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스터디

3. 말하지 못한 이야기

공미포 2,052

혹독한 일들을 겪고 난 후 솔리다리스의 사람들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여기저기 부서진 함선들을 고치느라 고생 중인 사람도 있는가 하면 재활치료를 하며 회복에 전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소에도 늘 바쁜 상태로 살아오던 단델은 일부 선원들이 꿈결 현상을 겪은 이후로 더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약초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펜러드, 오늘도 수고했어.”

펜러드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단델은 그제야 여유를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듯 지나가는 새하얀 구름과 청명한 하늘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늘 바쁘게 살아서 그런지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갔다.

꿈결 현상으로 선원들이 끔찍한 악몽과 싸우며 자신도 그 악몽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일이 엊그제 같았다. 눈빛부터 말투까지 변해버린 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움에 이를 악물며 버텼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아니, 앞으로도 그런 일은 두 번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해….’

편하게 자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방에 넣어둔 블루 베히모스를 꺼내려고 손을 뻗었으나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델은 피곤함을 느낄 때면 늘 블루 베히모스를 마시며 졸음을 참는 것이 일상이였기에 블루 베히모스가 없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곤 했다. 솔리다리스의 불문율로 곤히 잠든 단델은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질 정도였으니.

“이봐, 너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짧게나마 바람이 느껴지던 찰나 유진이 익숙하게 바람을 타고 단델 앞에 나타났다. 단델은 피곤함에 반쯤 풀린 눈으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멍하니 그를 바라보더니 단델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한쪽 벽에 기대어 풀썩 앉았다.

“넌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당연히 일하다 왔지.”

“농땡이 친 건 아니지?”

“무슨 소리를 그렇게 섭섭하게 해.”

유진은 괜히 단델에게 서운한 척 투덜대며 맞장구치듯 대답했다. 유진과 단델은 틈만 나면 이런 식으로 티격태격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단델의 성격을 모르는 이가 이런 말을 들으면 신경질을 내며 싸울 법도 했지만 유진은 단 한 번도 단델에게 화를 낸 적도, 시비를 건 적도 없었다. 이따금 잔소리를 들으면 귀찮아하긴 해도 단델이 시킨 일은 알아서 척척 잘 해냈다.

“나 참, 피곤해 보여서 걱정되길래 왔는데.”

느긋함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로 유진이 말했다.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늘을 날며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유진을 빤히 바라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하품했다. 기지개를 켜니 몸에 쌓여있던 긴장감이 내려앉는 듯 했다. 유진은 별다른 대꾸도,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여전히 공중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넌 언제 내려올 거야?”

“글쎄…. 딱히 내려갈 생각은 안 했는데.”

유진은 땅에 발을 내디디며 자신을 감싸던 바람을 멈추게 했다. 땅을 밟은 유진은 자연스레 단델의 옆자리에 앉은 채로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이 쏟아질 듯 눈이 반쯤 풀렸었는데 지금은 꾸벅꾸벅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유진은 단델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단델은 이를 의식할 겨를도 없이 밀려드는 졸음에 결국 유진의 어깨에 기대어 스르륵 하고 잠이 들었다.

‘이런, 또 잠들었네….’

평소에도 유진은 단델에게 블루 베히모스를 적당히 마시라는 말로 지나가듯 대답했다. 물론 단델은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자신이 없으면 할 일이 많아진다고 말하며 지나치게 많이 마시곤 했다. 거의 의존하다시피 마시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옆에서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푹 빠지곤 했다. 유진은 옆에 기댄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보다 두 배는 더 얇은 손목을 바라보고 있으니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러게…. 조금 쉬면서 하면 얼마나 좋아.”

유진은 중얼거리듯 말을 하며 허공에 손길을 몇 번 휘저었다. 두 사람 사이로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단델은 기절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 괜히 어깨에 기대어서 잠든 것이 마음에 걸려 익숙하게 단델을 안아 들고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도 그러하듯 침대에 단델을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며 유진은 다시 문밖으로 나오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고는 배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답답했던 마음이 트이는 기분이 들어 눈을 감았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바람의 소리와 갑판에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소리,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수들의 소리를 들으며 자유를 한껏 만끽하기 시작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훨씬 마음도, 생각도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유진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기지개를 켰다.

‘바보 같긴….’

유진은 단델이 잠들어있는 숙소를 향해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던 탓에 시선을 거두질 못한 채 계속 숙소를 바라보았다. 그는 단델이 조금만 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만 쉬어가면서 일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 했다. 다만 그 말을 할 기회도 없었을뿐더러 말을 하더라도 되려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 말을 아껴왔다.

유진은 하늘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평온함을 만끽하고는 아래로 내려와 남은 일들을 마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언젠가는 서로 앉아서 여유를 만끽하며 말할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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