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
2023.04.09
집단 학살등의 잔혹 행위 및 역사적 범죄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가 존재합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입구에 걸린 표어
마리아 소볼레프스카-우드워드는 제 머리 위에 쓰인 문장을 들여다본다. 녹슨 청동빛의 철자들. 반대로 뒤집혀진 B와 그 너머 보이는 지독히도 화창한 하늘. 폴란드의 여름은 푸르르다. 수용소의 입구로 향하는 철길 주변은 잔디로 뒤덮였고, 입구 너머에도 줄지어 선 나무들이 초록빛 잎을 바람에 맞추어 흔든다. 붉은 벽돌 건물은 그와 대조를 이루듯 어두운 색의 지붕을 얹은 채 굳건히 서 있었으며.
이곳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일견 평화롭다는 인상을 받을 광경이다. 그래. 곳곳에 늘어선 구조물들, 흑백으로 찍힌 사진, 매끈한 판에 새겨진 설명들이 없다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본래라면 영원히 역사 아래 묻혀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했기에 지금 이 박물관이 존재한다. 망각을 거부하고 기억되기 위하여.
오늘은 어떤 연유인지 함께하는 인원이 적었다. 가이드도, 그룹 투어도 없는 것 같았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는 마치 이 순간만큼은 오직 그를 위해 준비된 공간이라는 듯 그 앞에 서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심장이 무겁게 짓눌리는 듯한 감각. 섬광처럼 장면들이 그의 눈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아직은 멈출 때가 아니다.
아직은.
그는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곧게 뻗은 길이 양옆의 건물들로 갈라진다. 그 사이로 나무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언뜻 보이는 것도 같다. 그는 알고 있다. 이 길이 무슨 길인지, 저 구조물이 어떤 것인지, 건물 안에는 무엇이 전시되어 있는지, 그 전부를.
그는 걸음을 내딛는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이곳은 나치 독일이 건설한 수용소 중 가장 규모가 큰 수용소이자, 약 110만 명에 달하는 수감자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한 공간이다. 96만 명의 유대인, 7만 4천여 명의 폴란드인, 2만 천 명가량의 로마니(집시), 만 오천여 명 가량의 소련군 포로, 그리고 만 오천여 명의 기타 국적 희생자들이 이 수용소의 건물 아래에서 목숨을 잃었다. 처음으로 집단 학살을 위해 치클론 B 가스를 사용했으며, 온갖 인체 실험 또한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실존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 이곳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줌, 굴러가는 돌멩이 하나조차 학살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목격했다. 총살을, 교수를, 자신을 죽이게 될 건물을 건설하는 이들을, 병에 걸려 죽어가는 이들을, 한 건물로 줄을 지어 걸어가고,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된 이들을. 여자를, 노인을, 어린아이를, 남자를, 환자를, 건강한 이를. 모두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리란 희망을 품었으나 그것이 이루어진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마리아 소볼레프스카-우드워드가 걷는 모든 걸음 아래에는 그들이 존재한다. 누군가 그가 걸은 길 위를 걸었고, 누군가 그가 걸은 길 위에서 죽었다. 누군가는 그가 걸은 길을 따라 간 다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타박, 타박. 무거운 발걸음이 이어진다. 걷는 걸음 위로 기억들이 겹쳐진다. 한 걸음, 이곳은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 잠을 자던 방이다. 한 걸음, 이곳은 머글 태생 등록 위원회의 법정이다. 한 걸음, 이곳은 수감자들의 짐을 모아둔 전시실. 또 한 걸음, 아즈카반의 축축한 냄새가 수용소 건물이 간직한 건조한 먼지 냄새와 뒤엉킨다.
한 걸음.
하나의 맥락 속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기억이 이어진다. 벽을 빼곡하게 채운 희생자들의 사진 아래에서 그는 자신이 아즈카반에 보냈던 수많은 사람들을 본다. 총살과 교수가 일어난 현장에서 그는 자신이 참관한 사형을 떠올린다.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에서 그는 아즈카반을 기억한다. 그는 생각한다, 끊임없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편리한 서명 하나로 아즈카반에 보내졌던 이들은, 그의 명령 하나로 심문실에 갇혔던 이들은,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남아있어야 했던 이들은, 그리고, 그리고―.
이곳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 수용소. 영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폴란드의 땅.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영국을 떠올린다. 아즈카반을, 머글 태생 등록 위원회의 심문실을, 그 건물 아래에 들어왔던 사람들을.
그러므로 이곳에는 그만이 아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그는 남몰래 이곳을 그렇게 부르고는 했다.
아즈카반, 머글 태생 등록 위원회, 마법 정부.
메리 우드워드.
영국 마법 사회가 홀로코스트를 저지르지 않은 것은 능력의 문제였다. 그것을 의지의 문제로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등록 위원회가 생겨났던 초기 2년을 기억한다. 머글태생등록법이 시행된 후 수많은 머글 태생들은 그들의 혈통을 이유로 아즈카반에 끌려갔다. 그들 중 법이 ‘완화’될 때까지 제정신으로 살아남은 이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다음 5년 동안은? 약화되어가는 등록 위원회의 권력을 되찾고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반순혈주의라는 명목 아래 잡아들였다. 많은 것을 할 필요도 없었다. 불필요하게 모여 있다, 반순혈주의. 정부에 대해 작은 불평을 한다, 반순혈주의. 머글 태생을 돕는다, 반순혈주의. 반순혈주의자로 낙인찍힌 사람과 함께한다, 그 역시도 반순혈주의.
그 모든 순간에서 그가 그들의 미래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던 때가 있던가?
그는―마리아는, 메리 우드워드는― 대답한다.
“그럴 리가.”
사람이 죽었다. 여자가, 남자가,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사람이.
사람이 죽었다. 때로는 젊고, 때로는 늙었다. 그중에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 어떤 이는 건강했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았다. 기구의 보조가 필요한 이도,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들을 죽인 것은 “최종 해결책”이었을까?
아이히만과 회스, 힘러였을까?
아니면 한 개의 법이었을까?
메들린 골드핀치가 만들어 내고, 그가 이어받았던,
그러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은 없는 그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먼 곳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어쩌면 이 바람은 그가 떠나온 제1수용소를 지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이제 제2수용소에 놓인 거대한 비석 앞에 서 있었다. 그 아래 놓인 평평한 돌 위로는 다음의 문장이 부조로 새겨졌다.
영원히 이곳을 절망의 울음이 섞인 곳으로, 인류에 대한 경고로 남겨두라.
나치 독일이 150만 명의 남성, 여성, 아이를 살해한 곳.
그들의 대부분은 유럽 전역에서 온 유대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새하얀 꽃들을 엮어 만든 다발을 내려놓으며, 그는 마음속으로 그 위에 다른 문장을 덧새겼다.
영원히 이곳을 절망의 울음이 섞인 곳으로, 우리를 향한 경고로 남겨두라.
영국의 마법 사회가 수백 명의 남성, 여성, 아이를 살해한 곳.
그들의 대부분은 단지 부모가 머글 출신인 마법사들이었다.
머글 태생 등록 위원회
2000-2007
사라진 역사 속 잊혀진 이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열다섯 남짓 남은 그와 그의 친구들뿐이다. 한 명을 제외한다면 그들의 피해는 이 세상에서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을 기억할 곳도, 추모할 곳도, 하다못해 작은 기념물 하나조차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참회하고 속죄할 장소 역시.
그러나 세계의 추모란 결국 생김새는 다를지언정 그 형식은 공유하는 법이다. 망각되지 않고 남을 수 있도록 발버둥 치는 시도는 어디나 동일하다. 그는 수많은 ‘여행’ 속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반복되고, 반복되는 잔혹 행위들, 학살과 폭력, 차별과 혐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시도들. 아우슈비츠, 존엄의 관람석, 비야 그리말디, 해군기술학교, 기억공원.
그는 존재할 수 없는 역사를 그렇게 실존하는 장소 아래로 끼워 넣는다. 사라진 시간을 기념물의 물질성으로 붙잡는다. 아우슈비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피노체트의 독재 아래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죽음의 비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생각하며 그는 아즈카반을 생각하고, 등록 위원회 아래 죽은 이들을 추모하며, 씻을 수 없는 죄악을 기억한다.
거친 숨이 새어 나온다. 그는 심장을 부여잡는다. 그러나 얼굴을 찡그리는 와중에도 눈은 감지 않는다. 그것만이 그를 회스와 힘러, 아이히만, 피노체트, 살리자르, 프랑코와 그들 아래 존재했고 혜택 입은 모든 이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무릎을 꿇는다. 비석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곁에 선 것이 느껴진다. 줄무늬 옷을 입은 그들은 대부분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위에 투사된 아즈카반의 희생자들. 그는 그들의 이름도, 얼굴도, 하다못해 숫자마저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저 그 순간순간만을 간직할 뿐이어서, 그는―
떨리는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린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비석과 글귀뿐이다.
철도를 따라 걸음을 내딛는다. 수감자들이 열차를 따라 들어간 그 길을 거슬러 나온다. 걸음은 이곳에 들어설 때에 비해 힘이 없다. 어쩌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하다.
멈추어 있던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한다. 귓가에서는 필름이 감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찰칵,
찰칵,
찰칵.
머글 태생 등록 위원회의 법정, 아즈카반, 애원하는 사람들, 끌려 나가며 내뱉는 절규, 모든 빛을 잃은 채 쓰러진 몸뚱아리. 얼굴 없는 형체가 철길을 따라 줄지어 그를 기다린다. 수용소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행렬. 그는 그사이를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지난다.
사람들이 하나둘 그의 뒤를 따른다. 어린아이가 노인에게, 노인이 젊은이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형체들이 합쳐진다. 기억들이 되감긴다. 필름은 구르고 굴러 그에게 닿는다.
입구에서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수용소의 전경이, 그 글귀가, 펼쳐진 잔디가, 허물어진 건물들이, 붉은 벽돌이, 초록색 잎이 그를 마주한다. 켜켜이 쌓인 기억의 지층이 그 앞에 드러난다. 그는 그것을 응시한다. 그리고 다시금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전쟁을 생각한다. 2007년 10월 28일, 볼드모트의 죽음과 함께 하나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마법 정부가 점령당하며 일어났던 모든 혼란 역시 끝을 맺었다. 공백기에 벌어진 린치, 살해, 테러, 모든 폭력은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렀다.
전쟁은 끝났다. 어쩌면, 잔혹 행위도 끝났다. 어둠을 밝힌 많은 이들이 외쳤다. 이제 우리의 앞에는 빛만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동은 네 차례의 전쟁을 겪었다. 전쟁을 일으킨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 아래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 난민을 향해 폭격을 가한다.
시에라리온은 2002년까지 약 11년간 내전을 겪었다. 이 당시 손목이 잘리고 약탈당하고 강간당한 이들의 피해는 여전히 남아 있다.
르완다는 1994년 3개월 동안 약 80만 명이 학살당했다.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깊은 갈등으로 촉발된 이 학살의 뒤에는 무기를 공급하고 학살을 조장한 프랑스가 있었다.
미얀마는 1962년 쿠데타 이후 지금까지 군부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 아래에서 카친족과 카렌족 등의 소수민족은 반군과의 전쟁이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겪어야 했다.
세계는 여전히 잔혹하고, 폭력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래서 목숨을 빼앗긴다.
아우슈비츠가 그러했듯이, 비야 그리말디가 그러했듯이, 해군기술학교가 그러했듯이, 국립경기장이 그러했듯이
루뱐카가, 슈타지가, 사바크가, 무타와가 그러했듯이.
그러므로 마리아 소볼레프스카-우드워드는 생각한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폭력도 끝나지 않았다.
잔혹 행위는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다. 그가 후회하고 뉘우치며 바꾸고자 하는 것.
그 어떤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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