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링클
이변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어느 병원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피를 볼 일이 달리 없으니까. 날이 밝고 나서야 의료계 밖에서도 눈치챈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병원은 패닉에 빠져 자신의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너무나 황당해서, 소문조차 빠르게 퍼지지 못한 이상 현상. 혈관에 피 대신 녹인 초콜릿이 흐른
벌어진 상처에서 갈색의 액체가 솟는다. 굳은 피의 갈색과는 다르다. 애당초 지금 막 솟은 피가 갈색일 이유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건 피라기엔 지나치게 끈적하고, 윤기가 흐르고, 그리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발렌타인데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 성 발렌타인의 순교를 기리느니 어쩌니 하지만 이미 상술로 변질된 지 오래다. 초콜릿 회사들의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알림음을 기다렸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제발, 제발… 띠링.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 감았다가, 다시 뜬다. 물론 그런다고 디스플레이의 글자가 바뀔 일은 없었다. 읽지 못하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선명하고, 새카만 글자. 축하합니다! 어른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한 안내’들.) 어른이라니
“곧 봄이 올 겁니다.” 마리는 입술 바로 앞에서 홍차를 멈췄다. 내리깔았던 눈동자를 슬쩍 올리자 세자르가 빙긋 웃어 보였다. 얕게 숨을 내쉬면 붉은 수면이 바르르 떨리다가 다시 고요해진다. 한 모금을 머금을까 고민한 마리는 결국 입을 대지 않은 채 잔을 내려놓았다. “봄이 온다는 게 무슨 뜻이죠?” “그러니까…” 길고 창백한 검지손가락이 펼쳐진다.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 사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를 위로하고 싶어 했다. 울지 않았으면 했다. 그 사람이, 혹은 자신이. 그리하여 인간은 신을 창조하고 전설을 지어내며 이야기를 속삭인다. 이를테면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든가. 글쎄, 어쩌면 그들도 무언가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남긴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확실한 건- 사람은 정말로, 죽으면
사랑의 조건에 대한 두 가지 이론. 첫째: 자신과 닮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낀다. 둘째: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느낀다. 나는 전자를 믿어.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은 정확히 그런 이유에서니까.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하지만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언제나 내게 허락되지 않더라고. 그래, 알겠어. 이건 이상한 일은 아니지. 특
사랑의 조건에 대한 두 가지 이론. 첫째: 자신과 닮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낀다. 둘째: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느낀다. 나는 후자를 믿는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정확히 그런 이유이기에.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언제나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아주 평범한 일이다. 내게만 주어진 처절
회전계단을 오른다. 계단참이 없으므로 몇 층이나 올라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건 무의미하다. 층 같은 것은 없다. 그저 계단이 끝없이 이어질 뿐. 오른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작은 창문은 고작해야 하늘의 색 정도를 보여 줄 뿐이다. 유리도 끼워 놓지 않아 바람이 훅 불어닥치는 창문이건만 얼굴을 내밀 만큼 충분히 크지는 못해서 바깥을
나는 외계인이다. 사실 이건 꽤 이상한 표현이다. 단어 자체를 뜯어 보아도 통상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아도, 자기 자신에게 쓰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단어 아닌가. 내가 외계인이라기보다는 내가 외계인들의 세계에 왔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겠지. 그러나 분명히 외계인은 나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한때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라 믿었던 이들이 있
단순히 팔이 네 개가 된다고 해서 동시에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눈이나 귀가 네 개로 늘어나더라도 마찬가지고요. 핵심은 의식의 제어니까요. 한 가지 일에밖에 집중할 수 없다면, 팔이 네 개가 아니라 백 개여도,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할 수 없겠죠. 그러니까 늘어나야 하는 것은 팔이 아닙니다. 의식입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도 보고 싶고
입술이 천천히 떨어진다. 점막에 찬 공기가 닿으며 정신을 현실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고 보면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뜬다. 그가, 어째선지, 굉장히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걸로 됐어.” 나는 무심코 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방금 내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어째서? 모르는 사람이. 머릿속이 쿡쿡 찌르듯 아파져 온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다고들 하지만…” 그는 천천히 ‘걸어’오더니 나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건 당신네 인간들의 의견이죠. 사실, 저희가 보기에 당신들의 상상력은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각기 자신의 유리 상자를 갖고서 그 안에 반짝이는 것들을 넣고 이리저리 흔들어 모양을 만들어 낼 뿐이지 않습니까.” 당연하게도 나는 그의 표정을 이해할 수
너는 말할 줄 모른다. 아마 내 말을 들을 수도 없겠지. 하지만 네게는 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무언가가 있고, 나는 그걸 들여다볼 수 있다. 너 또한 나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건 우리에게 언제나 불충분했지만, 단 한 가지, 너를 사랑하는 데는 충분했다. 너는 내가 살아온 삶을 모른다. 나 또한 네가 살아온 삶을 모른다. 네 삶은 분명 내 삶과는 크
나도 좋아해. 너는 수줍은 얼굴로 말하며 웃는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네 머리카락을 흔든다. 어디서 흘러온 건지 모를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맴돈다. 선명한 햇빛이 잠시 창틀을 넘어 반짝이고 기분 좋은 시원함이 목덜미를 간질인다. 아, 찬란하게도 생생한… 나는 잠에서 깬다. 어두운 방 안.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끈다. 좋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결
도대체 어쩌다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재활용 센터에 로봇이 들어왔다. 물론 이 센터에는 이미 로봇이 많다. 견학을 온 어린이들을 안내하는 로봇도 있고 재활용품들을 분리하거나 처리하는 로봇도 있다. 하지만 재활용품으로 들어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대체 어떻게 버린 건지도 알 수 없다. 나는 고철 무더기 속에서 반짝거리는 LED를 응시하다가 결국
죽음을 각오했단 건 사실이다. 하지만 ‘각오’라는 말은 그 자체로,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잖아. 너는 별을 좋아했다. 밤거리를 걸을 때면 늘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광공해와 대기오염으로 더럽혀진 하늘에 별 같은 건 보일 리 없는데도, 너는 마치 그 너머의 반짝임을 보고 있는 듯한 얼굴을 했다. 너는 정말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해를 가리던 구름이 꾸물거리며 물러나자 고였던 빛이 울컥 쏟아져 내려온다.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떨군다. 거대한 공간에 빛이 가득 차올라서, 꼭 숨을 참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걸음을 옮긴다. 지붕의 잔해가 밑창에 밟혀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난다. 천장이 쏟아지는 빛을 가려 주던 시절에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지
생생한 붉은색. 햇빛이 닿으면 타는 듯이 빨갛게 빛나는 꽃잎이 매혹적이다. 틈새로는 절묘하게 감추어진 꽃술이 얼핏 비친다. 벌 한 마리가 겹겹이 둘러싼 꽃잎들 사이로 파고들었다가, 이내 다시 빠져나와 날아간다. 여전히 고고한 붉은 꽃머리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음에 들어?” 그림자가 진다. 고개를 들어 보면 네가 해를 등진 채 부
죄송합니다. 오늘 좀 바빠서 글을 못 썼습니다. 그게… 저… 마작하느라요. 알고 있습니다. 마작 같은 걸 너무 많이 하면 안 되죠. 그런데 이게 직접 해 보니까, 이런 말 좀 그렇겠습니다만, 사람들이 괜히 중독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돈을 걸고 안 걸고와 별개로 그 자체가 도박입니다. 이번 패가 나에게 필요한 것일까, 아닐까? 저 사람이 타패할 패로 론을
“루프물 좋아해?” “엥?” 저녁 열 시 이십오 분. 겨울의 거리는 이미 밤에 물든 지 오래다. 벤치에 앉아 있자면 차디찬 바람이 뺨을 쓸고 지나가서 따가울 지경이었다. “좋아하냐니까.” “루프물이 뭔데?” “아.” 별일 없는 날이다. 퇴근 후 만나 잠시 데이트를 하고, 붕어빵 봉투를 안은 채 버스정류장에 앉아 십오 분이 남은 버스를 기다린다. 바삭.
달리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달리고 있고, 그걸 알아차릴 뿐이다. 빠르다. 아마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것도 같다. 폐가 아프다. 사지의 근육이 한껏 긴장해서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눈앞으로는 본 적 없는 풍경들이 지나간다. 아니, 본 적 없다기에는 익숙하다. 하지만 본 적은 없다…
있잖아. 죽은 거지? 죽은 거 맞지? 그게, 그야 이렇게나 차갑고, 딱딱하고, 눈도 뜨지 않고, 숨도 안 쉬고 심장도 안 뛰면 보통 죽은 게 맞을 테지만. 어쩐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한번 물어봤어. 어쩐지 금방이라도 네가 눈을 뜨고 왜 울고 있는지 물어 올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말은 없네. 역시 죽어 버린 거구나. 그렇구나. 믿지 못할 일도 아니라
아이야, 태어난 걸 축하한다. 너는 죽을 때까지 평생 인간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건 곧 음식을 먹어야 하며, 옷을 입어야 하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집이 필요하다는 뜻.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어려우리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네가 그것들을 가진다 해도, 가지지 못한 인간들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란다. 너는 그들의 존재를 모른 척할 수 있을지언
평생 치킨 포기하고 십억 받을 수 있으면 포기할 거야? 그런 질문을 하면 그 사람은 항상 코웃음을 쳤다. 그런 식으로 못 받은 돈이 삼천사백 칠억이거든. 아니, 그러지 말고. 만-약-에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만약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상상하고 가정하는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그 사람은 단지 예상하고 추측했을 뿐이다. 나는 많이도 우는 인간이었다.
눈이 녹지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뒤돌아보면 네가 눈밭에 서 있다. 새하얀 코트를 입고 새하얀 눈밭에- “눈이 녹지 않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내 손은 새하얀 눈을 한가득 담고 있다. 차갑다. 그러나 눈이 녹지 않는다. “그렇구나.” “이상하지 않아?” “그건 이상한 일이야?” 나는 다시 뒤돌아본다. 너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
“신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첫 문장이었다. “신성부정죄로 고발당한 사람이 할 법한 말은 아니군요.” “전 멍청하지 않습니다. 모든 증거가 신이 있음을 증명하는데, 신이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그는 잠시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황당하게도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형사님은 신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애는 키가 컸다. 나도 작은 키까지는 아니었는데, 나보다도 삼십 센티미터 가까이가 커서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상당히 들어야 했다. 그래서인지는 그 애는 허리를 반쯤 굽힌 채 대화를 나누곤 했다. 스스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는데, 상대가 그걸 싫어할 수도 있어서랬다. 그 정도로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 애는 멋있었다. 키가 크고 배려심이
“한때, 사람들은 AI가 발달하면 인류를 위협하고 주권을 찬탈할 것으로 생각했지.” 그는 담배를 피운다. 불을 붙인 연초를 입에 문 채로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쉰다. “하지만 AI에 대한 연구를 멈출 수는 없었어. 편리한 생활을 마다하기엔 나약했던 거다. 특이점이니 뭐니 떠들어 대면서도 인공지능 의존도는 점점 높아졌고.”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문지른다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면 오케이 할래?” 지수는 읽던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재하는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였다. “뜬금없이?” “갑자기 생각나서.” 원래 ‘갑자기 생각’하는 타입의 인간이었나? 그것도 소파며 바닥에 퍼질러져선 만화책 따위를 보고 있던 오후에.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아니었던 것 같은
“내가 죽어도, 내 방의 물건은 치우지 말아 줘.” “왜?” 그 애는 대답도 없이 웃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신원 확인. 문이 열립니다. 잔뜩 부은 발이 구두에 꽉 끼어서는 잘 벗겨지지 않았다. 뒤꿈치에 손가락을 넣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대충 닫은 중문이 덜컹, 하며 반쯤 다시 열렸다. 제대로 닫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거실을 돌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