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챠

가챠 타입 14

1차

지독한 꿈을 꾸었다.

꿈속의 자신은 홀로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무늬조차 없는 새하얀 벽이 유메를 조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자신은 여기에 있는 걸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꿈이라는 걸 자각하려고 했다. 이런 건 현실이 아냐. 나는 깨야 해. 저도 모르게 가장 보고 싶은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꿈은 너무나 잔혹했다.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 발 나아갈 때마다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유메는 천천히 몸을 틀어 소리의 근원지를 알아보려고 했다. 그리고 보았다, 무미건조한 표정의 치즈루를.

치즈루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았다. 매번 밝고 쾌활한 모습을 보여준 치즈루가, 제게 없는 걸 가진 치즈루가 차가운 시선으로 유메를 보았다. 그제야 유메는 이게 꿈이라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시야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치즈루에게 버림받을 거 같아서 무서워졌다. 유메는 마음 한구석에 불안을 품고 있었다. 제게 다정히 대해주었던 치즈루가 이럴 리 없다면서.

치즈루를 향해 다가갔다. 점점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유메는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가려고 했었지만, 넘어갈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기고 말았다. 치즈루는 유메에게 아무 볼일이 없다는 듯 몸을 휙 틀었다. 멀어지고 있다. 유메는 어떻게든 다가가고 싶었지만, 끝 없는 어둠으로 추락했을 뿐이다.

*

꿈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그랬듯이 거친 호흡이 유메의 잠을 달아나게 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축축했다. 꿈이어서 다행이야, 유메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치 독실한 신자가 주님에게 기도하듯이 계속해서 웅얼웅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약 십 분이 지나고 나서야 유메는 진정할 수 있었다. 도저히 해소할 수 없을 거 같은 갈증이 유메를 괴롭혔다.

방에서 빠져나오니 태연하게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치즈루가 보였다.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치즈루는 꿈속에서 보았듯이 차가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유메가 나오자마자 단번에 밝아졌다. 치즈루는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유메에게 다가갔다.

“선… 배가 아니지! 유메, 이제 일어났어여? 지금 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저기, 아주 제일 높은 곳에 있다고요!”

그 말은 점심이라는 걸까. 확실히 어제 일찍 잠들었던 걸 고려하면 오래 잔 셈이다. 치즈루는 아침을 혼자서 먹는 게 무척 외로웠다며 유메에게 말했다. 거기다 점심은 어떻게든 자신을 깨워서라도 같이 먹겠다는 말에 안심했다. 볼에 무언가 닿았다. 유메는 손을 뻗어 제 볼을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어느새 자신은 울고 있었다.

“유메?”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냥, 그냥… 반가워서.”

“그게 무슨 말인데여~ 어차피 매일매일 얼굴 보고, 밥 먹고, 같이… 자기도 하고. 그랬는데 갑자기 반갑다고 말하면 치즈 쨩은 놀랄 수밖에 없다고요?”

약간 장난끼가 묻어나는 목소리를 듣자 현실에 돌아왔다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 놀랄 수밖에 없겠지. 그야 그렇겠지…. 유메는 애써 웃어보려고 노력했다. 언제였더라, 치즈루가 한 번 유메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한 번쯤은 제 속내를 드러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뉘앙스였다. 치즈루는 유메에 대해 더 알고 싶었을 뿐이고, 유메는 속내를 드러내라는 발언으로 해석했다. 차라리 전부 말하면 치즈루는 어떻게 반응할까. 학교에 다닐 때와 달리 지금의 자신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꿈도, 할 수 있는 것도. 어떻게든 방에 틀어박힌 채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였다. 다시 마주할 수 있었던 것도 아주 기가 막힌 우연에 가까웠다. 치즈루가 웅얼거리면서 제 볼에 바람을 빵빵 불어넣었다. 그 모습이 좋았다.

“그야 유메는 지금 제가 없어지면 엄청나게 슬프겠지만! 아, 막 헤어진다거나 그런 거 생각 안 했어요. 그렇게 불길한 걸 상상하다니, 치즈 쨩에겐 무리! 불가능!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막 조마조마하다거나, 불안하다거나. 그런 일은 일제히 생각하지 않은 채 웃고, 즐겁게 떠드는 거! 치즈 쨩 같은 애에겐 오히려 그런 게 더 필요하다는 거 알아요? 물론, 유메에게도 필요하지만! 앗, 아니, 잠시! 왜 아까는 울었는데 지금 우는 거예요?!”

“그냥 치즈랑 이렇게 있을 수 있다는 게 좋아서.”

“아… 그런 거라면 납, 득일 줄 알았어요?! 엉덩이에 뿔이 나도 저는 모릅니다아?”

다행이다. 유메는 안심한 나머지 웃었다. 실실 웃는 것밖에 못 했지만.

치즈루와 함께 있으면 유메의 불안감은 조금이나마 해소됐다. 이렇게 평생 있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유메는 부디 이 행복이 조금이나마 더 오래갈 수 있길 바랐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