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점

오레스테는 한 번 더 오만한 착각을 했다.

글 재활 by 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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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 블레어를 고소합니다….”

오레스테는 목이 새빨개질 정도로 술에 꼴아서 양팔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테이블에 거의 정수리를 박을 듯 기울어 있는 고개를 보니 렉스는 비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야, 월드 시리즈 졌지 네 인생 망했냐?”

“네가 월드 시리즈 같은 거 얘기만 안 꺼냈어도 나 이런 꼴 안 됐어!”

잠시 미국 물 먹었던 렉스가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 이야기를 꺼낸 건 그냥 그 시기가 되어서였고, 마침 심심하니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렉스가 한쪽 팀을 응원한다는 걸 알게 된 오레스테는 대뜸 그 반대쪽 팀을 응원하겠다고 선언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오레스테가 그 팀에 너무 몰입을 해 버렸다는 점이다. 오레스테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밀리기 시작하자 소화가 안 된다고 잘 먹던 안주도 내려놓더니 결국은 한 차례 속을 게워 냈다.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 경기에서도 패색이 짙어지자 흉통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결국 져 버리니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술을 한 됫박 마셨고, 결국 이 꼬라지가 되고 만 것이다.

저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스포츠 좋아하고 술 절제 못 하는 스물세 살짜리였다. 저놈이 마법사라고 하면 대체 누가 믿을까? ‘그 피 짙은 순혈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하면? 개가 비웃을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굴 자유가 있었다.

렉스는 슬퍼서 몸을 못 가누고 있는 오레스테의 뒷덜미를 붙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아빠한테 ‘너’가 뭐야? 그러게 누가 지는 팀 응원하랬나. 빨리 일어나.”

“이게 미쳤나….”

“길바닥에 버리고 가기 전에 싸가지 챙겨라?”

렉스는 취객이 되어 버린 경찰을 본인 집 현관문 안쪽에 버려 주는 친절을 발휘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레스테는 라이너 오플린 이야기만 꺼내지 않으면 지극히 그 나이다운 면을 보였다. 학교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렉스가 오레스테를 싫어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라도 자유롭게 살고 있는 사람 발목 잡고 물속으로 끌어들이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기어이 그를 수중으로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오레스테가 언제든 다시 물밖으로 나올 방법을 알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자유를 맛본 사람은 또다시 자유를 찾아 수면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으니까.


그 어린 나이에도 ‘교육받은’ 사람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은 있었다.

총명해 보이는 친구, 내게 있어 네 첫인상은 무척 명료했다. 형을 닮지는 않았는데 형처럼 아는 게 많아 보였다. 살갑게 다가간 것도 너와 가까워지면 형을 뛰어넘을 수 있겠다, 그런 교활한 이유였다.

그런 나와 네게 인정욕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공통분모를 발견한 뒤로는 너와 가까워졌다고 오만하게 착각했다. 한때는 나도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서 사랑받는 걸 꿈꾼 적도 있었으므로, 네 행복을 진심으로 바랐다. 그 행복이 인정받고 싶은 대상들에게서 놓여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그 틀에 끝까지 밀어 넣어 가면서 진정으로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데에서 오는 것일지라도.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해서 머리 한구석으로는 제 자유를 계획하면서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주 잠깐의 자유만을 약속하고 그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그렇게 판단해서는 안 됐다. 어쩌면 네게 필요한 건 언제까지고 네 편이 되어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같이 자유로워지자고 약속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걸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다. 우리 사이에 고작 교점 하나가 있는 게 아니라, 베아트리스 에버화이트라는 인간과 오레스테 오플린이라는 인간이 생각보다 더 많이 닮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게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묵직한 죄책감으로 변해 마음을 짓눌렀다.

이제 타고난 천성이 다르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네게서 내 모습을 읽을 시간에 다른 말을 했어야 했다.

베티, 난 도망칠 생각이야. 너도 같이 갈래?

“…….”

저들 좋을 대로 마음에 드는 포장재를 둘러 입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맞지도 않는 틀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 또한 사랑이 아니다. 누구든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억지로 적응하려 들면 공황 상태에 접어들게 마련이다.

자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한 겹 뒤의 진창을 목격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고 숨을 쉬기 어려웠다. 아주 오랜만에 그런 기분을 느꼈다. 헛숨을 들이키는 순간 지팡이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네가 형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분노 따위가, 그 분노에서 기인해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한 말들이, 순수한 적의 따위가, 형을 이기겠다는 목적까지도 더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아니, 나는. 네가 바라는 대로 진창에 빠지지 않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붙잡힌 손으로는 제 지팡이를 부술 듯이 움켜쥐었다. 오레스테는 끓는 듯 내달리는 맥박을 고스란히 느끼며 입을 열었다.

“너를 진창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너를 거기서 건져낼 거야.”

오레스테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목표가 아니라, 자신이 제대로 직면하지 못했던 친구를 위해서. 그럴 수만 있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든.

“그 사람들이 망가지면 네가 더한 진창에 빠진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아닐 거야. 넌 자유로워질 거야. 내가 그렇게 된 것처럼, 너도.”

오레스테는 한 번 더 오만한 착각을 했다.

“자유로워질 수 있어.”

어쩌면 내가 네 뒤늦은 자유를 되찾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근거는, 다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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