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렌

열대야

+VOID 여름 글 합작

개인서고 by 새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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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D-특히 HO1과 주변 NPC에 대한 본편 내용의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VOID를 다녀오신 후 열람해주세요!

무차님의 끝내주는 글감상은 여기로!


0.

매미 소리가 귀 따갑게 울려댄다. 짙푸른 하늘, 기울어지는 햇빛, 유유히 흘러가는 새하얀 구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왜 굳이 이곳이어야 했던 것일까. 렌은 알 수 없다. 한 번도 그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해 본 적이 없기에.

 

“렌짱, 정말 경찰이 되려고?”

 

그저 알고 있던 것은, 푸른 하늘 아래에서도 선명한 붉은색이 시선을 앗아갔고, 자신을 보며 웃는 그림자 드리운 얼굴이 평소와 같게도 상냥했으며, 숨을 틀어막는 퀴퀴한 무더위의 물비린내 냄새는 곧장 다가올 장마를 가리키고 있었고……그 빌어먹게도 불쾌한 세상 한가운데 던져진 자신의 뺨을 매만지던 손이 평소처럼 부드럽고 상냥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온통 불쾌한 것투성이인 그 세상 한가운데에서 오직 그 손길만이 미적지근하면서도 사랑스러워서.

 

“항상 바랐던 것이니까요.”

 

여름철 무더운 파랑을 싣고 렌은 입을 연다.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다시 의아해했다. 눈앞에 있는 이는 어쩐지 그 대답을 달갑지 않게 느낀다고 문득 짐작했기에.

 

“그래.”

 

그렇구나. 여상함을 담은 목소리.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매미 우는 소리, 여름의 하얀 햇살과 잎사귀를 채 통과하지 못해 드리운 푸른 그림자. 무더운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한차례 흩뜨린다. 여전히 뜻 모를 낯으로 웃던 토오야는 읊조렸다. 사실 그렇게 답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너는 그런 인간이니까.”

 

당혹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뛰는 한 명분의 심장 소리. 렌은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짐작한다. 뜨거운 햇빛, 그 때문인지 눈앞을 어지럽히는 열감. 렌은 짐작한다. 토오야가 저렇듯 이야기하는 이유는, 아마…….

 

“마음에……들지 않으십니까?”

“글쎄.”

 

모호한 대답. 어째서일지에 대한 의문은 거품처럼 녹아 사라진다. 이전부터 토오야는 형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위험한지, 안드로이드와 어떠한 관계를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렌에게 유난히 길게 말해주고는 했으므로. 그의 과거를 알기에 나오는 당연한 걱정이다.

 

“저는…….”

“알고 있어, 렌. 굳이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널 존중하는걸. 하는 가벼운 목소리. 그에 담긴 무거운 감정. 렌은 눈을 깜빡인다. 바다 속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축축한 공기 속에서 둘은 서있었다.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인지,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 자신의 결정을 배려하고 존중하겠노라 이야기하는 토오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그리고 천천히 가까워지는…….

1

경찰학교에 입교한 지도 어느덧 3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벌써 절반이라는 시간이 지나간 시점에서 렌은 간만에 휴일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입교할 때는 흐드러진 벚꽃이 인상적인 봄이었는데, 다시 돌아올 때는 호흡을 틀어막는 무더위라. 새파란 하늘임에도 곧 비가 올 모양인지 특유의 물비린내가 옅게나마 느껴졌다. 7월 초중순. 장마전선이 올라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스치듯 보았더랬다.

 

비 오고 천둥 치며, 번개가 번쩍이는, 비릿한 혈향 난무했던 어느 어두운 날을 떠올린 렌은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그렇게 생각하며 학교 밖으로 나온 렌은 눈을 깜빡인다. 낯익은 인영. 푸른 하늘 아래서도 강렬한 붉은빛이 눈을 사로잡은 탓이다.

“형님?”

“여어, 렌짱~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나 봐? 집에도 안 돌아 오고 말이야.”

 

웃으며 손 흔드는 친근한 이를 보며 렌은 당혹스러워하다가, 곧장 납득했다. 자신을 보기 위해 연차를 쓴 모양이다. 수사 1과이니만큼 분명 바쁘실 텐데. 결론을 그렇게 내리고 뒤늦게 아까 전의 말에 대해 변명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차, 성큼 다가와 손에서 짐을 뺏어가는 청년을 보며 렌은 변명 대신 아,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흘렸다.

 

“저, 제 짐이니 제가 들겠습니다.”

“간만에 돌아왔는데 그냥 즐겨, 네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 형님을 부려 먹겠어?”

“손윗사람을 부려 먹는 건 도리가 아닙니다.”

“…….”

“…….”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어. 멀뚱거리며 렌을 바라보다가 결국 탄식한 토오야가 렌의 어깨를 툭 치고는 어깨동무를 했다.

 

“저번부터 말했지만 말이야, 렌짱~ 다른 사람이 도와준다고 하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거래도? 자, 빨리 빼지 말고 타. 쿠로다 씨는 오늘 바쁘셔서 일찍 못 나오셨거든. 그래도 네가 나오는 날만 기다리셨어. 나라도 먼저 나가서 마중해 달라셔서 나만 일단 나왔지.”

“아…….”

“설마 버스를 타고 가려 했던 건 아니겠지? 오늘 날씨 엄청 더워.”

 

그런 목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쿵, 쿵…….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당사자인 그만큼은 느낄 만큼 확실하게. 느껴지는 온기와 무게감에 렌은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달싹인다. 배운 대로.

 

“……감사합니다.”

“옳지.”

 

그러고선 머리를 헤집는 손길. 아직 학교 바깥으로만 나왔을 뿐이건만 렌은 벌써 도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고 만다. 따가운 여름 햇빛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차를 타면 느껴지는 무더운 공기와는 단절된 듯한 청량한 바람.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있자니 한동안 듣지 못했던 기계음이 울린다.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집으로.”

 

운전석에 앉은 토오야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자동차는 곧장 시동이 걸리더니 자연스럽게 목적지를 향해 굴러갔다. VOID의 등장 이후로 급격하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당연하게 된 일상이다. 심지어 그 사람이 심각한 기계 혐오자라고 하더라도.

턱을 괴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렌은 고개를 돌렸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뭐, 연락은 해도 외출 기간에 나오지도 않는 누구 기다리느라 쿠로다 씨가 걱정했다는 것만 빼면?”

“……죄송합니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나한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쿠로다 씨도 네가 그런 애인 건 알고 있으니 사실 상관 없겠지만~”

 

상당히 예민한 성격이니만큼 렌이 바뀌는 환경에 굉장히 민감했고, 이에 적응하는 것에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다. 적응 도중 며칠을 밖에서 보냈다가는 더 적응하는 게 더 힘들었을 테고. 물론 그 사실을 다들 아주 잘 알았지만…….

 

“그래도 3개월은 좀 너무하지 않아? 뭐, 연락도 안 하고 박혀있던 건 아니니까 그래도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이제라도 나온 걸 보니 적응은 다 됐나 봐. 절반이나 지나서야 적응을 하다니 너도 참……. 그래도 조금은 빨리 나올 줄 알았는데.”

“집과는 환경이 너무 달라서요. 그래도 유익한 것들도 많이 배우고……좋았습니다. 제가 속한 교장에 괜찮은 이들도 많고, 교관님도 합리적이시고요. 물론 사격은 확실히 어려웠지만…….”

“하하! 경찰인데 사격이 어려워도 괜찮아? 나도 물론 검을 쓰지만 사격도 평균 이상은 해야 해.”

“알고 있습니다. 더 노력해야겠죠.”

 

시시콜콜한 이야기. 창 너머로 푸른빛 아래 우뚝 선 콘크리트 건물이 지나간다. 아스팔트 도로가 머금은 열을 뱉어내며 생기는 아지랑이. 일그러지는 도로 위 풍경을 보며 렌은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여름이군요.”

“아무래도 7월이니까. 렌짱도 더위 안 먹게 조심해. 음~ 그러고 보니 다음 주부터 장마라고 뉴스에서 그랬던가. 렌, 비 올 때 괜찮겠어?”

“경찰학교 내에서 그런 걸로 무리를 한 적은 없어 괜찮습니다. 비가 오는 것도……최근에는 별일이 없었고요.”

“그래, 그래. 그렇겠지. 이틀 뒤에 다시 들어가니까……3개월 더 있으면 졸업하고 배속을 받곘네.”

 

운전대를 두드리는 손가락. 툭툭……. 가만히 들리는 소리가 다소 불쾌함을 머금고 있다는 것을 렌은 깨달았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 렌으로서는 토오야가 느끼는 불쾌감의 근원을 짐작할 도리가 없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으니. 렌은 눈치를 보다가 잠시 시선을 굴리며 방금 전의 대화 내용을 복기했다.

 

“……형님,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아.”

 

툭. 운전대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춘다. 토오야는 웃으며 렌을 돌아보았다. 검게 코팅된 창문을 투과하여 들어오는 햇빛은 바깥에서 보는 그것보다 다소 어둡다. 그래서인지, 표정이……. 렌은 눈을 깜빡인다. 아니, 착각인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웃음으로 토오야는 단언했다.

 

“기분 나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그러게요.”

 

어쩐지 제 이야기 중 뭔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시는 것 같았어요. 렌은 그 말을 삼킨다. 토오야는 그 삼킨 말을 짐작했는지 웃었다.

 

“차 탄 김에 오래 가야 하니까 좀 자둬. 수고했잖아.”

 


집 안은 미리 에어컨을 틀어두었던 것인지 한층 사늘했다.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야시로가 에어컨을 켜두고 집을 나설 리 없으니, 자신을 위해 틀어둔 것이 분명하다, 고 생각하며 렌은 짐을 풀었다. 둘러본 방은 3개월 전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늘 청소해 주셨구나. 렌은 작게 웃었다. 겨우 3개월 오지 않았다고 오히려 집이 경찰학교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던 방금 전까지가 거짓말인 것 같았다.

누가 선물해 준 것인지 책상 위에 놓인 난생 처음 보는 책을 훑어보던 때였다. 달칵, 문을 열고 토오야가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렌, 짐 다 풀었으면 씻고 나와. 쿠로다 씨도 곧 도착하신다는데?”

“아, 잠시만요, 저도 요리를 도와드려야…….”

“방금 집 들어왔으면서 무슨. 오늘은 좀 쉬어. ……아, 쿠로다 씨 오셨네.”

 

아까 전 차에서의 미묘했던 느낌이 전부 착각인 것처럼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태도다. 렌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서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발소리를 또한 들었던 탓에. 아니나 다를까 익숙하고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렌, 왔니?”

 

바깥에서 그리 들리는 그립고 반가운 목소리. 렌의 얼굴에 남아있던 의문이 사라지고, 곧장 기쁨이 자리했다. 서둘러 바깥으로 향하는 렌의 뒷모습을 보며 토오야는 가볍게 웃었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그래. 늦어서 미안하구나. 일이 늦어졌어. 올 때 별 일은 없었지?”

“네. 형님이 데리러 와주신 덕에 편하게 왔습니다. 아버지도 오늘 수고하셨어요.”

“렌이 글쎄 이런 날씨에 버스를 타고 오려고 하지 뭐에요~ 폭염주의보까지 내렸는데, 정말 대책 없다니까요? 쿠로다 씨가 말 안해주셨으면 애가 기껏 쉬러 나와서 누워있다가 갈 뻔 했는데.”

 

툭 치는 손에 어색하게 웃는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던 그는 야시로의 시선까지 자신을 향하자 잠깐 머뭇거렸다. 요령이 없긴 해도 비상한 머리와 지금까지의 경험상, 별 일이 없었다지만 이 화제가 계속 튀어나오면 자신에게 그다지 좋지 않으리란 사실 정도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으므로.

 

“저, 그러고 보니 제 방에 있던 책은…….”

“아, 그거. 이번에 새로 나온 신간인데 재밌어 보여서 가져다 놨어. 재미없으면 버려도 괜찮고.”

“아, 아뇨.”

꽤 유명한 작가의 신작. 가족이 연관된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경찰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을 그다지 즐겨 읽는 건 아니었지만, 목차와 도입부만 해도 시선을 끌었고 소개글도 마음에 들었기에 렌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럼 가서 씻고 와. 밥 먹을 때 다 돼서 씻지 말고.”

 

등 떠밀리며 렌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형님이 원래 추리 소설 같은 것에도 관심이 있었던가,

2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불편함에 눈을 떴다. 해 뜰 기미조차 없는 밤중이다.

피곤해서 더 오래 잘 줄 알았는데 시간을 보니 새벽 2시인 것을 확인한 렌이 얼굴을 문질렀다. 여름철 공기가 지나치게 덥고 습해 에어컨을 끄지 않고 잤음에도 땀이 흥건해 불쾌했다. 그 사이에 집이 낯설어졌나.

 

“…….”

 

꿈이라도 꾼 것인지 어쩐지 불안하게 울렁이는 속을 억누르며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시간은 1시간 30분 전. 어쩐지 경찰학교에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한동안은 고생하겠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들었다. 학교에 적응했다고 집에서 잠을 설치다니. 졸업하고 나면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경찰학교에서도 불면증 탓에 제대로 고생했기에.

 

바깥을 보면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듯,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나무 그림자는 움직임 하나 없이 고요했다.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조금 돌아보고 움직이다가 올까. 렌은 바깥 달빛이 밝은 것을 확인하고 방 안에 두었던 검을 쥐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검을 휘두르는 건 상당히 도움이 됐다. 이 시간에 차를 끓일 수도 없으니까.

다만 시간이 늦어 씻는 것이 곤란하긴 했지만……어차피 이미 땀범벅이 된 것, 검 조금 휘두른다고 상황이 더 나빠지지도 않을 듯 했다.

 

“…….”

 

전부 잠든 시간이니만큼 조용히 문을 열었음에도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조금 크게 들린다. 그 소리에 지레 놀란 렌은 잠시 심호흡했다가, 조금 더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자신 때문에 괜히 고생하고 온 두 사람이 잠이 깨지는 않길 바라서.

 

“…….”

 

문을 열면 더운 공기가 훅 닿아온다. 그렇지 않아도 달아났던 잠이 한차례 더 고개를 숙였다. 아까 전에도 하늘이 깨끗했는데, 밤에는 더욱 그러해서. 도시의 빛나는 불빛 탓에 별이 흐리게 보였지만 달만큼은 선명했고, 달빛에 집 앞 심긴 나뭇잎이 살짝 희게 빛났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

 

검을 쥔 채로 멍하니 창백한 달빛을 보고 있자니 다가오는 바스락대는 발소리. 렌은 고개를 돌렸다. 나오는 소리 때문에 깬 사람이 있는 것일까.

 

“렌짱. 이 늦은 시간에 여기에서 뭐해?”

“아. ……혹시 제 소리 때문에 깨신 겁니까?”

“아니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꿈이 뒤숭숭했어. 근데 발소리가 들리길래 나와봤더니 네가 검 들고 나가고 있길래, 누구 묻는 줄 알고 급하게 따라 나왔지 뭐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렌은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었다. 피곤함이 뭉쳐 날카롭게 일어났던 마음이 놀랍도록 이 밤처럼 평온하게 풀어졌다. 이 또한 그의 가족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뭐, 어차피 나도 잠이 안 오던 차였으니 괜찮아. 그나저나 내가 검을 들고 내려오진 않아서……하긴, 들고 내려왔어도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러우니 맞대지는 못했겠네. 쿠로다 씨가 깨면 곤란하니까. 간만에 자세나 볼까? 우선 찌르기부터.”

“예.”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렌은 자세를 잡는다. 항상 밝은 낮에 이루어지던 수업이었기에 이러한 어두운 밤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안경조차 쓰지 않아 평소보다 조금 흐리게 보이는 것조차 적응되지 않았고. 그러나 렌은 침착하게 검을 쥐었다.

 

“어라, 경찰학교에서도 연습했어? 안 해서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당연히 해야 하니까요.”

“그래. 네가 성실하긴 하지. 그런데 자세가 좀 바뀌었네……. 경찰학교에서도 검도를 배우던가? 그래서 그런가보다. 네가 검 쓰는 방법을 생각하면 그렇게 잡으면 안돼. 정확도가 떨어지거든. 이 부분은 이렇게…….”

 

파지법을 조정해 주고는, 손목을 잡는다. 뒤로 가까이 다가오자 미약하게 느껴지는 체향에 렌은 잠시 몸을 흠칫거렸다. 그러고 보면 일이 일이어서인지, 혹은 항상 검을 잡아서 그런 것인지, 아카보시 토오야에게서는 미약한 쇠 냄새와 혈향이 항상 섞여 났다. 씻어도 희미해질 뿐 사라지지 않는 그런 그린 듯한 독특한 체향. 어릴 때는 다가올 때마다 맡곤 하는 그 체향이 예전의 사건을 생각나게 했었는데…….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어, 렌짱.”

“……죄송합니다.”

 

피식 웃으며 하는 이야기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체향에서 과거의 사건을 떠올린다는 사실을 눈치챈 후로 토오야는 최대한 제 특유의 체향을 없애려고 노력했고, 이제 와서는 집중하지 않으면 그저 스칠 정도로 희미하기만 했다. 렌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손목 각도를 조금 더 조정해. 휘두를 때는 이렇게…… ……렌. 집중해야지. 밤이라서 그러는 거야? 검 쥘 때 딴생각 하면 다친다니까.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그 말하지 않는 배려를 알아 좋아했다.

손목을 쥐고 각도를 조정 해주는 토오야를 보며 렌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다가 간신히 상념을 내려놓고 심호흡했다. 딴 생각하면 안 돼. 자야 할 시간도 버리고 봐주시는 거잖아. 떠오른 상념은 곧장 결과로 이어진다.

얼마 휘두르지 않았음에도 검 끝이 떨리는 것을 바라본 토오야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렌을 응시한다.

묘한 시선이 뺨으로 닿아왔다.

 

“…….”

“……형님?”

 

미묘한 표정. 눈에 스쳐 지나간…….

“너…….”

 

아, 가슴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습기를 머금은 무더운 바람이 실은 풀냄새. 창백한 달빛 아래에서 검붉은색을 띤 머리카락. 멍하니 검을 든 팔을 내려놓았으나 토오야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을 뿐.

 

“……피곤한가 보네. 이 상태로 계속 휘두르다가는 다치겠다. 그냥 들어가는 게 낫겠어.”

 

덤덤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거리를 둔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들어가는 토오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렌은 툭, 하고 검을 떨어트렸다. 숨을 들이쉬면, 여전히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바스락거리는 풀 밟는 소리,

 

……아, 눈치채셨구나.

여전하다는 걸…….


 

 ……하지만 이 확실한 관계를 불확실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정립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습니다.네……애초에 받아주시지도 않을 테고요. 걱정 시켜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대로가 좋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 하나 있다는 것을. 어린 마음에 이 이야기를 듣고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작 조금 달라진 감정 하나를 이유로 포기할 만큼 가볍게 여기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 하나로 자신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이 마음을.

 매미가 길게 울고, 여전히 열감은 가시지 않았다.

 

……하여튼 인간이란.

문 뒤에 서서 이야기를 엿듣던 이는 생각했다. 인간은 이해하기 어렵다. 쉽게 마음에 담고 쉽게 포기하고는 한다. 인간들의 비효율성을 안드로이드가 예측하고 따라가기는 상당히 버거웠다. 대응을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

 


 

아침 일찍 일어나 멍하니 국자로 냄비를 휘젓고 있자니 등을 툭 치는 손길이 있었다.

“렌짱, 잠은 잘 잤어?”

“아……. ……네.”

“그런 거 치고 피곤해 보이는데 요리까지 해?”

“아침이라 조금 그런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님도 피곤하실 테니까요.”

 

그래도 이번에도 모른 척은 해주시는구나. 복잡한 속내를 숨긴 렌이 다소 짜게 된 음식을 간 보고는 토오야의 입에 넣었다.

 

“음……괜찮네. 그런데 너한테는 너무 짠 거 아냐?”

“괜찮습니다.”

“흠…….”

 

모호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는 웃는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뭐. 상을 차리는 것을 돕는 것을 바라보던 렌이 다시 고개를 냄비 쪽으로 돌렸다. 숨기려고 애써왔는데 결국 들켜버렸다. 아마 세 달이란 시간 동안 보지 못한 것 때문일 테다. 그것 때문에 면역이 사라져 버려서. 애꿎은 시간 탓을 하며 불을 줄이는데, 문득 토오야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렌짱. 밥 먹고 나서 오늘 같이 산책이나 갈까? 날은 덥지만, 환기도 시킬 겸.”

“……그럴까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제안에 애써 웃었다. 그래. 나만 이렇게 이어가고 싶은 건 아닐거야. 토오야는 하나 달라진 모습 보이지 않는데 자신이 흔들리는 모습 같은 걸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역시, 지금과 아무것도 달라지고 싶지 않아서.

3

바깥으로 나오자 새하얀 햇빛과 새파란 하늘이 마주한다. 매미 소리가 귀 따갑게 울려댔다. 짙푸른 하늘, 기울어지는 햇빛, 유유히 흘러가는 새하얀 구름…….

 

“좀 걷자.”

 

그렇게 말하며 앞서 걷는 이를 따라 렌 또한 걸었다. 근처에는 공원이 있었고, 이따금 이 길을 따라 함께 산책을 하곤 했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제 앞에서 조금 빠르게 걷고 있는, 푸른 하늘 아래에서도 선명한 붉은색으로 시선이 향한다.

 

“렌.”

“예.”

“내일이면 다시 경찰학교로 돌아가지.”

토오야의 말은 뜬금없었다. 그야 그럴 테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니까. 걸음은 여전히 조금 빠르다. 렌은 보폭을 맞췄다. 앞을 보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예. 그렇죠.”

“사실 그렇게 대단한 직업도 아니야, 형사라는 건. 목숨이 위험할 때도 있고, 다칠 때는 훨씬 많지. ……사람의 목숨이라는 건 생각보다 별거 없어. 가벼운 마음으로 하면 힘들기만 해. 네가 찾는 사건은 10년 전의 일이라,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도 않고.”

 

여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토오야는 돌아보았다. 쿵, 쿵……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한 발 다가서서 뺨을 매만지면서 웃는, 푸른 그림자 드리운 얼굴은 여전히 상냥했다. 장마가 올 것을 예고하듯 숨 틀어막는 물비린내…….

 

“렌짱, 정말 경찰이 되려고?”

 

그 모든 걸 그런 이유를 위해서 감내할 수 있어?

그 말에 언젠가의, 천둥번개 치던 날, 그 번개를 반사하며 반짝이던 칼날을 생각했다. 그에게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항상 바랐던 것이니까요.”

기억조차 나지 않는 부모의 복수를 위해 달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누군가가 묻는다고 해도 렌은 속 시원히 답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도 알 수 없는 거대한 의무감이 있었을 따름이다. 자신을 두고 죽어버린 이들을 위한 복수심 같은 것조차도 관련된 기억이 선행되어야만 뒤따라올 수 있는 것이기에. 애정도, 기억도 없는 이들에 대한 복수심만으로 미래를 버리기엔 렌은 지나치게 건조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아마 그런 이유만 있었다면 그는 분명, 형사가 되겠다는 선택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테지만…….

 

“형님과 아버지 뒤를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복수보다도 그게 먼저였어요. 그거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습니다. 여름철 무더운 파랑 아래서 렌은 입을 연다. 그에게도 이정표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눈앞에 있는 이였고, 그래서 렌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을 듣고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되레 뭉글거리며 커지는 불쾌감이 육안으로 드러난다.

렌은 그를 보며 토오야가 이러한 대답을 달갑지 않게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그렇구나.”

 

토오야는 여상하게 답했다. 매미 우는 소리, 여름의 하얀 햇살과 잎사귀를 채 통과하지 못해 드리운 푸른 그림자. 무더운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한차례 흩뜨리고……. 인간의 겉껍질을 뒤집어쓴 기계는 여전히 속내를 감추고서 이야기한다.

 

“그렇게 답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

 

너는 그런 인간이니까. 그런 속삭임과 함께 그는 조금 더 몸을 가까이 해 붉은 눈을 마주 보았다. 불쾌한 작열감. 매미는 여전히 울고 있고, 상대의 본질조차 모르면서 쉽게도 애정을 품는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낯을 하고 감정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기계를 본다.

기계임에도 속이 울렁거렸다.

뜨거운 여름의 아지랑이 탓에…….

 

“마음에……들지 않으십니까?”

“글쎄.”

“저는…….”

“알고 있어, 렌. 굳이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널 존중하는걸.”

 

그 말은 오히려 무거워서, 렌은 눈을 깜빡였다. 기분 나쁜 축축한 공기 속. 자신의 결정을 배려하고 존중하겠노라 이야기하는 토오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기분이 나빠 보이기까지 해, 걱정하기에 나오는 말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잠시나마 당혹을 느낄 정도로.

 

“내가 아무리 경고하고 알려줘도 너는 해야만 할 테니까. 다만…….”

 

뺨을 매만지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이마와 이마가 가볍게 부딪힌다. 깜빡임 하나 없는 붉은 눈을 보며 렌은 손을 떨었다. 규칙적인 숨과 불규칙적인 호흡. 눈썹의 떨림조차 보이는 거리에서 깜빡임조차 없이 응시하던 그는 읊조렸다.

 

“……후회할 거야. 계속 가지고 있으면.”

 

흔들리는 시선을 보며 그리고 다시금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에게는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있었지만, 렌이 마음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멀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또한 알았다.

감정이 뭐라고 그러는 것인지는, 여전히,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을 선택해도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는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원한다면 받아줄 수 있어. 나도 너한테……마음이 없는 건 아니니까.”

“…….”

“그렇지만, 너도 그런 걸 바라지 않을 거잖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몇 년 전에 네가 쿠로다 야시로에게 스스로 이야기했던 것처럼.

마지막 말을 삼키고, 아카보시 토오야는 쿠로다 렌이 10년간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여지를 순식간에 내어준다. 렌이 단 한 번도 생각하지도, 욕심내지도 않았던 거리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좁혔고, 렌와 토오야의 차이는 그곳에서 명백히 두드러졌다. 관계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오로지 하나 뿐이라는 반증이기에.

 

“…….”

“렌, 대답은?”

 

숨이 막혔다. 아마도 여름 공기 탓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저 모든 말이 그저 자신을 달래고자 하는 말임을 알아서? 혹은 여기에서 받아달라고 말한다면 이어질 것이 무엇인지 어쩌면 깨달아버려서.

 

진심일지, 아니면 단순한 화풀이일지. 아니,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기엔 그는 지나치게 상냥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아카보시 토오야는 왜 저런 말을 급작스럽게 꺼낸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자신은 그것에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

창백했던 달과, 숨을 틀어막던 무더운 공기와, 귀뚜라미 울음소리. 끈적했던 식은땀과, 바깥 풀냄새 사이 섞였던 그 특유의 체향을 생각했다.

 

“저는…….”

 

머리가 아픈 건, 더웠던 어젯밤이 문제였던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든다. 바보 같은 결론이다. 돌아갈 수 있을 리 없잖아. 이렇게 말씀하셨는걸.

 

아카보시 토오야와 쿠로다 렌의 차이는 여기에서 다시 드러난다. 연인으로서의 애정과 가족으로서의 애정은 같지 않고, 렌이 숨겼던 것은 그러한 사실에서 기인했으므로. 그러나 렌과 다르게 토오야는 그 또한 변하지 않는 점으로 규정했다. 어찌 되었건 쿠로다 렌이 아카보시 토오야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명제이기에. 그저 그 앞에 들어가는 단어만이 조금씩 변하였을 뿐이었다. 렌의 비상한 머리는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눈치챈다.

“여기에서, 받아달라고 하면…….”

 

항상 사려깊었고, 자신의 속내를 쉽게 읽던 이였으나 이번만큼은 아카보시 토오야가 틀렸다.

여름은 여전히 새파랗다. 눈앞의 남자와는 지나치게 대비되는 색이다. 렌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이 없는 건 아니라니, 그저 그 정도를 바라는 게 아닌데.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문득 무엇인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아카보시 토오야는 쿠로다 렌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은 금방 인간의 겉껍질 아래로 넣어버리고서.

그래. 이런 것을 두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을 이해하기란 이토록 힘겹다.

 

“……그래?”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한 경고였다. 쿠로다 렌이 형사라는 길을 택한 이상 조금 더 이르게 따라오게 될 제 주인의 생각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구태여 렌이 즐겨 읽지 않는 추리소설을, 어울리지 않게 그가 가는 길에 대한 만류를, 이러한 상황에서, 쿠로다 렌이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감정까지 쥐어서 억지로 끌어냄은.

 부모를 찌르고 그 본인까지 찌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쿠로다 렌이 형사 일을 하고 진실을 찾고자 한다면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모르지만, 형사가 된 쿠로다 렌의 끝이란 결국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아카보시 토오야라는 형사의 탈을 쓴 그만큼은 알았다.

 

“그래서?”

“저는 형님과 가족이고 싶어요. 불확실한, 끊어질지도 모르는 관계는 싫습니다. 저도, 저라고 해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던 게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알고있어.”

 

RK400은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제안했고, 알고 있어서 흔들려고 한 것이다. 숨기고 있던 것을 억지로 꺼내어 쥐고 흔들어도 변하는 것은 결국 없으며, 렌이 이 관계에서 안주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인간이란 으레 불확실한 미래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편한 현재에 안주하고 싶어 하니까.

바보 같은 일이다. 그가 사랑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로다 렌은 명백히 흔들렸다. 그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했어야 할 거절이 왜 그에게 무언가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는지도. 렌은 여전히 제 가까이에서 자신을 관찰하듯 바라보는 토오야를 마주 응시한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 찰나만이라도 괜찮다면…….”

 

머리가 어질거리는 열기가 있다. 그리고 제게 항상 상냥하고 다정했던 이 또한. 규칙적인 호흡이 여전히 흐트러져 있는 호흡과 섞였다. 그저 지금처럼 있고 싶었다. 유일하되 변하는 찰나를 바라지 않았다.

차라리, 유일하지 않아도 불변하는 현재를 가지고 싶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일도 그냥, 더위에 취해 꾼 꿈이길 바라지만…….”

 

하지만 7월 한여름. 여름은 저물 새가 없고 둘 모두 그 긴 여름에 잠시 취한 것에 불과하다고,

이 찰나는 그저 그렇게 변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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