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 ss

헌법 제20조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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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오더로 주문하신 주니왕자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전세계적인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던 유진은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모바일 앱으로 주문하면 닉네임을 불러준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저런 닉네임을 설정한 사람이 있을 줄은.

창가석 테이블 옆 자리에 앉아있던 유준이 몸을 일으킨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유유히 카운터 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얹은 트레이를 서빙해 온다.

커피를 한 잔 씩 배분한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닉네임이...... 주니왕자야?"

한참 연상인 유진이 침묵을 깼다.

"애칭이에요. 여자친구가 지어 준 애칭."

유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만들어 내어선 아메리카노에 종이 빨대를 꽂는다.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걸 보아하니 적잖이 당황하긴 한 모양인데.

"아, 그래......"

유진은 대충 그런 말로 얼버무렸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참에 가까웠으리라.

나이 차이가 제법 있는 선후배 둘은 말없이 창 밖의 거리를 응시하기나 했다.

시내에 도플갱어가 돌아다닌다.

이 기묘한 소문은 여름 초입부터 학생들 사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유준이 그 소문을 처음 들은 건 6월 말의 일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 찰나의 여유를 즐기며 동기들과 이런저런 술잔을 기울이던 때, 그렇게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또 데면데면 하다고는 하기 어려운 관계의 동기가 이런 말을 꺼냈다.

"유준, 너 무용과 은서 알지."

교내의 내로라 하는 미인들은 죄다 시야에 담아두던 유준이었다.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공개된 인스타를 슬쩍 염탐했던 기억은 있다. 그렇다면 안다고 대답하는 게 이치에 맞으려나.

"어, 알지."

"내가, 엉? 걔랑 어떻게 썸씽이 있어서 잘 되어가고 있다 이거야."

유준은 잠시 현재의 여자친구가 몇 번째의 애인인지 고민했다. 솔직히 스무 번째 이후로는 세는 게 귀찮아서 관두었지만.

"그래서?"

"근데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 틈만 나면 여친 갈아치우는 윤유준한테 어드바이스를 얻어 볼까 하고."

"여친이 아니라 썸이라면서."

"야, 그게 그거지."

그게 그건 아니었지만 유준에게는 더 이상의 대홧감이 없었다. 별 수 없이 동기의 한탄을 들어보기로 했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세워진 맥주병을 들어 기울이다가, 텅 빈 걸 확인하곤 사장님을 불러 맥주 한 병 추가.

"무용과는 기말고사를 뭘로 보는지 알아?"

"뭐, 무용하겠지."

"그래~ 무용과니까 무용을 하지. 그런데 걔가 전공만 듣는 건 아니니깐, 교양 시험도 볼 거 아니냐."

당연한 소리를 하기에 유준은 재미없다는 얼굴을 만면에 드러내 본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어선 손목을 툭 떨어뜨린 채 맥주잔을 홀짝이는 불손한 태도. 동기는 유준의 반응을 보더니 콧바람을 흥, 뿜는 것이다.

"교양 공부를 해야 해서 오늘은 도서관에 있으려고요, 하길래 그럼 나도 도서관으로 갈까? 했지."

"그런데?"

"친구들이랑 같이 하겠대서 한 발 물러났어."

"그래서."

"난 그 날 시험이 다 끝났었거든. 야, 근데 너 이번 약물학도 진짜 에이플이냐?"

"너랑 다르게 성실한 편이라."

장난스러운 어투를 꾸며냈다. 어깨도 한 번 으쓱해 주니 상대는 샘이 나선 이상한 신음을 끄응, 하며 흘리다가, 본론으로 돌아온다.

"아무튼, 그렇게 빠꾸 먹고, 난 동기한테 전화해서 같이 밥 먹으러 갔다 이 말이야."

"남자?"

"남자."

유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며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본다.

"걔랑 학교 정문 근처에서 만나서, 터미널 근처에 새로 생긴 마라탕집 아냐? 그거 먹으러 갔거든."

듣고 보니 여자친구가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터미널 근처에 새 마라탕 집이 생겼으니 언제 한 번 먹으러 가자고. 유준은 마라탕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세상에는 비즈니스 태도라는 것도 있기 마련이기에.

"거기 맛있냐?"

"마라탕이 거기서 거기지."

아무래도 동기는 유준과 비슷한 입맛인 듯했다. 유준은 남몰래 동료의식을 느껴본다. 정작 데이트에 필요한 지식은 얻지 못했으나.

"그래서 동기랑 마라탕 먹으려고 횡단보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대쪽 보도블럭에 걔가 있는 걸 봐 버린 거야."

"걔?"

"은서."

유준은 두 눈을 조금이나마 크게 떠 본다.

"도서관에서 친구들이랑 공부한다고 했다며."

"응, 근데 거기 있더라."

"횡단보도 건너편에?"

"응. 횡단보도 건너편 보도블럭에. 어딜 가는지 급하게도 걸어가더라고."

"불러봤어?"

"아, 당연하지. 은서야! 하고 힘껏 불러봤는데, 듣는 척도 안하고 슝~ 지나쳤어. 안 들릴 만한 크기는 아니었는데......"

동기는 입술을 비죽 내밀곤 어깨를 으쓱한다. 의문스럽다는 느낌의 제스처다.

"반응도 안하니, 부른 내가 머쓱했지. 다른 사람이랑 헷갈린 줄 알고 후다닥 마라탕 집으로 도망갔다?"

"쪽팔리셨겠어."

유준은 빠르게 비어버린 잔을 스스로 채우고 있다. 황금빛의 맥주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그러고, 바로 어제 걔를 다시 만났거든. 만난 김에 물어봤지. 너 그때 터미널 근처에 있지 않았냐냐고."

"뭐라 대답하디?"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그러데. 완전 당황한 눈치던데. 오빠가 원한다면 그 때 같이 있었던 애들이랑 전화도 시켜주겠다고~"

"그래서, 전화 했냐?"

그러니 동기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피식, 웃고 마는 것이다.

"...장난스럽게 그랬어. 허, 당당해? 그럼 전화해~ 하면서. 그러니까 진짜로 전화 걸더라. 걔가 좀 백치미가 있긴 한데. 아, 하긴 그런 점이 귀엽긴 하다."

흥미 없는 사족은 간단하게 무시해버리곤, 유준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 술집의 안주는 간이 좀 부족하다. 테이블에 소금이 담긴 용기가 있었다면 다섯 번 정도 치고 싶었을 정도다.

"전화하니깐, 교양 수업에서 친해졌다던 애가 받더라."

"뭐래?"

"은서랑 같이 있었다고. 이것저것 같이 공부하면서 재밌었다고. 그게 썸타는 사람한테 할 소리냐?"

그녀가 눈앞의 동기와 썸타는 걸 몰랐다면 충분히 할 만한 소리긴 하다. 유준은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여선 동기의 말을 다시 한 번 분석하여 본다.

"그럼 진짜로 도서관에 있었다는 거?"

"그게, 나도 의심스러워서 다른 애한테 물어봤지."

"다른 애 누구?"

"은서랑 같이 다니는 여자애 있어. 인스타 아이디 교환도 했고. 같은 교양 듣는 것도 확인했고."

"그래서 뭐래."

"은서랑 같이 도서관에 있었대."

유준은 기울였던 고개를 더욱이 기울인다. 눈을 반쯤 감아선 바로 앞의 동기의 낯빛을 빤히 관찰해대고 있다.

"그거, 믿을만 해?"

"에이, 셋이서 어떻게 말을 맞췄겠냐? 마지막에 물어본 여자애는 말야, 정말 대뜸 물어본 거라고. 내가 물어볼 걸 예상했음 천재도 그런 천재가 없다."

"흐음......"

유준은 기울였던 고개를 정상 궤도로 되돌려선, 찌꺼기만 남은 안주를 몇 점 집어먹어 본다. 밍밍한 맛의 고기를 우적우적 씹어대는 치아.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내가 터미널 근처에서 봤던 은서는, 진짜 은서가 아니라는 거지."

"진짜 은서가 아님 누군데."

그리 물으니 동기는 또 별 대답이 없다. 유준은 고개를 약간 숙인 그의 얼굴을 주시하여 본다. 그러자 상대는 반 쯤 남은 맥주잔을 원샷하더니, 그제서야 천천히 입을 여는 것이다.

"......도플갱어 아니냐?"

유준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비어내고 만다.

"야, 뭔 도플갱어야. 취했냐?"

"아니, 그도 그럴게. 은서도 거짓말하는 기색이 없고, 다른 애들도 구라치는 건 아닌 것 같단 말야."

"니가 사람을 너무 믿는 거야."

"야, 암만 그래도 썸타는 앤데 구란지 아닌지 모르겠냐."

점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준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점점 무거워져 가는 머리를 지탱하기 위해 애를 써 본다. 자취방은 이 근처니까 어떻게 귀가할 수는 있겠지. 그런 희망적인 예상을 하며.

동기가 꺼낸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금방 이야기 흐름에서 버려졌다. 음주자들의 대화란 거진 이런 것이다. 유준은 어느새 떠오르고 만 신작 예능 이야기를 하다가, 도플갱어 이야기 같은 되도 않는 화제는 금세 머릿속에서 지우고 말았다.

"터미널 근처에 도플갱어가 나온대."

카페에 앉아 자질구레한 스터디를 하던 스터디원이 대뜸 꺼낸 말이었다. 유준은 이 주 전 술자리에서 들었던 동기의 연애담을 곧장 떠올렸다. 도플갱어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자주 쓰지 않으니, 그 단어 하나가 서치의 키워드가 되었음은 자명하다.

"그건 또 이상한 얘기네."

"유준이 너, 민속학 동아리 아냐? 이런 데에 빠삭한 동아리라고 들었는데."

"빠삭하려나?"

유준은 능글거리며 웃었다. 실제로 빠삭하기도 하고, 도플갱어라니 흥미가 일지 않는 이야기는 또 아니다. 스터디원은 은근히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친구가 말해준 이야기야. 방학도 됐고 하니 본가로 일주일 정도 내려갈 거라고 한 애가 있었대. 걘 기숙사에 살아서 룸메이트도 세 명이나 있어. 본가로 가져갈 간단한 짐 싸는 걸 세 명이 전부 목격했고, 잘 다녀오라고 배웅도 해 줬다네. 그런데 말이야, 그 다음다음 날 터미널 근처에 걔가 돌아다니는 걸 룸메이트 하나가 봐 버린 거야. 당연히 놀랐겠지. 놀라서 전화까지 했대. 그런데 터미널 근처의 그 애는 전화를 받는 기색도 없고, 인파 사이에 섞여서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는 거야."

푹신하진 않은 카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유준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홀짝였다. 속사포 같은 말에 끼어들 틈을 노리다가, 상대가 음료 잔을 드는 것을 보곤 질문을 던진다.

"잘못 본 거 아니야?"

"저녁만 되면 얼굴 보는 사인데 잘못 볼 수 있겠어?"

하긴 기숙사란 그런 곳이던가.

"그래서, 전화는? 받았대?"

"아, 응. 걔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서 전화가 연결됐대.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수정아, 이러면서."

"전화에서 다른 소리는 안 들렸고?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나, 웅성거리는 인파 소리 같은 거."

"......안 들렸대. 어디 실내에 있는 것처럼 음질이 깨끗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고."

"어머니?"

"누구누구야, 엄마 이것 좀 도와 줘, 하면서."

유준은 미간에 골을 새긴 채 움직임을 멈췄다. 이래서야 얼마 전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와 거의 판박이가 아닌가.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다. 동기 녀석 하나만 겪은 일이라면 착각이려니 하며 넘어갈 수 있겠지만, 비슷한 사례가 둘이나 나온 걸 보아하니 무언가의 '현상'임은 분명했다.

유준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스터디원은 경악스러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런데 이게 걔한테만 벌어진 일이 아냐."

"어? 그럼?"

"왜, 도플갱어를 보면 한쪽이 사라진다는 얘기가 있잖아. 그래서, 애들이 별로 말을 안 하는 것 같긴 한데......"

정확한 표현은 '자신의 도플갱어를 보면 자신은 죽어버린다'지만. 그것을 이 상황에 굳이 교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유준은 번쩍이는 안광으로 이어질 말을 재촉한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시디과 누구도 동기 도플갱어를 봤다는 거 같고, 기계과 누구도 후배 도플갱어를 봤다는 거 같고─── 그래,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서너 명이야."

유준은 머리에 돌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 이 세계에는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세계의 이 시간대의 이 도시에, 그러한 현상이 새로이 발생한 모양이다.

그는 우선 민속학 동아리의 지도 교수를 떠올렸다. 그 다음으로는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동아리 선배를 생각해냈다. 누구에게 먼저 전달해야 할까. 

유준은 가볍게 고민하다가, 먼저 마주치는 사람을 붙잡아 얘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독고유진은 무어라 읽어야 할지 헷갈리는 이름의 카페의 2층 창가석에 앉아 있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넓죽한 모양의 백화점은 벽돌을 닮아 있다. 창문 하나 없는 쇼핑센터 앞을 가로지르는 6차선 도로는 오늘도 대중교통과 자가용들로 인산인해. 유진은 일전 백화점 내부의 서점을 들르기 위해 자가용을 끌고 이 거리에 나왔다가 교통체증으로 곤혹을 겪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백화점 근처에 일이 있을 때면 버스를 애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가 일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꼬박꼬박 올려야 하는 웹소설은 다다음 주 분량까지 미리 써 놓았고, 간단한 교정까지 다 보았으며, 기르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의 주기적인 몸단장 역시 바로 어제 끝냈다.

상당한 양의 세이브 원고를 비축해두는 건 그의 버릇이었다. 여러모로 험한 인생이라 언제 어디서 의식과 목숨을 잃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고로 유진은 한 달의 칠 할 가량을 느긋하게 보낸다. 나머지 삼 할은 원고 집필과 지역 순찰 정도에 적절히 분배되어 있다. 오늘은 칠 할에 해당하는 날이었고, 집에만 있자니 몸이 찌뿌둥하여 무심코 현관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말았다. 고양이들을 위해 에어컨을 괜찮은 온도로 맞춰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페 2층에서 대로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익숙한 얼굴이 길다란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게 보였다. 백화점에서 카페 쪽으로 대로를 횡단하는 게 된다. 대형 서점의 갈색 종이봉투를 한 손에 덜렁덜렁 매달고 있다.

유진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전화라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갑작스레 눈이 마주쳤다.

윤유준은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서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곤 곧장 빠른 걸음으로 횡단을 재개하더니,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카페의 계단을 올라왔다.

"뭐하세요? 여기서."

창가 테이블에 종이봉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유진은 머쓱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여가 생활?"

"카페 순회하는 취미도 있으셨어요?"

"있어 보여?"

유진의 가지런히 정리된 옅은 턱수염은 오늘도 건재하다. 

유준은 더운지 앞머리를 한번 쓸어올렸다가, 손에 미끈하게 묻어나는 땀을 싫은 눈치로 쳐다본다. 할 말이 있다고 하더니 커피를 주문하러 1층으로 휭하니 사라져버렸다.

서늘한 감이 있는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으니 곧 유준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돌아왔다. 그새 땀이 식었는지 이마에 물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호쾌하게 잔 째로 커피를 마시고 나서야 유준은 입을 열었다.

"요새 이상한 소문이 돌아요. 들으셨어요?"

"소문?"

지역사회 커뮤니티에 별로 속해있지 않은 유진은 정보 습득이 느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을 의미해 본다.

"터미널 근처에 도플갱어가 나온다고."

"터미널? 여기잖아."

두 사람의 눈앞에 있는 백화점. 그 지하에 위치한 것이 시외버스터미널, 왼쪽에 자리한 별도의 건물이 고속버스터미널이다. 자가용이 있는 유진은 최근 이용해 보지 않았지만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으리라.

의외로 유진과 그의 은사가 주시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 주변은 특히 포교하는 종교인들이 많아서, 운이 좋으면 양지의 종교가 아닌 음지의 종교와 연이 닿을 수도 있다. 그런 수상한 단체를 일망타진하며 쓸만한 아티펙트를 모으는 게 유진의 주 업무인데......

"도플갱어라니 무슨 소리야."

유진은 한층 진지한 얼굴로 한참 어린 후배를 쳐다보았다. 유진의 전공은 약학이 아니라 민속학이었지만, 민속학 연구 동아리라는 뜻밖의 공통분모가 그들을 묶어주고 있다.

유준은 주변인들에게 들었다는 소문을 이야기 해 주었다. 다른 장소에 있는 게 분명한데도 자꾸만 터미널에 모습을 보이는 학생들. 불러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전화를 걸어도 휴대전화를 들지 않는 그들. 유진은 신묘하다는 표정으로 유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커피잔의 얼음이 녹아 딸그락, 하며 움직인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니."

"뭐, 이미 소문은 쫙 퍼진 것 같으니까요. 환한 대낮에 돌아다니는 도플갱어라니, 무섭잖아요? 보고도 입 다물고 있는 애들이 배는 될 걸."

유진은 입을 앙다문 채 창밖을 응시했다. 이 거리에 그런 것들이 돌아다닌다면 분명 예삿일은 아니다. 하지만 귀신도 아니고 도플갱어라니. 괴이한 생명체를 제법 만나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유진도 도플갱어는 만나본 적이 없다. 인간으로 둔갑한 괴물이라면 모를까......

......어쩌면 인간으로 둔갑한 괴물이 도플갱어보다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도플갱어가 발견된 애들 사이에 공통점은 없어?"

"대충 인스타 훔쳐보긴 했는데요, 그렇다할 공통점은 없는 거 같던데. 과도 다르고, 동아리도 다르고 스터디도 안 겹치고."

하기사 동아리 활동에 열성적인 유준이 기본적인 조사도 않고 있었을 리 없었다. 유진은 얼음이 반쯤 녹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창 너머의 대로변엔 여전히 사람이 많다.

유진은 불과 며칠 전 자신의 은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다. 분명, 요즘은 눈에 띄는 이변이 딱히 없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에 반해 도플갱어가 나온다는 소문은 몇 주 전부터 퍼져 있던 모양이고. 교수님의 말이 진실이라면 (거짓일 이유가 없었으므로, 진실에 가까우리라) 이 도시에 도플갱어 따위의 괴생명체가 출현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말인 즉슨, 도플갱어는 도플갱어가 아닌 진짜 사람이라는 뜻이고.

터미널 앞 횡단보도에서 두리번대던 포교인이 행인 하나를 붙잡았다. 흔해빠진 양지의 사이비 종교라 유진은 큰 관심을 두지 않으려다가.

문득 기이한 발상이 뇌리를 스쳤다.

터미널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건 도플갱어 뿐만이 아니다.

"사이비?"

저도 모르게 입새를 비집고 흘러나온 말이었다.

유준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로 유진을 바라본다.

"집단 구분을 잘못한지도 몰라, 우리."

"집단이요?"

"......터미널 근처에 사이비가 많잖아. 멀쩡한 건물로 위장한 사이비 건물도 있고."

실제로 몇 번 방문도 해 보았던 유진이었다. 포교당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종교단체 내부를 탐색했었는데, 죄다 별 거 아닌 사이비들이라 빠르게 발을 빼냈다.

"사이비들과 도플갱어가 연관이 있다고 한다면?"

유준은 십 초 정도 입을 다문 채 눈동자를 굴리다가, 유진이 다다른 결론을 날쌔게도 툭 내뱉었다.

"도플갱어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일이 있다고 거짓말 쳐 두고, 사이비 종교에 참석하느라 터미널 근처에서 발견됐다, 이거예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치는 똘똘한 학생 답다. 유진은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 치면, 어째서 증언이 그렇게들 견고했는지 이해가 돼. 사이비는 보통 혼자서 다니지 않잖아. 유준이 너도 학교 안에서 자주 마주치지 않아?"

심리 상담 따위를 해주겠다며 선량한 얼굴로 새내기들에게 접근하는 2인조는 틈만 나면 캠퍼스 안에서 발견된다. 그 2인조의 구성 인원이 항상 로테이션 되는 게 무섭다면 무서운 점이다. 그런 이야기를 민속학 동아리 학생에게 들었다. 이제서야 떠오른 힌트를, 유진은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써본다.

"그럼, 첫 번째 도플갱어, A양이라고 할까요. A양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는 건 거짓말이었고, 실은 그 시간에 사이비 종교에 참석하고 있었다. A양과 같이 공부를 했다는 두 친구의 증언 역시 거짓."

"아마 같은 사이비 종교단원이었겠지. 그 시간에 같이 사이비 활동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A양이 그 시간에 사이비 활동을 했다는 걸 알고 덮어준 걸 수도 있고."

A양은 정말로 도서관에 있었냐는 썸남의 물음에 과하게 반응했다. 같이 있었다는 친구에게 전화까지 하여 증명하지 않았나. 썸남은 그녀의 '백치미'를 마냥 귀여워했지만, 실상 백치미가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

"도서관 어느 자리에 앉아있었냐고 캐물어도 크게 효과는 없겠네요. 도서관이 그렇게 작지도 않으니 목격 정보를 확인하기도 어렵고. CCTV로 확인한다 한들 일반 학생한테 그걸 그냥 보여줄 것 같지도 않아요."

"CCTV를 봐도 말이야, 사각지대에 앉아있었다고 얼버무리면 그만이기도 해."

애정행각을 위한 사각지대란 캠퍼스 어느 공간에나 마련되어있기 마련이니.

"......A는 파고들 틈이 없는 거 같으니 B로 넘어가죠."

두 번째 도플갱어. 기숙사에서 세 명의 룸메이트와 생활하다가 일주일 간 본가로 떠나버린 B양.

"B양이 사이비 종교단원이라고 치면, 일주일 동안이나 사이비 종교에 있어야 할 이유는 뭘까요? 짐까지 싸서 나갔다고 했잖아요."

"글쎄, 그건 아직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가 아니야...... 뭐, 여름 맞이 합숙이라도 한 거 아닐까. 합숙 정도는 교회에서도 하잖아?"

정식 교회가 아닌 사이비에서의 합숙이니 위험성은 배로 가중될 테지만, 본래 무언가에 미쳐있는 신도들이란 제 몸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진은 문득 B양의 안전이 염려되어 얼굴근육을 팽팽히 당기고 만다.

유준은 그런 유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B양을 목격한 룸메이트가 그 자리에서 곧장 전화를 걸었었죠. 전화는 B양이 룸메이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연결됐어요. 실내에서 받는 것 같은 깨끗한 음질이었고요."

"그리고 통화 도중 B양의 어머니가 B양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 실내가, 터미널 근처에 있는 사이비 건물의 내부라고 한다면, 그러면...... B양은 어머니와 함께 사이비 종교에 들어간 걸까요?"

유준은 제 커피를 반도 마시지 않았다. 유리잔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길게 흘러내려 철제 테이블에 닿는다. 그런 모습을 시야에 담으며, 유진은 입술을 움직였다.

"......자길 엄마라고 칭한다고 정말로 어머니라는 보장은 없어. 룸메이트가 B양의 어머니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설사 안다 하더라도 전파를 거친 목소리는 쉽게 구분할 수 없잖아?"

"그렇다는 건, 그 여자는 B양의 어머니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의 일원일지도 모르지. B양이 곤경에 빠진 걸 보고 옆에서 도와줬든가...... 아니면 애초부터 매뉴얼이 있었을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에겐 본가에 간다고 둘러댄 후 합숙에 참여한다는 매뉴얼이. 그렇다면 당연히 트러블에 대처할 방안도 공유하고 있었을 거야."

유준은 깍지 낀 두 손을 제 무릎에 올려두었다. 사각 테 안경 저편의 새카만 눈동자가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허공에 떠오른 자신만의 요약 정리본을 살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유진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목이 말라 커피잔으로 손을 뻗는다. 농도가 옅어진 아메리카노는 맛이 덜하다.

"도플갱어가 한둘만 발견된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럼 학교에 사이비가 꽤 퍼져있다는 건데?"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좀 위험하지 않아요?"

유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사건 역시, 교내 사이비에 얽힌 사변이었으니까.

"무슨 종교인지 감 오는 거 있어?"

"글쎄요,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저렇게 비밀스럽게 다니는 거 보니 뒤가 구린 사이비 아니겠어요."

뒤가 구린 사이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이비는 대부분 뒤가 구리다. 그것이 세속적인 방향으로 구리다면 차라리 낫다. 꼬투리를 잡아 사법으로 형을 집행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세속적인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 이를 테면, 악마 숭배에 가까운 방향으로 구린 거라면......

그것은 양의 사이비가 아닌 음의 사이비다.

유진은 음의 사이비를 조사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그의 은사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도플갱어에 얽힌 애들, 스케줄을 좀 조사해줬으면 좋겠다."

유진은 목소리를 낮춰 부탁했다.

이틀 뒤, 두 사람은 정겨운 이름의 갤러리 앞에서 만났다. 일전의 백화점 바로 옆에 위치한 갤러리로, 갤러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2층에서 누군가의 개인전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준도 유진도 미술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1층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로 발을 들이기나 했지만. 슬쩍 실내를 둘러보니 미술 전시 팜플렛이며 기념품을 손에 든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당황스러운 닉네임의 유준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서빙해왔다. 한 잔 씩의 커피를 각자의 앞에 두곤, 길 건너 맞은편의 건물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두 사람.

"정말 저 건물 맞아? 한의원에, 피부과, 정형외과...... 그냥 의원 건물 같은데."

작은 목소리로 묻는 유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유준.

"......도플갱어가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대요. 동기 친구가 그러던데."

"동기 친구? 발이 넓구나, 유준이."

"아는 애들한테 물어물어 다녔죠. 하아, 저도 소문이 쫙 퍼졌을 거예요...... 괴소문에 집착하는 윤유준."

유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어지는 말을 툭 내뱉었다.

"선배 때문이에요."

"흐음, 나한테 도플갱어 얘기를 한 건 유준이잖아. 해결해달라고 얘기한 거 아니었어?"

"선배랑 교수님이 해결하실 줄 알았죠."

"교수님한테 보고하기 전에 최소한의 조사는 해야지."

"이건 최소한이 아닌 거 같은데."

불만스럽게 눈썹을 까딱이는 후배를 보고, 유진은 그저 웃으며 창 너머의 도시를 관찰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도플갱어를 현장에서 체포하기 위해 잠복하고 있다. 유준은 도플갱어 소문에 얽힌 이들의 대략적인 스케줄을 파악하였고, 그들이 '이 거리에 나타나면 안 되는 시간대'를 일일히 체크했다. 스터디를 간다거나, 운동을 간다거나. 그런 시간대에 그들이 이곳에 나타난다면, 당장 카페를 뛰어나가 포박할 생각이었다.

유진에게는 이미 모든 정보를 공유해 두었다. 아마 둘 중 눈썰미가 더 좋은 사람은 유진일 테니까. 내가 한 번 놓친다 한들 선배가 잘 낚아채 주시겠지. 낙관적인 예상을 하며, 유준은 별 맛 없는 종이빨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정보를 정리한 보람도 없이, 의외의 인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유준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말단이 젖은 빨대가 입술을 타고 미끄러진다.

나이 많은 선배는 그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살짝 고개를 돌려선 왜 그래, 하며 억누른 목소리로 묻는다.

"......오늘 자기 언니 만나러 간다고 했는데."

"어? 누구?"

유진은 연신 휴대폰 액정과 창밖을 번갈아 본다. 유준이 보내준 용의자들의 사진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 안에 그녀는 없다. 그것은 유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제 여친이요."

그는 피곤한 두 눈을 부릅뜨곤 카페를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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