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신] 일리움

2020 고증X


마지막 예언, 트로이의 성문을 부수라. 라오콘은 트로이의 사제였으나, 자신의 숨통이 틀어막히던 순간에는 아테나의 예언이 선연하게 들렸다.

 

내가 가엾습니까? 

 

두터운 뱀의 몸뚱아리는 성인의 손아귀에도 들어가지 않아, 아폴론의 사제는 짠맛이 나는 비늘을 잡아 뜯었다.

 

내가 가엾습니까?

 

목을 젖혀도 축축한 뱀은 기어코 따라붙어 더 힘세게 조였다. 아래서부터 점멸하는 목소리가 말라붙어 나오지 않았다.

 

그래, 가엾다.

 

한숨 쉬듯 연민어린 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손바닥을 비집어 겨우 틈을 벌려낸 라오콘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허겁지겁 주워삼킨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살려주세요 아버지, 살려주세요… 찢어지는 흐느낌이 주위를 가득 채웠다. 짓눌려 비틀린 팔뚝에 혼절한 아들은 고통스러운 신음 하나 없었다. 라오콘은 고개를 버겁게 돌렸다. 태양이시여, 위대한 광명이시여, 트로이는 이렇게 죽습니까? 이어지는 정적에 그는 탄식을 사그라뜨렸다.

 

예언의 능력을 지닌 사제는 직감했다. 트로이는 이렇게 사그라들 것임을. 광명과도 같은 눈으로 사제는 일찍이 알았다. 높이 솟은 목마는 멀리서도 보였기에 그 안에 든 것도 훤히 보였다. 유난히 무거운 목마의 바퀴, 미세하게 울리는 목마의 진동과 배에 그어진 네모난 실금. 사제는 그리스 군이 철수하며 남긴 목마 안에 승리보다 뜨겁게 타오를 화마가 들어있음을 알았다. 명장을 내어주고 치른 값비싼 승리라 모두가 치하하고 슬퍼할 때, 사제는 계시 없는 신전 안에서 홀로 기도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도 트로이를 비호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아들들을 이끌어 기꺼이 소리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트로이의 마지막 예언자였다.

 

그리스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는 기꺼이 죽음을 마시기로 했다. 인간 아닌 신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이 나라를 한탄하면서도 사제는 자신의 끝이 이 나라라 여겼다.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제발 이 목마를 불태우게 해주십시오. 늦은 밤, 불빛 한 줄기 비추지 않은 신전에서 그의 기도가 나지막이 울렸다.

 

허벅지에 파고든 독사의 송곳니가 서늘하다. 라오콘은 방금 전에 끊어진 아들의 비명을 되새기며, 눈을 닫는다.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숨이 멎어가는 것이 백 배 천 배 나았으므로. 그리고 그는 올림포스의 열두 권능을 떠올린다. 그들은 혹여 자신의 외침이 계획을 망칠까 마지막까지 노심초사 할 것이다. 라오콘은 크게 몸을 뒤틀어 하늘을 응시한다. 점점 시야가 흐려진다. 나의 조국 트로이. 사랑하는 나의 일리움이여. 부디 목마를 불태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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