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흑발소년
카르에고는 스스로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함은 제가 그렇게 애타게 부르던 규율에서 벗어난다. 예외를 만들고, 질서를 어지럽힌다. 딱히 이상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아마 이대로 홀로 살아갈 거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아, 나비. 좋은 아침이네요.” 잔디밭에서 다비가 늘어진 채 있었다. 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산야는 익숙하게 엉망진창이 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다시 바람이 엉키자, 아예 정리하는 걸 포기했다. 지금은 머리를 정리할 때가 아니다. 생각을, 비워야 했다. 눈을 감아도 잔혹하게 죽어가는 이들이 떠오른다. 산야는 누군가의 목숨이 이기적인 욕심에 의해 사라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움직였다. 잔혹한
헬가는 자신을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바란 적이 있다. 철없는 어릴 때 있었던 일이다.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고 싶었던 탓에, 한때 자신만을 바라봐줄 수 있는 이를 찾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았다. 작은 호의조차 건네주지 않았기에, 헬가는 꿈속에서 만난 킹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킹은 참 착했다. 아니, 일부러 제가 눈을 감고 있었
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소나기는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우산이 있어도 이 비를 뚫고 갈 엄두를 못 낼 정도가 됐다. 카게미야는 곱게 접힌 우산을 한 손에 쥔 채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비를 피하고 있는 걸까? 우산이 있는데? 우산은 옅은 붉은 색이다. 그 색은 퍽이나 카게미야에게 잘 어울렸다. 어째서 카게미야가 우산을 쓰지 않은 채 그
“올해 생일은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저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아마네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해보았다. 12월 6일, 그의 연인인 텐도 아마히코의 생일. 매년 찾아오는 중요한 날이다. 어렸을 적엔 모두가 모여서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축하해주지 못했다. 어쩐지 숨이 턱 막혔다. 자그마치 십여 년간 그의 탄생을 축하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12월 6일, 텐도 아마히코의 생일. “생일이란 본래 탄생을 기념하는 일. 자, 모두. 아마히코 씨의 생일을 축하할 준비를 해봅시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할 거라고?” 어느덧 아마히코의 생일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니, 참 빠르다. 모두 아마히코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바삐 움직였다. 간소한 선물, 맛있는 음식. 아마히코의 취향에 맞춰 손수 만들었다
처음 환희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든 건 엮일 일이 없을 거 같은 상대였다.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행동이나 말을 들을 때마다 궁금해졌다. 어째서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괜히 억울해지기도 했다. 자신은 어머니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았다. 누구보다 훌륭한 딸이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환희는 제 노력이 가소롭다는 듯이 굴었다. 환
“있지, 이름이 없다는 건 무슨 느낌인지 알아?”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어두컴컴한 창고 안이었다. 자그마치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이 쓰러져 있다. 그중에서 흡사 늑대를 연상시키는 귀를 가진 청년이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청년의 앞에는 안경 쓴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그나마 창고 안에서 청년과 더불어 정신이 온전하게 깨어 있는 사람이다. 청년은
“있잖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네?” 연호는 두 눈을 깜빡였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이 세빈을 향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만 껌뻑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 번 더 들려주실 수 있나요? 선명한 붉은 눈이 꼭 그렇게 말하는 거 같았다. 한 번 더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세빈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아
12월의 어느 날이 되면 몹시 소란스러워진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옅은 푸른 빛에 옅은 잿빛 구름이 있었다. 곧 눈이 오려나. 구름이 제법 켜켜이 쌓인 탓에 금방이라도 차가운 솜을 토해낼 거 같았다. 세차게 바람이 불자, 아이리스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이 스네즈나야에서 눈이 내리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다른 지역보다 추운
아이에게 있어서 게토는 단순히 좋아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아이는 늘 매번 단순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둘러대고 있었다. 맞다, 이제 그럴 질문을 할 만한 상대는 남아 있지 않았지. 자꾸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바람에 휘날려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하며 생각했다. 제가 품은 감정을 굳이 정정해야 할
지독한 꿈을 꾸었다. 꿈속의 자신은 홀로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무늬조차 없는 새하얀 벽이 유메를 조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자신은 여기에 있는 걸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꿈이라는 걸 자각하려고 했다. 이런 건 현실이 아냐. 나는 깨야 해. 저도 모르게 가장
버니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파티는 늘 리오의 곁에 있었다. 당연히 지긋지긋할 정도로 그의 말을 들었다. 외우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외우게 됐다. 언제부터 자신이 버니시였더라. 애초에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었다. 파티는 조금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릴 때의 철없는 생각이었을 뿐이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과
본리 죽음이란 한 번 밖에 찾아오지 않는 삶의 마침표다. 그렇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어떨까. 마침표를 여러 번 찍을 수 있다면. 한 번밖에 없다는 희귀성이 사라지고, 죽어도 돌이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생명을 경시하지 않을까. 어차피 다시 살아날 수 있는데, 같은. 설은 하늘을 보았다. 어두컴컴한 하늘에는 구름이 켜켜이 쌓여있을 뿐 별은 보이지
현에게는 소소한 취미가 있다. 바로 집 근처나 동네 한바퀴를 돌아보는 것. 처음에는 시간 때우기 겸 시작했었는데 예상외로 재밌었다. 같은 길을 가는 것도 지루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아직까진 지루하지 않았다. 좌우로 나눠진 골목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오른쪽은 주택가인지 낮은 빌라가 여러 채
수없이 많은 이들을 보냈다. 매일 밤마다 눈을 감으면 떠난 이들이 떠오른다. 발드르는 제 손으로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잊으려고 해도 도통 잊을 수 없었다. 혹시 죽을 때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제가 조금 더 잘 막아냈더라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텐데. 한순간의 판단 미스가 저를 제외한 모두를 죽여버렸다. 생각해보았다. 왜 자신만이 살아남았
요란스러운 사람. 그게 예림을 향한 진호의 감상이었다. 본래 진호는 조용한 걸 선호했다. 예림이 저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태도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진호는 곁에 사람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좋으니까. 딱 그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다. 타인에게 휘둘리는 것도 별로였다. 하지만 예림만큼은 예외였다. 늘 자신을 볼 때마다
본래 지구란 별은 위태로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지구는 천천히 멸망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은 지구의 멸망을 막고자 노력해 보았으나, 잘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어차피 멸망하게 될 거, 그전까지 마음껏 살아보자. 그런 마인드였다. 주형은 폐허가 된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본래 타 연구실에는 잘 오지 않았는데,
미아가 됐다. 사에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훑었다. 어딜 가도 낯선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제가 아는, 중절모를 쓴 오렌지 빛 머리카락의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츄야는 신장이 다른 사람보다 작은 편에 속했다. 체격은 조금 작아도, 존재감 만큼은 하늘을 찌르듯 높았다. 적어도 츄야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을 없을 테니까. 사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피곤하다.” 사에를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가볍게 기지개 켰을 뿐인데 온몸에서 괴롭다는 아우성을 보내고 있다. 사에는 제 어깨를 주먹으로 톡톡 쳤다.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츄야였다. 츄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사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어. 피곤해?” “응, 아직 임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 …빨리 익숙해져서 츄야를
처음으로 좋아한다는 걸 자각했을 때는 암담했다. 남들은 다 행복하다고 했는데, 자신은 영 그렇지 못했다. 질척거리는 감정이 제 목을 조였다. 숨이 막힐 거 같으면서도 좋아하는 걸, 동경하는 걸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 됐다. ‘그것도 벌써 몇 년 전 일이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테사 씨에게 고백했다니. 그때는
겨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기가 차가워지며 손발이 트는 것도 싫었고, 추위를 대비하여 옷을 갑갑하게 입어야 하는 것도 싫었다. 눈이 오면 조금 들떴지만, 거리가 지옥의 빙판길로 변하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겨울은 썩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생각이 조금 바뀔 거 같았다. 모토키는 슬쩍 제 옆을 보았다. 이세야 시키, 세리자와 모
물고기 한 마리를 얻었다. 빙워징은 생각해 보았다. 어쩌다 제가 푸른빛을 지닌 물고기를 얻게 된 것일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더듬어 보았다. 이름 모를 남자가 제가 물고기를 좋아한다는 걸로 빌미 삼아 접근했다. 징은 그런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무슨 속셈이 있었냐고 딱 한 번 추궁했더니,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부리나케 도망갔다. 덕분에 물고기 한
“레겐은 한 번 생각해본 적 있나요? 만약 이 세상이 평화롭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이요.” “……그다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최근 들어서 데시드는 제가 생각한 걸 레겐에게 들려주었다. 레겐은 문자 그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다. 데시드는 마치 재미없다는 듯 레겐을 보았다. 어쩐지 어린애의 투정처럼 느껴지는 걸까. 레겐은 그제야 생
센티넬에게 있어서 가이드는 귀중한 존재다. 제 능력을 감당하지 못한 채 예민해진 센티넬을 말릴 수 있는 건 오직 가이드 뿐이다. 거기다 가이드의 적성을 지닌 이는 무척 적었기에 사회적 우위를 차지했다. 때때로 오만한 가이드는 위험한 순간에도 제 이익을 취하려고 했다. 리콰이드는 그런 부류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이드가 귀중한 건 맞았지만, 그게 모든 관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