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죽지 않는 남자

줄요 2024 불사필멸 합작

made in heaven by 살
7
0
0

그 남자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호자를 대동하고 왔다. 뒷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수갑이라도 차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는 자유로운 상태였다.

 

이름은 요나스 아이흐만입니다. 독일에서는 줄리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옷깃에는 그가 미군 소속임을 알리는 배지가 붙어있었다.

 

문서에는 폴란드인이라고 적혀 있던데.

국적은 상관없습니다. 아인이라는 게 밝혀지면 곧바로 미합중국으로 인도되니까요.

 

장교는 남자가 마치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확실히 말 한 마디 없는 그 남자는 군인보다도 물건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요한은 미덥지 않은 얼굴로 종잇장을 만지작거리며 줄리앙이라 불린 이의 겉모습을 훑었다. 장례식장에서나 입을 법한 새까만 정장. 굵은 목에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꼭 잠근 단추와 넥타이. 인솔자와 다르게 어떤 표식도 붙어있지 않은 옷깃. 어깨보다 좁은 너비로 다리를 벌린 채 그는 미동 없이 서 있다. 몸에 바짝 배어 있는 군기 때문에 그는 여러모로 일반인과 구분되어 보였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왼쪽 발목의 발찌였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영락없는 범죄자다. 이런 사람이 저택에 드나들면 분명 입소문이 안 좋게 날 텐데. 그런 생각으로 그를 거꾸로 훑어 올라오다 보면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가 언제부턴가 줄곧 요한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새하얀 머리카락. 그와 같이 하얗게 빛바랜 눈은 온전한 한 쌍이 아니었다. 한눈을 가린 안대는 일회용 안대였지만 그가 그것을 벗고 출근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자신 말고는 이렇게 흑백으로 점철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일말의 색조차 찾아볼 수 없어서, 두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어서 그가 무척 알기 어려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웃을 줄 모를 것 같던 남자는 시선이 마주치자 입매를 올려 웃었다. 건조한 웃음이었다.

 

*

 

또 무슨 귀찮은 짓을 벌인 거야?

으음… 그게. 특수부대 출신이라길래.

 

벨이 멋쩍게 웃었다. 그는 요한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요한이 떨떠름하게 여길 걸 알면서도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요한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여태 계약한 업체에도 군인 출신 경호원은 차고 넘쳐.

하하, 아인은 처음이니까.

아인이면 뭐가 다른가? 죽지 않는 것 말고 특별한 구석이 있어? 일을 더 잘 하기라도 하나?

그럴지도 모르지. 형도 여태까지 같이 일한 사람 중에는 아이흐만 씨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아?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요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벨의 말대로 줄리앙은 융통성 없어 보이는 얼굴에 비해 일머리가 좋았다. 지나치게 가혹한 요한의 기준에도 나름 흡족했다. 사람을 여럿 쓰지 않아도 되었고 굳이 그의 능력을 가늠하지 않아도 되었다. 무슨 일이든 시키면 묵묵히 해내고 우는 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사무용 의자 바퀴가 바닥 위를 매끄럽게 구르는 소리가 났다. 요한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벨이 제자리로 돌아와 펼쳐놓은 서류를 정리하며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고 잘 지내봐, 형. 아이흐만 씨도 그간 고생하셨다니까. 말씀은 안 하시지만 여기가 미국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

 

고생이야 했겠지. 그러나 마리우스의 저택은 재활 센터가 아니다. 어쩌면 통제되지 않는 장남이 언젠가 사고를 칠까 봐 죽지 않는 수행원을 구해와 붙여놓은 걸지도 모른다. 벨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의 아래에서 이렇게 오래 버티는 건 줄리앙이 유일하지 않으냐고.

확실히 줄리앙은 요한의 가장 큰 문제점을 무던하게 받아낼 줄 알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비난과 모진 말들, 요한 그 자신조차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폭발적인 분노에도 줄리앙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의 모욕을 감지하는 신경은 십수 년의 군 생활과 가혹한 실험으로 완전히 거세된 것 같았다. 아무리 때리고 밀쳐도 기껏해야 비틀거리는 게 전부인 줄리앙을 보고 있으면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솟았지만 마음이 가라앉고 나면 그런 점이 오히려 편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그 눈. 한없이 평이하고 단조롭기만 한 눈… 요한의 손에 맞아 코피가 흘러도 줄리앙의 눈에선 일말의 반항심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요나스 아이흐만은 원래 가족도 친구도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했다. 폴란드에서 군 생활을 하다 어느 날 돌연 미군으로 축출되어 오래도록 아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했다. 그러다 쓸모가 다 했을 때 헌신짝처럼 버려져 어느 부잣집 아들의 수행원 신세로 전락한 지금에도 여전히 그런 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그 눈 말인데.

 

줄리앙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그는 요한의 신발을 벗기던 중이었다.

 

왜 그런 거야?

경위를 묻는 건가?

뭐든.

파견 임무 중에 사고가 났어.

 

그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줄리앙은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요한은 손을 뻗어 검지손가락으로 무릎 꿇은 그의 안대를 가볍게 들춰보았다. 그 아래 눈은 거의 감겨 있었다. 그리고 눈꺼풀에 남아 있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 그러고 보니 줄리앙의 몸에는 흉터가 많았다. 가끔 그가 짐을 옮기기 전 소매를 걷어붙일 때면 팔에 흉터가 제법 박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손가락을 쏙 빼내자 그 위로 안대가 도로 덮였다.

 

아인한테도 흉터가 남나?

죽기 전까지는 남아 있지. 선천적인 장애가 아니라면 죽었다 살아날 때 사라져.

그럼 넌 눈이 뚫리고도 살아남은 건가?

그래.

불편하지 않아? 한 쪽 눈이 없으면 말이야.

 

줄리앙이 눈썹을 들썩였다. 요한은 남은 한 발로 줄리앙을 툭 건드렸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신발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힘 한 번 주지 않고 부드럽게 구두를 벗기는 동안 요한은 발을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었다 깨어나면 안 됐던 건가? 어차피 전쟁터니까.

 

그러자 줄리앙이 드물게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는 첫인상에 비해 비교적 자주 웃는 편이었다. 가끔은 소리를 내서 웃기도 했다. 그러나 기분 좋은 순간에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던 기억은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가 고개를 들지 않아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끔뻑이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길지 않은 웃음 끝에 줄리앙의 음성이 이어졌다.

 

…난 나 자신이 아인이라는 걸 알기 전에도 군인이었어.

뭐, 일반 군인이라면 무리지. 근데 넌 죽었다 살아나는 게 예삿일도 아닐 거 아냐?

세상에 쓸모없는 죽음을 달가워하는 군인이 어디 있나.

 

그의 대답이 생각보다 길어서 요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 어쩌면 그는 조금 전 요한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뭘 할 수 있지? 애초에 그 같은 인물도 마음에 안 든다는 감정을 느끼긴 하는 건가? 어느덧 요한의 양말까지 벗겨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줄리앙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줄리앙이 요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정을 극한까지 걷어낸 눈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새하얗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죽었다 살아날 때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군복에는 총알구멍이 선명한데 내 몸에는 흉터는커녕 생채기 하나 남아 있지 않거든.

 

줄리앙의 독일어 억양은 느리고 낮아서 말을 완전히 끝맺는 게 오래 걸렸다. 요한은 기침이 나올 것처럼 가슴 속이 간지러웠다. 그가 말을 맺기까지 기다리는 게 갑자기 힘들게 느껴졌다. 이어질 말이 무엇일지 알 수 없어서? 아니면… 이제는 알 것 같아서?

 

그런데 도련님은 총을 잡아본 적은 있나?

 

요한은 벌떡 일어나 줄리앙의 뺨을 올려붙였다. 퍽 소리와 함께 줄리앙의 고개가 꺾였다. 한 번 더 손을 치켜올리는 순간 줄리앙이 요한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눈을 부릅뜨고 정강이를 걷어차자 그는 곧장 손을 놓았지만 놓친 것은 아니었다. 요한이 자유로워진 손으로 줄리앙을 다시 한번 후려치려던 찰나, 돌연 눈앞이 번쩍거렸다. 번개가 내리친 듯한 감각. 요한은 순간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뒤늦게 불붙은 듯한 통증이 찾아오고 나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줄리앙이 요한의 뺨을 마주 때린 것이었다.

 

이 짓도 못 해 먹겠군…….

 

그렇게 감정이 또렷한 줄리앙의 음성은 처음 들었다. 들으란 듯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이성의 끈이 끊겼다. 요한은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는 화병을 집어 그대로 줄리앙의 머리에 내리쳤다. 얇은 유리로 된 화병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이 조각나고 줄리앙의 머리 위로 찬물이 쏟아졌다. 인상을 찌푸리고 무심코 한 발짝 뒤로 내디딘 것도 잠시 줄리앙이 곧바로 요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군인의 몸이었다. 마음을 먹고 달려들면 요한이 당해낼 수 없었다. 그의 힘에 밀려 넘어질 듯 뒷걸음질 치던 요한이 벽에 부딪혔다. 지금까지의 묵묵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그가 거칠게 요한의 뺨을 후려쳤다. 둘, 셋, 넷… 손아귀 안에서 요한이 몸부림칠 때마다 줄리앙은 별수 없이 조금씩 비틀거렸지만 아무리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둘러봐도 그가 중심을 잃는 일은 없었다. 마치 공고한 두 벽 사이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골이 울리고 어지러웠다. 입안은 죄다 터져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버둥거리던 요한은 기어이 악을 썼다.

 

이 개새끼가……!!

 

그제야 문이 벌컥 열렸다. 힘깨나 쓰는 사용인이란 사용인들은 죄다 몰려와 줄리앙에게 달려들었다. 한 팔이 붙잡혔을 땐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반대쪽 손을 치켜들던 줄리앙은 양팔이 붙잡힌 것으로도 모자라 몇 사람의 무게가 실리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정도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그의 몸을 완전히 바닥에 짓누르고서야 사용인들은 멈췄다. 몇 사용인들의 허리춤에 마취총이 꽂혀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요한이 줄리앙의 머리를 맨발로 걷어차자 문밖에서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요한의 방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빠져나가 줄리앙을 두들겨 팰 것처럼 몸부림치는 요한에게 사용인들이 있는 힘껏 매달렸다.

 

내 앞에서 군인이라고 뻐긴다고 내가 네 비위를 맞출 것 같아? 내가 널 무서워하기라도 할 것 같냐고!

 

줄리앙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걷어차인 그의 입술이 찢어져 비로소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잔뜩 헝클어져 바닥에 처박힌 그 얼굴이 어느샌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울컥 화가 치솟았다. 도련님, 제발 진정하세요……. 그런 일상적인 목소리는 잡음이 되어 한 귀로 흘러 나가고, 요한은 애꿎은 바닥을 걷어차며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쳤다.

 

쓸모없는 죽음? 내가 등신으로 보이냐? 네가 고작 총 좀 잡아봤다고 날 우습게 보는 걸 모를 줄 알아! 네 서류에는 네가 그 좁아터진 연구실에서 몇 번 죽었다 살아났는지까지 적혀 있어. 그런데 고작 한 번, 그 한 번이 싫다고 나한테 트집을 잡아?

…….

아니, 아인 같은 건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어. 미국 군부 놈들이 발목에 발찌만 하나 채워다 보내놓고 거짓말을 치고 있는 건지 알 게 뭐야. 당장 내가 널 죽여버릴 수도 있어……!

 

그때 사용인들의 무릎 아래서 숨을 고르던 줄리앙이 거친 목소리로 빠르게 읊조렸다.

 

내가… 아인이 아니라면, 아쉬운 건 자네 아닌가?

뭐……?

내가 불사신이 아니라서, 네가 날 죽이려고 하면… 그래서 정말로 죽는다면, 나보다도 네가 아쉽지 않겠냐고.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낮고 단조롭게 속삭였지만, 말미에는 웃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때는 분노에 사고가 마비되어 길게 생각하는 게 힘이 들었고, 그가 이 순간까지도 끝끝내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기만 했을 뿐 줄리앙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

 

…그리고 또 한 번 눈앞이 새하얗게 날아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요한은 그의 멱살을 잡고 올라타 있었다. 바닥에 뒤통수를 크게 부딪친 줄리앙이 드물게 앓는 소리를 냈다. 뻐드러진 손의 관절이 줄리앙의 반듯한 이마를 찢어놓아서 피가 흘렀다. 창백한 얼굴과 안대를 적시는 피가 유난히 검붉어 보였다. 지난번의 일 이후로 줄리앙은 요한에게 단 한 번도 손을 치켜들지 않았지만 비이성적인 분노에 휩싸여 주먹을 휘두를 때면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그 기억은 기껏해야 요한의 분노를 부추길 뿐 방지턱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줄리앙이 군에서 쫓겨나듯 전역한 건 머리의 부상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모양이었다. 그때에는 줄리앙에게 죽었다 살아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냐고 물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줄리앙이 아니더라도 상급자 중 누군가가 일찌감치 고쳐 썼을 것이다. 요한도 그의 심정을 아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요한에게도 고질병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고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병이었다.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악을 쓰고 울다 기절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 탓에 그의 부모님은 옛적부터 지금까지 요한에게 돈과 사람을 쓰기를 아끼지 않았다. 어릴 때는 고치기 위해서였고, 커서는 숨기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숨겨놓았다던 죽지 않는 군인이 요한의 수행원이 되기까지는 단순히 동생의 의사만 관여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줄리앙은 마리우스 부부가 요한을 내치기 전에 택한 최후의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한은 그 최후의 수단에마저 저항하고 있었다.

줄리앙은 제 위에 올라탄 요한을 내동댕이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의 두 손이 기어이 목을 틀어쥘 때 그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요한을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요한은 줄리앙이 제 몸 아래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 마침내 그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격앙되어 목을 조르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부러져라 손목을 쥐어오던 손아귀의 힘이 차츰 약해지고 있었다. 손바닥 아래 거칠게 맥동하는 그의 혈류와 요한의 심장 박동이 맞추어 뛰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방에 제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한은 손을 놓았다. 깜빡이는 것조차 잊어버렸기 때문에 눈앞이 흐릿했다. 눈을 힘주어 깜빡이면 그제야 눈앞의 광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줄리앙의 목에 새빨갛게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줄리앙은 눈을 감은 채 미동 없이 제 몸 아래에 누워 있었다. 왜인지 떼어낼 생각 없이 줄곧 손목을 쥐고만 있던 그의 손은 바닥에 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줄리앙.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머리가 탈 것처럼 끓던 열이 일시에 차게 식었다. 요한은 숨을 고르다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줄리앙.

…….

 

심장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그러다 곧 거세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요한은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뺨을 툭 건드렸다. 벌어진 입, 맥없이 돌아가는 고개… 내리감긴 눈꺼풀은 금방이라도 가늘게 뜨여 숨이 다한 눈동자를 보일 것 같았다. 숨이 가빠왔다. 뭐야?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 고작 이 정도로… 요한은 줄리앙의 어깨를 두드렸다. 처음에는 의혹이 가득하던 손길이 차츰 거칠어졌다. 줄리앙의 뺨을 때리고 어깨를 흔들어도 줄리앙은 요한을 따라 흔들릴 뿐 눈을 뜨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오래 눈을 감고 있었던 적이 있던가? 요한은 덜컥 겁에 질렸다. 그러다 불쑥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려냈다.

아인이라고 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고 했어.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지? 아인이라면 태어날 때 생긴 흉터도 재생된다고 했다. 그런데 줄리앙은… 눈을 하나 잃었는데도 그대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만약 그러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럴 수 없었던 거라면? 홧김에 내뱉었던 말이 이제야 실체가 되어 숨통을 조여왔다. 피가 스며든 안대를 잡아당겨 벗기면 흉터가 내려앉은 눈두덩이가 드러났다. 안돼, 안돼.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줄리앙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끌렀다. 첫 단추는 이미 그가 쓰러지기 전부터 요한의 손에 붙잡혀 떨어져 나가 있었다. 단추를 몇 개 풀지 않아도 그의 몸에서 쉽게 흉터를 찾을 수 있었다. 그야 고작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요한은 그게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험하게 생겼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 모든 전투의 상흔이 언제 감쪽같이 사라질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몸을 더듬어봐도 흉터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신음이 들려왔다.

요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줄리앙의 미간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이윽고 몇 번의 기침 끝에 질끈 감고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그 아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흉터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목에 남은 손자국도, 이마의 상처도, 눈도 전부 그대로였다. 줄리앙은 눈을 가늘게 뜨고선 요한을 바라보다 들릴 듯 말듯 입술을 달싹였다.

 

…뭐 하는 거지?

 

뭘 하고 있냐니. 나는 네가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네가… 요한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숨을 무척 가쁘게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늦게 현기증이 일면서 줄리앙의 옷깃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차츰 힘이 풀렸다. 줄리앙은 제 뒤통수와 뺨을 한 번씩 문질러보고선 상황을 완전히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가 낮은 한숨과 함께 바닥에 도로 머리를 기댔다.

 

머리를 부딪힌 사람을 그렇게 흔들면 안 돼…….

그게 아니라… 난 그냥, 네가.

…….

나는…….

 

몸에서 힘이 빠졌다. 갑자기 말을 잇는 게 힘들었다. 중얼거리던 요한이 이어지는 말 대신 긴 날숨과 함께 고개를 숙이면 줄리앙이 불쑥 손을 뻗어왔다. 요한은 그 손길을 흠칫 피하려다 멈췄다.

그의 손이 요한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주었다. 억세고 거친 손이었다.

 

*

 

죽었다 살아난 거야?

 

줄리앙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요한의 신발을 벗기던 중이었다.

 

…오늘 낮에 말이야.

아니.

 

그의 목소리가 푹 잠겨 있었다.

 

그럼?

그냥 잠깐 기절한 거야.

 

말을 마친 줄리앙은 양말까지 가지런히 벗겨 놓고 몸을 일으켰다. 일정한 속도로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려가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요한은 무심코 붉게 부어오른 그의 왼뺨에 손을 대보았다.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아직 열감이 남아 있었다. 줄리앙이 단추를 풀던 손을 멈췄다. 요한은 마네킹을 다루듯 손끝으로 줄리앙의 턱을 들고 그 아래 남아 있는 손자국을 유심히 살폈다.

 

몸에 흉터가 많던데.

 

줄리앙이 눈을 마주쳤다.

 

아인이라는 거. 거짓말이야?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요한은 믿기로 했다.

 

아인은 잘 안 죽나?

그런 건 상관없어.

그럼?

자네 말대로 난 잘 몰라. 내가 아는 건 죽지 않는다는 게 전부지.

 

줄리앙의 목소리는 거칠고 매우 작았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도 차분하게 들렸다.

 

난… 그냥 잘 죽지 않는 것뿐이야.

 

잘 죽지 않는 사람이라. 그건 이상한 말이었다. 잘 죽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요한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제 줄리앙은 요한과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제 본분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요한의 옷을 벗기고 그 위로 흰 가운을 걸칠 것이다. 요한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동안 요한을 입히고 눕혀서 잠에 들도록 할 것이다. 그런 뒤 알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가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잠들 것이고, 그 생각 또한 요한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문득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은 줄리앙을 서류로 만들어 갖고 있지만 그 서면에 적힌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내일은 출근할 때 목을 가리고 오라고 해야겠어. 아니면 스카프라도 하나 둘러줘야지. 그렇게 하더라도 오늘의 소동은 저택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그게 어떤 변화를 예고하지는 못할 것이고…….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