은 당연히 알아야지!’

미안한 일은 첫째 안 만들어야 하고 둘째 수습을 해야 하며 셋째 수습이 안 될 거면 대안이라도 만들어 와야 한다. 이런 경우에 대안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생각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쏘아붙이려고 했는데 정작 입을 열어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나서 발만 쿵쿵 구를 뿐이었다.

진심으로 화가 나는 일이 드물다보니 캐럴 자신조차도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했었는지 잊어버렸다. 화가 날만한 상황이 오면 캐럴은 빈정거리거나 잔인한 말로 깔아뭉개거나 말없이 지팡이를 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빈정거리기만 해도 상대는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요리하기 편했다. 어디까지나 상대가 마음에 뭐가 남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상대가 너무 크게 상처받지 않게 빈정거리는 법’을 생각하던 캐럴은 스스로 너무 웃겨서 허공을 향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나이를 먹을 만큼은 먹었기에 캐럴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는 제법 잘 알고 있었다. 평타를 모르는 주둥아리라는 게 있다면 본인의 것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애인을 말로 뭉개버리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캐럴은 평생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고민을 했다.

캐럴이 허공을 향해 공기가 잔뜩 들어간 웃음소리를 내고 있으면 테리온의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캐럴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테리온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미안하단 말은 이미 했다. 계속 같은 말을 해보았자 화가 풀리지는 않을 것 같고, 금지된 주문만 아니면 곱게 맞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반응이 없으니 더욱 불안했다. 언제 어디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눈앞에 둔 기분이 어떤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머리를 쥐어짜낸 테리온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키스할래?”

“야 이 개새끼야.”

뇌를 거치지 않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캐럴 본인도 말하자마자 입을 다물었고 테리온은 놀라서 몸이 굳어버렸다. 불편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캐럴이 테리온을 쏘아보자 테리온은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테리온인들 이 상황이 즐거울 리 없었지만 지은 죄가 명백한 탓에 고개를 들 명분이 없었다.

캐럴의 뇌리에 과거가 스쳐지나갔다. 레이디 아망딘. 졸업하고 나서는 치고받고 싸우기만 하느라 잘 몰랐지만 졸업하기 전엔 그는 여자만 만났다. 자신이 어디 빠질 외모는 아니고 테리온이 남자와도 가능하다는 건 직접 체험하기도 했지만 원래는 여자 쪽을 더 선호할 가능성이 컸다. 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가끔 테리온의 옆에 미녀가 찰싹 붙어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났지만 캐럴은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생각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시점에서 이미 생각은 난 것이니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테리온이 막무가내로 저를 끌고 갔을 때는 내심 기뻤다. 반지라니. 테리온에게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심지어 어떤 디자인을 고를지 자신에게 결정권을 넘겨준 것까지 마음에 찼다. 어쩐지 너무 기뻐해주면 안 될 것 같아서 표정관리는 했지만 가끔씩 반지에 시선이 가는 것까지 관리할 수는 없었다. 토할 것 같은 상상도 훨씬 덜 하게 되었다. 테리온이 반지를 제대로 끼고 있는지 가끔 곁눈으로 확인할 때도 흡족했다.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뺀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 몰래 여자를 만나면서 반지 빼둔 거 아니야?’

캐럴의 머릿속에 흔해빠진 상황이 등장했다. 헌팅캡을 쓴 사람이 왼손 약지에서 반지를 뺀 채로 다른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사진을 내밀면 정말로 외도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면서 우는 의뢰인. 어딜 가든 항상 일어나는 일이라 듣기 지겨울 정도인 불륜이야기. 캐럴은 맹세컨대 자신이 그 ‘우는 의뢰인’이 될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본인이 사진 속에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면 차라리 쉽게 납득이 갔으리라. 아무나와 바람피우고 다닌다는 소문이 안 돈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런 자신이 이런 꼴이 되어야 하다니. 이 캐럴 라이트가?

결국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캐럴이 소리쳤다.

“어떤 년이랑 놀아난 거야 이 개자식아!”

“뭔 소리야? 어쩌다 보니 반지를 잃어버렸다니까!”

“그래! 어떤 년이랑 놀아나다가 잃어버린 거냐고 이 파렴치한 개새끼야!”

“그런 짓 안 했어! 그냥 잃어버렸다니까!”

“어떻게 계속 끼고 있던 반지를 그냥 잃어버릴 수가 있는 건데?”

“나도 몰라! 손에서 뺀 적도 없는 반지가 사라졌다고! 나도 황당해!”

“너도 황당해? 지금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몰라?”

“……같이 맞춘 반지를 잃어버려서 화가 난 건 아주 잘 알아. 미안한 것도 당연하고.”

“그걸 알면서 반지를 잃어버렸어?”

“나도 어쩌다 그게 사라진 건지 모른다니까!”

“지금 소리쳤냐?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서 그렇게 뻔뻔한 거지? 뭐? 키스으?”

“아니 그건 그냥 싸울 때 하던 습관처럼……. 어쨌든 잘못했다니까.”

“알면 잃어버리질 말았어야지!”

“그게 내가, ……하.”

끝없는 도돌이표에 테리온이 말을 하다 말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대화해보았자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안을 빙글빙글 돌게 될 것이다. 머리를 굴리던 테리온은 할 말을 찾기 시작했다. 본인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면 그 정도로 관심이 없냐는 구박만 돌아올 것이다. 추적마법을 하나도 걸어놓지 않은 것은 이미 실컷 설교를 들은 후였다. 잃어버린 시점에서 과거 동선을 따라 샅샅이 찾아보았다는 해명도 이미 했다. 심지어 같이 다시 한 번 동선을 따라 아씨오를 마구 쓰기도 했다. 그 날 다녔던 곳을 전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반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쯤 노력했으면 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이 일부러 빼고 다닌 것도 아닌데. 반지는 누가 오블리비아테를 걸고 훔쳐가기라도 한 건지, 도무지 언제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테리온으로서는 본인이 먼저 미치고 팔짝 뛸 만큼 속상했다. 그 만큼 속상하다는 걸 표현하기에는 뭔가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에 굳이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랬다.

갑자기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캐럴 본인은 지금까지 반지를 빼놓고 다니는 인생을 살았으면서 정작 자신이 당하니까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다니. 자신은 반지를 일부러 뺀 적이 없는데 일부러 뺀 적이 아주 많은 사람에게 비난당하고 있었다. 억울함이 수면 위로 올라올 듯 찰랑거렸다. 지은 죄와 억울함이 부딪히자 결국 테리온은 한 마디 하고 말았다.

“난 너랑 달리 커플링 같은 건 익숙하지 않다고! 그런 건 어쩔 수 없잖아!”

연인의 과거를 들먹이는 건 매너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과거를 들먹이며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하겠지만 이미 터진 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테리온이 그럴진대 캐럴은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없었다. 화를 억지로 참던 캐럴이 듣기에는 테리온이 한 헛소리의 정도가 너무 심했다. 심지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캐럴은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비명 같은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럼 난 익숙해?!?”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캐럴은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이놈을 죽여 버릴까? 아니, 금지된 마법을 쓰면 추적당할 수도 있었다. 죽지 않게만 하면 어떤 마법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디핀도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죽지는 않잖아. 분노로 손은 물론 잡은 지팡이까지 잘게 떨렸다. 어딜 베어줄까. 팔? 다리? 몸통? 아니 아예 누구나 볼 수 있게 저 잘난 낯짝을 베어줄까?

낮짝을 벨까 생각하며 테리온의 얼굴을 본 캐럴의 얼굴이 굳었다. 저 표정은 뭐란 말인가. 테리온은 누가 멍청이가 되는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멍한 얼굴을 하다가 곧 입꼬리를 씰룩이기 시작했다. 마치 웃음을 참는 것처럼, 아니, 처럼이 아니라 정말로 웃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참는 게 몇 초 가지도 않았다. 결국 입꼬리 단속이 안 되었던지 그는 파들파들 떨면서도 이죽이는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왜 웃는 건데. 뭐가 웃겨?”

“아니, 웃긴 게 아니라…….”

웃긴 게 아니면 왜 웃고 있단 말인가. 이 자식은 인피에 무두질이라도 해줘야 정신을 차릴 건가? 이를 벅벅 갈던 캐럴의 손에서 갑자기 떨림이 사라졌다.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이해도 할 수 없었고 제 눈이 보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테리온은 제법 행복해보였다. 비웃는 것도 아니고 기가 찬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닌 그저 순수하게 행복해서 웃는 그런 미소가 얼굴에 걸려있었다.

‘혹시 저 자식, 마조히스트였던가? 욕을 듣는 게 갑자기 좋아졌나? 아직 아무 마법도 시전하지 않았는데 미쳤을 리는 없는데.’

왜 갑자기 바보처럼 웃고 있단 말인가. 곰곰 상황을 생각하던 캐럴이 입을 딱 벌리고 손에서 지팡이를 떨어트렸다. 설마 자신이 커플링 따위가 안 익숙한 게 좋아서 웃고 있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되뇌었지만 그것 외엔 마땅한 답이 없었다.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우리 반지는 훨씬 더 좋은 걸로 새로 사자. 전 재산을 터는 한이 있어도 제일 비싼 걸로 사줄게.”

심지어 갑자기 순순해져서는 바보 같은 낯짝으로 전 재산을 터니 어쩌니 하고 있었다. 아니, 테리온의 전 재산 따위 털어봤자 얼마 나온다고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아니, 그 테리온이 전 재산을 털어서 커플링을 새로 맞춰주겠다고 한 건가 지금?’

맥이 탁 풀렸다. 캐럴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그래서 자신이 커플링을 많이 해봤을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자체에는 분노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기객관화를 할 수 있는 나이였으니 그렇게 오해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잘 알았다. 어이가 없는 건 오히려 다른 부분이었다. 그게 그렇게까지 기뻐할 일인가? 가만히 생각하던 캐럴은 지팡이를 주워 품에 집어넣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거짓말 같아? 진짜야. 니 생각만큼 거지 아니거든? 새로 하자니까. 이번엔 추적마법 걸려있는 걸로 사면 되잖아. 야, 고개 좀 들어봐. 어?”

테리온이 옆에 앉아 저를 달랬지만, 캐럴은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으면 죽었지 고개를 들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손에 파묻은 얼굴에 걸린 게 화가 아니라 기쁨이었으니까. 자신이 커플링에 익숙지 않은 게 그에게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 제게 다시 기쁨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떤 여자와 바람을 피웠는지 죽여 버릴지 살려둘지 따위를 생각하며 차오르던 누더기 같은 감정이 싹 씻겨 내려갔다. 이게 기쁘다는 사실은 죽어도 저 놈에게 들킬 생각이 없었다. 이걸 들키느니 차라리 아즈카반에 처박히리라.

한참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캐럴은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야 새침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 자신은 전혀 기쁘지 않고,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아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용서해주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스스로를 100번쯤 세뇌시킨 노력 끝에 나온 표정이었다.

“알았어. 이번 기회에 네 전 재산이 얼마인지 알 수 있겠네.”

“말을 해도 꼭…….”

“전 재산이랬지? 그럼 반지 사고 나선 나한테 용돈 탈 때마다 존댓말해라.”

“진짜 이러기냐?”

“이러기다, 왜. 어쨌든 알았으니까 반지 다시 사러 가자. 지금 가?”

“지금? 돈 빼오는데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좋은 일은 서두르라는 말도 있잖아.”

“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는데.”

테리온이 일어나자 캐럴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망토까지 잘 챙겨 입은 캐럴을 본 테리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무장할 필요 있냐? 그거 마법차단망토 아냐?”

“그렇게까지 무장 안 하면 어쩌려고? 너도 입어.”

“어차피 금지마법은 차단 못하는데 왜…….”

“잔 말 말고 입어.”

테리온 몫의 망토를 던져준 캐럴은 쯧, 혀를 차고는 망토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기뻐하는 꼴이 제법 기특해서 챙겨줬더니, 기껏 신경써줘도 고마운 줄을 모른다. 이래서 회색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던가. 속으로 혀를 차며 캐럴은 지갑을 찾았다. 분명 어제 입었던 그대로 내던져뒀으니 주머니 어딘가에 지갑이 있을 터였다. 그가 오늘 전 재산이 털리고 나면 위로주 정도는 사줄 의향이 있었기에 지갑은 필요했다. 한참을 뒤적거리던 캐럴은 손에 잡히는 무언가의 감촉에 동작을 멈췄다. 그는 주머니 속에 오른손을 넣은 그대로 왼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검지에 늘 끼는 은색 반지 외에도 한 쌍에서 한 짝이 된 반지가 제 약지에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캐럴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지금 내 오른손에 만져지는 이건 누구 반지지?

캐럴의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퍼즐이 맞춰졌다. 이걸 잊고 있었다니 스스로의 기억력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어제 자신은 테리온보고 먼저 자라고 한 다음 술에 잔뜩 취해서 집에 들어왔다. 그래도 이전만큼 취하지는 않았던 캐럴은 신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화장실 세면대 위 받침대에 놓여져 있던 테리온의 반지를 발견했다. 짜식 정신머리가 없네 커플링도 화장실에 두고 다니고, 엉? 그렇게 중얼거린 뒤, 캐럴은 싱글싱글 웃으며 제 약지에 테리온의 반지도 함께 껴보았다. 둘레가 약간 남는 반지와 딱 맞는 반지가 똑같은 모양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거 꽤 기분 좋은 거구나. 낄낄 대고는 캐럴은 테리온의 반지를 제 망토주머니 안에 넣었다. 나중에 화장실에 흘리고 다닌다고 신나게 면박을 줄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나서는 몸을 씻고 그대로 입은 옷을 빨래한 다음 유쾌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더랬다.

“…….”

좆됐다, 는 천박한 표현이 캐럴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다른 반지이지 않을까? 그래, 샘플이라면서 받았던 걸 주머니에 넣어뒀을 수도 있다. 확장마법 걸린 주머니니까 잊힌 채 섞여있을 수도 있었다. 아무렴, 테리온의 반지는 아닐 것이다. 캐럴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주머니에서 꺼내보았다.

……다른 반지일 리가 없었다. 캐럴은 조용히 좌절했다. 그래, 아씨오를 아무리 써봤자 나올 리가 없었다. 이 값비싼 망토에는 확장마법에 차단마법에 청결마법 체온유지마법 등 온갖 마법이 걸려있었으니까. 애초에 아씨오정도의 주문을 차단하지 못하는 물건이라면 그 돈을 주고 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걸 어쩌면 좋지?’

일단은 이걸 어딘가에 숨겨야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전한 곳은 제 망토주머니였다. 제 망토를 테리온이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지만 일단은 주머니에 넣으면 일반 마법으로는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캐럴이 반지를 다시 숨기기 전에 테리온이 불쑥 나타났다.

“준비 다 했어. ……너 뭐하냐?”

“뭐, 라니?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한 손만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건데?”

“어? 내가 뭘? 아냐, 뒷짐 안 졌어.”

캐럴이 등 뒤로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하지만 차마 주먹을 펼치지는 못했다. 재빨리 주머니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동체시력 좋은 테리온이 그걸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그가 수상하게 볼 게 뻔했으니 손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니 무영창으로 주머니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캐럴은 다시 한 번 절망했다. 제 망토는 마법차단기능이 있었고…….

“주먹은 왜 계속 쥐고 있는 건데? 너 수상하다?”

“아, 아니 뭐가 수상해! 그냥 주먹 좀 쥔 거가지고?”

“그 안에 뭐 숨겼냐?”

“내가 숨기긴 뭐 뭘 숨겨!”

“완전 숨겼잖아.”

눈을 가늘게 뜨고 캐럴을 보던 테리온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저벅저벅 걸어와 억지로 캐럴의 오른손을 폈다. 캐럴은 저항했지만,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신체능력이 테리온보다 떨어지니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몇 번의 몸싸움 끝에 캐럴의 오른손 안에 있는 물건을 본 테리온의 얼굴이 굳었다. 손 안에 있는 물건을 보고는, 캐럴의 왼손을 보았다. 캐럴의 왼손 약지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본 테리온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하기 시작했다.

“야, 이, 이게, 나, 내가 설명할 수 있거든? 기다려봐, 진짜로 설명할 수,”

“캐럴 라이트!!!”

울분에 찬 고함소리가 온 집을 흔들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