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작업물

US

/ 2020년 작

소마 by 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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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iminal - Innocent & Suspect

* 자공자수, 나르시시즘, 약간의 폭력적 요소 (교살 위협) 포함

* 영화 US 소재 차용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

 

넓적한 끈으로 감긴 손목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가 힘없이 툭 무릎 위로 내던졌다. 

 

머리가 아직 욱신거렸다. 뒤통수가 깨질 것 같아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피가 흐르나 싶기도 한데,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데다 감각이 무뎌져 피부의 촉감으로는 알 수 없었다. 손을 들어 만져 보고 싶었지만 묶인 채로는 자세가 영 불편하다. 신음이 목 안에서 울렸다. 

고개를 숙였다 들며 어수선한 기억을 헤집었다. 눈앞에서 친구가 사라졌다. 그 애는 괴한에게 덮쳐지자마자 겁에 질린 채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L의 이름을 부르다가 속수무책으로 질질 끌려갔다. 얼핏 보기로는 친구의 입을 막던 그 자는 친구와 꼭 닮은 얼굴에, 엇비슷한 몸집을 한 채 온통 새빨간 옷을 걸치고 있었다. 매부리코에 갈색 눈까지, 어디 가서 지지 않을 덩치까지 너무 똑같아 제 눈을 의심하는 사이 L 역시 뒤통수를 강타하는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길이 없으니 어디인지 짐작조차 안 갔다. 적어도 친구와 산책하던 산타크루즈 해변이 아니란 건 알겠다. 캘리포니아 주는 넓다. 미국은 더 넓다.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채 운반되어 다른 주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온통 컴컴해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몸이 묶인 의자는 꽤나 앤틱한 모양새였다. L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문드문 놓인 빛만으로는 어두워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넓고 삭막했다. 네모반듯한 타일이 깔린 바닥은 발 디뎌 보지 않아도 냉랭한 온도가 전해졌다. 허공에 미미하게 푸른기가 감돌았다. 부서진 비너스 상 뒤로 언뜻 그가 보였다. 붉은 옷, L과 꼭 같은 체격, 그리고…… 미처 더 살피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L을 발견한다. 

네발짐승 같은 자세로 소리도 없이 훌쩍 뛰어와 L과 눈을 맞춘다.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속도와 몸짓에 소름이 끼쳤다. 응시하는 것만으로 질릴 만큼 무시무시한 외견은 아니었다. 인형처럼 반듯한 뼈대도 그 위를 덮은 거죽도 도리어 객관적 기준에서 충분한 미형이었고 너무나 익숙했다. 때문에 얼굴을 보고 있자 구토감이 치밀었다. L의 기억은 헛것도 착각도 아니다. 친구와 마찬가지로, L은 자기 자신을 마주했다. 

 

“너흰 뭐야?”

 

내뱉듯 물었지만 어쩐지 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분명 사람 꼴을 하고 있는 자인데 이상하게도 멀쩡한 소통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접혔다. 심해 생물이나 거대한 곤충, 혹은 외계인이라도 마주친 듯한 기분이다. 같은 얼굴을 한 자에게 감금되는 건 분명 흔한 경험은 아니다. 비상식 앞에 L은 당연히도 주춤한다. 본능적 거부감으로 속이 메슥거리는 동시에 기이하게도 뱃속에서 홧홧한 불이 타는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어릴 적 헤어진 쌍둥이라도 있었던가. 들은 바는 없다. 설령 있었다 한들 저렇게 토악질 날 만큼 인간답지 않은 양태를 보일 리 없다. 

상대가 옅은 숨을 오래도록 내쉰다. 와닿은 호흡이 얼어붙을 듯 오싹했다. L의 것과 같은 갸름한 선과 새하얀 얼굴에 한결 더 짙은 음영이 졌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전신을 칭칭 감은 끈이 바닥에 끌리며 소음을 냈다. L은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다. 마른침은 삼켰다. 

 

“우리는…… 죄인이야.”

 

바람 새는 미성이 그렇게 속삭였다. 뱉지 않은 말이 메아리로 돌아오는 걸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성대의 모양과 근육막의 두께까지도, 혀를 굴리는 방식까지 똑같음에 틀림없다. 

붉은 옷의 죄인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눈을 깜빡였다. 새까만 눈동자는 유리알로 된 인형의 가짜 눈처럼 반질반질 빛났다. 나른하게 팔락이는 속눈썹을 가닥마다 셀 수 있을 만큼 다가왔을 때 죄인의 손이 L의 뺨을 감쌌다. 그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생김을 갖춘 입술이 느릿하게 L의 이마에 닿았다. 이 감촉도 아마 완벽하게 동일할 것이라는 추측에 미치자 L은 판판한 피부 위 내려앉은 입술, 표피의 굴곡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둥근 이마에 머물러 있던 입술이 콧등을 타고 내려가 마침내 동일한 것이 겹쳐졌다. 

 

같은 얼굴을 한 죄인의 입맞춤은 놀랍도록 조심스럽고 정결했다. 의식을 치르듯 어떤 숭고함까지 느껴지는 행위에 L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움직였다. 가볍게 윗입술을 깨물고 파고드는 동작에 순순히 응했다. 기도에서 울렁이는 것이 거부감인지 흥분인지 알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지나친 부덕으로 뇌가 녹아내릴 것만 같다. 입가에서만 할짝이고 탐하는 탓에 안달이 난 건 이쪽이라 고개를 쭉 빼자 그의 죄인은 기다렸다는 듯 숨을 빼앗는다. 한참 동안. 

 

“아!”

 

뾰족한 비명이 샌다. 혀로 입안을 쓸자 비린 맛이 돈다. 죄인은 결국 L에게 또 하나의 죄를 저지르고야 만다. 의식의 마지막에 단칼로 산제물의 목을 치듯 콱 깨물어버린 여린 살에서는 피가 아주 철철 났다. 침에 섞여든 피를 무의식 중에 삼켰다. L의 흐릿한 시야에 붉은 옷 위 단정하고 유려한 얼굴이 보였다. 죄인이라는 명명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무고한 형상에 L은 생각한다. 지금 나의 표정도 나의 얼굴도 저럴까. 눈동자는 탁해지고 뺨은 붉게 달아올라 살짝 벌린 입술에서는 밭은 숨이 벅차게 튄다. 입가에는 흡혈귀라도 된 듯 피가 묻었다. L은 그 모습을 한 순간이라도 놓칠까 눈을 크게 떴다. 

 

실은 오래 전 거울에 입맞춘 적 있다. 제 모습을 정반대로 한 치 오차 없이 비추는 무생물에 입술을 슬며시 부볐다. 말캉한 살이 거울면에 맞닿고 고스란히 전해지는 싸한 냉기가 비참해 황급히 물러섰다. 손을 올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여기 직접 닿을 수 있다면. 

어려서부터 거울을 마주본 채 그 안에 비친 눈동자를 노려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거울 속 L과 한참 눈싸움을 하다 손을 뻗어 온기가 전해질 리 없는 매끈한 표면을 건드리곤 했다. 어쩌면 이 거울상을 만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고 이제야 생각한다. 

 

문득, 얻어맞은 뒤통수에서 쩡 하고 고통이 다시 퍼졌다. 

 

.

 

정신을 잃은 줄도 몰랐는데 다시 깨어난 걸 보니 잃긴 했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기절 중에도 꿈을 꿀 수 있던가? 아니면 그저 아주 빠르게 잠들어버렸던 것일지도. 결국 기절인지 수면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이 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 나아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꿈이 기억을 발굴해냈다. 

 

왜 산타크루즈에 처음 왔다고 생각했던 걸까? 왜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아주 어릴 적 형과 함께 여름 축제가 벌어진 해변을 마음껏 돌아다니다 길을 잃고 홀로 놀이시설의 거울 미로에 갇힌 적 있다. 수많은 L의 거울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로 속을 헤매다가 유리 안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은 그 앨 만났다. 

그 앤 그림자처럼 조용히 따라붙었다가 L과 맞닥뜨렸다. 완전히 같은 눈높이로 마주친 두 쌍의 눈동자가 몇 초간 침묵을 지키던 중 아이는 불쑥 내민 작은 손으로 L의 목을 졸랐다. 손가락이 목에서 떨어지자마자 쓰러진 L은 거칠게 기침하고 숨을 몰아쉬며 몸의 방향을 틀지도 않은 채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탐하게 된 것도 그 이후였다. 

 

그 날 이후 L은 거울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L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겨우 한 살 터울의 형제를 함께 두고 한눈을 판 것을 크게 후회했다. 결국 몇 달간 미술 치료를 받아야 했다. 미술 치료로도 큰 전진이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무용 치료를 시작했다. 미술 치료를 받았던 것도 무용 치료를 받았던 것도, 그로 인해 무용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전부 기억나는데 정작 그 원인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무용 치료는 다행히 효과를 봤다. L은 거울 앞에 온종일 몸을 붙이고 찰싹 붙어 있는 대신 더디게 일상 생활이 가능해졌다. 무용 연습실 또한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여 있었고 L은 자신의 모습을 집요하게 거울로 살피며 몸을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아름답게 움직였다. 

인과를 완전히 잊은 채로도 허상을 향한 집착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기어코 입을 맞추기도 했고. 이제 그가 갈구하던 모습은 거울 속 평면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 눈앞에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자꾸만 치미는 기대의 요건은 설명된다. 

 

“네가 기억났어.”

 

L은 몸을 일으키며 툭 내뱉었다. 인기척이 느껴지던 시커먼 구석에서 박쥐처럼 휙 날아든 인영이 L 옆에 주저앉았다. 마네킹처럼 어딘가 허한 눈을 말똥히 뜨고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이 여전히 조금은 섬뜩했지만 어쩐지 아이처럼 느껴져 두렵지 않았다. L의 시선이 구속복처럼 (정작 구속의 역할은 전혀 하지 못했지만) 꽁꽁 그의 온몸을 감싸고 묶은 새빨간 옷을 훑다가, 소매 아래 삐져나온 손에 머물렀다. 

저 손이 오래 전 내 목에 닿았고 기도를 막았다. 어릴 적 두 소년에게 현재의 두 청년의 모습을 대입해보다 문득 정신이 아찔해졌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은근하게 흐트러진다. 눈 앞의 청년이 돌연 제 목을 조르면 과연 무사할지 재어 본다. 외모는 같은데 완력은 차이가 날까. 저쪽이 짐승처럼 재빠르고 과감하긴 하지만 무용으로 다진 몸이라 L 역시 그리 약하지만은 않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L은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의자에 앉아 있지도, 손목이 묶여 있지도 않다는 것. 

L의 시선이 꽂히는 경로를 가만히 쫓고 있던 그가 눈 깜빡할 사이 어깨를 짓누르며 몸을 겹쳐왔다. 체중이 실리는 것을 느끼며 턱 막힌 호흡을 뱉었다. 올라탄 채로 뺨을 어루만지던 오른손이 천천히 턱을 쓸더니 엄지와 검지 사이를 넓게 벌려 목을 감쌌다. 더 거칠게 틀어쥘 수도 있을 텐데 그럴 생각은 없다는 듯 썩 친절한 손길이다. 그가 턱뼈 아래 양쪽을 꾸욱 누르며 속삭이듯 물어왔다. 

 

“그럼, 이것도 기억나?”

 

교살 당할 위기에 놓여서도 엄습하는 공포심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두근대던 심장 소리만 더욱 선명해졌다. 숨결이 달다. 밀착한 몸에서 보이는 반응을 그 또한 알아채고 헛웃음을 짓는다. 할까? 이렇게? 그가 목을 감싸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묻는다. L은 대답하지 않고 상체를 들썩였다. 그는 왼손으로 L의 머리를 부드럽게 젖히고 곧게 뻗은 목 위로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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