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타임은 꽃차와 함께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AU (700일 로그)
동그란 은색 삼단 접시에 아기자기하게 세팅된 달콤한 간식은 지나가던 누구도 유혹할 수 있을 만큼 완벽했다. 맨 밑에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놓은 햄과 치즈가 들어간 크루아상 샌드위치. 중간에는 포슬포슬하게 구워진 크랜베리와 블루베리 스콘, 그리고 곁들여 먹을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잼. 맨 위에는 화려한 색상을 자랑하는 작은 마카롱과 오트밀 쿠키, 작은 유리잔에 담긴 딸기 쇼트케이크가 있었다.
태량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작은 은색 스푼을 만지작거리다 앞에 놓인 애프터눈 티 세트로 시선을 돌렸다. 둥그런 테이블이 아기자기한 사이즈여서 착시현상이었는지, 티 세트가 더욱 푸짐해 보였다. 태량이 앉아있는 작은 정원에는 비슷한 테이블이 여럿 있었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은 태량이 유일했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약간 쌀쌀한 날씨 탓이었는지, 아니면 저녁이 가까워지는, 하늘의 푸른색이 빛바래는 애매한 시각 탓이었는지는 아직 몰랐지만.
“미안! 오래 기다렸어? 오늘 일이 좀 늦게 끝나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태량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시야에 얇은 붉은색 겉옷을 걸친 청년이 들어찼다. 뛰어왔는지 약간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빙긋 웃어주며 태량은 생각했다.
‘적어도 안 춥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겠네. 유즈가 추위를 타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의 반대편의 비어있는 의자를 향해 손짓하면서 태량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10분? 오래는 안됐어. 오자마자 바로 티 세트를 내줘서 좀 놀라긴 했지만. 예약제여서 이렇게 빨리 준 걸까?”
“글쎄, 그건 아닐걸? 여긴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찻집이거든. 언제와도 늘 줄을 서고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하지만… 음, 오늘은 그냥 운이 좋았던 걸까?”
사실 찻집 주인이 태량 왕녀님을 알아보고 혼신의 힘을 다해 빠르게 공들여 내놓은 작품이 이 애프터눈 티 세트인 것은 유즈리하와 태량은 모르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최근 국화 축제에 태량이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니 아마 오늘 찾아온 손님이 누구인지, 적어도 눈이 있는 사람은 눈치채고 있을 거라 유즈리하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아무리 애매한 시간이어도 여기가 이렇게 텅 빌리가 없을 텐데.’
주인의 배려 덕분에 단둘이 태량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유즈리하는 속으로 감사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화려하게 세팅된 티 세트를 보며 한 번 감탄하고,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고, 얼마 안 있어 켜질 등불에도 시선을 주고. 유즈리하는 옆에 놓인 찻주전자에 손을 뻗으며 물었다.
“좀 있으면 어둑어둑해질 것 같은데, 오늘 언제쯤 들어가야 해?”
“아, 오늘은 정식적으로 외출 허락을 받고 나와서 조금 늦어도 괜찮아. 다 먹고 호위를 불러서 들어가면 되거든.”
그러니까 이거 다 먹을 시간은 충분히 있어. 혹시 몰라 날씨에도 단단히 대비했고. 어깨 위로 걸친 짙은 푸른색의 두꺼운 숄을 가리키자 유즈리하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 묶음 한 레몬색 머리카락이 옆으로 흘러내려 색의 조화가 참 예쁘다고 생각하며 유즈리하의 눈가가 휘었다.
“그런데 아무리 치안이 좋은 마을이라고 해도 이 시간까지 나와 있는 걸 용케 허락해줬네? 여태 몰래 나오길래 외출에 대해서 엄청 엄격할 거라 추측했었는데.”
“저번 축제 때 공식적으로 외출한 후로 조금 유해지긴 했어. 본격적으로 데뷔는 했으니까, 가끔 마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해주셨고. 그런데 나올 때마다 호위를 열댓 명씩 데리고 나오는 건 아무래도 민폐니까 열심히 설득해서 두 명으로 합의를 봤어.”
네 말대로 치안이 좋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테고. 웃으며 말하는 태량의 앞으로 유즈리하는 따끈따끈한 밀크티를 밀어주었다. 하얀 도자기 잔 안에 옅은 갈색의 차가 찰랑이며 고소하고 달달한 향기를 풍겼다. 유즈리하의 눈도, 태량의 눈도 기대로 반짝였다.
뭐부터 먹어야 할까? 다 맛있어 보이는데. 눈을 위에서부터 굴리는 유즈리하의 말에 태량은 키득 웃으며 맨 밑 접시에서 샌드위치를 두 조각 꺼내 하나는 자신의 접시에, 하나는 유즈리하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밀크티를 한 모금 홀짝이고 설명했다.
“애프터눈 티 세트는 정석대로라면 맨 밑 샌드위치부터 시작해서, 중간층에 있는 스콘을 그다음에 먹고, 맨 위의 디저트로 끝내. 꼭 안 따라도 큰일 나는 건 아니니까 먹고 싶은 순서대로 먹어도 되지만.”
“와 역시 량, 아는 게 많네!”
유즈리하는 태량을 향해 엄지를 척 올려주고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자그마한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은 유즈리하의 표정이 만족스럽게 변하는 것을 보고 태량도 자신의 샌드위치를 손에 들었다.
“성에서 종종 후식으로 나오니까. 누군가를 대접해야 할 때 나오는 경우가 잦으니까 그럴 땐 격식 차려 정석적인 순서대로 먹지.”
그런데 여기 생각보다 맛있다, 성에서 나오는 티 세트에 절대로 뒤처지지 않겠는걸? 두 번째 샌드위치 조각을 집어 드는 태량의 모습에 유즈리하는 뿌듯한 마음에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말했잖아, 여기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라고. 이곳이 바로 태량 왕녀님께서도 극찬하셨다는 그 찻집!”
유즈리하의 장난스런 말에 태량은 가볍게 유즈리하를 흘겼다. 유즈리하는 짐짓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몇 초 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하나둘, 샌드위치를 해치우고 찻주전자의 밀크티를 반쯤 비우고, 스콘을 하나씩 들고 크림을 펴 바르고 있을 때였다.
“잠시 실례합니다.”
둘의 위로 살짝 그림자가 드리웠다. 유즈리하와 태량이 올려다보자 찻집 주인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쟁반 위로 투명한 유리 찻주전자와 유리잔 두 개가 보였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찻집 주인은 유리 주전자와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건 특별히 드리는 서비스에요.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 꽃차라 한 번 맛보시고 감상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즐겨주세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바람같이 사라지는 찻집 주인을 보는 유즈리하의 얼굴에 알 것 같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하, 량의, 아니 왕녀님의 팬인가 보군. 저번 연설 이후로 왕녀님 팬이 엄청 늘긴 했었지. 찻집 주인 계 탔네. 한동안 왕녀님이 자기 찻집을 방문해주셨다고 자랑하고 다니겠어.’
멍하니 찻집 주인이 사라진 쪽을 보고 있던 태량의 시선을 유즈리하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려 찻주전자 쪽으로 돌렸다.
“서비스라니까 우리 이것도 마셔보고 감상평 남기고 갈까? 기왕 주신 거 따듯할 때 마시자.”
유즈리하의 말에 태량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다 갸웃 기울였다. 태량의 시선 끝에는 유리 주전자에 투명하게 비치는 붉은색 꽃차가, 액체 위로 동동 떠다니는 붉은색의 꽃이 있었다. 잠깐의 관찰 후 태량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 이거.
“맞아. 이거 국화차야. 빨리 눈치챘네? 역시 이거 꽃이 큰 힌트였으려나?”
“이 꽃만큼은 내가 몰라볼 리 없으니까. 그런데 신기하네. 국화차는 늘 노란 국화를 넣은 종류만 봤었거든.”
“여기서도 보통은 노란 국화차 종류만 팔긴 해. 붉은 국화차는 딱 이 시기에만 나오는 특산품이라고 볼 수 있지~ 국화 축제가 끝나면 붉은 국화차가 한참 유행하거든.”
투명한 유리잔에 국화차를 따라주며 유즈리하는 씩 웃었다. 찰랑이는 붉은색 투명한 액체 너머로 유즈리하의 갈색 눈동자가 태량을 응시했다.
“좋지 않아? 붉은 국화를 다시 한번 주고받는 느낌이기도 하고?”
유즈리하에게 돌아온 미소는 붉은 국화꽃처럼 밝고 화려했다. 태량은 유리 주전자를 받아 유즈리하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두 개의 유리잔에 온기가 가득 들어찼다.
“그러네. 이렇게 다시 붉은 국화꽃을 주고받게 되었으니 찻집 주인에게도 감사 인사를 하고 가야겠네.”
늦은 저녁 날씨는 서늘했지만, 꽃차의 온기에 둘은 마냥 따듯했다.
“곧 겨울이 될 테니까 야외 티타임은 이번이 올해의 마지막이겠네. 하지만 겨울에도 즐길 거리는 많으니까, 그때도 기대되는걸.”
유즈리하의 말에 태량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겨울에도 만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음 가을이 돌아오면 다시 애프터눈 티 먹으러 오자.”
돌아오는 가을마다 나를 만나러 와주면, 붉은색 국화꽃을 선물할게.
늦가을의 꽃차 위로 자그마한 약속이 새겨졌다.
Written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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