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 I AM U
#Cerumillion
I.
"정신이 드세요?"
"......"
"자신이 누군지, 아시겠나요?"
"....네."
"이게 무슨 그림으로 보이시나요?"
"........네모요."
.
.
.
"수술,성황리에 끝났습니다."
방에서 나온 세르는 얼굴에 쓰고있던 가면을 벗으며 환자의 부모에게 말했다. 여자의 부모들은 연신 안도하며 세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제 저희 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건가요?"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후 어떤 폭력적인 행위도 보이지 않을겁니다."
"닥터 세루리안, 정말 고맙네. 그동안 불치병에 걸린 줄 알았던 우리 딸아이에게 드디어 정상적인 생활을 선물해줄 수 있게 되었어. 내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럼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또 뵙겠습니다. 물론 안 보는게 제일 좋겠지만요."
ㅡ
19XX년 말, 미지의 영역인 줄로만 알았던 인간의 정신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알려지며 의학계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로보토미 시술로 알려진 이 시술은, 중증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전전두엽을 절개하는 것이었다.
세르 세루리안이 어떻게 외과의사, 그것도 이 로보토미 시술을 전반적으로 담당하는 의사가 되었는가라는 문제는 그에게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세르 세루리안은 오로지 자신의 쾌락만을 좆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도와야한다는 의무나 사명감이 아니었다.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짜릿함, 감히 인간의 정신을 고칠수도 동시에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그 우월감.
생각해보면 그의 이상하리만큼 높은 선민의식은 그가 보육원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아무도 그의곁에 오래머물지 못했다. (그것의 상대의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ㅡ
'치익-'
담뱃불에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세르는 손장난을 멈추고 잔을 빙빙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손에는 방금 그가 만든 화상자국이 있었다.
그는 불을 좋아했다. 모든것을 태우는, 그럼에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악마. 동시에 그의 눈에 자신을 보며 허무한듯 서있는 한 남자아이가 비쳤다.
아이의 볼에는 눈물자국이 한줄기 남아있었고, 남자아이 치고는 긴 머리카락이 불길과 같이 흔들렸다.
그 아이는 세르의 첫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세르는 누군가에게 흥미를 느꼈고, 욕정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오랜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춘기 소년의 치기어린 감정이라 치부하기엔, 첫경험이 주는 맛은 짜릿했다.
그러나 그 사건이후로 세르는 그 아이를 볼 수 없었고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뒤에 이곳으로 온 것이다.
세르의 방은 그 아이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 아이가 좋아했던 향, 자주하고 다니던 목걸이, 언젠가 수줍게 내밀던 귀여운 인형....
똑같은 것을 살 수 없다면 주문제작을 해서라도 그는 어린시절의 우상을 간직하려 애썼다.
그 아이가 성장한 모습을 상상하며 남몰래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무의식중에도 그를 따라하려 애쓰며, 세르는 그렇게 완성되지못한 첫경험을 갈망했다.
II.
i.
"오늘 공연도 정말 멋졌어! 역시 자네를 극단에 데려온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일 같네."
"무슈 버밀리온! 너무 수고하셨어요! 저, 지금 다른 배우들과 근처 식당에 가기로 했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가지 않으시겠어요?"
베르 버밀리온은 정중하게 웃으며 여자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며, 극단주의 칭찬에 대꾸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오갈 데 없는 저에게 이런 과분한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베르는 오늘도 들어온 파란 장미 꽃다발을 대기실 탁자에 올려두었다. 이 도시에 오고 얼마지나지 않아 베르의 연극이 끝나면 항상 꽃다발이 도착하고 있었다. 꽃다발에는 카드는 커녕 종이 한장 꽂혀있지 않아 그는 그저 자신의 열렬한 팬이 보낸거겠거니 추측만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솔레일 극단의 소속 배우로, 어느날 혜성처럼 나타나 단기간에 극단의 간판스타가 된 남자였다. 잘생긴 외모, 탄탄한 연기력, 모난 구석없는 성격은 솔레일 극단을 인기 극단의 배열에 올려두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기구한 인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며 수군댔지만 그마저도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평화의 시대에는 예술이란 이름아래 모든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그의 불행도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ㅡ
"M, 나왔어. 미안해, 극단 일이 좀 늦어졌어.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왔는데, 봐주면 안될까?"
"걱정하지마, 나도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았는걸?
그것보다는 오히려 피곤할텐데 오늘 나를 만나러 와줘서 고맙지."
만인의 연인으로 공공연히 알려져있던 버밀리온에게는 약혼녀가 있었다. 그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으나, 파파라치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의 연인을 끔찍이도 아끼는것이 지나가던 아이도 알 정도라,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여인들도 대부분 포기한 상태였다.
베르가 M을 만났던 시기는 2년전 극단이 공연을 위해 독일에 머물던 때였다. 시내에서 그들이 데이트를 하는것을 목격당한 이후 호사가들은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M이 지적장애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든것이 완벽한 베르 버밀리온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여자를 만나냐는 의견이 반, 그마저도 로맨틱하게 느껴진다는 의견 반으로 나뉘었다.
호사가들이 무엇이라 떠들든, 그들은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 베르가 프러포즈를 했을때, M은 뛸듯이 기뻐했고 그녀의 부모님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렇게 그들은 다가올 결혼을 그리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ii.
"펜팔?"
"그래, 요즘 파리에서 유행한다는 거 말이야! 일단 서비스를 신청하고 편지를 우체국으로 보내주면, 우체국에서 무작위로 파트너를 짝지어준다고 하더군! 어때, 재밌어보이지 않아?"
"난 글쎄, 일단 모르는 사람에게 내 편지가 간다니...."
"에이, 그렇지 말고 우선 해봐! 혹시 아나? 마음이 맞는 여ㅇ....아니지, 친구라도 만날수 있을지 누가 아나? 아, 말실수 좀 했다고 사람을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보나? 자네에겐 M밖에 없다는거, 잘 알고 있다니까!"
일이 끝난 그날 오후, 베르는 동료의 재촉에 못 이겨 우체국으로 향했다. 수신인이 정해지지 않은 평범한 편지 한통도 손에 든 채였다.
우체국에서 연락이 온건 일주일 뒤였다. 펜팔상대가 정해졌다는 말과 함께 베르는 깔끔한 편지봉투하나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만나서 반갑다는 상투적인 인사와 자신을 C.C라 불러달라는 간단한 요청이 들어있었다. 베르의 펜팔상대는 얼핏보면 여자같기도 했으나 남자같기도 했다.
처음에 베르는 이런것이 왜 인기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편지를 주고받을수록 그 심정이 이해가 될것 같기도 했다.
C.C는 놀랍도록 베르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즐겨듣는 음악, 즐겨하는 향수, 술, 음식...
또한 그는 말솜씨도 꽤 있는편이어서 베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마치 어린시절처럼.
베르는 C.C와 곧 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들은 서로를 V.V, C.C라 부르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베르가 C.C를 편하게 여긴 이유는 또 있었다. C.C는 절대 개인사를 묻지않았고, 실제로 만나자는 요청도 먼저 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 점이 베르에게 호감을 샀고, 점차 그 둘은 속얘기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베르에게는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것이 퍽 편했기 때문이다.
ㅡ
...
..
그럼 이만 줄일게, 너와 편지를 주고받는게 요즘 내 생활의 낙인거 같아.
답장 기다릴게!
P.S. 저번에 네가 추천해 줬던 포푸리, 잘 쓰고 있어!
사랑을 담아, C.C가
펜팔을 주고받은 지도 벌써 한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극단일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모든것이 이상하리만치 순조로웠다. M이 사흘 전 편지를 보낸것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없다는게 마음에 걸렸으나, 바빠서 답장을 늦어질 것이라고 베르는 애써 마음을 다 잡았다.
iii.
의아함을 느낀 베르가 M의 집에 갔을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방문은 열려있었고, 몸싸움의 흔적은 없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베르에게 경고음을 날리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집 가족이 여자를 데리고 간것같다는 말을 하여 그는 수소문 끝에 여자의 부모님에게 찾아갔다.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하네...그 우리 딸이 심한 전염병에 걸려서 말이야....."
"아니, M은 저번에 봤을때만 해도 멀쩡해보였는데요. 편지 한 통 보낼 시간도 없었습니까?"
"의,의사가 전염성이 강하다고 해서, 우리도 어디 지방으로 요양을 보낼 수밖에 없었어. M이 좀 괜찮아지면, 그때 연락을 따로 할게."
베르는 그 외에도 더 따지고 싶은 의문점들이 많았으나, 부부의 재촉에 못이겨 현관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를 수상히 여겨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다음날 부부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ㅡ
베르가 로보토미 시술이라는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일주일 후였다. 베르에게 이야기를 해준것은 극단의 또 다른 동료배우로, 입이 가볍고 술집을 자주 드나들며 떠들기를 좋아하는 호사가였으나 그만큼 주워듣는 정보도 많았다.
"사람의 뇌를 잘라낸다고?"
"야, 누가 들으면 아주 야만적인 시술인 줄 알겠네. 그냥 폭력성이 내재된 부분만 조금 잘라낸다고 하던데. 아직 개발된지 얼마 안되어서 뒤에서만 알음알음 퍼져있다는데,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안다, 이말이야."
"그래도 잘못되면 어떡해? 그런 시술은 들어본 적 없어. 그걸 받는 사람이 있긴 해?"
"의외로 수요가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 수술로 효과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던데? 정신질환을 고치는 방법이라고 소문이 자자해."
사람의 뇌를 건드린다니. 그건 의학에는 문외한인 베르가 생각해도 위험해 보였다. 동료는 자신이 그 시술을 개발한 양 자랑스럽게 떠들어 댔으나, 베르는 그런 그의 소리를 들으며 들고있던 잔을 돌렸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도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특출났었다. 그의 생애를 비추어볼때, 그것은 생존본능에 가까운 것이었고 십중팔구는 들어맞았다.
아마 그 아이를 처음 보았을때의 심장의 떨림도 그 이유였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베르에게는 그 로보토미 시술이라는것이 연인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M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나,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었고 베르는 그런 M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기에 그것에 대해 별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가령 그녀의 부모님이라던가...혹은 그녀 자신 마저도..
ㅡ
..
친애하는 V.V에게
잘 지내? 별일 없는거지?
한동안 답장이 없어서 걱정했어. 무슨 큰일이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기를 바래. 답장을 못한다고 너무 미안해하지는 마, 다 이해하니까.
이럴때는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게 아쉽네. 안다면 직접만나서 위로해줄 수 있을텐데.
..
베르는 읽고있던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가하게 편지나 쓰기에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갑작스러운 연인과 그 부모의 실종, 로보토미 시술...정신질환?
무언가가 연결될 듯 말듯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의 손에는 파이프가 들려있었고 책상에는 어딘가의 주소가 적혀있는 쪽지가 놓여있었다. 로보토미 시술을 소개해준 동료가 준 쪽지였다. 그는 그런 시술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으나 가서 정보를 얻을 요량으로 받아온 것이었다.
그는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모자를 눌러쓰며 길을 나섰다. 극단에는 친척일로 당분간 고향에 내려간다고 말해놓은 상태였다. 극단주는 매우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나, 마지못해 허락해주었다.
ㅡ
"여긴가..?"
베르가 도착한 곳은 어느 외진 병원이었다. 도심과 떨어져 있어 이곳까지 사람이 올까, 생각이 들면서도 평범한 시술을 하는 곳은 아니기에 이런 외진 곳에 위치한것도 납득이 갔다.
"계십니까?"
그는 아까부터 미세하게 울리는 심작박동을 애써 무시하며 문을 열었다. 카운터의 직원이 용건을 물어왔다. 베르가 로보토미 시술에 대해 상담을 받으려 왔다고 하자 직원이 반색하며 말했다.
"로보토미 시술 말씀이시군요! 저희 병원의 자랑이예요. 이 시술을 받으면 그 어떤 정신질환도 말끔히 낫는답니다. 아, 자세한건 선생님께 들으시는게 낫겠군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직원은 그를 3층의 한 집무실 앞으로 데려가 이곳에서 기다리면 담당의사가 곧 올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베르는 의자에 앉아 아까부터 느껴지는 심장박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마치 그때처럼,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는 경고였을까?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는 뒤를 돌아 고개를 들어 의사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복도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한 사람의 분위기는 쉬이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의 입술이 살짝 올라간것 같기도 했다. 남자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위험하게 흔들렸다.
"보고싶었어, 베르."
베르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그를 마주보며 웃었다.
나의 우상이자 내 삶은 망쳐놓은, 그 악마를.
III.
i.
"이제부터 너희랑 같이 지내게 될 베르라는 친구란다. 모두들 사이좋게 지내렴. 아, 세르는 베르에게 보육원 시설 좀 소개시켜줄래?"
누군가가 말했다.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고.
"나는 세르라고 해. 이 보육원에서 제일 맏형이지. 나이도 비슷해보이는데, 우리 서로 말 편하게 할까?"
부모님은 아버지의 잦은 도박으로 자주 싸우셨다. 항상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큰소리가 났고, 그럴때면 나는 내방에 틀어박혀 소설에 몰두했다. 소설 속 세계는 나에게 소중한 안식처였다.
나도 그런 세계의 주인공이 되고싶었고,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게 배우라는 꿈을 가지게 해준 동기였다.
"아,나,나는...베르야..아까 들었겠지만.."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물으려 했으나 그는 연신 술을 마시며 아내의 욕을 하기 바빴고 며칠지나지 않아 그도 집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걸 깨달았을때, 의외로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주변이웃의 도움으로 도와줄 시설을 찾다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14살의 일이었다.
ㅡ
세르는 정말 똑똑했다. 그는 산수에 능했고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나보다 더 의젓하고 멋있었다. 자연스레 나는 그를 형처럼 따랐고 그도 나를 좋아했다. 우리는 그렇게 단짝처럼 지냈다. 나는 세르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에게는 어딘가 숨길 수 없는 기품이 있었고, 바다같은 푸른 눈동자는 보고있기만 해도 빠져드는 것같았다. 그는 확실히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ㅡ
"...그게 정말이예요?"
"그래! 왜 저런 아이가 번번히 파양당해서 돌아왔겠어. 그 중에는 죽은 부부도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래도 저는 그 아이, 착해보이던걸요. 친구들하고도 잘 지내고."
"그것도 다 꾸며낸 모습일지도 몰라. 난 가끔 걔가 좀 쎄한 구석이 있더라고.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나보지."
"..좀 불쌍하네요, 그 아이. 걔도 원한 일이 아니었을텐데."
"뭐, 우리는 여기서 일하면서 돈만 받으면 그만이지."
원장실에서 새어나오는 말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그들이 세르에 대해 얘기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당장이라도 들어가 세르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며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원장실 근처에 있다는것을 밝히면 혼날게 뻔했기 때문에 결국 뒤를 돌아 세르에게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베르, 무슨 일이야? 넘어지겠어. 천천히 와."
"...세르, 나는 네편이야."
"어휴, 또 안좋은 소리라도 들은거야? 괜찮아,괜찮아."
그는 자신의 품에 안긴 나를 토닥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커서, 분명 내가 그를 안아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에게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원장실에서 들은 대화가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그가 듣고 슬퍼할까 속으로만 간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곁에 평생 남아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서로 안고있었다.
ㅡ
"그래서, 이 병원까지 찾아온 이유가 뭘까? 내가...보고싶어서 찾아온건 아닐테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너...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오, 베르, 아직도 나한테 화난거야? 그건 다 너를 위한 일이었는걸. 아, 내가 어떻게 의사가 됐냐는 질문이었으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였으니까?"
"...그래, 이미 그 일을 지금 파헤쳐봤자 소용없겠지. 용의주도한 네가 가만히 뒀을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것보다는, 상담받고 싶은게 있어서."
베르는 그와 이야기를 하며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올라왔으나 그의 연인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내 지인중에 정ㅅ,"
"쉬, 베르. 그전에 안부부터 묻는게 예의인거 몰라? 나는..그 날 네가 사라진 이후로 너를 찾아다녔는데. 네가 너무 보고싶어서, 그 웃음이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더라고. 네가 어떻게 컸을까 상상하면서..잠도 많이 설쳤거든. 아, 내가 준 꽃다발은 잘 받았나?"
"....꽃다발?"
"역시 너는 큰 무대가 어울려. 어렸을때부터 알았지. 네가 연기를 할 때의 그 미소,그 눈빛..눈을 뗄수가 없었어, 손에 쥐고 나만 보고 싶을 정도로."
"너..내 공연을 보러 온 적이 있었어? 그 꽃다발은, 네가 보낸거야?"
"뭐, 나름 로맨틱하고 좋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세르는 정말로 옛 연인을 대하는 것 같아서, 베르는 오랜만에 온몸에 한기가 도는 기분을 느꼈다.
"..언제부터야? 대답해."
"이제 일할 시간이야. 내가 아무리 좋아도 공과사는 구분하는게 어때? 물론 나는 근무시간에 남몰래 하는것도..꽤 좋아하는데."
그는 아까부터 헛도는 대화에 두통을 느꼈다. 게다가 세르는 어딘가 위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이 미친 병원에서 나가자마자 극단에 사표를 내고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문을 꺼냈다.
"..사실 내 지인중에 그 정신질환을 치료해준다는 시술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있어. 그래서 상담차로 온거야."
"흐음, 그런데 왜 본인이 안오고 네가 왔을까? 설마 네가 받고싶어서 오지는 않았을텐데."
"..그, 좀 멀리에 살아서."
"그새 아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나봐. 질투나게."
"10년이면, 많은 것들이 변할때지. 당장 너와 나도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잖아."
베르는 세르와 말을 섞을수록 점점 자신이 말려드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로보토미 시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기위해서는 자리를 지키는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세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베르를 바라보더니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 베르, 그게 묻고 싶은게 아니잖아. 네가 묻고 싶은건...너의 그 사랑스러운 연인이 어디있는지 아냐?"
베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 느낌이 들었고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당장 다가가 세르의 멱살을 잡았다.
"너,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오랜만에 만났더니 더 저돌적이다. 나 목졸리면서 하는 것도 좋아하는거 어떻게 알았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이 빌어먹을 악마새끼야. M을 어떻게 했냐고!"
"음, 그건 쉽게 알려주면 재미가 없는데. 아니면...날 만족시키면 알려줄 수도 있고."
세르는 베르의 귓가에 속삭이며 베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마치 뱀이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감각에 베르는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너지? 네가 그 애한테 로보토미인가 뭔가 하는 시술을 강제로 시켜서 M을 해코지 한거야, M이 어딨는지, 좋은 말로 할때 말해!"
"진정해, 자기야. 난 내 일을 한 기억밖에 없는데?
뭐, 그렇게 알고 싶다면, 게임을 하자. 이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면, 날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그러나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는...널 내 마음대로 할꺼야."
"이 미친..."
"그래, 이제야 나를 제대로 봐주는구나! 그 눈, 너무 사랑스럽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네가 악마 같은 애가 아닐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악마로 태어난 애야."
세르는 오히려 그 말에 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었다.
"하! 그래, 그리고 그 악마는 너에게 굶주리다 못해 미쳐있는 상태지."
그는 베르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더 있을거면...상관은 없는데. 이 다음부터는 청소년 관람불가라서. 어때? 난 너를 본 것 만으로도....이렇게 너를 갈망하는데.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한번 대 줄 생각은 없어?"
계속되는 세르의 희롱에, 베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는 베르가 어린시절에 알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의 욕망만을 우선시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베르에게 집착했다. 그때 베르는 자신을 아껴서 그런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연인간의 소유욕 내지는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그것에 가까웠다. 다른아이들과의 소통도 자신을 통해서만 할 수 있도록 통제하며 그는 베르를 서서히 길들여갔다.
ㅡ
"세르, 어딨어? 세르-"
보육원 친구들과 다 같이 모이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는 세르를 찾아나섰다. 점심시간에도 세르가 내려오지않아 그의 방에도 가보고 선생님께도 물어봤지만, 아마 아픈 것 같다는 두루뭉술한 대답뿐이었다.
바스락-
그때 후원에서 무언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홀린듯이 소리의 근원지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그러자 그곳에는 익숙한 뒷모습이 서 있었다.
"여ㄱ.."
반갑게 말을 걸려던 나는 왠지 달라진 분위기에 뒷말을 삼켰다. 축축해진 손을 괜스레 말아쥐며 조심스럽게 소년의 뒤로 다가갔다. 그러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검은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고양이의 사체였다.
소년은 그것이 신기한지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그림이 그려진 수첩이었는데, 그 페이지에는 그린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고양이 사체 그림이 있었다.
눈 앞의 소년은 내가 지극히 잘 아는 인물이었으나 어쩐지 말을 쉬이 걸기가 망설여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을 무렵 소년이 갑자기 몸을 돌려 내 쪽을 응시했다.
"뭐야, 베르, 무슨 일 있어?"
"아..그, 선생님이 너 아픈거 같다고...밥 먹으러 내려오지도 않았으니까..."
"나 걱정해서 온 거야? 섬세해~ 그냥 할 일이 좀 있었거든,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우리 가서 다른 애들이랑 놀자!"
고개를 돌린 소년과 순간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마치 빛이 사라져버린 듯한 그 눈동자에서는 무기질적인 무언가만이 부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내가 아는 예의 그 소년으로 돌아와 살갑게 말을 붙여오는 것이, 나로서는 퍽 안도감이 든 것이다. 직전에 본 것은 모두 나의 착각이라고 믿었다.
그는 그저 그 사체를 지나가다 발견했을 뿐이고, 그것이 신기해서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고, 저 불쌍한 고양이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고 말이다.
ㅡ
"베르, 지금부터 내 말 잘들어. 이제부터는 우리밖에 믿을 수 없어."
그 날 저녁, 세르는 보육원 뒷뜰에서 나를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보여,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걸고있던 목걸이를 매만졌다.
"한 달 전에 새로 오신 의사선생님 있지? 그 사람, 뭔가 좀 이상한거 같아. 그 사람의 주사를 맞은 아이들 모두, 아프다고 하기 시작했단 말이야."
"지,진짜? 그런데 의사선생님은 착한 것 같던데.."
나는 용기내어 그의 말에 반박했지만 세르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그저께 K를 본 적 있어? 그 애도, 의사선생님 방에 갔다온 뒤로 안 보이잖아. 생각해보면 원장실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있잖아..."
세르는 잠시 뜸을 들이며 주변을 살폈다. 나는 직감으로 그 다음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걸 알았다.
"이 보육원, 입양이라는 이름 아래로 아이들을 팔아치운다는 얘기가 있어."
"뭐? 거짓말 치지마..선생님들은 다 상냥하신데..식사도 잘 나오고..아픈 곳도 봐주시고.."
"야, 어느 누가 팔아치울 상품이 하자가 있기를 원하겠어? 다 비싸게 보내려 하는거지. 사실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건데, 나에게도 입양갈 뻔한 순간이 있었거든. 그런데 낌새가 이상해서 도망쳐 나온거야. 못 믿겠으면 나중에 원장실에서 서류나 찾아보든지."
그의 말은 갑작스러웠지만 그의 진지한 표정이 신빙성을 더해주는 듯 했다. 게다가 이전에 원장실 앞에서 들은 이야기도 마음에 걸려서 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방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ㅡ
그 다음날부터, 세르의 말을 듣고 보니 잘 지내던 보육원의 모든 것이 꺼림칙해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즐겨먹던 수프도, 항상 마주치는 원장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도. 그러고보면 선생님들은 꼭 식사후에 낮잠시간을 가지게 하셨는데, 아이들이 자고 있는 그 시간에는 선생님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모든 아이들이 낮잠에 든 시간, 나는 방을 몰래 빠져나와 원장실로 향했다. 숨을 죽이고 발소리가 안나게 걷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장실의 문은 살짝 열려있었고 역시나 문틈 사이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긴 어때요?"
"아, 거긴..를 생각하면 부족한 것 같은데요."
"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말씀하신.."
선생님들은 무언가를 고르는 듯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원장실 옆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발견해 그것을 읽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아이들을 얼마에, 언제 이 보육원에 입양보냈는지에 대한 문서였다. 그러나 종이에 적힌 액수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일부 아이들의 얼굴에는 엑스표시가 쓰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요새 보이지 않았던 K의 얼굴도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곧 세르가 말한것이 진짜면 어떡하지라는 패닉감이 들었다. 종이에는 마치 이게 꿈이 아니라는 듯 원장의 것으로 보이는 서명도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원장실 인근에서 벗어났고, 그날 밤은 내 룸메이트가 걱정할 정도로 잠에 들 수 없었다. 오만가지 상상들이 나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K가 인근 강변에서 죽은 채로 발견이 된것은 사흘 뒤의 일이었다.
ii.
베르는 도망치듯이 집무실에서 나와 서둘러 병원문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익다못해 터질 것 같았다. 저 미친 사이코패스가 드디어 악마, 그것도 성욕의 악마와 계약한 것이라 읆조리며, 그는 병원을 빠져나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가 진정이 된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습관적으로 걸고있던 목걸이를 만지며, 그는 차분하게 생각하려 애썼다. 베르에게는 연인의 행방이라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고, 그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세르와 한 내기가 떠올랐다.
그 미치광이가 M에게 어떤 짓을 한건 기정사실 이었다. 더 나아간다면 그녀의 부모에게도 무언가 협박을 하지 않았을까.
ㅡ
"흠, 세르 세루리안? 외과의사라고? 근데 그 사람은 왜."
베르는 그에게 자신의 상황을 말해도 될 지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군은 그래도 한명 정도는 있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J는 처음에는 믿기지않아 하다가, 곧 베르에게 위로를 전하며 꼭 도와주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베르가 배우생활을 시작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알게 된 친구로, 아직까지도 가깝게 지내는 오랜 친구였다.
다음으로 그는, 공공도서관에 찾아갔다. 무엇인가 도움이 될 만한것이라도 있을까 싶어 찾아온 것이었다. 도서관에는 오래된 신문을 모아둔 공간이 있었고 베르는 홀린듯이 다가가 신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눈에 세르 세루리안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와 그는 재빨리 그 신문을 펼쳤다.
정신질환, 이제 인류가 넘을 수 있는 벽 되나....
오늘 오전(XX.XX)에 열린 의학 컨퍼런스에서 최연소 외과의사로 화제를 모았던 세르 세루리안(29)이 그동안 미지의 영역이라 불렸던 정신질환을 치료할 방법을 발표해 또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세르 세루리안은 5년전 이곳 파리로 이주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전의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일각에서는 그가 무언가 뒤에서 손을 쓴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지만, 그가 의학계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는것은 부정할 수 없다.
(중략)
닥터 세루리안이 고안해 낸 전전두엽 절개술, 일명 로보토미 시술은 정신질환자들의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는 전두엽 일부만을 긁어내 제거하는 방식이다.
(중략)
신문에서는 이를 끝으로 세르 세루리안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의학 저널에도 특별히 추가적인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고안 된 지 얼마안된 수술이어서 그런 듯 했다. 아무래도 J의 연락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ㅡ
지난 일주일 내내, 베르는 악몽에 시달렸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는 기분에 예전처럼 활발하게 지낼 수도 없었고, 심신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향도 피워봤지만 그때뿐이었다. 베르가 그 일에 대해 알아보려 할수록 불안감은 더 심해졌다. 그 악마가 베르에게 무슨 저주를 건 것일까?
"또 오세요~!"
베르는 오랜만에 집앞으로 나가 바게트와 햄, 그리고 치즈를 샀다. 집에만 있지말고 가까운 데라도 나가는 것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힘들 때일수록 오히려 자신을 돌볼 것. 베르가 힘들어 할때마다 M이 항상 해준 말이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베르는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어 몸을 가볍게 떨었다. 마치 그 어린시절 고양이 사체를 무감각하게 응시하는 세르를 목격한 것 처럼, 그는 굳은 몸을 천천히 움직이려 애썼다. 그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혹시 만에 하나가 있는 법이었다.
베르가 고개를 돌려 세르를 찾는 그 순간, 신호가 바뀌는 소리가 들리며 그는 곧 군중에 휩쓸렸다. 지나쳐가는 사람들의 군집속에서, 그는 얼핏 시리게 타오르는 눈을 본 것도 같았다.
쉬이-
베르는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감각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그를 무심하게 스쳐지나가는 사람들과 그를 이상한 듯 보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다급히 자신이 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다. 익숙한 골목에 들어서자 익숙한 공중전화가 보였다. 그는 가시지않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J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전부터 베르를 지배하고 있던 이 불안은 아는 사람의 목소리라도 들어야 나아질 것같았다.
"어, 무슨 일이야?"
"아, 아니, 그냥...그보다 내가 전에 말한건 어떻게 됐나 하고."
"일주일 전에 말해놓고서는 무슨. 너는 내가 무슨 자판기라도 되는 줄 아냐."
"그래...아무래ㄷ,"
"그러나 내가 누구냐, 00사 에이스 아니냐, 또 이 형님이 빠삭하게 알아왔지! 일단 네가 말한 그 세르 라는 외과의사 말인데, 이야, 이 사람 꽤 머리가 좋나봐? 최단기간에 의사로 승진. 지금은 외곽의 00병원에서 일하고 있네."
"..그게 다야?"
"날 뭘로보고, 여기까지는 세살배기 아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사실 그의 행보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꽤 많더라고. 어떻게 그렇게 어린나이에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과거행적이 하나도 없을까? 마치 지워진것처럼.
단순한 불특정다수의 질투로 말미암은 소문이라고 하기에는, 글쎄, 좀 수상한 점이 있어서.
너, 로보토미가 사람의 뇌 일부를 잘라내는 시술이라 들어봤어? 전두엽이었지, 아마. 그런데 소문으로는 그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인형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대. 더 중요한건 그 시술을 받는 도중 혹은 그 이후에 석연치 않게 죽은 사람들도 많다는 거야. 유가족에게 들은 증언이니 확실해. 그리고 M말인데..
J는 누군가에게 쫒기고 있는 것마냥 말을 빠르게 내뱉었는데, 그러던 그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갑작스레 말을 멈추었다. 그는 무엇이 두려운지 망설이고 있었다. 베르는 얼추 예상이 갔지만 애써 무시하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수화기의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말해."
"...."
"말하라고."
"..네 추측이 맞았어. 그녀의 부모님과 세르가 만난 행적이 포착됐어. 아마 그들의 동의 아래 세르는 M의 수술을 집ㄷ,"
그 말을 끝으로 짧은 비명과 함께 말소리가 끊겼다. 수화기 너머는 지나치게 고요해서, 그는 밭은 숨을 내쉬었다. 손발이 차가워지며 그는 그 자리에서 수화기를 든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만날래?"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낮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목소리를.
"..너 어디야."
"글쎄,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하필 왜 그 둘이야, 둘은 살아있는거야? 그것만 묻자."
"그걸 알려주면 게임이 아닌데...날 보러오면 알려줄게,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상대는 그것으로 볼 일은 끝인 듯 전화를 끊었다.
베르는 신호가 끊긴 수화기를 하염없이 붙들고 있었다. 머리가 오히려 차갑게 식으며 찾으러 가야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에게서 대답을 이끌어 내야했다.
그놈은 처음부터 자신이 M의 행방을 알고 있다듯이 말했고, 제일 친한 친구인 J에게도 해를 입혔다. 둘의 공통점이라고는 그저 자신과 가까운 사이라는 점 밖에 없었다.
아니면 J가 말할 무언가가 두려워서였을까.
iii.
어둑한 밤, 모든 것이 잠든 시간.
베르는 세르와 처음 마주했던 그 병원으로 향했다. 창문에는 모든 불이 꺼져 있었으나 그는 저 위층에 자신이 찾고 있던 사람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병원문이 닫혀있을거라 생각했으나, 막상 다가가니 문은 쉽게 열렸다.
아무도 없는 병원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게시판에는 여러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었는데 개중에는 베르가 속한 솔레일 극단의 공연 홍보지도 있었다. 그는 이전의 기억을 되살려 집무실이 있는 3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며 그는 코트안의 권총을 무심코 만지작 거렸다. 베르는 집무실의 문을 열었으나, 예상과 달리 아무도 없었다.
"뭐...,"
그때 누군가 뒤에서 베르의 코와 입에 천을 갖다대며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ㅡ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베르는 서둘러 제 눈가에 손을 가져가려 했으나, 손이 묶여있어 그럴 수 없었다. 또한 발도 의자에 묶여있었다.
"깼어? 그거 좀 센 약물이라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아, 그래도 해가 되는건 아니야. 내가 널 어떻게 해치겠어."
그때 발소리가 들리더니 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르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짓씹듯 말했다.
"애들 어딨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섭섭하게...그래, 뭐. 바로 본론으로 들어는거, 나쁘지 않지. 나는 너의 그런 부분도 좋아하니까."
"...어딨어."
"아아, 그 여자? 불쌍하기도 하지. 너에게 버려질까 전전긍긍하다가 제 발로 수술대에 오르는 꼴이라니! 자신의 병이 너에게 흠이 갈까 행여 날 내치진 않을까 똥마려운 개새끼처럼 굴길래 나는 그저 그 여자의 등을 살짝 떠밀어줬을 뿐이야."
"....지랄 마,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어."
"푸흐, 진짜? 진짜로? 그 여자가 짜증났던 적이 맹세코 한번도 없었단 말이야? 오, 불쌍한 베르...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것 같던데. 그 여자의 가족도 그렇지 않았는데 감히 네가 장담할 수 있을까?
...뭐, 진실은 이제 아무도 모르겠네. 혹시 알아? 그 여자가 수술을 받다가 죽어버렸을지."
베르는 세르의 말을 듣다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줄곧 미뤄뒀던 가정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무언가가 눈에서 흘러내렸다.
"또 너의 그 알량한 친구는 어떻고. 꼴에 기자랍시고 여기저기 캐고 다니는 꼴이 참...우스워, 밟아버리고 싶게.
...너 지금 그 얼굴 너무 예쁘다...계속 울리고 싶을 정도로.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내,내가 뭐든지 할게. 너는 나한테 바라는게 있잖아, 내가 할게. 그러니 제발...살았다고 말해줘.."
일순 정적이 감돌더니 이내 웃음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하하! 이정도로 쉬워질 줄은 몰랐는데..뭐, 그럼 내 손의 병에 든 약을 마시면 알려줄게. 따지고 보면 확률은 반반이니까 나름 공정하지 않겠어? 그리고 너도...맨정신이면 좀 힘들 것 같아서, 나름의 배려야."
베르는 무엇에 대한 배려인지 묻고 싶었으나 세르가 이내 제 턱을 잡고 약을 들이부어서 그러지 못했다.
3-3 완전판은 성인물입니다...
읽고싶은 분은 저에게 뎸을 주세요
저는..미자에게 음란물을 유포하고 싶지 않습니다...
IV.
베르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제 답지않게 과음을 해서 그런듯했다. 그는 탁자위에 놓인 물을 들이마셨다.
M에 이어 그의 절친한 친구, J에게까지 세르의 마수가 뻗친 걸 알았을 때, 그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M이 수술을 받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며 사흘 밤낮을 집에서 절망적인 기분으로 보냈다. 그의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와있었고 볼은 식사를 거른 탓인지 움푹하게 패여있었다.
그러나 오늘 저녁, 베르는 오히려 상쾌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간단한 식사를 했다. M이 준 목걸이를 걸고 M과 찍은 사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는 서랍 깊숙이 숨겨놓은 권총을 챙겨 현관을 나섰다.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오늘은 기필코 그 새끼를 죽이리라고.
그는 차를 몰아 세르를 처음 만났던 외진 병원으로 향했다. 불이 꺼진 병원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문은 열려있었다. 베르는 망설임없이 병원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복도에는 베르의 구두굽소리만이 울렸다. 그는 오랜 악연을 끝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앞에 보이는 문을 열면 되는 간단한 일임에도 그는 무엇이 두려운지 손을 가볍게 떨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베르."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세르였다. 그는 정말로 반가운 사람을 맞이하는듯 눈까지 접어가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베르는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딴건 집어치워, 빌어먹을 새끼야. 오늘은 너랑 끝을 보러 온거야."
"그 두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예전의 K처럼, 보육원 원장처럼, 네가 죽이고 입싹 닫았겠지. 미친 새끼."
"하하! 그래, 맞아. 그 사람들이 너에게 붙어 있는게 마음에 안들었어. 너는 나만 바라봐야 하는데."
"...하나만 물어보자. 그때도, 거짓말로 날 조종하고, 서류를 날조하고,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원하는게 겨우 그거였어? 보육원을 폭파하면서까지!"
베르는 분노에 차 총구를 세르에게 들이밀었다. 그러나 사람에게 총을 겨눈 경험이 없어서인지 총을 든 손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는 오히려 베르에게 다가와 총구를 잡으며 말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베르. 그 일은 네가 원한 일이었어. 네가 먼저 그런 나쁜 사람들, 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건..네 거짓말에 속았을 때의 일이야. 나로 네 행동을 변명하지마."
"흐음, 그래, 뭐. 덕분에 나도 재밌었으니까. 하지만 널 위하는 내 마음은 진심이었어. 그 사건 이후로 날 피해서 도망가버린건 서운했지만."
세르는 그 말을 하며 총구를 자기 가슴쪽으로 당겼다. 베르는 놀라서 총을 놓았으나 세르가 그의 손을 잡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거 알아, 베르? 그 M이라는 여자, 사실 네 돈을 보고 만난거였어. 사람이 죽을 때가 돼면..매우 솔직해지더라고. 너와 함께하는 매순간 순간마다, 자신이 너와 결혼하면 들어올 재산을 생각하면서, 그 여자는 너에게 사랑을 속삭였겠지.
운명적인 사랑? 오, 불쌍한 베르. 너는 그동안 속고 있는 거였어. 그 여자 부모님에게는 하자있는 딸이 괜찮은 신랑감을 물어 올 줄 몰랐겠지. 뭐, 그 인간들도 피차일반이었어. 그 보육원 때부터 지금까지 너를 진정으로 위하는건, 나 밖에 없어."
베르는 몸을 떨다가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거짓말..하지마, 이제 네 말은 안 믿어. 너는 여기서 죽어야 해."
"글쎄?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돼. 쏘고 싶으면 쏴. 이 놀이도 그만 질렸으니까."
"...."
"뭐야?...하하! 너, 처음이야? 하아, 베르 너는 너무 순진해서 문제야. 더럽히고 싶게. 난 너의 그런 점도 좋아하지만. 설마, 옛날 생각하고 있어?"
"...닥쳐."
"옛날에 우리가 서로 죽고 못 살기는 했지..어때, 베르. 우리 예전처럼 다시 시작하는거야, 그 망할 여자와 이 지긋지긋한 도시는 잊고."
"..너는 마지막까지 거짓말이구나. M이 그랬을리 없는데. 너에게 어떻게 지금 내가 느끼는 절망감을 맛보게 할 수 있을까."
베르는 눈물을 닦으며 핏발 선 눈으로 세르를 노려보았다. 세르는 자신의 가슴에 총이 겨눠졌음에도 오히려 즐거워졌다. 그 모습을 보며, 번뜩 베르는 세르에게 복수할 계획이 생각났다. 이제 그에게는 아무것도 필요없었고, 또 아무것도 없었다.
"너...다,당장 그거 내려놔. 아니, 내려놔줘요, 형. 내가 잘,잘못했어."
"하, 그래. 이거였어."
베르는 총머리를 자신의 머리로 돌리며 세르와의 거리를 천천히 벌렸다. 여유로웠던 세르의 표정은 가면이 벗겨진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난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날 아낀다고? 지랄마. 네가 날 이렇게 만든거야. 나는 네가 끝없이 절망하며 고통스러워 했으면 좋겠어."
"미안해. 형, 그니까 그거 내려놔요, 형. 내가 뭐, 뭐를 하면 돼? 돈? 원하는거 다 들어 줄테니까, 그거 내려놔. 베르 버밀리온. 제발,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곳까지 와서 이짓거리를 하고 있는데!...미안. 화내서 미,미안해. 앞으로는 화 안낼테니까 제발..."
"....."
"...형? 자,잠깐,"
탕-
총소리가 방안을 갈랐다. 남자는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세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가 하염없이 시체를 붙들고 있었다. 남자는 점점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방안에는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웃음소리만이 맴돌고 있었다.
ㅡ
"아유, 버밀리온 선생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뭘요, 다 S가 영특해서 그렇죠. 제가 봤을 때 정말로 연기에 소질이 있어요. 가르치는 보람이 넘치죠."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 베르 버밀리온이라는 청년이 이사왔다. 그는 파리에 있을 적 다섯 손가락안에 든다는 솔레일 극단에서 활동한 배우인데,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하고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그는 현재 마을에서 연기선생님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베르'는 수업을 끝마치고 집으로 들어와 평소처럼 말을 걸었다. 목에 걸고있는 다이아 목걸이가 붉게 빛났다. 거실 한복판에는 큰 유리관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오늘도 보고싶었어, 자기야."
ㅡ
이제 내가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너만이 알겠지. 하지만 나는 이 결정에는 후회는 없어. 내 사랑은 변하지 않고, 우리는 서로니까. 나는 너니까, 나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찾은것 뿐이야.
.....좋은 꿈 꿔, 내 사랑.
-I am You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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