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반열역학계

20240106

링클의 안 by 링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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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녹지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뒤돌아보면 네가 눈밭에 서 있다. 새하얀 코트를 입고 새하얀 눈밭에-

“눈이 녹지 않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내 손은 새하얀 눈을 한가득 담고 있다. 차갑다. 그러나 눈이 녹지 않는다.

“그렇구나.”

“이상하지 않아?”

“그건 이상한 일이야?”

나는 다시 뒤돌아본다. 너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다. 새하얀 코트를 입고 새하얀 눈밭에,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에 서 있다. 회색 하늘에서는 지금도 눈이 내리고 있다. 눈보라. 사선으로 내리치는 눈송이들. 폐부를 파고드는 찬 바람. 너는 눈밭에 서 있다. 새하얀-

“이상하잖아.”

“그렇구나.”

문득 이 눈을 뭉쳐 쥐면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이 동한다.

아니,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손을 털어 버린다.

“왜 그래?”

“왜냐하면.”

눈이 녹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눈이 녹지 않아.”

“녹아야 해?”

“원래대로라면.”

너는 여전히 새하얀 코트를 입고 새하얀 눈밭에 서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에 눈송이가 하늘하늘 떨어져 쌓인다. 아니다. 맹렬하게 날려 떨어진다. 바람 소리가-

“그게 두려운 거구나.”

“뭐가?”

“원래대로가 아닌 게.”

너는 허리를 숙여 한 줌의 눈을 손에 쥔다. 맨손. 양손을 모아서, 누른다. 원래대로라면 뭉쳐져 눈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양손을 떼어놓는다. 네 두 손 사이로 눈이 내린다. 사르락 하는 소리조차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여전히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니까?”

눈이 녹지 않는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네가 여기 있잖아.”

너는 웃는다. 나는 그제야 드넓은 눈밭 같은 곳에 온 적 없다는 것을 너는 흰 코트를 입기엔 추위를 탔다는 것을 눈은 손을 대면 녹아 버린다는 것을 손을 쥐면 뭉쳐진다는 것을 인간은 죽어 버린다는 것을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에 눈보라가 쏟아진다. 그러나 눈은 이 이상 높이 쌓이지 않는다. 너는 새하얀 코트를 입고, 새하얀 눈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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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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