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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EJ (2)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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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같은 꿈을 꿨다.

모래사장으로 밀려온 남자의 머리. 보랏빛으로 빛나는 바다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면 파도가 발을 간질인다. 남자의 머리는 검고, 또 축축하고. 미역인지 모를 해조류가 귀에 걸려있다. 머리의 반은 모래사장에 파묻혀서, 감은 눈은 한 쪽밖에 보이질 않는다.

복사뼈를 쳐대는 파도를 무시하고 허리를 굽힌다. 모래에 파묻힌 남자의 머리를 뽑아낸다.

짠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엉겨붙는다.

형용하기 힘든 냄새가 났다.

쉰 것도 같고, 썩은 것도 같고, 달콤한 것도 같고, 익은 것도 같고.

"잘린 머리란 말이지, 그런 메타포야."

누군가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남자는 눈을 뜨지 않는다. 머리가 잘려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상식적인 판단이다.

눈꺼풀을 까뒤집으면 흐려진 수정체가 이쪽을 바라본다.

입술을 벌리면 축 늘어진 혀가 비죽 튀어나온다.

확실히, 죽어있다.

"사람이란 뭘까요?"

"고기능의 의식이 담긴 65kg의 고깃덩어리."

"말장난인가요?"

"아니, 진심이야."

눈을 감은 남자의 머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입을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말을 하는 걸까.

"형은 그렇게 되어서 만족해요?"

"그렇게?"

"머리만 남아서, 만족해요?"

머리는 웃지 않은 채 웃었다.

웃었다, 라고 느낀다.

"후련하고 좋아."

허벅지에 한기가 돈다.

정신을 차리고 내려다보면, 바닷물이 가랑이 사이까지 차올랐다.

아니, 자신이 바다 안으로 걸어들어 왔다고 하는 편이 옳다.

"같이 갈까?"

머리가 말했다.

"몸을 떼어내러 갈까?"

그제야 목의 절단면을 살필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에 물어뜯겨 있다.

바다는 본래 푸른색.

푸른색이 무엇과 섞이면 보라색이 될까.

도진은 느릿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평소의 그와 같은 모양새다. 이야기를 하다가 그와 이웃한 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래도 자각은 늦지 않아서, 지금은 이 얘기를 할 때가 아니죠, 라는 말을 덧붙여 억지로 본 주제로 돌아온다. 그런 패턴을 세 번 정도 반복했다. 그의 입에서 이대림이라는 남자의 이름이 나오기까지.

이대림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도진의 전 애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단어 몇 개로 간단하게 갈음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게 또 있기 마련이다. 도진 역시 단순히 애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 듯했고, 따라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사람이 죽으라고 했으면 전 죽었을 거예요. 우리는 그런 사이였어요.

도화는 팔짱이라도 끼고 싶었지만 운전대를 잡은 채로는 그럴 수 없었다.

“저기, 나 담배 피워도 되나?”

대신 이렇게 물었고, 도진은 끄덕였다.

“거기 글로브 박스에 담배 있을 건데. 좀 부탁해.”

“부탁이요?”

“불 붙여 달라고.”

“라이터는……”

“그것도 그 안에 있어요.”

글로브 박스를 열어 담배와 라이터를 찾은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양 손에 연초와 라이터를 든 도진이 어딘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움직이질 않는다는 거다.

”왜 그래?“

”아, 아니……“

“붙여주기 싫어?”

도화는 별 수 없이 왼손을 조수석으로 내민다. 담배 한 개비가 쥐어졌다. 입술로 가볍게 깨물고 나서, 라이터를 기다린다. 오지 않는다.

”불.“

반응이 없다. 전방 도로에 크게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다. 조수석을 흘긴다. 도진은 다소 멍한 얼굴로 기어 부근을 응시하고 있다.

”아이, 뭐하는 거야. 주세요.“

뭉개진 발음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손을 내미니, 그제야 도진은 천천히 움직인다. 적확한 자리에 불을 붙인다. 겨우 빨아들인다. 연기를.

“그 사람도 담배를 피웠어요.”

말투가 바뀌었다.

“피우다가, 끊었지. 그래서 나도 같이 끊게 됐는데.”

갑자기, 왜? 물론, 방금도 뜬금없이 바뀐 거긴 하지만.

“지금은 다시 피우고 있으려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그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전자담배다. 윤서천이 이 도시를 떠나며 도진에게 선물했던 것을, 우연찮게도 도화가 박살내고 말아서, 같은 기종으로 사 주었던 그 담배다.

“약속 잡으면서 안 물어봤어?”

“담배 피우냐고요?”

“궁금했을 거 아니야.”

“그런 걸 어떻게 물어봐. 오늘도 나오라고 통보받은 건데.”

내린 창문 너머로 커피향의 연기가 훅 사라진다.

“……통보?”

“전화가 왔어요. 얼마 전에. 내가 머리 자르기 전이지, 그게.”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제 머리를 슬쩍 매만진다. 길어서 하나로 묶고 다녔던 것을 완전히 잘라버렸다. 보편적인 남성의 쇼트 커트다. 길이가 약간 길긴 하지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맞아. 그 사람이 죽으라고 하면 죽었을 거라고.”

지난 주 금요일 아침의 일이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하지만 도진은 번호의 주인을 단숨에 알아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몇 년을 사귄 상대의 전화번호니까. 외우고 싶지 않아도 외우게 된다.

심장박동이 한순간 빨라졌다.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사지의 말단이 차가워졌다.

그러한 신체의 반응이 알려주는 것은, 역시,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기보다는 무서워 했구나 하고……

수신을 거부할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어느새 수신 버튼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귓가에 휴대전화를 댔다. 도진아, 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진아. 번호가 그대로네. 다행이다.

네가 낸 책을 공항에서 봤어.

네가 계속 얘기해줬던 그 꿈이지? 이건.

내가 떠난 이후로도 잘 살고 있었구나. 정말 기특하다. 얼굴 한 번 볼까?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대답은 간단하다. 무서우니까.

그러나 입 밖으로 거부의 의사를 밝히지 못한다.

그렇게 길들여졌다.

순종하도록 길들여졌다.

그와 인연을 끊은 지 삼 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길은 여전히 들어 있어서.

“알겠다고 대답했어.“

도진이 건조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도화는 운전대에서 한 손을 뗐다. 피우던 담배를 차내 재떨이에 대충 비벼 끈다. 마음만 같아서는 세 대 정도를 연거푸 피고 싶었지만, 지금의 도진에게서는 영 담배를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당신이면 싫다고 할 법도 한데. 왜 그랬어?”

조수석에서 턱을 괴고 담배를 빨아대던 도진이 미묘한 웃음을 머금고 대답한다.

“그래도, 한 번은 보고 싶었나 봐요.”

“아깐 보기 싫었다면서.”

”도화 씨라면 안 보러 갈 거예요?“

내 인생을 흐트린 전 애인을, 이라는 구가 의도적으로 생략된 문장이다. 도화는 딱 잘라 대답하지 못한다.

”그런 거예요.“

웃음기가 섞인 어조다. 도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가에서 전자담배를 거뒀다. 희미한 커피 향이 차내에 잔류한다.

”그래서…… 그 날 머리를 자른 건가?“

”슬슬 덥잖아요.“

”아니, 당신은 지금 상태로 머리를 자르러 갔어.“

”그런가?“

킥킥댄다.

”그래…… 한 번 보고 싶었다고는 하지만, 당신한테 그 이대림이라는 남자는 여전히 스트레스니까.“

막 웃는다.

“당신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런 상태가 된다면서? 이미 들었어.”

“걔도 참 입이 가볍네.”

비웃는 투다.

그가, 다른 사람을 비웃고 있다.

뒷목이 서늘해진다. 내색은 않고, 전방을 주시한다.

“네…… 스트레스였어요. 그러니까 내가 머리를 자른 거지.”

그 사람은 내 머리가 덥수룩하게 긴 걸 좋아했거든요. 도진은 그렇게 말하고 또 큭큭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단정하게 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을 흘기면서 도화는 갈등한다. 흡연을 기준으로 도진의 인격은 현저하게 바뀌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행하려는 행위가, 도진에게 있어 득일지 실일지 알 수가 없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의 영역이라면, 도화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래도, 이 상태로 남은 사십 분을 주행하는 것보단 뭐라도 해 보는 게 차라리 나을 거다. 실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이대로 가산동이 아니라 병원이라도 데려가면 될 일이다.

도화는 머릿속으로 정돈한 문장을 천천히 내뱉는다.

“그건 작가 양반하고도 합의가 된 사항인가?”

도진은 일순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의 변화가, 곁눈질로도 쉬이 보인다.

그리고, 도진은 다시 웃었다.

“도화 씨는 참 마음에 드는 사람인 것 같아요.“

”빠져나가려 하지 말고, 대답해 봐.“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담배 한 대가 간절했다.

”당신, 전에도 날 한 번 봤잖아.“

“현이랑 같이 왔던 날 말이구나.”

지난 주 토요일. 그러니까, 지금의 도진이 머리를 자른 바로 다음 날. 도화는 아파트 현관에 위치한 암묵적인 흡연 구역에서 도진을 마주쳤다. 하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이유는 첫째로 도진이 머리를 짧게 잘랐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고, 셋째로 제 근처에 선 도화를 확인하고 시선을 슬쩍 돌렸기 때문이다.

침묵의 공동 흡연이 끝난 후 도화는 서점으로 향했다. 도진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건 현이라는 판단이 섰으니까. 얼마 전부터 기르기 시작한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던 현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작가님이라면 어제도 서점에 오셨어요. 특별히 기분이 안 좋아보이시진 않았는데. 오히려 좋았으면 좋았지. 무슨 잡지에서 의뢰받은 글을 다 쓰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시더니, 저한테 처음으로 보여주시겠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서도진이라는 작가의 첫 독자는 언제나 그의 동거인이자 애인인, 윤필규다.

현은 그제야 이변을 눈치챘다. 머리까지 자르셨다고요? 낌새가 안 좋은데. 집에 가 봐야 하나. 같이 가 주시겠다고요? 저야 감사하긴 한데…

토요일은 공휴일이다. 즉,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윤필규도 집에서 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일 도진에게 이변이 생긴다면, 사태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대처할 사람은 애매하게 친한 도화도 무난하게 친한 현도 아닌 연인인 윤필규.

“걔는 작가님이 무슨 상태인지 모른단 말이에요.”

당시의 현은 무척이나 다급했다. 서점의 문을 대충 잠그고 달려나가기에, 도화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도진의 집 현관문 앞에서 보았던 광경이……

“그땐 놀랐어요. 필규야, 나를 모르니까. 어지러워서 그런 거라고 대충 넘길 수 있었는데. 도화 씨가 현이까지 데리고 오는 바람에.”

도진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미 상당히 흘린 것도 같았다. 인중을 넘어 턱까지 번진 핏자국이 생리적으로 부담스럽게 비쳤다. 오른손으로 코피를 거칠게 닦아낸 모양이었다. 굳어선 어두침침하게 갈변한 피가 손이며 뺨에며, 오른쪽 관자놀이에까지 묻어있다.

필규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런 도진을 부축하고 있었다. 이미 도진의 상해라는 큰 사건도 터져있는 마당에, 뜬금없이 지인 둘이 초인종을 눌러대니 더 혼란스러웠을 거다.

“상당히 곤란했다니까요. 걔는 놀라서 나오려고 하질 않는데, 현이가 뭐하는 거냐고, 그만두라고 해서.”

머리가 어지러워서 코피를 흘린 사람에게 ‘그만둬라’라는 말을 하는 건 이상하다. 윤필규가 그런 모순을 눈치챘을까. 도화는, 그것까지는 알지 못한다.

”……그런 상황이니까, 나는 당연히 당신이 독단적으로 머리를 잘랐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그래요?“

”당신은 금요일에 멋대로 머리를 잘랐어. 다음 날 눈을 뜬 작가 양반은 짧아진 머리를 보고 혼란스러워 했겠지. 충분히 스트레스 상황이야. 기억이 없는데 신체에 변형이 생긴건. 그리고, 당신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도진은 양손을 맞잡고 싱긋 웃었다.

“상황 파악이 빠르시네요. 역시 조사원은 다르구나.”

“왜 말을 안 했어?”

“무슨 말이요?”

“당신하고 같이 사는 그 애한테 말이야.”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진다.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이. 사라진 웃음을 대신해 만면을 채우는 건, 다름 아닌 의아함.

“말해야 하나요?”

“사귀는 거 아니야, 당신들?“

”네, 그렇죠.“

”그러면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 당신 정도면…… 말해두는 게 여러모로 안전하지.“

둥그런 안경 너머의 눈이 도화를 응시한다.

”세상에는 굳이 털어놓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 있어요.”

“아니, 당신은……!”

“나는, 그 애가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를 제외하면,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어.”

불과 몇 시간 전에 들었던 현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작가님이 저러시는 걸 전에도 한 번 본 적 있거든요.

그렇다는 건, 그 외에는 본 적이 없다는 의미다.

“제가 이곳에 있는 건 그 정도로 희귀한 일인데, 저를 털어놓아서 좋을 게 있나요?”

도화 씨라도 저 정도로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과는 같이 살고 싶지 않죠?

걔도 필규랑 헤어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누군가와 헤어지는 건 걔한테 있어 상당한 스트레스라서, 이번에도 헤어지게 된다면, 글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도진의 얼굴을 한 그는 그리 말하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눈길은 여전히 이쪽을 향해 있다. 차가우면서도 맹렬한 시선이다.

이것은 일종의 협박이다. 도화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자신의 사정을 필규에게 털어놓는다면, 나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인과가 간결한 협박이다.

하지만,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까…….

윤필규는, 동거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내칠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도화는 단언한다. 물론 필규와는 생활 패턴이 놀랍도록 맞지 않아서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지만. 딱히 친하다고 할 수도 없는 거리의 이웃이지만. 이 나이 먹도록 남의 뒷일을 캐며 살아오다 보면 사람을 보는 눈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를 뒷조사한 적도 있고.

서도진 씨……. 윤필규는 당신을 선뜻 내쳐버릴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은 그 정도로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왜 그걸 모르고 있지?

익숙한 이름의 IC를 지난다. 과천, 의왕 방면으로 진입. 전방에 과속 방지 카메라가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의 알림음. 감속하는 차체. 침묵.

“……왜 가산에서 보기로 했어요?“

“거기서 살았었거든요. 아까 얘기 안 했나?“

했었다. 이대림의 이름이 나오기 전에, 그 사람과 가산 쪽에서 삼사 년을 같이 살았다고 했다. 더블 체크가 필요했을 뿐이다. 작가 양반의 기억과 이 사람의 기억이 일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럼, 그 사람이랑 헤어진 후에 이쪽으로 이사온 건가?“

”그렇게 되네요.“

도진은 짤막하게 대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엿보였다. 무엇에 대해? 이쪽으로 이사 온 사실에 대해?

과속 방지 구간이 끝났다. 차체는 다시 가속한다. 가벼운 압박감을 느낀다. 속도감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것이다. 도화는 이 압력을 좋아했다. 고철덩어리 안에 앉아서 쏜살같이 달려나가고 있다는 감각이 언제나 즐거웠다.

도진은 썩 즐겁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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