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페커미션 19. 테세우스의 배
1차 - 알파x라비(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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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라비] 테세우스의 배
여기에 낡아빠져 바스러질 지경으로 고전적인 사고실험이 하나 있다. 잠시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 아이들을 구출해 탈출할 때 썼던 배에 집중해보자. 배는 거친 바다를 누비는 만큼 여기저기 부서질 것이고, 육지에 다다르면 새로운 재료를 써서 부서진 곳을 수리하여 다시 바다로 배를 띄울 것이다. 또 다른 곳이 부서지고, 새 재료로 메꾸고, 부서지고, 메꾸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배에는 처음 건조될 때의 부품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과연 이 배를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매번 내구도가 떨어지는 장비를 수리해야 하는 밀레시안이라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모든 부품이 교체되기 전에 새 장비를 마련하기에(혹은 대장간에서 부숴먹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겠지만, 낡은 무기를 굳이 고집하는 괴짜라면 한 번쯤 생각해 볼 법한 이야기이다. 새로운 재료를 써서 거듭 고친 무기는 처음의 그 무기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가? 모습부터 성능까지 많은 것이 반영구적으로 변할 것인데.
그러나 알파, 혹은 알파 에타 프로타시오라는 자는 스스로를 근거로 내세워 증명한다. 테세우스의 배는 아무리 부품을 갈아치우고 거듭해 성능을 개선한다 해도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 것이라고. 그를 보라, 육신을 몇 번이나 갈아치워도 여전히 알파 에타 프로타시오이지 않은가.
혹자는 영혼이라는 부품은 교체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영혼만으로 자아를 정의내릴 수 있는가? 달라질 키, 체형, 성별, 뇌, 호르몬, 성장상태, 그 모든 것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영혼의 변질을 생각해보자. 알파의 영혼이 완전히 다른 색으로 물들어 버렸다면 그것은 같은 알파의 영혼인가, 다른 영혼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알파를 알파라고 인식할 것이다. 육신이 바뀌어도, 알파의 영혼이 타락해도, 알파는 알파인 것이다. 그 자신이 그렇게 인지하고 주위가 그렇게 인지하는 한. 따라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알파의 육신이 몇 번이나 죽어나가도 알파는 알파이기에. 변하는 것은 없기에. 빌어먹도록 지겹게도, 없기에.
그러나 다만 알파 에타 프로타시오는 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다만, 제 무기를 들어 설명했을 뿐이다. 배의 모든 부분이 교체되어도 배는 배이고, 부속품이 바뀌어도 이 무기는 무기고, 새 신체를 얻은 자신도 분명 자신이니까 저가 죽는 것에 그렇게까지 연연하지 말라고. 제자의 눈앞에서 죽어버렸을 때, 환생하고 왔더니 서글프도록 울고 있는 라비를 달래기 위해서. 분명 제자 앞에서 죽은 것은 실수였지만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도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제 죽음에 매번 이렇게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알파의 가볍고 발랄한 설명에 라비는 고개를 저었다. 라비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선원들은 배의 상처를 기억할거에요. 배의 역사를 기억할거고요.’
말문이 막힌 알파는 가만히 라비를 보다가, 과장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여전히 배는 배잖아? 수리하면 끝이고.’
‘그건 그렇겠지만……. 그렇다고 수리한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알파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결국 배는 튼튼한 채로 거기에 있을 터인데. 그러나 그걸 말하는 순간, 이 똑똑한 제자와 밤새 입씨름을 해야 할 것이다. 알파는 말을 슬쩍 흘리다 경박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쨌든 배이기만 하면 된 거 아닐까? 그나저나 라비, 수련은 다 했어?’
‘그렇게 넘어가지 마시고…….’
‘어허, 이야기는 수련을 끝내고 나서야!’
물론, 수련이 끝나고 나서도 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방랑하는 알파 에타 프로타시오는 생각한다. 그 때였던 것 같다고. 이렇게 도망치고 싶어 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때였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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