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가 일러 가로되
목마른 천사 애프터
아이를 가진 이후로는 자꾸 밤만 되면 배가 고파졌다. 엘시는 일주일 동안 냉장고 안에 있는 계란을 10개 넘게 먹었다. 윌마가 주방에 있는 계란 개수를 세어보았더라면 엘시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지난번 주방에서 경비를 마주쳤을 때 수줍게 웃은 이후로 경비들은 엘시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그들은 어쩌면 엘시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혹은 한 번 은혜를 입을 수 있다고 기대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실상은 엘시가 그들에게 가벼운 주문을 건 것뿐이다. 거울 앞에서 엘시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살이 조금 붙은 것 같다. 그러나 저녁에 고작 한 끼 더 먹어서 살이 찌는 것보다 아이가 자라면서 배가 불러오는 속도가 더 빠를 것이다. 엘시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열 달이 아니었다. 고작 두세 달… 운이 좋다면 다섯 달 정도.
천사회를 적대하는 사람들은 많다. 보통은 꿈에 비해 능력이 변변찮을 뿐이다. 원래대로라면 칼 만의 계획에 편승하여 산타 모니카가 파괴되도록 두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잠든 분을 굳이 깨우지 않아도 된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가 생겼다면 그쪽을 선택하는 게 당연했다. ‘그 사람들이 성공해 주지 않으면 곤란해.’ 또 엘시는 생각했다. ‘굉장히 특이해 보였어.’ 그들은 경찰도 아니었고, 탐정도 아니었고, 범죄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사실상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방향만은 정확했다. 그들은… 무엇에 이끌리고 있는 것일까? 엘시는 땋은 머리를 매만지다 풀어보았다. 머리를 어깨 양옆으로 늘어뜨렸다가 한쪽으로 쓸어모으기를 반복했다. 머리를 풀고 있을 걸 그랬나? 엘시는 미키 폴런의 눈을 떠올렸다. 남자는 알기 쉬운 동물이다. 그렇게 번듯한 남자도 한 번쯤은 흔들린다. 그리고 아무리 곧은 나무라 한들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뿌리까지 뽑을 수 있고, 윌마는 엘시를 이용해 그런 식으로도 위험 요소를 많이 제거해 왔다.
이번에는?
윌마의 계획에는 엘시가 없었다. 엘시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말하자 윌마는 엘시를 노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사무실의 문을 쾅 닫는 소리를, 과격하게 다이얼을 돌리고 다른 이에게 짜증을 쏟아내는 소리를 들으며 엘시는 미키에 대해 생각했다. 엘시의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 직접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르는 남자. 그 남자가 혼자 왔더라면… 그의 귓가에 암시를 불어넣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가 혼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엘시는 오히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미키가 윌마를 죽이지 않는다면 이제키엘이 죽일 것이고, 그러지 못하게 되더라도 베니와 샐리가 윌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실패한다면 미키는 윌마를 죽일 수밖에 없겠지. 엘시가 진실로 궁금한 것은 그 모든 게 끝났을 때도 엘시가 살아 있을지였다.
엘시는 제 눈가를 잡아당기고 뺨을 꼬집어 보았다.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좀 더 예뻐 보일 것 같았다. 그러나 엘시의 고질적 문제라면 눈물을 흘릴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엘시는 이제 그저 몇 걸음 뒷걸음질 쳐서, 전신 거울에 담긴 제 모습을 바라보여 배에 양손을 얹어 보았다. 거울 속 엘시는 웃고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 거니……?
*
셀레나는 어릴 적부터 천사와 직접 대화를 나누기 위해 여러 미신적인 의식을 시도해 왔는데, 실은 실제로 미신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의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천사에게 신호를 보내는 행위 중 하나였고, 천사는 그런 어린 마음을 이해하듯 셀레나가 어떤 의식을 준비하든 그 자리에 나타나 주었다. 어릴 때는 신이 나서 싸구려 오컬트 서적에 나오는 여러 의식을 전부 시도해 봤지만, 크고 나서는 그런 게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그러나 셀레나는 오늘 식탁 위에 새하얀 천을 깔아놓고 촛불을 여기저기 켜 두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지난밤 아버지가 곧 셀레나의 곁으로 돌아오리라는 소식을 전해 온 건 수호천사가 아닌 베벌리 힐스 사무소의 탐정들이었다. 그리고 셀레나는 지금 수호천사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탐정들의 안위를 알기 위해서.
수호천사님, 제 사욕을 위해 기도드림을 오늘 하루만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속삭이며 눈을 감으면 머지않아 셀레나의 의식은 꿈을 꾸듯 비현실의 경계로 걸어 들어갔다. 원래 이 공간에서는 늘 수호천사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는데, 오늘은 누군가 쉼 없이 소리내어 기도하고 있었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불현듯 안개가 걷히듯 눈앞이 또렷해졌다. 달빛이 비스듬히 들이치는 곳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조아린 채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머리 위에 누군가 안수기도를 하듯 손을 얹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라기엔 불명확한 형체였다. 그것은… 한 번도 천사의 본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만 셀레나는 그 흔들거리는 그림자가 천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셀레나는 기쁘면서도 내심 당혹스럽고 두려웠다. 천사는 성경이나 명화에서 보았듯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셀레나의 수호천사는 그것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어 보였고, 천사라고 부르는 것조차 불경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덧 풍경은 변하여 그 사람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몸뚱이에 비정한 총알이 한 번 더 날아와 박히고… 그가 쓰러질 때 셀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어도 그의 숨이 끊어져 가는 순간까지 머리맡에 서서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는 천사가 너무도 무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돌연 남자가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키는데, 벼락과 같은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데, 천사가 그 뒤에서 그와 함께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
영웅들이 떠난 뒤에도 롬바르도는 부하들을 물리지 않았다. 신도들에게는 믿음만 있을 뿐 투지도 경험도 없었다. 간혹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던 광신도들도 총을 몇 대 맞고 나면—그리고 살아있다면—정신을 고양하는 술과 약에서 깨어나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곤 했다. 엘시는 윌마의 시체를 지나쳐 루이즈에게로 갔다. 그녀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루이즈는 엘시를 미워했다. 엘시가 네필림이고 그녀 자신은 일개 신도라는 사실이 가끔은 못 견디게 싫은 것 같았다. 때로 그 욕심이 선망과 동경의 감정을 넘어설 때면 루이즈는 아주 기분 나쁜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그 눈이 싫어서 루이즈에게 한 번 정도 말해보고 싶었다. 너도 우리 엄마처럼 심해인한테 다리를 벌리는 건 어때? 그렇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너무나 많은 신도가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의 의식… 그렇게… 심해에서 올라온 것들과 몸을 붙이고 씨를 받아서… 루이즈가 물의 의식을 드렸던가? 엘시는 불안정한 걸음으로 빠르게 다가가서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 들었다. 권총을 잡고 방아쇠를 당기는데 틱, 틱 소리만 날 뿐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문득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렇게 하는 게 아냐, 아가씨.
롬바르도는 권총을 쥔 엘시의 손을 고쳐 잡게 했다. 그가 엘시의 손에서 권총을 한 번도 빼내지 않고 리볼버의 약실에 총알을 두 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예고 한번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권총에서는 좀처럼 들어볼 수 없는 파열음이 났다. 두 발이 루이즈의 몸에 박힐 때 엘시는 그녀가 살아 있어서 몸이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총알이 박히는 힘에 움찔거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멎은 줄 알았던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롬바르도는 그 권총을 어깨 너머로 던져 버렸다.
직경이 안 맞았군. 이제 저 총은 못 써.
그가 엘시를 도운 것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그가 한 팔에 끼고 있던 산탄총을 엘시에게 겨눴기 때문이다. 이 거리라면 조준도 필요 없었다. 머리가 통째로 날아갈 것이다. 롬바르도가 윌마를 내려다보았다. 엘시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저 친구들이랑은 무슨 사이지?
친구예요. 아주 친한…….
엘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롬바르도가 방아쇠를 당겼다. 나란히 붙은 총열에서 발사된 산탄이 엘시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는가 싶더니, 빼곡하던 구멍이 새하얗게 빛나며 사라졌다. 시야가 찢어졌다가 되 붙는 감각. 그 고통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엘시는 허리를 숙여 구역질했다. 희멀건 침만 흐를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롬바르도가 혀를 차며 총을 거뒀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군. 난 하여간 종교쟁이 놈들이 마음에 안들어. 너희 모녀는 벌레 같은 년들이야.
엘시는 자기도 모르게 뒤늦게 배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 안으로 코피가 흘러드는 통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롬바르도가 윌마의 시체를 발끝으로 밀어내는 게 보였다. 윌마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안 죽는, 뭐 그런 몸은 아니지?
제가 죽는 몸이었어도… 방아쇠를 당기셨을 것 아닌가요?
질문은 나만 한다. 내가 널 놓아주면 넌 뭘 해줄 수 있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
자신의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롬바르도가 고갯짓을 했다. 롬바르도의 부하 두 명이 엘시의 곁에 따라붙었다. 엘시는 그들을 회유할 때가 아니라 그저 입을 닫고 따라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크툴루의 축복은 무한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아서, 이제 엘시는 총을 한 발만 더 맞으면 꼼짝없이 죽는 몸이었다.
단화를 신고 발걸음을 재촉하던 엘시가 비틀거리자 오른쪽에 서 있던 부하가 그녀를 둘러업었다. 자꾸만 구역질이 났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이 때문일지도. 구역질을 가시게 해줄 만한 차갑고 시큼한 음료가 마시고 싶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채 흔들리며 엘시는 울렁거림을 잊고 즐거운 생각을 해보려고 했다. 저 검은 승용차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폴과 크리스티나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곧 내가 얼마나 자유로워질지… 그 남자가 나를 한번이라도 다시 떠올리기나 할지…….
*
그러니까요, 소장님. 지금 사무소가 완전히 똥통 냄새가 난다니까요. 큰일 났어요, 애들도 다 씻겨 놨는데. 어른들이요? 어른들은 당연히 안 씻겨 보냈죠. 다들 집 가서 씻으면 그만인데요 왜.
폴이 리를 올려다보았다. 리는 폴의 눈을 손으로 가리며 쉿… 속삭였다. 가서 동생이랑 놀고 있어. 폴은 뒤뚱뒤뚱 걸었다. 수화기를 귀에 꾹 누른 채 리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리는 솔을 들고 아이들의 몸을 벅벅 문질러가면서 몇 번이나 헹궜는데, 오래 씻지 않은 체취와 땀 냄새는 겨우 사라졌지만 미묘한 비린내만은 결코 씻겨 내려가질 않았다. 저 애들은 인간이 아닐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소장의 말을 한 귀로 흘리던 리는 빈틈이 생기자마자 잽싸게 틈을 비집고 떠들기 시작했다.
소장님, 솔직히 말해서요, 이번 일이야 잘 흘러갔지만요. 거짓말처럼—네, 그럼요! 특이한 거야 당연하지만, 처음에는 무슨 이런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았나 생각했다니까요.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과연 이 사람들이 다음에도 올 거냐는 거예요. 이 생고생을 하고도 말이에요. 특히 미키는 소장님이 거의 몇 년을 소일거리만 시키셨잖아요? 분리수거 통에서 콜라병을 찾아오라는 수준의 무의미한 일거리들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이런 큰일을 맡기시면 그 후유증이 크지 않겠어요?
…네, 네. 알아요, 그만두지는 않겠죠. 언제 소장님 말이 틀린 적 있나요, 그냥 불쌍하다는 거지. 말 나온 김에 베니 말인데요, 정말로 결혼할까요? 물론 하겠죠. 안 하면 이상하겠지만… 제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있냐는 거예요. 그야 소장님이랑 일한 게 몇 년인데 도무지 좋게 끝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걱정은 되죠! 그냥… 베니가 꾀부릴 줄 모르는 타입이니까 특별히 더 걱정된다고요. 안 된 일이잖아요? 남겨진 사람한테도 떠나는 사람한테도…….
숨죽여 속삭이던 리는 문득 소파 위를 바라보았다. 짧은 소파 위에서 아이들이 팔걸이에 머리를 베고 비좁은 자리에 다리를 겹친 채로 잠들어 있었다. 리는 크리스티나를 안고 오던 베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팔에 안긴 크리스티나는 꼭 일곱 살배기 아기 같았다. 허리를 펴면 리와 키가 비슷할지도 모르는데. 진짜 갓난아기를 들고 있으면 엄청 우스울 거야. 무슨 핫도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그는 이번 의뢰에서 분명 열어선 안 될 문을 열었을 것이다. 비록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다 한들, 그 너머를 보기 전과 후가 어떻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
샐리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라 하마터면 입구를 눈앞에 두고 지나칠 뻔했다. 벨트가 샐리와 베니의 목을 조르듯 감겨왔다. 베니가 헛기침과 함께 어우, 짐짓 놀란 소리를 내었다. 샐리는 그가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도록 무심코 팔을 뻗어 그를 붙잡고 있었다. 급박한 와중에도 하등 쓸모없는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둘 다 데리고 나가면 되지?
뒤를 돌아보면 말문이 막혔다. 미키의 상아색 좌석 시트가 피로 뒤덮여 이젠 하얀 부분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이제키엘의 상태가 얼핏 보기에도 심각해지고 있었다. 사막 도로를 달려 산타모니카로 돌아오는 와중에도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그는 입속으로 무언가 중얼거리곤 했다. 그게 그가 믿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인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읊조리는 주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혀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 샐리는 두 사람이 죽을까 봐 초조하고 두려웠다. 이제 모든 게 끝났는데. 경찰도 천사회도 더는 사무소를 쫓지 않을 텐데. 그럼 부탁 좀 할게. 이제키엘부터……. 간신히 말을 이으며 베니에게로 눈을 돌리던 샐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샐리의 손 아래로 구렁이가 똬리를 튼 듯한 흉터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손바닥 아래로 느껴졌다. 근 며칠간은 분명히 본 적 없는 흉터였다.
왜 이래? 너…….
베니가 제 가슴팍에 손을 턱 소리가 나게 얹었다. 그가 지난 고통을 회상하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몰라. 좀 전에 그 여자가 나한테 무슨 술수를 썼을 때… 그때 갑자기 느껴졌어.
뭐가?
뭔가 살을 긁고 지나갔다고 해야 하나. 명치에서부터…….
베니의 말투가 너무 덤덤해서 샐리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모르겠다는 말은 그만하고 제대로 좀 말해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 상황에서도 특히 이질적인 고통 하나를 짚어낸 것은 베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샐리가 화가 난 얼굴을 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베니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로 초조해하다 드물게 먼저 고개를 돌렸다. 베니가 차 문을 걷어차듯 거칠게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저러다 죽겠어. 빨리 가자.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의료진들이 영웅들을 맞이하러 뛰어나오고 있었다. 샐리는 벨트를 풀고 차 바깥으로 발을 내디디며 조금 휘청거렸다. 아무런 상처도 없는데 몸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역시 현장에 적합한 인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현장에 어울리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고작해야 50명이 조금 넘어 보였다. 엘시 카트라이트가 자리를 뜬 이후로는 일이 아주 쉬웠다. 윌마와 엘시가 없는 천사회는 총 든 민간인이나 다름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교회까지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지만 나머지는 그가 아닌 시간이 해결할 일이었다.
카트라이트와 엮인 이후로는 기괴한 것들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괴물의 사체를 발끝으로 굴려보며 롬바르도는 혀를 찼다. 칼 만을 일찍이 제거한 건 잘된 일이었다. 그를 고문할 때 풍기던 썩은 내와 물비린내가 손을 몇 번이나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롬바르도는 총을 들지 않은 손의 냄새를 무심코 맡아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그 지독한 악취는 화약 냄새에 묻혀가는 참이었다.
형님.
롬바르도는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프레디였다. 그는 불만이 많아 보였다. 그가 맹랑한 말투로 따져 물었다.
정말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그러면?
대낮에 창고에 기어들어 와서 서류까지 뒤져본 놈들입니다. 죽이진 않는대도 곱게 보내주는 건 말이 안 돼요. 한 놈은 경찰에 저희 관할 구역도 아니에요. 거기다 한 놈은 이름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가 손 쓸 필요 없는 이유야, 프레디. 세상 어느 경찰이 저런 놈을 예뻐하겠어? 저놈은 개야. 개 신세를 면하려면 경찰복을 벗어야 하고. 아니까 저러고 다니는 거 아니겠어.
롬바르도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담배를 한 대 빼물었다. 잽싸게 불을 가져다 대면서도 프레디는 마지막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그래도… 미군 출신인 놈도 있고요.
몸 쓰고 총질하는 놈들끼리는 원래 통하는 법이지. 그놈은 문제없어. 이름 모를 놈은 두말할 것 없고.
숨을 깊게 들이쉬면 담배 끝이 경주하듯 빠르게 타들어갔다. 긴 한숨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롬바르도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잠시 손을 허우적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영어로는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여자 쪽이 괜찮잖아.
그러자 프레디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경멸스러운 눈빛을 일말의 충심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번호라도 알아 오란 말씀은 아니시죠?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롬바르도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녀는 아주 그럴듯한 여자였다. 롬바르도의 감으로는 굳이 연락처를 찾지 않아도 두어 다리만 건너면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샐리 라이드… 창고의 문을 가장 먼저 열고 들어온 것도 분명 그 여자렷다… 그 여자에게는 단순히 기계를 만지작거리는 걸 넘어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롬바르도는 조만간 샐리 라이드의 뒤를 밟아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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